'네덜란드'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06.05.17 레이카르트가 크라위프를 넘어설 때 by 渤海之狼 1
  2. 2006.04.15 네덜란드 노장의 선물 by 渤海之狼
  3. 2006.03.04 '늙은 감독' 히딩크가 명장인 이유 by 渤海之狼
  4. 2006.01.23 네덜란드 감독이 잇빠이 by 渤海之狼
  5. 2006.01.23 "토털 사커를 낳은 네덜란드의 [장군] "리뉘스 미헐스" by 渤海之狼

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60511.html

저자: 스즈이 토모히코

바르셀로나는 5월 3일 셀타전에서 이겨 2시즌 연속 18번째 리그 우승을 결정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FC 바르셀로나의 우승이 결정된 날의 밤은 중심가인 란브라스 거리에서 미친 듯이 기뻐하는 것이 통례. 기쁨은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자전거나 쓰레기통이 불타오르고 신호등은 파괴되었다. 더욱이 오버인지 소동을 탄 계획적 범행인지 안경점의 유리를 부수고 들어가 1000개의 선글라스를 도난당했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우승이라는 축하할 일에 묻혀 “헤~ 그렇군요.”라는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도 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그렇게 진기한 일도 아니어서 그런가? 여전히 도둑에 위한 피해자 수는 유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아니 어쩌면 넘버 원일수도. 첼시에게 이긴 밤도 그러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경찰대가 곤봉을 휘두른 상대는 잉글랜드인 뿐만 아니라 카타란인도 있었다. 승리 = 폭동. 상식적인 이야기.


 카타란인을 거기까지 미치게 한 것은 바르샤이며 호나우지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리그 초반전은 굉장히 고전했다. 7라운드의 시점에서는 레알 마드리드가 수위였으며 FC바르셀로나는 5위(2승1패4무). 캄프 노우에서는 선수들에게 야유가 쏟아졌다. 특히 마르케스에게…….


 레이카르트는 최종 라인에서 볼을 컨트롤할 수 있는 선수를 원했다. 그 전에 감독을 맡고 있던 판 할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과르디올라나 코퀴, 셀라데스를 시험했지만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단념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지금은 전술이 진보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레알에서는 이반 캄포가 노이노제에 걸렸지만 마르케스는 야유를 견뎌냈다. 그가 질 놓은 퍼포먼스로 레이카르트의 기대에 응하게 된 것이 바르샤 진격의 시작이었다.


 수비가 안정되자 바르샤는 연승가도를 질주했다. 그래도 레이카르트의 오른팔인 텐 카터는 수비진을 더욱 조였다. 시합에 따라서는 감독보다도 많이 사이드라인으로 튀어 나오는 횟수가 많을 정도였다. 스파르타크 로테르담을 2부로 떨어뜨린 괴로운 경험이 있는 레이카르트가 명감독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도 파트너인 텐 카터와의 절묘한 컴비네이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호나우지뉴가 있었다고 하여도.


 거기에 미드필드진이 연주하는 바르샤 특유의 템포는 산뜻했다. 사비, 모타, 에드밀손들이 부상으로 이탈하여도 여전히 기능했다. 포워드라인의 셋(호나우지뉴, 에토오, 메시)은 상황에 따라서 앞에서 기다리며 기회를 노린다. 자연히 상대에게 퍼스트 체크를 하는 것은 MF. 상대 진영에서 볼을 가지고 가는 것도 그들의 역할. 이것은 어느 팀에게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저렇게 놓은 DF 라인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미드필드진의 빠른 작업과 리듬이 좋기 때문에. 리그 초반의 저조한 성적은 지금의 형태가 되기 위한 수업료라고 할 수 있다. 아틀레티코의 페르난도 토레스에게 바보가 되었던 푸욜의 뒷 공간은, 그 후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호나우지뉴의 왼쪽 사이드라는 것도 판 할 시대와 겹친다. 그 때는 히바우두가 절대 왼쪽에 붙는 것을 거부. 중앙에서의 플레이를 고집했기에 한 번은 세비야와의 원정 멤버에서 제외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호나우지뉴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역시 레이카르트의 인덕에 위한 것이 크다.


 96-97 시즌. 감독이었던 바비 롭슨은 '호나우두가 전술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 판 할은 리그 연패는 했지만, 선수와 팬에게는 미움 받았다. 레이카르트는 과거 10년 동안 가장 바르셀로나에 기쁨을 선사한 감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크라위프에게 필적하진 못했다.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하지 못하면 언제까지라도 드림 팀의 잔상을 떨칠 수 없다. 그 때는 좋았다……고. 하지만 이젠 너무 오래된 이야기다. 파리에서 바르샤는 신시대를 구축하고 일본에서 행해지는 세계 클럽 선수권으로 향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바르셀로나의 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광희난무? 상상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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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서 스타디움을 특별한 분위기로 만들어 줄 것 같은 팀이 있다. 인구 130만, 카리브해의 소국 트리니다드토바고다.
트리니다드토바고에 세미 프로리그가 생긴 것은 1995년. 4년 후인 1999년에는 완전 프로화되어 카리브해의 여기저기서 선수가 모여 들었다.
리그는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축구 수준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스타디움에서 인기 밴드들이 칼립소(카리브해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발상했다)의 콘서트를 동시에 행했기 때문이다. 스타디움은 카니발과 같은 축제 분위기가 되어 팬이 모여들었다.
<사커>+<음악>이라는 새로운 축구 문화가 태어났다.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축구협회는 꼭 이 열기를 독일 월드컵 대회로 가지고 가고 싶다고 생각하여 동국 출신인 FIFA 부회장 잭 워너(가족이 운영하는 심파울 여행사가 이번 월드컵 입장권을 독점 판매)의 연줄을 이용하여 음악대 전원의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미 칼립소의 밴드는 월드컵을 향해서 맹연습 중. 독일의 스타디움이 즉석 콘서트장이 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는 축구와는 연이 없었던 카리브해의 소국이 어째서 월드컵에 출장할 수 있었던 것인가? 우선 들 수 있는 이유로 네덜란드의 명장 레오 벤하커 감독의 존재.
북중미, 카리브해 지역예선 최종라운드에서 트리니다드토바고는 초반 3시합에서 승점을 1점밖에 얻지 못하고 최하위로 떨어졌다. 협회는 센트 크레아 감독을 해임하고 당시 62세의 벤하커를 초빙했다.
벤하커는 술주정뱅이의 문제아 요크에게 규율을 가리키고 37세의 대 베테랑 라타피(전 그라스고 레인져스)를 대표로 다시 복귀시켰으며 거기에 트리니다드토바고 국적의 모친을 가진 잉글랜드 태생의 크리스토포 버챌을 꼬셔서 대표팀에 뽑는 등 계속해서 개혁을 해 나갔다.

당연히 전술은 네덜란드류였다. 벤하커는 말한다.
"내가 오기 전까지 팀은 수비적인 리액션 사커를 하고 있었다. 그런 축구로는 이길 수 없다. 항상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는 공격적인 사커를 하게 하였다. 네덜란드류의 전술과 그들의 높은 신체능력은 잘 조화했다. 때문에 플레이오프에서 바레인에게 승리하여 월드컵에 출장할 수 있었다."

벤하커는 80년대 후반 레알 마드리드를 3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1990년 월드컵 대회에서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했다. 벌써 정년퇴직했을 법한 나이지만 "내 나이 정도 되면 '미션 임파시블'에 도전하고 싶어진다구"라며 정열을 불태웠다.

필자는 월드컵 티켓 1차 판매가 개시되었을 때 단지 품절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트리니다드토바고의 TST티켓을 신청하였고, 약 250만원정도가 카드에서 인출되었다. 그 직후에 후회했지만 트리니다드토바고가 최하위에서 올라와 월드컵 출장을 결정짓고 거기에 칼립소의 음악대가 보내진다는 것을 알고 나자 굉장히 이득을 본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축구 + 음악 in 월드컵]. 네덜란드 노장 덕분에 독일 월드컵의 즐거움이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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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umber.goo.ne.jp/soccer/world/20060223.html
저자 : 키자키 신야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네덜란드에서 프로코치가 된 인물이 있다. 휘테세의 유스팀에서 코치를 맡고 있는 하야시 마사토씨다. 하야시씨는 이미 네덜란드에서 2급 감독면허를 취득. 현재 휘테세에서 일하면서 1급 감독강습에 다니는 매일을 보내고 있다.

 1급 강습을 받으면서 하야시씨가 놀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네덜란드사람들의 전술에 대한 세밀한 모습이었다. 전술의 기본은, 포메이션에 대한 부분만으로도 두께 5Cm는 되었다. 네덜란드사람들은 3대시스템으로 4-3-3, 4-4-2, 3-5-2로 정의한다. 이것을 각각 더욱 세분히 나눈다. DF는 맨투맨인가, 한 명의 리베로를 남기는가, 남긴다면 DF라인의 앞인가 뒤인가. MF가 3명이라면 중반은 삼각형인가 역삼각형인가. -라는 식으로 세분화한다.

 다음에 하는 것은 시스템끼리 대전했을 경우를 가정해 토론하는 것이다. 4-3-3과 4-4-2가 싸운다면 어디가 장점이고 어디가 단점이 되는가. 이렇게 마크를 끌어냈다면, 이렇게 파고들어야 하지 않은가... 수업에서는 그러한 토론이 계속된다. 시스템 vs 시스템의 조합과 그 장점과 단점을 머릿속에 집어 넣고 있는 것이 일류의 네덜란드 갑독이라고 하야시씨는 말한다.

 “히딩크의 전술을 매직이라고 부르는데, 그 기본은 이 강습에 있습니다. 그는 시합의 흐름에서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여, 그곳을 뚫기에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변경하지요. 모든 패턴이 머리에 들어가 있기에 갑작스런 시스템의 변경이 가능한 것입니다.”

 올해 1월. 그 히딩크가 강사로써 강습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야시씨는 히딩크의 배우려는 자세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히딩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늙은 감독입니다. 때문에 최신 이론을 배우는 이 장소는 나에게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그는 강사이면서 열심히 최신 이론을 흡수하려고 했습니다."

 화제가 아시아에 이르르자, 히딩크는 아시아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아시아에는 엄격한 상하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질이 있기에 선수가 서로 지시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전술대국이 낳은 지장은 아시아에 대하여 정통하며, 감독으로서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월드컵에서 최초에 대전하는 일본의 시스템의 약점을 히딩크가 날카로운 창으로 찌르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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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column_cl/20051214.html

 마르코 판 바스턴(네덜란드), 거스 히딩크(호주), 레오 벤하커(트리니다드 토바고), 딕 아드보카드(대한민국).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팀 감독에는 네덜란드 출신 감독이 4명이나 출장한다. 조사해 보진 않았지만 같은 나라 출신의 감독이 4개국의 대표팀 감독으로 지휘를 하는 것은 아마도 월드컵 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세계는 지금 공격 축구의 시대. 그 흐름 속에서 맞이하는 독일 월드컵을 당연히 필자도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그리고 4명의 네덜란드 감독의 존재는 그야말로 시대의 상징으로 공격축구의 원조인 나라의 감독들이 중용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네덜란드의 감독들은 중용되고 있다. 레이카르트(&텐 카터 조감독), 코 아드리안세(포르투)와 로날드 쿠만, 데니 블린트 그리고 호주 국가 대표 감독인 거스 히딩크. 그 수는 5. 이쪽은 틀림없이 사상 처음으로 세계는 지금 공격 축구의 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 감독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5명 중 4명이 그룹 리그 돌파에 성공했다. 마지막 주를 맞이하여 가장 위험에 처해 있던 것은 코 아드리안세(포르투)와 쿠만(벤피카)이었다. 둘 다 그룹리그 최하위. 승리하지 않고선 16강에 오르는 길은 없었다.

 

 쿠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대전하였다. 나는 모리뉴와 인터뷰했던 2년전의 일이 생각났다. 때는 결승 토너먼트 1회전이 행해지기 2~3일전. 모리뉴가 이끄는 포르투의 대전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포부를 묻는 질문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퍼거슨은 확실히 명장이지만 그의 축구에 전술적인 결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난 그 곳을 철저히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승리했다.

 

 네덜란드의 양 감독은 어떠했을까? 코 아드리안세는 실패했지만, 쿠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결전에서 멋진 승리를 이루어냈다. 그것도 몇 명의 주력선수가 결장했는데도 말이다. 2년전의 포르투처럼 계속 승리해 나가며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진 않지만 맨체스터에게 승리함으로써 그의 주가는 크게 올라갔음이 분명하다.

 

 쿠만, 판 바스턴, 레이카르트 이 세명은 88년 유럽선수권 서독 대회에서 우승할 당시의 주력 멤버이다. 명선수는 명감독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선배인 크라위프도 예외였다. 그들에게 공통되는 점은 무엇인가? 젊은 감독 3명도, 크라이프도 FIFA20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한 고 리뉘스 미헐스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경험이 있다. 준우승한 74년 서독 월드컵 대회, 우승한 88년 서독 유럽선수권에서도 지휘를 잡은 것은 미켈스였다. 이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헐스처럼 공격 축구의 발전에 기여해 온 아리고 자키는 미헐스에 대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미헐스가 나타나기 전과 후의 축구에 있어서의 생각 방식이 전혀 별개가 되었다. 그가 만든 토탈싸커는 그럴 정도로 참신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에 해당하는 크라위프, 손자에 해당하는 쿠만, 레이카르트, 판 바스턴은 사랑스러운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들을 포함한 네덜란드의 감독들이 독일에서 행해지는 내년 월드컵 대회에서 주목을 받는 것에 인과율의 법칙을 느끼는 것은 나 뿐일까?

 

 모리뉴는 올 시즌에 초에 프리미어에서 주목할 팀으로 토튼햄을 꼽았다. 그리고 실제 토튼햄은 리그 4위권 내에 있다. 감독은 네덜란드에서 년간 최우수감독을 수상한 경험이 있는 마틴 욜이 맡고 있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그 흐름 속에서 빠져있다. 공격축구라는 단어가 활발히 쓰이기는 하지만 이유로써, 이론으로써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기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그 때, 방제가 아닌 히딩크가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을 맡았다면 지금의 일본은 어떠했을까? 그 때라고 하는 것은 94년으로 신감독을 찾고 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히딩크에게 접근했었다. 방제로 방향이 바뀐 것은 그야말로 최후의 순간. 만약 그램퍼스의 감독으로 히딩크가 취임했었다면..... 방제에게 불만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후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히딩크는 2004년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고, 2006년에는 호주의 감독으로 일본과 대전하게 되었다.

 

 바로셀로나의 조감독 텐 카터에게 필자는 일본의 감독으로 와주세요라고 인터뷰 중에 농담삼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일본에 많은 친구들이 있다. 일본의 축구도 자세히 알고 있다. 내가 일본 대표의 감독이라면 일본의 디펜스 시스템을 2~3개월 안에 재건해 보이겠다. 하지만 레이카르트와 3년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기에 지금 일본에 가는 것은 무리겠지만……”

 

 이번 시즌이 그 3년째. 내년 텐 카테가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는 한 자유로운 몸이 된다. 내가 카와부치회장이라면 망설이 없이 그에게 감독 계약을 맺자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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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헤딩의 명수


 리뉘스 미헐스는 네덜란드 풋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종반에 그는 [토탈사커]를 세상에 알렸다. 필드 위에 있는 선수는 어떠한 포지션에서나 플레이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연습 일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 날까지 가장 성공한 네덜란드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도 아래서 아약스와 바르셀로나는 70년대에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헐스 또한 3번에 걸쳐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하여 74년 월드컵에서 준우승, 88년에는 유럽 챔피언이 되었으며, 92년에는 유럽 선수권에서 3위가 되었다.

 리뉘스 미헐스는 1928년 2월 9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축구팬인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그를 축구와 연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1958년까지 미헐스는 아약스의 일원으로써 260시합 출장하였으며 포워드였던 그는 122골을 기록했다. 1946년 그는 명문 아약스 1군팀에서 데뷔하게 된다. 상대는 덴하그. 만약 아약스가 이기면 국내 우승이라는 중요한 시합이었다. 미헐스는 후반 5골을 넣어 팀 우승에 커다란 공헌을 한다. 선수시절 그는 정열적이었고, 시합을 앞두곤 힘든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그 대신 정신적인 면으로 부족한 재능을 보충했다.
 선수로써의 그가 가장 뛰어났던 것은 헤딩 기술이었다. 이 헤딩에 관해서는 월드 클라스급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중전에서 밀리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각도가 없는 곳에서도 믿기 힘든 골을 만들어냈다. 대표팀에서 그는 5번 주장을 맡았지만 만성화 된 부상으로 인해 58년 현역에서 은퇴하게 된다.

타협을 하지 않는 유모어리스트

 미헐스는 은퇴 후 곧바로 프로의 코치가 되진 않았다. 그는 우선 스포츠 인스트럭터가 되었다. 이 전문직은 그가 고교생이었을 때부터의 꿈이었다고 한다. 스포츠 인스트럭터로써 그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몇 년간 일한 뒤 다시 축구계로 돌아가게 된다. 62년 암스테르담의 아마츄어팀 JOS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현역시대 자신의 모든 것을 축구에 받쳐 온 그였기에 감독이 되자 선수들 역시 자신과 같이 모든 것을 축구에 받쳐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우수했지만 타이트한 연습 스케줄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굉장히 엄격한 감독이었다.
 규율을 중시하며 조용하고 온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법에 대해서는 타협을 불허하는 강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법]이었던 것이다.

 연습이 스케줄대로 행해지면 문제는 없었지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겨울 아침. 굉장히 추웠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는 눈보라까지 치고 있었다. 연습은 오전에 행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습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온 선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날씨에서는 누구도 밖에서 연습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헐스조차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창을 통해서 밖의 눈보라를 지켜본 후,미헐스는 모습을 감췄다. 몇 분이 지난 뒤 선수 중에 하나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손목시계를 차고 수영 팬티만 입은 미헐스가 자전거를 타고있었다. 미헐스는 외쳤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는가? 자네들은 올 건가 오지 않을 건가?” 눈보라 속에서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메뉴는 런닝 후 눈싸움으로 바뀌었다. 엄하긴 하지만 유모어가 있었다. 그는 팀에 [올바른 분위기]를 가져오는 것이 가능한 남자였다. 선수들은 자주 힘든 피지컬 트레이닝에 불만을 표했지만 미헐스는 그런 연습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재능은 그가 후에 새로운 축구를 도입할 때 굉장한 도움이 된다.
 JOS에서 3년간 미헐스는 팀 메이크에 수완을 발휘하였고 차츰 커다란 야심을 갖게 되어 프로의 감독이 될 결심을 하게 된다.

 1965년 프로감독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자마자 아약스에서 빅 버킹검의 후임으로 취임을 요청받는다. 버킹검은 비극적일 정도로 비참한 시즌 초반의 책임을 지고 해고당했다. 팀은 리그 최하위로 떨어질 지도 모를 상태로 자칫 잘못하면 2부로까지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아약스의 구세주로서 미헐스가 지목되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시즌. 그는 아약스를 강등의 위기서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음 시즌에는 팀을 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프로 감독으로써 실적이 없던 남자가 이루어낸 특필할 만한 성과였지만 그가 항상 축구만을 생각하며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사명감과 정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축구의 본질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 플레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핸드볼에서는 볼을 손으로 감싸고는 키프하는 것이 가능하다. 축구에서도 플레이어는 볼을 키프할 수 있지만 문자그대로 '감쌀'수는 없다. 왜냐하면 손으로 하듯이 발로 볼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축구에 있어서의 모든 놀라움은 볼 키핑에 있다. 한계가 있을 터인 발로 마치 손으로 볼을 취급하는 것마냥 하는 것에 사람들은 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듯이 도전하는 것이다.”

토탈 풋볼의 탄생까지

크라이프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건 아약스에서건 '토탈 풋볼'의 키맨이었다.


 미헐스는 아약스에 있어서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선수였던 때 아약스의 전통인 공격적이고 매력적인 축구를 알고 있던 미헐스는 이 전통적인 축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철학을 응용해서 그 맛을 더해 주었다. 그가 팀에게 요구했던 것은 공격적인 프로집단이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팀이 아마츄어였던 네덜란드가 프로화 되기 시작했던 것은 60년대 초반이었다. 미헐스는 프로페셔널한 축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진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캐리어를 시작한 첫 팀이 아약스였던 것이다.

 미헐스에 의하면 네덜란드 선수들의 기본은 공격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고로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것이 아약스였던 것이다. 그가 만든 철학은 하나의 기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을 빼앗았으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적의 골까지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선수들에게 공격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볼을 키프하고 게임을 지배하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축구에서 긴 시간 볼을 키프하는 것은 어렵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미헐스는 “볼을 빼앗겼을 때의 대응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볼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베스트라는 것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재빨리 볼을 돌리도록 요구했다. 볼을 돌리면서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선수들은 프리인 상태로 패스를 받을 수 있도록 자주 포지션 체인지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과는 반대로 볼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이론'상 골에 직결되는 패스코스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미헐스는 항상 1명의 키 플레이어(플레이메이커)를 의지하게 된다. 아약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동안, 미헐스는 자신의 철학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토탈 싸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스템에서는 유능한 선수들이 시합 중에 어떠한 국면에서건 필요한 상황에 따라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된다. 누구나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디펜더는 포워드가 되었고 포워드는 디펜더가 되었다. 당초 이 아이디어는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미헐스는 크라위프, 니스켄스, 카이저, 슈르비아, 바소비치라는 우수한 선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탁월한 기술과 올라운드 플레이어이며 또한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미헐스는 선수 전원이 기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동등한 레벨이 될 수 있게 팀 메이크에 정열을 쏟았다. 그 중 가장 중시했던 것은 피지컬 컨디션이었다. 그리고 연습의 기본은 런닝과 전술연습이었다. 선수들의 기술이 굉장히 뛰어났기에 미헐스가 바라는 축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축구는 굉장히 공격적이며 매력적이었기에 네덜란드 축구의 대명사가 된다. 아약스에서는 요한 크라위프가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필드상에서 팀을 이끌고 라인을 설정할 수 있었다. 팀은 윤활유를 충분히 바른 기계와 같이 움직여 이 팀을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아약스와의 결별

 미헐스의 연출에 의한 토탈 싸커는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낸다.
 1967년 아약스는 네덜란드 챔피언이 되었고 컵 대회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1968년 팀은 또다시 국내 리그를 제패하였지만 다음 시즌 유럽 챔피언스 컵에서는 결승전에 진출하여 AC 밀란에게 1-4로 패한다. 이 패배로 미헐스는 보다 큰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수준에 아직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몇 명의 선수를 내치고 자신의 철학에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젊은 선수들을 기용한다. 이것은 현명한 결단이었다. 2년 후 챔피언스 컵에서 아약스가 우승을 이루었기에 이 결단이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클럽 축구의 최고봉을 이루기 위하여 미헐스는 바로셀로나로 떠나게 된다.
 스페인 축구계는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한지 얼마 지나지 않던 때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이러한 배경도 있었다. 미헐스의 완고하며 독단적으로도 보여지는 지도방식에 선수들의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헐스에 대해여 크라위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이 그에게 배운 것은 전술과 개인의 규율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프로페셔널이 되었다. 그러나 아약스에서 종지부를 찍을 즈음에는 미헐스가 더 이상 독재자로 있을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프로였기에 개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헐스 앞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용납 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법]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찬성하지 않는 것, 그러한 태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크라위프가 독재자라고 표현한 것은 틀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것이 곧바로 미헐스의 성격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토탈 싸커를 플레이하기 위해서 선수는 정해진 법에 따라서 민첩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드상에서 서로 포지션을 바꾸어 가며 언제나 역할을 스위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패턴으로 플레이해야 하는 가를 확실히 파악한 잘 조직된 집단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선수에게 막대한 운동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완벽한 피지컬 컨디션이 요구되었다. 규율과 힘든 연습에 의해서만 이것이 가능했기에 미헐스는 선수들에게 규율과 전술 스킬을 겸비한 하드 워커로 플레이 할 것을 요구했다.

 아약스에서 유럽 챔피언이 되었기에 미헐스의 이름은 축구 역사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7년 동안 그는 팀을 유럽 최고의 존재로 이끌며 공격적이고 매력 넘치는 획기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세계에 놀라움을 준 [오렌지 머신]

월드컵 1974에서 시합을 지켜보는 미헐스.

 바로셀로나에서도 미헐스는 토탈사커의 컨셉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는 바로셀로나의 키플레이어로서 크라위프, 니스켄스와 계약했다. 그리고 1974년 그 때까지 2시즌 3위, 2위였던 팀을 스페인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바로셀로나의 감독을 맡으면서 미헐스는 네덜란드 축구협회로부터 74년 월드컵 서독대회를 대비하여 대표감독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 받는다. 미헐스는 이것을 받아들여 네덜란드 대표팀에 토탈사커의 전술을 적용할 것을 결심한다. 그가 결심한 주된 이유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많은 선수가 3년전 아약스에서 챔피언스 컵을 제패한 멤버들이었기 때문이다.

 월드컵까지의 준비기간은 짧았기에 토탈사커를 침투시키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만다. 3년전 아약스의 멤버가 네덜란드 대표의 베이스를 형성하였고 그 밖의 선수들을 여기에 조립해 넣었다. 아약스에서처럼 미헐스는 키플레이어로서 크라위프를 기용했다. 크라위프는 라인을 전후로 움직여 조직적인 디펜스를 지시했다. 거기에 맞추어 선수들은 부지런히 포지션 체인지를 행했다. 더구나 이 팀이 가장 주목받은 것은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는 빠른 속도의 볼 돌리기였다. 이 생동감 넘치는 축구 스타일은 세계의 축구 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었기에 세계에서 절찬이 쏟아졌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네덜란드는 잘 조직된 플레이 스타일로 [오렌지 머신]이라 칭해졌다. 미헐스는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토탈사커의 컨셉에 맞게 그들을 조정해 갔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공격적이고 개방적이며 용감한 게임을 선사해 주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팀이며 그것을 대회기간 중 증명했다. 물론 그들은 결승에서 서독에 1-2로 져버렸지만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헐스와 그 팀은 세계 축구에 역사적인 대전환을 가져왔다.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네덜란드 대표팀이지만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미헐스의 수완이 필요했다.


미헐스의 변신과 유럽선수권 우승

드디어 유로1988에서 네덜라드는 빅 타이틀을 획득.

 1971년의 아약스, 74년의 네덜란드 대표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헐스는 엄격하며 무자비에 가깝다 생각되는 태도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타이트한 스케줄과 규율을 강조했기에 [장군]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또한 [스핑크스]라는 닉네임도 붙게 되는데, 이것은 연습이나 시합 중에 거의 말하지 않았고 미디어에게도 또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완고하며 가까이 다가가기엔 어려운 인간 - 그것이 미헐스의 인상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아약스와 바로셀로나의 감독을 계속하며 성공가도를 질주한다. 토탈사커의 컨셉은 널리 퍼져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것을 플레이하기에 최고의 선수들은 네덜란드 선수들이었다.

 수년이 지나자 미헐스는 다른 사람의 주장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시작했다. 1986년 미헐스는 2년 후의 유럽선수권에 대비하여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리뉘스 미헐스를 보게 되었다. 기자들에게도 개방적이 되었고 선수들 또한 팀을 하나로 모으는 그의 방식을 사랑했다. 88년팀의 키플레이어인 뤼트 휠리트는 미헐스의 방식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팀의 정신적 지주가 미헐스였다. 정상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을 그는 숙지하고 있다. 그는 정상에 서기 위하여 우리들을 준비시켰으며 동시에 자유도 주었다. 모든 것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행해 지고 있다. 그는 [자네들의 플레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좀 더 틀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납득시켰다. 그것은 투쟁심이다. 투쟁함으로써 결투에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결투에 이김으로써 시합에 이길 수가 있다.”

 네덜란드가 해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결승전에서 싸운 것은 74년에 패배한 뒤로 숙명의 라이벌이 된 서독이었다. 74년의 패배를 잊기 위해서도 네덜란드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자 했다. 그리고 긴박했던 시합의 결과 2-1로 서독을 이겼다. 반 바스텐이 결승 골을 넣었을 때 미헐스조차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것이 미헐스의 감독으로써의 캐리어의 하일라이트일 것이다. 이 때 그는 자신이 [굿 가이]인 것을 미디어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가 톱 팀의 감독으로써 최후의 모습을 나타난 것은 1992년 유럽선수권 스웨덴 대회였다. 그는 다시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지만 팀은 PK전 끝에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것을 끝으로 미헐스는 은퇴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그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최고의 네덜란드 감독으로 존경받고 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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