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506/france/column/200603/at00008439.html

저자 : 데무라 켄지[出村 謙智]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감독 교대를 단행한 프랑스 3대 클럽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울리에


 "사커는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뱉을 턱이 없을 말이지만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다.

 제라르 울리에[각주:1]. 현 리옹 감독. 확실히 그는 육체적으로 생사가 걸린 듯한  어려움과 정신적인 지옥에 떨어진 듯한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철저하게 현장에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는 58세의 명장이다.


 리옹, 파리 SG, 마르세유, 프랑스의 3대 클럽은 작년 시즌부터 이번 시즌에 걸쳐, 감독 교대를 단행했다.


 리옹 / 르 갱 -> 울리에

 파리 SG / 후르니에 -> 라콤브

 마르세유 / 트루시에 -> 페르난데스

 

 이들 중에서 전임자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확실시 되는 감독은 울리에뿐이다.

 약 10개월 전. 리그 5위인 상태에서 작년 시즌을 끝낸 트루시에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페르난데스의 마르세유는 3월 21일 현재는 작년과 같은 5위. '챔피언스 리그 출장 가능성이 있는 3위가 되지 않으면 감독으로써는 낙제점이다'며 트루시에의 목을 자른 마르세유지만, 페르난데스체제에서도 성적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파리 SG에 이르러서는 라콤브체제가 되어서부터 점점 순위를 낮아질 뿐이었다(현재 8위).


 이 두 사람에 비교해서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가 쉬운 일이었냐고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 라고 할까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 그것은 프랑스리그에서 네 번 왕좌에 오른 팀을 다섯 번으로 이끌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적어도 작년과 같은 8강에 오르는 것이다. 신임 감독에게는 굉장히 높은 목표치가 주어진 것이 울리에였다.


숫자가 증명하는 이번 시즌 리옹의 강세.


 올 시즌의 프랑스리그도 거의 3/4가 경과했는데 앞에서 말한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는 거의 클리어했다고 말해도 좋은 상황이다.

 3월 21일 현재, 리옹은 2위인 보르도와 승점 11점차로 수위를 독주하고 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 1회전에서 작년 시즌 8강에서 패배한 PSV에게 1-0, 4-0으로 쾌승, 여유 있게 8강에 올랐다.

 “작년과 비교해서 리옹은 훨씬 좋은 팀이 되어 있다. 가장 발전한 점은 중반이후의 안정감. 이것은 제라르 울리에의 능력에 의한 것일 것이다.”

 올해는 리옹에게 완패를 당한 PSV의 히딩크감독은 울리에 체제가 된 리옹의 강함에 대해여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는 4-3-3인 시스템으로 시작하여 전임자 르 갱이 만들어 낸 팀을 계승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울리에 체제의 리옹. 단, 세밀한 숫자를 비교해 보면, 작년과의 차이가 명확해 진다. 프랑스리그 작년 30시합 경과 시점에서 +25점이었던 득실점차는 올해는 +33이며, 챔피언스리그 1차리그에서는 작년도 올해도 +9였지만, 작년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5-0으로 대승해서 벌어들인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용적으로 올해가 더 나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5승 1무승부라는 멋진 성적으로 그룹을 1위로 돌파했다.

 이러한 숫자에서도 히딩크감독이 보낸 올해 리옹에의 찬사가 외교적인 발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올해 리옹 감독에 취임한 울리에는 고부, 빌토르라는 경량급의 테크니션이 많았던 FW에 193Cm, 90Kg인 카류를 보강. 압도적인 운동량과 테크닉을 자랑하던 에시엔(첼시로 이적)이 빠진 중반에는 페드렛티, 티아고라는 서로 다른 타입의 MF를 획득하여 종합적으로는 구멍을 메워 보였다. “종합력에서는 작년보다도 향상된 느낌을 받는다”고 평가를 내린 것은 프랑스 대표 GK인 쿠페.


 앞서 말한 에시앙과 쥬닝요의 MF진은 초인적인 움직임이 작년 시즌 리옹의 특징의 하나였는데, 올해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인다고는 해도, 그것이 반드시 쥬닝요만이 눈에 띈다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숫자에서도 명확하다.


<작년 시즌 = 쥬니뉴 11, 고부 5, 플로 5, 베르구뉴 4, 말루다 4>

<올 시즌 = 빌토르 11, 프레드 8, 쥬니뉴 7, 카류 6, 말루다 5, 고부 4>


 이것은 30전을 치른 상태에서 리옹의 개인 득점을 작년과 올해를 비교한 것. 작년 시즌 리옹이 쥬닝요의 개인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 것에 비하여 올해는 공격진이 두루두루 득점 분포가 퍼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던 풋볼에 있어서 진정 강함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력이 뛰어나며 비슷한 5명의 FW, 8명의 MF, 8명의 DF, 그리고 3명의 GK가 필요하다.”

 그러한 울리에의 지침이 올해 리옹의 팀 만들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게 능력 있는 선수를 모으는 것은 어떠한 감독이나 꿈꾸는 일이다. 단 좋은 선수를 모은다면 그것만으로 이길 수 있는 팀이 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또한 별다른 문제다.

 “올해의 레알 마드리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선수가 아무리 많아도, 팀으로써 기능시키기는 간단하지 않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압도한 리옹을 이끄는 울리에의 말이니만치 설득력이 있다.

 “팀의 모든 선수가 팀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이 상승 군단이 되어 가는 첫걸음이다”고 말하는 울리에는 스타 선수들이라고 하여도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프랑스 대표, 그리고 리버풀에서의 감독 경험에서 이끌어 낸 방법론이기도 할 것이다.


감독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역사적 패전


 프랑스 축구팬에게는 생애 잊을 수 없는 날이 세 개 있다고 한다.


 1982년 7월 8일

 1993년 11월 17일

 1998년 7월 12일


 위에 적은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답할 수 있는 독자님들은 굉장한 프랑스 축구의 매니아라고 자부해도 좋을 지도 모르겠다.

 1982년 7월 8일은 “세비야의 비극”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스페인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서독과 대전한 날. 그리고 1998년 7월 12일은 자국 개최의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프랑스가 처음으로 월드컵을 제패한 날이다.


 자 그럼 1993년 11월 17일은 무슨 날인가 하면, “파리의 임종”이라 하여 울리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다.

 이날, 파리의 파르크 드 프랑스 경기장에서는 94년 월드컵 예선 최종전, 프랑스 대 불가리아의 일전이 행해지고 있었다. 시합은 1-1인 상태로 인져리타임에 돌입했다. 울리에가 이끄는 프랑스는 비겨도 월드컵 출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종료 직전에 지노라가 불가리아 진영에서 간단히 빼앗긴 볼에 역습당하여 마지막에는 코스다티노프에게 역전 골을 허용.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끊어졌다. 이 때 프랑스는 지노라를 시작으로 칸토나, 파팽등 개성적인 스타가 즐비하여 80년대의 흐름을 잇는 화려한 축구를 보여주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것이 발목을 잡아 커다란 오점을 남겨 버렸다.


 당연하게도 이 세계축구사에 남을 패전은 지도자인 울리에에게 훗날 커다란 영향을 준다. 울리에는 곧바로 대표팀 감독을 사임. 뒤를 이어 받게 된 에메 자케를 지원하는 DTN(내셔널 테크니컬 디렉터)에 취임한다. 그리고 나라를 둘로 나누는 논쟁으로까지 발전한 [칸토나, 파팡을 대표에서 빼라]는 것을 자케에게 강력하게 조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케가 칸토나, 파팽이 없는 프랑스 대표팀을 만들어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루어낸 것을 지켜본 직후인 1998년 여름, 울리에는 DTN을 사임하고 리버풀의 감독에 취임했다.


잉글랜드 명문클럽에서 일으킨 혁명


 그 후 2004년 그 자리를 떠나기까지 6년간 리버풀 감독으로 울리에가 이루어낸 위업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프리미어리그에서 순위는 2위가 1회, 3위가 1회, 4위가 2회).


FA컵 우승(2001년)

리그 컵 우승(2001년, 2003년)

채리티 실드(현 커뮤니티 실드)우승(2001년)

UEFA 컵 우승(2001년)

UEFA 슈퍼 컵 우승(2001년)


 과거 15번 리그 제패와 같은 빛나는 역사 그리고 울리에가 떠난 직후 따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는 빅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부족한 전적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울리에가 취임했던 당시의 리버풀은 80년대에 일어난 2번의 비극(헤이젤, 힐즈보로)를 겪고, 1990년 마지막으로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마지막으로 긴 기간에 걸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기에 클럽에서는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울리에를 초빙한 것이다.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시합 다음 날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습조차 시키는데 힘들었지. 취임 당시, 리버풀에서는 사커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식생활의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 시합이 끝나면 chips에 맥주의 세계였었다고”

 지금은 프로 선수라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실행시키면서 근대화를 기도했던 울리에.

“30명의 전 플레이어, 거기에 30명의 전 코치인 평론가나 저널리스트가 주위에 진을 치고 있으며, 2시합 계속해서 패하면 사임의 위기를 맞이한다.”는 리버풀이기에 느껴야만 했던 압박감 속에서 6년간 감독의 자리를 계속 지켜낸 것은 앞서 이야기 한 울리에가 추진하는 클럽의 근대화가 착실하게 결실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법은 급성장을 하고 있던 젊은 선수들에게서도 지지받았다.

 “오언, 제라드라는 젊은 스타들을 주위에서 존경받는 팀 플레이어로 키워 낸 자부심이 있다.”

 확실히 10대부터 리버풀에서 스타 가도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선수는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항상 for the team을 느끼게 하는 플레이는 프랑스 대표감독 시대에 스타 선수의 취급에 실패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울리에류의 영재교육에 영향 받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지내는 것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프랑스 대표, 그리고 리버풀에서의 경험을 살려 유능한 선수들을 팀으로써 기능시키는 수완이 뛰어난 울리에. 17년 만에 돌아온 프랑스 리그에서 그리고 유럽의 강호들과 싸우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옹에게 영광을 안겨주기 위하여 '생사보다도 중요한 사커'현장을 지켜 나간다.


ps; 제가 프랑스 리그를 잘 모르며, 일본어 번역인 관계로 고유 명사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를 바랍니다.

  1. Gerard Houllier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