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07.04.12 네덜란드를 떠받치고 있는 육성 피라미드 by 渤海之狼
  2. 2006.12.04 "그리고 신은 8일째에 마르코를 창조했다" 마르코 판 바스턴(Marco van Basten) by 渤海之狼 5
  3. 2006.06.07 호주 감독 히딩크의 도전 by 渤海之狼
  4. 2006.06.07 히딩크의 콤플렉스 by 渤海之狼
  5. 2006.05.24 판 바스턴 감독술의 비밀 by 渤海之狼 1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607/holland/column/200703/at00012782.html
저자: 나카타 토오루

인조 잔디 필드를 가진 아마추어 클럽 아르곤은 나쁜 날씨라도 연습에 지장이 없다.


■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축구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

 저공비행하는 유럽의 비행기를 타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곧이어 수많은 축구장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실감한다.

 [지금 난 네덜란드로 돌아왔구나~]하고.

 한국의 반 정도의 크기인 소국(小國) 네덜란드에는 4000개가 넘는 축구 클럽이 있다.
 각각의 팀에 축구 구장 하나와 연습장 몇 개, 클럽 하우스를 갖추고 있다. 각 클럽들이 축구 구장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없다. 예를 들면 페넨달이라는 마을에는 DOVO와 GVVV라는 네덜란드에서는 유명한 클럽이 있지만 양 클럽이 떨어진 거리는 불과 5M폭의 길 하나. 각각이 축구 구장, 연습장, 클럽 하우스, 주차장, 유스 육성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더비에는 3000명 정도의 관객이 열광한다. 거기에 DOVO의 옆에는 또 하나의 무명 축구 클럽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치스러울 수가……. 필자가 살고 있는 집에서도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두 개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이 있다.

 네덜란드의 축구라고 하면 [아약스], [페예노르트], [PSV], [AZ], [네덜란드 대표], [토털 풋볼], [공격형 축구], [4-3-3] 그리고 크라위프로 대표되는 수많은 [명선수] 등이 키워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네덜란드에 살아보면, 이런 키워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각 마을에 여러 개 있는 아마추어 클럽의 존재에 있다 - 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인은 1군, 2군, 3군 등 레벨에 따라 플레이 할 수 있으며 어느 클럽이라도 유스 팀을 각 세대별로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약 4000개의 클럽에, 6만에 가까운 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라도]

 이것이 축구가 가진 원래의 재미였을 터.
 여기에는 싼 티켓을 시합 당일 사서 프로의 축구를 즐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금의 프로 축구 세계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많은 나라에서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특히 네덜란드의 아마추어 축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라도]의 정신이 지켜지고 있다. 어디에 살고 있건, 어떤 레벨이건 사람들에게는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 있으며, 플레이 할 수 있는 팀과 장소가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아마추어 클럽

 [한 번 톱 클럽의 관계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게 생각하여, 네덜란드의 톱 아마추어 클럽, 아르곤을 방문해 보았다.
 아르곤은 1만 60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 마이드레히트에 있다. 위트레흐트 주(州)이지만 실제로는 위트레흐트의 마을에서는 30Km 떨어져 있으며 철도는 없고, 고속도로에서도 떨어져 있는 육지의 섬이다. 아르곤은 마이드레히트의 중심지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공식전을 치루는 메인 축구 구장에는 작은 스탠드가 있다. 천연 잔디의 연습장은 5개. 인공 잔디의 연습장은 1개.
 필자가 아르곤을 방문했던 때는 평일 밤 연습이 있었는데 날씨는 최악으로 큰 비가 내렸다. 그러나 인공 잔디덕분에 유스 세대에서 톱 팀까지 시간을 조금씩 늦추거나, 필드를 서로 나누거나 해서 평소와 다름없이 연습하고 있었다.

톱 팀의 감독, 얀 자우트만(37세)의 말에 따르면,
[필드는 전부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소유. 클럽 소유가 아니다]라고 한다.

- 그렇다면, 인조 잔디도?

[그렇다. 인조 잔디 필드도 지자체의 소유이다. 클럽의 소유물은 조명, 스탠드, 클럽 하우스 등이다. 우리들이 인조 잔디 필드를 만들어 달라고 지자체에게 계속 조른 것이 결실을 맺었다. 덕분에 이런 나쁜 날씨에서도 보통과 같은 메뉴의 연습을 짤 수 있게 되었다.]

- 그렇다는 것은 잔디 관리도 지자체가 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일주일에 2번 정도 지자체에서 사람이 와서 잔디를 손질한다. 때문에 지자체에게 “첨엔 돈이 좀 들겠지만, 인조 잔디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인건비가 절약된다”고 말하니 OK사인을 내려주었다. 아르곤만 인조 잔디를 설치하는 것은 다른 클럽에겐 불공평하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아마추어 클럽에도 인조 잔디가 깔린 연습장이 만들어졌다(웃음)]

- 과연~. 우선 한 가지 묻겠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마추어 클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 병원, 경찰 등은 생활하는데 불가결한 것. 축구 클럽도 그런 것처럼 당연한 것?

[뭐, (네덜란드라면 어느 마을이건 반드시 있는)교회 같은 것이다(웃음). 그러나 요즘 아마추어 클럽이 마을 중심에서 외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마을이 점점 커지면 지자체는 축구 클럽이 있는 장소에 주택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르곤도 가까운 미래에 교외 혹은 공업단지의 구석으로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때는 연습 필드뿐만 아니라, 공식시합용의 축구 구장도 인조 잔디가 될 것이다.]

 가령 클럽의 이전을 지자체가 결정한다고 하여도 이사갈 곳의 토지를 준비해주는 것도 지자체가 해준다는 안심감이 네덜란드 아마추어 클럽에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축구 구장이 지자체의 소유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날씨로 인한 시합 중지 결정권도 지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식시합을 치루는 구장의 필드가 인조 잔디라면 정비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날씨가 나빠도 필드가 악화하지 않기 때문에 시합 중지가 되는 경우도 굉장히 줄어든다는 것이 된다.

■네덜란드 독자적인 육성 시스템이라는 것은?

네덜란드 아마추어 축구를 이야기해 준 자우트만. 다음 시즌에는 프로 감독이다.


 네덜란드의 아마추어 클럽은 우승하여도 프로의 2부 리그에 승격하지 않는다.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인 상태다. 그 결과 다른 유럽 축구 강국에서는 상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프로 1부 리그를 정점으로 한 2부, 아마추어 톱 리그, 하위 리그, 유스 육성……이라는 피라미드형 조직이 되어 있지 않다. 네덜란드는.

 자우트만은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네덜란드 축구 조직은 피라미드로 되어있지 않다. 왜냐면 네덜란드의 아마추어 클럽은 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연습 환경은 잘 갖추어져 있어도 프로로써 공식전을 싸워나가기 위한 시설이 빈약하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상태로 있고 싶어 하는 팀이 많다. 그러나 유스 육성과 스카우팅에 관해서는 네덜란드도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각 프로 클럽이 유스 육성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아마추어 클럽의 유스 육성 부분도 프로를 향한 등용문이 되어 있다.
 FC위트레흐트는 [아카데미]라 불리는 유스 육성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주(州)안에 있는 아마추어 클럽과도 계약을 맺어 좋은 재능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어있다. 산하에 있는 아마추어 클럽은 선수의 공급뿐만 아니라 축구 클리닉, 연습 시합 등으로 프로 팀과 교류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아약스, AZ도 그 지역의 유력 아마추어 클럽과의 유스 육성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엔 FIFA 룰에 따라 프로선수의 계약금 일부가 유스 시대를 보낸 클럽에 환원되게 되어 있다. 페예노르트에서 리버풀로 옮긴 카이트 이적료의 일부는 네덜란드의 아마추어의 명문 클럽 퀵 보이스의 주머니로 들어가 스타디움의 메인스탠드를 개조한다고 한다.
 아마 그 이름도 [디르크 카이트 스탠드]가 될 터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웃음) 아마추어 클럽에게 있어서도 유스 육성은 중요한 것. 아르곤에선 RKC의 캡틴 판 디에먼(patrick van diemen)이 자랐다. 지난 시즌은 (2부인) FC 옴니월드에서 2명이 프로가 되었다. 물론 모두가 전부 프로에서 성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우리 팀이 반드시 또 받아 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어린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영웅”이니까!]

■ 작은 국토이기에 가능한 “피라미드형 육성 시스템”

 자우트만이 말하는 피라미드의 이유는 또 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서 보면 역시 네덜란드의 유스 육성환경이 제일 낫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독일의 육성환경이 좋다”고 말들 하지만 네덜란드만큼은 아니다. 잉글랜드는 프레미어의 팀이라면 “아카데미”를 반드시 소유해야하며 아스날같은 곳은 10개 이상 되는 멋진 잔디 필드가 있다. 하지만 그건 프로 뿐. 아마추어의 그라운드는 잔디가 벗겨져 있고 골포스트는 녹이 슬었으며 골망도 없다. 네덜란드는 아무리 작은 클럽이라도 육성환경이 굉장히 잘 되어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도 독일도 나라가 너무 크다. 유스 세대에서 뉴캐슬에서 포츠머스로 리그의 원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네덜란드는 북쪽의 그로닝겐에서 남쪽의 로다JC까지 유스라도 간단히 원정할 수 있다.
 물론 네덜란드도 아이가 어렸을 적에는 지역 리그가 되지만, 좁은 나라에 프로팀이 북적북적된 덕분에 레벨 높은 몇 개의 프로 클럽과 톱 아마추어 클럽의 유스팀으로 리그를 짤 수 있다. 이것은 작은 나라인 덕분에 가능한 우리들의 이점이다]

 그야말로 스몰 이즈 뷰티풀.
 커다란 나라에서도 작은 나라에서도 프로 1부, 2부 리그가 각각 18~20팀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은 다름없지만 지역 리그를 형성했을 경우 작은 나라 쪽이 그만큼 프로를 모체로 하는 팀이 더 많아져 레벨 높은 경쟁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피라미드형 육성 시스템"을 완성시킨 것이다.

 칼럼을 쓰고 있던 중에 우연히 자우트만에 관한 빅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시즌부터 프로 2부 리그의 하를렘과 2년 계약을 맺어 1군 감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우트만은 아르곤에서 유스 선수를 키워 제자들과 함께 1군으로 승격. 2005년에는 팀을 전국 2위로 이끌었다. 아직 35살이었던 자우트만은 네덜란드에서도 주목을 받는 지도자가 되어, 그 해의 리뉘스 미헐스 어워드를 수상.
[1년 전이었다면 미헐스(1974년 월드컵 때의 네덜란드 감독. 2005년에 사거)에게 직접 트로피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래도 히딩크에게 트로피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은 페트로비치, 프랑크 데 보어, 판 룬 등 왕년의 명선수들과 함께 프로 코칭 라이센스 코스를 다니며, AZ의 판 할 감독 아래서, 연수를 받고 있다.
 [디프로마(졸업증서)를 딴 후엔, 프로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말했던 자우트만이 디프로마 획득을 눈앞에 두고 그 꿈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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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Ac 밀란의 산시로 스타디움의 횡단막이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른다. “판 바스턴이 없는 산시로는 날개 없는 풍차다”.

이 네덜란드 FW는 30세를 조금 넘자마자 플레이를 멈추었다. 1995년 8월 축구계는 눈물을 흘렸다.

이 암사슴과 같은 탄력 넘치며 연약한 네덜란드 선수와의 이별은 필드 상에서 위험한 선수들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 - 즉 디펜더들은 축구를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 올린 한 선수를 말살한 것이다. 그의 연약했던 오른쪽 발목의 마지막 남은 힘을 그들은 잔인하게도 없애버린 것이다.

그의 오른쪽 발목은 4번에 걸친 수술 뒤에도 낫지 않고 [산 마르코]는 은퇴하는 길 말고는 향할 곳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 은퇴 선언은 결국 8월 17일에 행해졌다.

밀란의 오피스에 있던 그를 밖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그런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선, 간결하게 단 3개의 문장을 말했다.

“여러분에게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전 축구를 그만둘 겁니다. 고맙습니다.”

밀란은 147시합에서 90골을 기록한 축구계의 전설적인 센터포워드를 잃었다. 이 우울한 금요일에 그는 보통 사람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드라마를 만들지 않아도 좋다. 축구가 없는 생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밀란에게 있어서 판 바스턴이 없는 상태는 굉장히 큰 타격이었다. 회장 베를루스코니는 “마르코 판 바스턴은 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회장이 말했던 것은 옳았다. 축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판 바스턴이라는 인물은, 축구라는 것을 마치 손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필드위에서 달리는 것이 아니고 춤을 추고 있었다. 판 바스턴이 시합에 나가면 디펜더들은 도미노의 패와 같이 계속해서 쓰러졌고, 그에게는 필드에 난 잔디조차도 머리를 숙였다.

판 바스턴은 [007]과 같은 [살인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느 팬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쓰여 있는, 신이 세계를 만든 것을 본 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신은 8일째에 마르코를 창조했다”


판 바스턴은 골을 넣고도 그다지 골 세레모니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물론 그의 테크닉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그의 풋 워크는 발군으로 그의 슛은 완벽하며 결정적인 것이었다.

판 바스턴은 1982년 4월 3일에 아약스에서 데뷔하였다. 대전 상대는 NEC. 그는 그 때 17살로 요한 크라위프의 대역을 맡았다. 그 시합을 아약스는 5-0으로 승리하였고, 그 중 3점은 판 바스턴이 넣었다. 완벽하게 맡은 일을 처리해 낸 판 바스턴은 “난 크라위프와는 다른 타입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크라위프는 위대한 축구 선수다. 크라위프는 나보다도 다재다능하며 필드 위에 있는 모든 포지션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난 크라위프보다도 많은 골을 넣을 수가 있다. 내가 그보다도 보다 공격적이다.”


판 바스턴은 또한 여러 종류의 골을 넣었다. 어떤 때는 머리로, 또 어떤 때는 멋진 개인기를 펼친 후에 디펜더의 머리를 넘기는 슛을 했다. 그는 누구 봐도 알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그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판 바스턴은 진정한 승리자이기도 했다. 예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스포츠에서는 어떤 것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수 없을 때라도, 팀 동료의 플레이가 나쁠 때라도, 유니폼이 뜯겨 나갈 때라도, 마지막에 시합에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다. 승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승리가 분위기를 만든다. 승리가 불쾌한 상황을 모두 잊게 해 준다. 나는 예전에 시합에 지면 언제나 울었지만 최근은 그런 패배감에서도 해방되었다.”


판 바스턴은 완벽을 노리는 승리의 구도자였다.

87년 컵 위너스 컵 결승, 로코모티프 라이프치히(동독)과의 시합에서도 그러했다. 오른쪽 발목으로 인하여 판 바스턴은 시합에 나갈 예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시합에 나가 아약스에 결승골을 가져다주었다. 이 골은 시로이가 크로스를 올려, 판 바스턴이 머리로 넣은 것이었다.

후에 시로이에게서도 들었지만, 판 바스턴은 당초 유럽 컵을 전부 쉴 예정이었다.


판 바스턴은 네덜란드에서 4회, 이탈리아에서 2회 등 리그 득점왕이 되었다. 세계는 그의 다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유럽선수권에서 왠지 조금은 얌전한 듯 보였다. 네덜란드의 감독 리뉘스 미헬스는 첫 시합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그를 선발로 출장시키지 않고, 이 자랑스러운 존재의 포워드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 대신에 죤 보스먼이 플레이 한 이 시합을 네덜란드는 0-1로 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미헬스의 작전이기도 했다. 이런 작전으로 분발하게 된 판 바스턴은 다음 시합인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힘을 폭발시킨다. 시합은 3-1로 네덜란드가 승리, 판 바스턴은 이 시합에서 전부 득점을 올렸다.

네덜란드의 [발레 댄서]의 활약은 영국 보도진에게도 절찬 받았다. [골든 히어로],[정체를 드러낸 남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네덜란드는 판 바스턴 덕분에 숨을 다시 쉴 수 있었으며, 또한 준결승에서 서독과 맞붙을 때에도 그의 결승골로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20세기 최고의 슛을 보인 것은 결승전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였다. 54분, 신의 아들 판 바스턴은 하늘에서 강림하여 아놀드 뮤렌의 크로스를 발리슛으로 파 사이드의 골 위 구석을 찔렀다. 골키퍼인 다사에프는 순간 볼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사에프는 펀치를 맞은 복서와 같이 멍하니 미사일과 같은 슛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슈퍼 골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크로스가 왔기에 ‘볼을 떨어뜨린 후에 드리블로 가져가지 않으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이 멋대로 슛을 한 것이다. 이것은 조금 설명하기 어렵군”


판 바스턴을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짧았던 그의 캐리어도, 강렬한 재능도.

1999년 아약스 박물관에는 이 천재적인 센터포워드의 코너가 생겼다. 여기에는 그의 캐리어의 모든 것과 그와 관련된 몇 가지가 있다. 판 바스턴은 어렸을 때, 그가 희대의 영웅들의 활약을 쓴 축구 책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판 바스텐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써 넣었다.

“내가 최고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그을 세계에서 최고의 포워드라고 불렀지만,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슈퍼스타라는 것은 마라도나나 크라위프나 펠레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고 1992년에 말했다.

“이러한 선수들은 18살 때부터 이미 스타로써 존재하며, 귀중한 순간을 계속 경험해 왔다. 멕시코 월드컵의 마라도나는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레벨의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판 바스텐 자신도 그러한 슈퍼스타였다. 여러 차례 그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했으며, 예전엔 조금 오만하기도 했다.

“난 에고이즘(=이기주의)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했다. 필드 밖에서라도 말이다. 선수시절 판 바스턴은 자신의 애인에게 스포츠 백을 두개 들리고 옮기게 하였다. 어째서 자기 애인에게 무거운 물건은 들게 하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금 시합을 했지만, 그녀는 하지 않았다”

현재 그는 축구를 하고 있지 않다. 대신 판 바스턴은 골프를 즐겨 하고 있다. 그것도 꽤 실력이 좋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자신의 가방을 옮기지 않는다. 그의 가방을 옮기던 애인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부인인 되었기 때문이다.


Marco van Basten/마크코 판 바스턴.

1964년 10월 31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 좌우 양 발로 정확한 슛, 장신을 살린 강력한 헤딩, 부드러운 페인트, 볼 간수로 찬스메이커도 해냈던 스트라이커. 17살의 어린 나이로 아약스의 톱 팀에서 데뷔. 4시즌 연속 득점왕이 된다. 87년에는 컵 위너스 컵에서 첫 우승, 시즌 종료 후에는 AC밀란으로 이적. 굴리트,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트리오]로, 밀란을 유럽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88,89년에는 유럽최우수선수에 빛났다. 네덜란드 대표로써도 국제 A매치 58시합에 출장하여 24골. 88년 유럽선수권에서는 결승전에서 보인 슈퍼골 등 5득점을 올려 우승에 공헌했다. 4번에 걸친 수술로도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아 아쉬움에 쌓인 채 95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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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wcup/06germany/column/200606/at00009281.html

저자: 이이다 히로코


작년 11월, 남미 예선 5위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임한 오스트레일리아는 PK전 끝에 32년만의 월드컵 출장을 이루었다. 오세아니아의 맹주로 군림하면서도 꿈으로만 끝나던 월드컵의 문은 한 사람의 네덜란드 감독의 “매직”에 의해서 열렸다.


가장 가혹한 일에 잘 오셨습니다.


[어느 쪽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물 실업가 겸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연맹(FFA)의 회장인 프랑크 로위는 약 3년 전에 처음으로 거스 히딩크와 접촉했던 때의 인상을 이렇게 회상했다. 2003년 7월에 FFA 회장에 취임했을 때부터 로위는 히딩크를 감독으로 초빙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당시의 FFA는 5억 호주 달러라는 막대한 적자 때문에 재정 재건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세계적 명장을 맞아들이기 위한 체제는 되어있지 않았다. FFA가 로위 회장 주도에 의한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히딩크는 모국 네덜란드 리그에서 PSV의 감독으로써 여전히 맹활약하고 있었다.


월드컵 독일 대회 예선이 막바지에 다다른 2005년, 국내에서는 당시의 감독 프랑크 파리나를 경질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대표팀 감독을 잡고 있던 파리나 전 감독은, 2001년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는 우루과이에게 패배. 국민의 축구에 대한 관심을 단 번에 저하시켰으며, 연맹이 파탄에 빠지게 된 것은 그 직후였다. 월드컵 독일 대회에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의 미래가 걸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아래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감독은 역시 히딩크이외에는 없었다. 작년 5월, 로위회장은 최고 경영책임자인 존 오닐에게 히딩크와의 교섭을 지시. 오닐은 곧바로 네덜란드로 향했다.


작년 6월 컨퍼더레이션 컵에서, 파리나가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룹리그에서 3전 전패. 10실점으로 그룹리그 패퇴가 되었다. 월드컵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 솔로몬 제도와의 시합을 약 2개월 남겨둔 시점에서의 대패로, 팀에는 암운이 드리워졌다. FFA는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히딩크와의 교섭이 막바지에 다다른 6월 하순, FFA는 [컨퍼더레이션 컵의 부진]을 이유로 파리나를 해고. 남은 것은 히딩크의 승낙을 받는 것만 남았다.


히딩크는 당시 다섯 개의 나라에게서 오퍼를 받았다고 한다. 대리인인 판 누에하우젠씨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오퍼는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다.]한다. 판 누에하우젠씨는 또한 [간단한 선택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오고가는 데만도 큰일 이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는 32년간 월드컵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라고 말했으며, 히딩크가 당초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 감독 취임에 난색을 표명했다는 것을 고백했다. 지구 남반구 최대의 [축구 발전도상국]의 미래를 건 임무라는, 다른 의미에서의 중압감도 있었다. 오닐과의 대화로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히딩크는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풋볼 브레인(축구를 숙지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다. 당신은 아니다.]


히딩크는 대표선수로써 4회, 어시스턴트 코치로써 1회 월드컵 예선을 경험한 그레함 아놀드를 교섭 상대로 지명했다. 아놀드는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사정에 정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가 어느 정도 월드컵 출장에 목이 말라 있는가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현역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플레이 했던 경험이 있는 아놀드에 대하여, 히딩크는 친근감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풋볼 브레인”끼리 서로 맘을 열고 이야기하여, 히딩크의 결심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신력을 좋아한다. 그들은 프로이지만, 마음에는 아마추어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것이다.] 교섭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러한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작년 7월 22일.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로위회장의 2년에 걸친 희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FFA는 [2005년 11월 16일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의 계약서, 그리고 승리했을 경우에 유효가 되는 [2005년 11월 17일 오전 0시부터 월드컵 독일 대회가 끝날 때까지]라는 두 건의 계약서를 작성. PSV와의 겸무를 인정하는 [파트 타임]이라는, 이례적인 대우로 히딩크를 맞이했다.


히딩크는 파리나 시대부터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고 있던 아놀드에게 계속해 줄 것을 요청. 선수와의 파이프역활 뿐만 아니고, 분석용 비디오의 수록, 젊은 선수의 발굴, A리그의 시찰 등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활동의 전책임을 주었다. 히딩크 자신은 네덜란드에 있어도, 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태세를 취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언론은 [Welcome to the hardest job in Australian Sport(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에서 가장 가혹한 일에 잘 오셨습니다.)]라는 타이틀로 히딩크를 환영. 히딩크 자신도 취임 회견장에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돌파를 [미션 임파시블]이라 하였다.


오지 거스


FFA는 히딩크의 감독취임 발표 3일전, 한 달 후 행해질 예정이었던 콜롬비아와의 친선 시합을 취소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콜롬비아와 대전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히딩크가 지시했던 것이었다. 그 대신 취해진 네덜란드 합숙에서, [히딩크 오스트레일리아 호]는 출범했다. 명장을 지휘관으로 삼게 된 선수들은 활기에 차 [Let's go, Let's go]라는 큰 소리를 내며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수를 보고, 히딩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치는 것으로, ‘열심히 하고 있구나‘고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큰 소리를 내면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열심히 하는 것에도 밸런스가 필요하다.]


히딩크는 팀에 결여되어 있던 [냉정]을 인스톨했다. 연습을 시찰한 오닐은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고 히딩크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네덜란드, 한국을 연속으로 월드컵 4강으로 인도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위업을 달성해 온 히딩크는, 그 업적으로 “명장", ”지장“, ”마술사“, ”미러클맨“ 등,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히딩크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식“이 있었다.

아놀드는 어느 날, 선수들의 위해서 특별한 비디오를 준비했다. 이 비디오는, 수영 선수 이언 소프나 크리켓 선수인 스티브 워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 스포츠 선수의 퍼포먼스나 메시지를 수록한 것이었다. 선수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열의를 높이고자 한 아놀드에게 히딩크는 [그런 것이 효과가 있나?]고 회의적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어도, ‘기껏해야 수영이잖아? 그래서?’하면서 상대도 안 해줄 것이다]


히딩크의 말에 아놀드는 잠깐 기가 죽었지만 곧바로 자신을 가지고 [물론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놀드의 생각대로 선수들은 환성을 올리고 박수를 치면서 비디오를 감상했다. 히딩크는 그러한 선수들의 반응을 “감상”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식의 동기부여 방식을 새로운 발견으로 받아들였다.


슬리퍼를 신고 연습하러 오는 선수들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던 히딩크도 곧이어 오스트레일리아 독특의 “캐쥬얼”로 받아들였다. 기자회견에서는 [No worries, mate(친구여, 걱정하지마)라는 단어를 배웠다]며 막 주어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의 영어를 말하거나 죠크를 말해서 기자들을 자주 웃겼다.

선수들이 히딩크의 색깔로 물들어 가는 것과 동시에,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의 외향적인 면을 자신의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에게서 친근함을 담아 “오지 거스”라 불리게 되었다.


환호성은 연기자가 받게 하는 것


월드컵으로의 최종 관문이 되는 남미 5위와의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 히딩크에게 주어진 기간은 4개월. 실전을 쌓을 기회는,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인 솔로몬제도와의 시합(홈 & 어웨이), 그리고 친선 시합인 쟈마이카 등 합계 세 시합뿐이었다. 지금까지 오세아니아 예선에서는 국내 클럽에 소속하고 있는 지명도가 낮은 선수들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런 전례 속에서 히딩크는 이런 시합에 부상자를 제외한 베스트 멤버로 임했다.


그리고 맞이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상대는 기이하게도 4년 전과 같은 우루과이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 여기서 선수들을 기가 죽게 해서는 안 되었다. 히딩크는 [나를 믿어주길 바란다]고 말하며 선수들에게 강한 신념을 가지게 하고, 엄격한 훈련에 의한 만전의 전략을 준비했다.


원정 첫 시합. 옐로카드를 받고 있던 선수가 7명이나 있어서 오스트레일리아는 도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시합을 노린 히딩크는 MF 팀 케이힐과 MF 마르코 브레시아노를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하였다. 이 시합은 졌지만,히딩크는 [원정에서 0-1은 오케이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리고 홈에서 맞이한 두 번째 시합. 이 이상 실점이 용납할 수 없었기에 히딩크가 취한 것은 수비태세였다. 대담하게도 주력인 MF 해리 큐얼을 벤치 스타트 시켰다. 그리고 양 팀이 무득점인 상태로 맞이한 전반 32분, 히딩크는 경고를 받은 DF 포포비치를 불러들이고 큐얼을 투입. 이 교대로 분위기가 확 바뀌자 3분 후에는 그 큐얼이 브레시아노의 귀중한 선제점을 어시스트했다.


두 시합 합계 1-1이 된 시합은 연장에서도 결착이 나지 않아, 월드컵 플레이오프 사상 처음인 PK전으로. 다섯 번째 킥커인 FW 존 알로이지가 찬 볼이 넷을 흔든 순간, 오스트레일리아는 32년 만이 되는 월드컵 출장이 결정되었다. 알로이지는 양 손을 쭉 뻗고, 벗은 유니폼을 휘두르면서 스탠드를 향해서 달렸고, 다른 선수들도 기쁨을 표출하면서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히딩크는 벤치에서 팔짱을 낀 채로, 필드 위에서 기뻐 날 뛰는 선수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감독의 역할은, 영화감독의 역할과 같다. 영화가 성공으로 끝나면, 환호성은 연기자가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달려온 선수 한사람 한사람을 악수로 맞이하여, 꽉 껴안았다.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1페이지를 쓴 선수들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32년간 월드컵과 멀어져 있던 그들은, 어떻게든 예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이런 멋진 선수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날, 시드니 시내의 광장에서 열린 승리 기념 파티에서, 히딩크는 트레이닝셔츠로 단상에 올라, [오늘은 캐주얼하게 차려입고 왔다]고 말하여 웃음을 유발했다. 사회자가 [월드컵에서는 결승까지 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진지한 얼굴로 [최후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긴 여정이다]고 전제한 후, 살짝 미소 지으며, [오케이. 오늘은 모두 기분이 좋으니까 [마지막까지 간다]고 할까]라 코멘트. 기지가 뛰어난 히딩크의 화술은, 쾌거의 흥분에 취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꽉 잡아, 회장을 환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맨 매니지먼트의 천재


그런데 히딩크의 이미지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엄격한 지도자]라는 것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드 위에서는 엄격한 연습을 행하지만, 필드 외에서의 히딩크는 지적이며 유모어가 풍부하고, 고르고 고른 단어 하나하나가 인간으로써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오닐이 [맨 매니지먼트의 수완은 일류]라고 절찬하듯이, 선수의 개성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최대한 살리는 히딩크의 수완은 멋지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지도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아놀드에 의하면, 히딩크는 [선수와 마인드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히딩크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격려할 때도, 껴안아야 할 선수와, 질타해야 할 선수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PSV 감독과 오스트레일리아 감독이라는 양다리를 걸친 히딩크에게 있어서, 대표팀에 할당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취임 시부터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의 4개월, 히딩크가 대표팀을 지도한 것은 실질 3주간 정도였다. 이 적은 기간동안, 히딩크는 선수 한 사람 한 사람과 신뢰관계를 쌓고, 천성의 구심력으로 팀의 결속을 높여갔다.


주장으로 발탁한 FW 마크 비두카는 히딩크를 [스승님 같은 리더]라 표현한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100% 의욕에 차게 하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에게 조차 [팀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라 생각하게 한다. 이런 감독과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이 한 적이 없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자랑하는 스트라이커인 비두카이지만, 1994년 6월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후부터 국제 A 매치에서의 성적은 31시합 6득점에 불과하다(2006년 5월 20일 시점). 이 데이터가 나타내는 대로 비두카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는 의문부호가 찍혀 있었다. 2004년 2월 베네주엘라와의 시합 직전에는, 햄스트링 부상을 이유로 결장을 표명. FFA는 화풀이로 대표 소집에 응하지 않았던 선수에 관한 FIFA의 조항을 행사하여, 당시 소속하고 있던 리즈에서의 시합 출장을 금지했다.

그러한 비두카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히딩크였다. 비두카는 [주장으로 임명받아, 주어진 책임을 이루기 위하여, 팀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코멘트했다.


대표 팀 중에서 히딩크와의 관계가 가장 깊은 것은 MF 제이슨 컬리나(PSV)일 것이다. 파리나 감독시대에는 조연에 불과했으며, 소속팀이었던 아약스나 트벤테에서도 묻혀있던 존재였던 컬리나. 그러나 히딩크의 손짓에 입단한 PSV에서 급성장을 하여, 지금은 대표팀과 클럽, 양 쪽에서 주력으로 정착했다.

[신경질적인 코치는, 이렇게 해, 저렇게 해하며 선수를 신경질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거스에게 그러한 면은 없다. 거스는 갑자기 탈의실에 모습을 나타내는데, 등을 살짝 치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 할 때도 있다. 플레이어를 편안하게 해주며, 시합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하는 컬리나. 자신의 재능을 살려준 히딩크에게 컬리나는 커다란 신뢰를 보내고 있다.


선수의 개성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분발하게 하는 방식도 선수별로 나뉘어 사용한다.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 솔로몬제도와의 첫 번째 시합, 브레시아노를 후반 13분까지 출장시키지 않았다. 시합 후, 브레시아노는 입을 꽉 다물고 이렇게 말했다.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서 깜짝 놀랐다. 분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나, 아놀드는 이것이 히딩크식의 선수조종술. 일부러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시켜서, 브레시아노에게 헝그리 정신을 되찾게 하여, 보다 높은 레벨에서 플레이하기 위함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대륙간 플레이오프 두 번째 시합에서 우루과이에게서 귀중한 동점골을 넣은 것은 그 브레시아노였다.


“오랜 강호”를 부활시키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묘미


FFA는 동국 대표팀이 월드컵 출장을 정한 직후부터, 히딩크에게 월드컵 후에도 계속 해주길 요청해 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며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2006년 1월, 잉글랜드 대표팀의 스벤 예란 에릭손감독이 월드컵 후에 퇴임을 표명한 이래, 잉글랜드의 후임감독 후보에는 항상 히딩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오닐은 2월 중순, 네덜란드까지 가서 히딩크의 잔류를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히딩크의 회답은,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풀타임으로 지도하고 싶다]라는 것. 결국 FFA는 3월 상순에 [히딩크의 잔류는 없다]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표이후, 히딩크의 거취를 둘러싼 논의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내뿐만 아니고, 전 세계가 활발해졌다. 그런 논의를 진정시키는 듯이, 히딩크는 조금씩 자신의 진퇴를 알려갔다. 3월 하순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PSV의 감독 사임을 표명하자, 계속해서 잉글랜드 대표팀 후임 후보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외시켰다. 한 때는 할 듯이 보였던 이 포지션에 등을 돌리 이유를, 히딩크의 대리인 판 뉴에하우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FA(영국 축구 협회)는 진실되지 않았다. 그들은 홍차를 마시며, 거스가 [최종후보자에 적합한지 어떤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거스와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는, 취임 요청을 하는지 안 하는지 둘 중에 하나다. [최종후보자]라는 생각은, 거스의 지금까지의 공적을 무시하는 것이다.]


히딩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판 뉴에하우젠의 설명에서는 히딩크의 명장으로써의 프라이드가 보였다. 그리고 4월 상순, 히딩크는 월드컵 후의 행선지를 [러시아]라고 단언했다.


러시아는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패퇴하여, 작년 11월에 전 감독 유리 세민이 사임. 그 이후, 감독 부재인 상태가 계속 되고 있었다. 히딩크 획득의 배경에는, 첼시의 오너인 러시아의 대부호 로만 아브라모히치씨가 움직이고 있었다. 러시아 축구 연맹은 2년 계약으로 연봉 약 600만 유로라는 높은 대우로 히딩크를 초빙했다고 한다.


[러시아 축구 향상을 위해서, 그리고 러시아가 다시 강호국이 되기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성공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다. 나는 인구 1600만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이지만, 러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딩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월드컵 통산 다섯 번이나 출장하면서도 1승도 할 수 없었던 한국을 월드컵 한일 대회 4강에,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32년 만에 월드컵 출장으로 이끌었듯이, 히딩크는 “오랜 강호”를 부활시키는 것이야 말로 지휘관의 묘미라 느끼고, 러시아를 선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본선에서 “미러클”은 일어날까?


독일 월드컵 개막까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PSV 감독을 퇴임하고, 월드컵 후의 거취도 명확하게 된 지금,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지도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GK 마크 슈워처는, [월드컵 출장을 정해진 뒤조차, 우리들은 거스가 잔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월드컵 기간동안에 거스에게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23명의 선수들은, 히딩크와 함께 보내는 남겨진 시간을 충실히 하여, 월드컵에서 한 번이라도 더 시합을 하고 싶다고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경험이라는 면에 있어서 F조 중 다른 세 개의 나라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히딩크가 오스트레일리아의 팀 정신을 표현할 때 빈번히 사용하는 [Eager(열의)]로는 어느 나라에게도 지지 않는다.


1998년 월드컵 프랑스 대회에서 4강이었던 네덜란드의 멤버였던 DF 히오반니 판 브롱크호르스트는 은사가 지도하는 미지의 나라를 경계한다.

[히딩크는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는 히딩크 아래서 국제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월드컵에서 서프라이즈를 일으킬 나라일 지도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가능성”과 히딩크의 “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교묘한 전술, 전략이 융합하면, “미러클”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증명해 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일 월드컵에서 어떠한 미러클을 보여줄 것인가? “미션 임파써블”을 “미션 파시블”로 바꾼 지휘관이 이끄는 나라다. 이것만은 예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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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60601.html

저자: 키자키 신야


명장 히딩크의 콤플렉스


네덜란드에는 “선생 감독”(티쳐 트레이너)라는 단어가 있다.


프로 감독이 되기 전에 [학교의 교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네덜란드에는 이러한 경력을 지닌 명장이 적지 않다.


아약스를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이끈 판 할감독(현 AZ감독). 지난 시즌 AZ를 UEFA 컵 준결승으로 이끈 코 아드리안세감독(현 FC포르투감독). 그들은 선수시절 큰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교사를 했던 시기에 집단을 관리하는 방식을 몸에 익혀 [질서]와 [규율]을 무기로 감독으로써 성공시대를 걸어 온 것이다.


이런 “선생 감독”의 대표적인 존재가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의 히딩크감독이다. 히딩크는 1984년까지 11년간 특수학교에서 교사를 했으며 본인도 [이 때의 경험이 감독이 되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에는 또 하나의 파벌이 있다. 현역시대는 스타 선수로써 화려한 활약을 했고 감독이 되어서도 많은 타이틀을 손에 넣은 사람 즉 “명선수 감독”(톱 플레이어 트레이너)이다. 전 바르셀로나 감독인 요한 크라위프, 현 바르셀로나 감독인 레이카르트가 그 대표적인 예. 가까운 장래 판 바스턴이나 로날드 쿠만도 여기에 낄 것이다.


양 타입이 다 감독으로써 결과를 내고 있지만,안타깝게도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인기”라는 면에 있어서 이 두 타입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인기가 있는 것은 선수로써 얻은 카리스마성을 무기로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 축구를 하는 “명선수 감독”들이다.


“선생감독”의 축구는 결과를 중시한 나머지 축구의 [아름다움]이나 [재미]를 무시해버리는 일이 있다. 히딩크조차 그 예외가 아니다. 한국대표나 PSV와 같은 기계적이고 전술적인 팀은 만들어도 판타지스타나 10번 타입의 선수를 팀에 융화시키지 못한다. 히딩크가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 시대에 전혀 평가받지 못했던 것은 이 부분에 원인이 있었다.


히딩크에게는 콤플렉스가 있다. 어째서 결과를 내고 있는데도 크라위프와 같은 평가를 얻지 못하는가. 역시 명선수에게는 당할 수가 없는가? - 그런 분함을 원동력으로 다시 세계에 충격을 주려고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


우연히도 일본의 지쿠감독은 세계적인 “톱 플레이어”의 한 사람이다. 히딩크에게는 절대 질 수 없는 시합이다.


“선생”대 “명선수”

히딩크에게 있어서 오스트레일리아 대 일본은 또 하나의 대리전쟁인 것이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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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60522.html

저자: 키자키 신야


판 바스턴. 현역시절엔 네덜란드 대표팀의 슈퍼스타. 유럽 최우수 선수에도 3번 선출되었다.

 네덜란드 대표 회견장에 가면 어느 나라에 있는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우선 네덜란드어 다음에 영어 그리고 독일어 아주 가끔은 이탈리아어도 나온다. 그 전부를 통역 없이 판 바스턴 감독은 응한다. 
 
 물론 모든 언어가 완벽하지는 않다. 때때로 독일인에게 멋 부리며 말을 하여 “한 번 더 말해주세요”라는 말을 들어도 꿀리지 않고 확실히 답한다. 판 바스턴이 동요하는 모습을 한 번즘은 보고 싶다. 
 
 어쨌든 어째서 회견하는 이야기를 꺼냈느냐하면 판 바스턴이 가진 '굉장한 흡수력'에 주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활하면서 여러 나라의 말을 익혔듯이 판 바스턴은 현역시대에 많은 감독의 '작법'을 흡수했다.
 
 판 바스턴은 말한다.
 
"나는 운 좋게도 많은 명장들과 만났다.
사키에게는 볼을 잃었을 때의 포지션과 압박하는 법을 배웠다.
크라위프에게는 볼을 가지고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카펠로에게는 리얼리즘. 즉 몸 상태가 안 좋을 때 어떻게 참고 싸우는가를,
미헐스에게는 성공의 열쇠가 되는 '규율'과 '조직'을 배웠다."
 
 어째서 감독 경험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지 않을 정도로 매력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는가? 그것은 경험 부족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현역시대에 많은 것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각 감독의 좋은 부분을 간파하여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내 진짜 목표는 유로 2008이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시치미 떼지만 판 바스턴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하고 기대해 버리게 된다.
 
 "네덜란드가 세계 넘버원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팀으로 싸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 선수가 팀에게 보다 좋은 해결책을 가져다줄 수가 있다."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인 FW 휜텔라르를 선출하지 않은 것도 팀으로써의 싸움 방식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다. 휜털라르는 골은 넣지만 콤비네이션은 약하다.
 
 스스로를 [이상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라는 판 바스턴. 이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사람이 세계에 충격을 준다면 히딩크보다도 오히려 판 바스턴이 아닐까? 그런 기분이 든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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