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rian Glanville

일본어 번역: Katsumi Hond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 [스포츠 20세기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이 스트라이커는 틀림없이 축구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성된 선수 중의 한 명이다.

 그는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볼 컨트롤은 선수 생활 말년까지 여전하였다. 빠른 스피드와 경이적인 스태미나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뛰어다니며 그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파괴적인 오른 발, 공중전에서의 능력, 킬러패스를 만들어 내는 후각, 신출귀몰함 등 그는 혼자서 토탈 사커를 보여주었다.

 자신 진영 골문 앞에 갑자기 나타나 상대의 공격을 막고서는 곧바로 볼을 능숙히 다루어 상대 골 앞까지 운반하였다.

 장신[각주:1]에 두꺼운 갑빠와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은 이탈리아 카프리에서의 이주민으로 리버 플레이트에서 플레이 했었다. 알프레드 자신도 16살에 이 클럽에 가입하여 한 번 우라칸(Club Atlético Huracán)에 임대되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1947년에는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로써 7시합에 플레이 하여 얼마나 많은 대표팀 출장 회수를 늘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지만, 준비되어 있던 운명은 달랐다.

 1949년에 같은 세대의 뛰어난 스트라이커 아돌포 페데르네라(Adolfo Pedernera)나 다른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콜롬비아로 건너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말을 바꾸면 나라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FIFA에 가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적료를 제시할 수 있어 원하는 대로 선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디 스테파노는 보고타의 미요나리오스(El Club Deportivo Los Millonarios)에 입단하였다. 그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 귀국하는 일은 있어도 플레이 하지는 않았다. 그를 시작으로 많은 뛰어난 선수들을 잃은 것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아르헨티나가 출전할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53년에는 콜롬비아에서의 모험도 끝을 맞이한다.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가 아닌 에스파냐를 선택하자 영원의 라이벌인 두 빅 클럽 -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그와의 계약을 위해서 다투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의 소유권을 가진 리버 플레이트에게 당시로써는 거금인 3만 4000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했지만 간단히 해결되지 않아 결국 에스파냐 축구 협회가 중재에 들어가 양 클럽이 그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1년마다 팀을 옮기기로 하여 첫해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권리가 주어졌지만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플레이 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에게 있어서는 잊기 힘든 후회로 남았다.

 그의 활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에스파냐 리그에서 8번, 컵에서는 1번 우승했다. 에스파냐의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새로운 모국의 대표로써 31시합에 플레이 하였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와 같이 넘치는 힘과 통솔력은 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전혀 활약하지 못했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태평양 연안의 비냐 델 마르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의 호텔에 에스파냐 대표팀이 머물고 있었기에 필자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부친은 마사지 약을 가지고 와 있었다. “이것을 써서 치료하라고 녀석에게 말했지만……” 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들은 이젠 저 악독한 아르헨티나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각주:2]) 감독을 위해서 플레이 할 생각이 없다”……고. 바르셀로나와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성공하여 유명한 에레라는 거만한 권위주의자였다. 지배욕이 강한 디 스테파노는 라이벌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 후 두 슈퍼스타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였다. 한 사람은 우승한 브라질의 중반을 떠받쳤던 흑인 지지[각주:3]이고 또 한 사람은 스웨덴의 젊은 스트라이커 앙네 시몬손(Agne Simonsson). 그러나 둘 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디 스테파노가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지휘대 위에 누구도 올라서지 못하게 하였다. 지지는 굴욕적인 시즌을 보내는 동안 제대로 볼도 차지 못한 채 빛나는 경력을 되찾기 위해서 모국으로 돌아가 1962년 월드컵에서 2번째 우승을 이룩하게 된다.

 헝가리에서 망명해 온 푸슈카시(Puskás Ferenc)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확실히 그때까지 그는 헝가리 대표팀의 주장으로 팀을 통솔해 왔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현실적인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디 스테파노가 왕이었다.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득점왕 경쟁을 하던 둘은 같은 골 수로 마지막 시합을 치르게 되었고, 푸슈카시는 득점을 올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디 스테파노에게 패스를 하여 골을 선물했다. 이리하여 둘의 파트너십은 더욱 강고해 졌다고 한다[각주:4].

 그들은 1960년 챔피언스컵 결승 아이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시합에서 둘이서 7골을 넣었다[각주:5].

 1962년 벤피카와의 시합에서 푸슈카시는 3골을 넣었는데, 그 중 1골은 디 스테파노에게서의 멋진 스루패스로 인한 것이었다[각주:6].

 푸슈카시 이전에 또 한 사람의 세계적인 선수가 디 스테파노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몽 코파(Raymond Kopaszewski)다. 1956년 5월 파리에서 행해진 제1회 챔피언스컵 결승에서 코파도 또한 팀을 지배했다. 랭스에서 코파는 디 스테파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 최초의 결승전에서 4-3으로 승리하였는데, 디 스테파노는 자기 진영에서 출발하여 혼자서 골을 넣는 항상 볼 수 있었던 형식으로 골을 넣었다. 코파는 이 때 이미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에 합의하고 있었지만 이런 완벽한 팀에 어째서 자신이 필요한지를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코파는 오른쪽 윙으로써 명성을 날렸지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게임메이커로 활약하여 프랑스를 3위로 이끌었다.

 디 스테파노는 챔피언스컵에서 비할 대 없는 활약을 보여 58시합[각주:7]에서 49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 중 7골은 결승전에서 기록한 것이었다.

 1964년에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결별하여 바르셀로나의 작은 클럽 에스파뇰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다. 그 후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감독으로써도 성공한다.

 하지만 선수로써 보여준 눈부신 광채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Alfredo Di Stefano/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26년 7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바라카스에서 태어났다. 17살에 리버 플레이트의 톱 팀에 데뷔. 처음엔 오른쪽 윙이었지만 우라칸에 임대되어 스트라이커가 되었고,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하여 [라 마키나[각주:8]]라 불리는 유명한 공격 라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 1947년에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선출되었다. 그 후 1949년에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보고타’로 이적, 4시즌 동안 대활약[각주:9]한 후, 에스파냐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유럽 챔피언스컵 5년 연속 제패[각주:10]에 공헌한다. 스트라이커이면서 포지션은 유동적으로 드리블, 슛, 패스 능력을 모두 구사하여 올라운드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 후 에스파냐 대표팀에서도 플레이 했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 결국 본선에서 출장하지 못하였다.(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 178cm. 이 키는 당시로써는 큰 키였었다. [본문으로]
  2. 세리에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카테나치오 전술을 확립한 전설적인 감독 [본문으로]
  3. 애칭 Didi로 풀 네임은 Valdir Pereira [본문으로]
  4. 아마 푸슈카시가 레알 마드리드 입단 첫해인 1958~59 시즌의 이야기 같다. 스테파노 23골, 푸슈카시 21골. 이 시즌 말고는 둘의 골 수에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5. 시합은 7-3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 디 스테파노: 27분, 30분, 73분. 푸슈카시: 46분, 56분, 60분, 71분. [본문으로]
  6. 3-5로 패하여 벤피카의 우승. 당시 에우제비우가 3-3 동점 상황에서 쐐기골이 되는 두 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 [본문으로]
  7. 기록에 따라서는 60시합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La Máquina, ‘기계’라는 뜻 [본문으로]
  9. 292시합 출장하여 269골 [본문으로]
  10. 1955년 ~ 1560년까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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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David Meek
일본어 번역: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바비 찰튼이 과감한 돌파를 한 뒤 우레와 같은 슛을 차는 모습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가장 멋진 광경의 하나였다.

 

 그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런 모습으로 골을 향했을 때, 거기에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발레 댄서와 같은 움직임과 재능은 그를 잉글랜드 풋볼의 역사 속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를 특별한 선수로 만든 또 하나는 스포츠맨 정신이었다. 그가 옐로 카드를 받은 것은 커리어 전체를 통해서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프리킥 시에 물러나는 것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경고였는데, 그 기록은 후에 FA에 의해 지워져 버린 것이다.

 

 그는 결점이 없는 아이돌이었으며, 필드의 안과 밖에서 모범적인 행동을 한 신사 겸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플레이어로서의 커리어를 끝낸 후에도 신사적인 인생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존경 받고 있으며, 특별한 인물로써 군림하고 있다.

 

 그는 1973년에 은퇴하였고, 11년 뒤 클럽의 디렉터에 선출되었다. 그 밖에도 많은 임무와 함께 그가 오늘날에도 가지고 있는 포지션은 사커 컨설턴트(상담역). 그리고 1994년에 나이트의 칭호를 하사 받아 [바비 찰튼 경()]이 된 인물에 어울리게 스포츠 대사(大使)라는 것이었다.


 맨체스터에 있는 그의 코칭 스쿨은 데이비드 베컴도 이곳 출신이었다 확립된 교육 시스템으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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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 10 6일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찰튼 어슬래틱과의 시합에서 어린 바비를 리그에 데뷔시켰다.
 
데뷔부터 2년 뒤 그는 홈에서 치러진 챔피언스 컵[각주:1] 8강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와의 1차전 멤버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골을 넣어 홈에서의 2-1 승리에 공헌하였고, 베오그라드에서 숙명의 2차전의 여행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손에 넣었다.


 그가 3-3 무승부로 끝난 그 시합에서 2골을 넣은 덕분에 유나이티드는 4강 진출을 이루어 냈다. 그는 다른 젊은 팀 동료들과 같이 토요일 울브스와의 시합을 위해서 다음 날 귀로에 올랐다. 바비는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있었고 축구계는 그런 그의 발에 경의를 표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료 보급을 위해 뮌헨에 들렸던 비행기가 3번째 이륙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그 저주스러운 비극의 비행기 사고가 일어났다. 축구 역사에 슬픔으로 새겨진 그 날짜는 1958 2 6일 토요일로 오후 3시를 조금 넘었을 때였다.

 44명의 승객 중 23명이 그 사고에서또는 사고 직후에 목숨을 잃었다. 죽은 사람들 중에 8명은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었다. 팀원 중 9명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 중 2명은 그 때 입은 부상으로 인하여 그 후 두 번 다시 플레이 할 수는 없었다.

 

 바비 찰튼은 의식을 잃어 팀 동료인 해리 그레그(Harry Gregg, GK)에 의해 기체의 잔해 밑에서 꺼내 졌다. 사고로 인한 충격과 베인 상처 때문에 병원에 수용되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어서 비교적 행운인 편이었다. 바비는 휴양을 위해서 잉글랜드의 자택으로 보내졌지만, 다음 달에는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FA 6회전에 일찌감치 시합에 복귀했다. 그는 급조된 만신창이인 팀을 도와 5월 FA컵 결승에서 볼튼에게 질 때까지 팀을 이끌고 끝까지 싸웠다.

 

 그 때부터 뮌헨의 비극으로 인하여 생긴 길고 괴로운 재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많은 플레이어가 와서는 떠났지만 찰튼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소년을 막 벗어났을 때 베오그라드에 갔지만, 뮌헨의 비극 후 눈깜짝할 사이에 사나이가 되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후에 [맷 버스비(Sir Matt Busby)()]이 말했듯이 찰튼은 유나이티드 부흥의 발판이었다.

 뮌헨의 비극 후 미래가 깜깜할 정도로 암흑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나는 바비 찰튼이 있다라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격려를 받았다. 그의 존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부흥을 위한 용기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비 자신도 클럽을 위해서 온몸을 바쳐, 사고 뒤인 1958-59 시즌에서는 리그 38시합에 출전하여 28골을 넣었다. 1963년에는 레스터(Leicester)를 물리치는 견인력이 되어 FA컵 우승에 공헌하였다. 1964-65 시즌에 버스비는 그를 MF로 자리를 이동시켰다. 바비는 등 번호 8번을 달고 이 시즌 리그 성공의 키 플레이어가 되었던 것이다.

 

 뮌헨의 비극 후 불과 수개월 뒤에 잉글랜드 대표팀에 소집되어 햄프턴 파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시합에 데뷔하였다. 그 후 12년간에 걸쳐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106시합에 출장하여 여전히 득점 1위인 49골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해는 1966년에 찾아왔다.

 4강 포르투갈과의 시합에서 2개의 전형적인 그다운 골인 [캐넌 슛]을 넣어 잉글랜드를 월드컵 결승으로 이끌었다. 그 강력한 슛에 골키퍼는 그야말로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웸블리에서의 결승 서독과의 시합에서 찰튼은 지칠 줄 모르는 팀을 고무(鼓舞)시키는 선수였다. 그는 냉정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정확한 컨트롤이 기반이 된 패스, 어디에서건 골을 노릴 수 있는 위협으로 시합 전체를 통해서 상대를 곤란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서독 MF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포워드를 지원할 기회를 주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2-2 동점인 상태로 90분이 종료되어 돌입한 연장전에서도 찰튼은 유명한 [월드컵 결승전 해트트릭]으로 팀을 4-2 승리로 이끈 제프 허스트(Geoff Hurst)[각주:2]의 활약을 계속 도왔다. 필드 위에서 이미 세계 최고봉이 된 바비의 옆에는 친형인 잭(Jack Charlton, CB)도 있었다. 승리의 순간엔 전부 울었지만, 바비는 그것을 창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966년 월드컵 결승의 영광 직후, 그는 잉글랜드의 축구 기자의 투표에 따라 연간 최우수 선수를 수상하였다이어서 심판에 의한 모범적인 선수로써도 상을 받았으며 또한 발롱도르의 영예에도 빛났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66-67년 리그 우승을 이루어낸 데니스  (Denis Law, FW), 데이비드 허드(David Herd, FW), 조지 베스트(George Best, Winger), 노비 스타일스(Nobby Stiles, MF), 알렉스 스테파니(Alex Stepney, GK) 등과 함께 특필할 만한 명 플레이어의 한 사람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리그의 시합 거의 전부를 출전하여 미드필드의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12골을 기록하여 유럽에서 또하나의 쾌거를 향해 돌진했다.

 

 유럽 챔피언스 컵 우승을 이루어낸 이 1967-68 시즌이 유나이티드의 선수로써 커리어의 절정이었다. 뮌헨의 비극에서 딱 10년 에 해당하는 이 시즌에 유럽 챔피언이 되도록 인과율의 법칙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바비는 느꼈다고 한다.

 벤피카와의 결승전 당일. 나는 이 결승에서 지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먼 곳까지 왔으며, 너무도 많은 위험에서 탈출해 왔다고 생각하였다
 
고 고백했다.
바비에게는 드문 헤딩으로 골을 넣어 선취득점을 올렸지만, 1-1 동점으로 이어진 연장에서 팀이 3골을 몰아 넣어 4-1로 승리하였다.

 시합 후, 그는 감동과 육체적 피로로 인하여 자신의 방에서 틀어박혀서 우승 축하 파티에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각주:3]

 

 잉글랜드 1부 리그[각주:4]에서 1956~1973년까지 플레이 했던 그는 클럽 기록인 759시합에 출전(1)하여 통산 249(1)을 기록했다. 1973년에 은퇴하였고, 1984년에는 클럽 디렉터에 선출되었다. OBECBE의 영예를 받은 후인 1994년 여왕 탄생 기념식 자리에서 나이트의 칭호를 하사 받았다. 이것은 그를 지금도 여전히 잉글랜드 스포츠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써 군림할 수 있게 하였다. 그의 특별한 인생에서 또 하나의 빛나는 한 장면이었다.

Bobby Charlton/바비 찰튼
1937 10 11일에 탄광의 마을 에서 태어났다. 바비는 애칭으로 본명은 로버트(Robert).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함께 플레이 했던 잭 찰튼(John "Jack" Charlton –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플레이) 2년 연상의 친형. 19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톱 팀에 들어가 데뷔를 하였지만, 1958 2 21살의 나이에 뮌헨에서의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많은 팀 동료를 잃었다. 본래는 [캐넌 슛]이라 일컬어졌던 강력한 무기를 가졌던 센터 포워드였지만 포지션을 미드필더로 옮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재건하는 한편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활약. 199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모국을 첫 우승으로 이끄는 활약을 보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1967-68년 시즌에 유럽 챔피언스 컵에서 염원이던 우승을 차지. 1994년 영국 황실에게서 [나이트(기사)]의 칭호를 받아, 보비 찰튼 경()[Sir Bobby Charlton]이 되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디렉터로 활약하고 있다.

  1. 현 챔피언스 리그. [본문으로]
  2. 1998년 기사에 서임되어 받아 Sir의 칭호를 받았다. [본문으로]
  3. 이 때 부인인 노마에게 “관계도 없는 매스컴 녀석들과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이 승리는 우리들(뮌헨의 비극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현재의 프레미어 리그에 해당.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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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cent Machenaud
일본어 번역
: Shuichi Ta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에릭 칸토나의 생애.
 그것은 사랑과 증오의 반복이었다.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칸토나 만큼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감정을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준 축구 선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칸토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따르는 것을 일절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필드 위에서건 사생활에서건 일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칸토나는 세계 유일무이한 선수였다.
 그 정도로 전형적이라는 말과 거리가 먼 선수도 없다.

 1966년 5월 24일에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칸토나는 지역 클럽인 케롤(SO Caillols – 장 티카나(Jean Amadou Tigana)도 여기서 뛰었었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15살 때부터 상대 팀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부터 그는 반역자였다. 재능은 주목받고 있었지만 획득을 노린 어느 클럽도 그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우선 그의 부모와 이야기를 한 후 이어서 칸토나 본인을 납득시킨 것이 오세르(AJ Auxerre)의 스카우터였다.
 “그는 정직했으며 총명했다. 그렇게 납득시켜주면 ‘농(non)’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2부리그 마르티그(FC Martigues)에서 1시즌 임대 이적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오세르에서 7년을 보냈다.
 바지르 볼리(Basile Boli[각주:1]), 장 마르크 페레리(Jean-Marc Ferreri[각주:2]) 등을 키워 낸 오세르의 유소년 육성 센터는 프랑스에서 가장 정평난 곳이었다. 거기서 프로가 무엇인지를 배울 동안에도 칸토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바꾸지 안않다. 재능있는 선수인 것은 누구나가 인정했다. 오세르의 명물 감독인 기 루(Guy Roux[각주:3])도, 이 ‘놀라운 아이’에게 기대하였다. 다른 선수는 용납되지 않는 것도 칸토나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기 루는 칸토나를 1부 리그에 데뷔시켰고 필드 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이 소년에게 프랑스 미디어가 주목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수로서 평가가 높아짐에 따라 기이한 행동도 눈에 띄게 되었다. 멋진 골을 넣음과 동시에 상대 선수에 대한 폭력 행위나 심판, 관객에 대해 욕을 하는 칸토나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프랑스 대표팀에 데뷔도 하였다.
 1987년 8월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동독과의 시합(2-1로 동독 승리)에서 처음으로 삼색 유니폼을 입게된 그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펼쳤다.

 당시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스킨헤드를 처음으로 행한 것도 칸토나였다. 머리를 빡빡 밀고 등장한 메츠와의 시합에서는 플라티니처럼 프리킥을 넣어 전 프랑스의 화제를 독점했다.

 독설은 독해져 갔지만 또한 확고부동한 스타가 되어갔던 것이다.
 “별로 내 인생에 축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감독이나 팀 동료들이 뭐라 말하건 나하곤 상관 없다. 흥미가 일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은 그런 특이한 행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프로로서의 캐리어는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는 말만 보면 이미 천하무쌍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오세르의 GK는 프랑스 대표팀의 브르노 마르티니(Bruno Martini)였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난 뒤에, 마르티니는 칸토나에게 자신의 가방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칸토나는 거절했다.
 “나는 니 명령같은 건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선 마르티니의 얼굴에 펀치를 먹였다.

 망나니 기질은 더욱 커져만 갔다.
 1988년 5월 오세르와의 계약을 끝났을 때, 그를 획득하고자 했던 팀은 올림피크 마르세유와 마트라 라싱[각주:4]이라는 2大 클럽이었다. 치열한 획득 경쟁이 벌어졌고 결국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프랑스 신기록인 180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제시한 마르세유였다. 큰 실적을 남기지도 않은 젊은 선수에 대한 계약금으로써는 파격의 액수였다. 교섭의 자리에는 칸토나 자신도 참석하여,거기서 마르세유의 회장이며 사회당 소속의 국회의원 겸 실업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베르나르 타피(Bernard Tapie)에게 대들었다. 후에 타피는 이렇게 회고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는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타피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칸토나에게 있어서도 태어난 고향으로 개선했다고는 하여도 결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타피의 방식도, 또한 마르세유라는 도시의 분위기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바로 전에 칸토나는 프랑스 대표팀에 자신을 부르지 않은 앙리 미셀을 공공의 자리에서 “10할NOM”이라고 욕하여 큰 문제를 일으켰다. 사태를 중히 여긴 프랑스 축구협회는 그에게 1년간 국제 시합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칸토나는 자신만만히 이렇게 말했다.
 “옳은 것은 나다. 확신한다.”

 한편 마르세유에서도 타피가 맘에 들어했던 것은 칸토나가 아닌 이미 에이스 자리를 확보하고 있던 장 피에르 파팡(Jean-Pierre Papin)이었다. 때문에 칸토나는 보르도와 몽페리에에 2시즌간 임대된다. 그 후 또다시 마르세유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도,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국은 곧바로 찾아온다. 어느 시합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그는 유니폼을 벗어 던진 채 스타디움을 뒤로 한 뒤 그 상태로 3일간 행방 불명이 되었다. 할머니와 오세르 시대의 친구인 미셸 피네다와 만나러 카탈루냐까지 간 것이다.

 타피는 칸토나를 방출할 것을 맘먹고 님(Nîmes Olympique)에 그를 팔아 넘겼다. 이 작은 클럽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킨다. 공격적 미드필드로써 필드에 군림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트러블은 끊이지 않았다.
 심판에게 항의하던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볼을 심판에게 차서 퇴장당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위기였다. 아무리 칸토나라고 하여도 이때는 은퇴를 결심하였다. 그것을 번복시킨 것은 미셸 플라티니의 어드바이스였다. 플라티니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행선지는 리즈 유나이티드.
 시즌 도중에 입단한 그는 리즈에게 프레미어 우승을 안겨주며 곧바로 잉글랜드에서도 절찬을 받는다. 그런 그를 주목한 것이 당대 제일의 인기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5시즌을 보낸 그는 [에릭 더 킹]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활에 큰 공헌을 한다. 옷깃을 세운 백넘버 7의 유니폼은 클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칸토나 자신도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정신적인 아버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비호 아래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 그는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져 잉글랜드 넘버 원 선수라는 평가를 획득한다.

 한편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그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미셸 플라티니도 울리에도 칸토나를 파팡에 버금가는 에이스로써 계속 기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파팡이 프랑스 국민의 아이돌이었던 것에 비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우승 4회, 컵 우승 2회라는 위대한 결과를 남긴 칸토나는 그런 영광만큼의 인기를 프랑스에선 얻지 못했다. 프랑스 대표팀이 이기면 물론 박수를 받았지만 패했을 때의 모든 비난과 야유가 그에게만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파팡과의 차이는 뚜렷했다.
 “녀석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라고 불가리아에게 패하여 미국 월드컵 출장권을 잃은 직후에 그는 말했다.

 그 시합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월드컵 기회였다.
 프랑스 대표 출장 45회, 19득점을 올린 칸토나도 대표에서의 타이틀은 불운했다. 1996년 유럽 선수권은 그의 홈 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있는 잉글랜드에서 개최. 그러나 에메 자케는 애지중지하던 지네딘 지단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칸토나를 대표팀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이때 그의 영광도 끝을 고했다.
 이 시기의 그는 정신적인 황폐가 두드러진다. 상대 선수에 대한 공격, 심판에 대한 욕설, 나중에는 상대 팀 서포터에게 날라치기를 먹여 3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다. 결국 TV 광고에서만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은퇴가 거론되었지만 그가 미디어와 이야기하지 않게 된 때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때문에 누구도 그가 언제 현역 생활의 마침표를 찍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맨체스터와의 계약을 1년 남기고 은퇴는 97년 5월에 발표되었다. 클럽에서 짧은 프레스 릴리스가 배포도었을 뿐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은퇴 선언.

 마지막까지 칸토나는 유아독존이었다.


Eric Cantona/에릭 칸토나.

1966년 5월 24일.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오세르에서 캐리어를 스타트시켜 21살에 대표팀에 데뷔하지만 너무도 강한 퍼스널리티로 인하여 클럽 수뇌진 등과 트러블이 끊이질 않아 자주 소속 클럽이 바뀌었다. 92년에 잉글랜드 리즈에 이적하여 팀을 리그 우승에 이끌었고, 다음 시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겨서는 젊은 선수들을 리드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90년대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94-95 시즌에 팬과의 트러블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지만, 95-96시즌에 복귀하여 리그와 컵 2관왕에 공헌했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불운이 많아 1998년 월드컵 멤버에서 제외된 것을 계기로 선수로써의 캐리어도 막혀버렸다. 독특한 외모, 강렬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위키피디아에 있던 말 추가

칸토나 어록

  • 세상에는 보통과 다른 인간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자랑스럽다.
  • 갈매기들이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95년 날라차기 사건으로 24시간 구치소에 있은 후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을 갈매기로 비유하며)
  • 팀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 내가 눈에 띄면 된다.! 
  • 내 묘비석에는 아무런 말도 새겨 넣고 싶지 않다. 새하얀 돌인 상태로 좋다. 나란 인간을 언제까지고 수수께끼인 채로 남겨 두고 싶다.
  • 내가 보스다!
  • 나는 신이다!
  •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써 무엇을 하는가다. 개인으로써 주목을 받고 싶다면 난 테니스를 할 것이다. 혹은 멋진 여성을 파트너로 삼아 혼합 복식을 하거나.
  • 나는 축구에 대한 정열을 잃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은퇴 회견에서)
  • 내 최고의 순간? 나에겐 많은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는 녀석을 발로 찼을 때이다.
    (관객에게 날라차기 한 뒤에)
  • 아니! 그건 나다.(지네딘 지단과 미셸 플라티니 중 어느 쪽이 프랑스 역대 최고의 선수인가를 질문받았을 때)
  • 골은 아기와 같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칸토나에 대해서..

  • 내가 지금까지 마신 모든 샴페인을, 올드 트래포드에 영광을 가져다 준 칸토나에게 바친다.(조지 베스트)

  • 칸토나를 데리고 있는데, 누가 펠레를 필요로 할까요.
    (영국 해설자 마틴 테일러. 1993~94시즌 첼시와의 경기에서, 칸토나가 중앙선에서 찬 킥이 골 대를 맞추었을 때)

  • 앨런 시어러를 획득함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PK를 차고 싶어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백넘버 9를 달고 싶다는 것. 백넘버 문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즈음 우리 팀에서 PK를 차고 있던 것은 칸토나였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앨런 시어러 획득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
  • 확실히 칸토나에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의 지시를 받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팀에 가져다 준 최대의 공적은, 완벽을 목표로 한다면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알렉스 퍼거슨)

  •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는 그가 최고. 그와 같은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 나의 꿈.(데이비드 베컴)


  1. DF. 마르세유 재적 시에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어 챔피언스 리그 우승. 별명 ‘골 문 앞의 암살자’ [본문으로]
  2. AMF/FW. 대표력 37경기 3골. 84년 유럽 선수권 당시의 중심 선수. [본문으로]
  3. 선수 생활(1952-1961)과 감독 생활(1961-2005) 을 합하여 50년 넘게 오세르에만 있었다. 현 RC Lens의 감독. [본문으로]
  4. (Racing Club de France – 파리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지만, 경영 악화로 현재는 아마추어 팀. 마트라(Matra )는 당시 클럽 회장이 경영하던 자동차 회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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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Satoshi Hojo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있는 힘껏 펼친 양 손으로 브라질 국기를 등에 매고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리는 자신을 한껏 자랑스러워했다.


 1994년 7월 17일. 미국 로즈 보울 스타디움.

브라질 국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던 날은 한 명의 스트라이커가 그 이름을 역사에 아로새긴 날이기도 했다.


 한창 전성기였던 펠레를 중심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1970년 멕시코 대회 후 실로 여섯 번의 대회를 거친 뒤의 월드컵 우승. 땅에 떨어지려하던 축구 왕국의 위신을 되찾은 것은 신사로 알려진 펠레와는 정반대인 악동 호마리우였다.


 남을 깔보는 듯한 발언을 계속하며 수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엄격하게 정해진 규율도 그에게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사생활에서는 밤에 너무 놀러 다닌다고 하여 감독들의 분노를 산 이야기 등은 셀 수도 없이 많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법자는 아니었다.

 유언실행 - 말한 것은 반드시 행한다. 그 하나만을 집어낸다고 해도 같은 시대를 산 다른 어떤 스타보다도 걸출한 존재였다.


 에스파냐의 명문 클럽 바르셀로나에 이적한 93-94시즌.

개막전에 “30골을 넣어 보이마!”라고 예고하여, 그 숫자대로[각주:1] 넣었다. 그 중 해트트릭이 5번[각주:2]. 총 득점의 반은 몰아넣기에 위해 달성된 숫자이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크라위프에게 사생활을 주의받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은 자기 일만 걱정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밤에 놀러 다니기에 골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크라위프라도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사생활이 문란하건, 연습에 지각하건, 정작 게임이 시작되면 벤치의 기대대로 골을 넣어갔다. 프로에게 부과된 사명이 결과라고 한다면 호마리우정도의 프로페셔널도 없었다.


 “이번 월드컵은 호마리우를 위한 대회이다”

 그렇게 선언하고 임한 1994년 월드컵 미국대회. 그리고 선언대로 대회는 호마리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우승이 결정된 순간부터 카니발이 펼쳐지는 듯이 기뻐 날뛰는 팀 동료들과는 대조적으로 경직된 얼굴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베테랑 프랑코 바레시에게 봉쇄된 것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한 골만 더 넣으면 득점왕의 타이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인지……. 어쨌든 그 얼굴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명랑한 브라질리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많은 브라질 국민들이 호마리우에게 가지고 있는 감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24년에 걸친 공백을 메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왕국의 부활을 알려주는 심벌로써, 그를 사랑했다. 90년대에 있어서 그만큼 브라질리언다운 브라질리언은 없었다.


 1966년 1월 29일.

 ‘호마리우 지 소사 파리아’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에서 태어났다.

 사커 닉네임이 주류인 브라질에서는 별나게 호마리우는 본명이다.

 도장공(塗裝工)인 부친은 처음으로 얻은 장남의 이름을 붙이는데 굉장히 고민한 끝에 당시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붙였다.

 [살아있는 사전, 돈 호마리우].

 여러 가지 단어의 의미를 해설하는 호마리우 박사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거기에 부친의 어떤 바람이 담겨져 있었는지는 둘째 치고, 아들은 단어를 설명하는 대신 온갖 패턴의 골을 넣어가는 골의 박사가 되었다.

 공칭 168Cm. 실제로는 더 작을 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소아천식에 걸려서인지 키가 생각대로 커주질 않았다. 그것이 호마리우의 미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리우데자네이루 주(州)의 명문, 바스코 다 가마의 감독의 눈에 띈 것은 13살 때였다. 곧이어 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기대로 가득 찼지만, 결국 입단할 수 없었다.

 “너무 쪼그맣다”
 라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적으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일원이 되지만 그것도 2부 리그인 올라리아(Olaria Atlético Clube)에서 득점왕에 빛난 수년 후의 일이다. 의지가 되는 것은 언제나 두 다리뿐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에서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어 19살 때에는 처음으로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입고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 출장한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였다.


 21살을 맞이한 87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선수권의 득점왕을 획득. 그 다음해에 참가한 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6시합에서 7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다. 호마리우의 명성이 해외의 여러 나라로 울려 퍼지는 것은 이 때부터이다.

 1988년에 네덜란드의 PSV로 탈취 당하게 되는데, 많은 브라질 국민들에게는 [부르터스, 너마저도]라는 명언으로 알려진 로마의 케사르의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브라질에는 [배신]이라는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브라질리언의 해외로의 유출이 본격화 된 것은 1986년 월드컵 멕시코 대회 직후부터이다. 이 대회에서 불과 2명에 지나지 않았던 [해외파]가, 4년 후인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12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유럽으로 건너간 그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볼의 마술사라는 간판을 버리고, 근면성실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노동자로 변해버렸다. 어떤 선수는 브라질계 독일인으로, 어떤 선수는 브라질계 이탈리아인으로써 대표팀에 돌아왔다. 그러한 [유러피언 척하는 선수]들을 긁어모은 카나리아 군단에는 본능대로 마법의 지팡이를 흔들어, 전 세계의 사람들을 매료해 왔던 예전의 자유분방함도 창조력도 실종되어 있었다.

화려함만으로는 더 이상 세계를 제패할 수 없다. 그런 뿌리 깊은 생각이 유럽화로 경도된 배경에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손에 넣은 것은 낙담과 실망뿐인 패배들뿐이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 22살의 호마리우는 바다를 건넜다.

 그로부터 7년여. 작은 거인은 유럽 축구의 냉엄한 세례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브라질리언으로 존재했다. 그에게서 눈부신 마법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브라질의 어느 기자는 상상과 현실을 오고가는 모습을 [악마]라고 표현했다. 걸작인 것은 호마리우가 바르셀로나에 있을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인 호르헤 발다노(Jorge Alberto Valdano Castellanos)의 말이다.

 “정말 불공평한 이야기다. 그는 애니메이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선수이니까”

 즉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발다노에 따르면 호마리우의 움직임은 비디오를 돌려도 코마 단위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이라고까지 불리는 듯한 요술을 호마리우는 떼지어있는 디펜더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던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94년 월드컵 미국대회에서였다.

 러시아의 GK가 “유럽 선수라면 절대 저 코스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인 오른발 아웃사이드에 의한 상식 밖의 다이렉트 슛. 그것을 시작으로 담담히 5골을 넣어갔다. 그건 전부가 세세한 기교로 만들어진 예술품이었다. 동시에 골은 결코 억지로 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 GK의 손이 닿질 않는 곳에 차분히 굴리면 된다. 이정도로 슛의 기본에 충실한 선수도 없다.


 화려함이 사라진 현대 축구에 있어서 멸종되어 가고 있는 마법사의 생존자. 그 호마리우에게 축구의 신인 펠레는 [천재]라는 말을 선사했다.

Romário de Souza Faria/호마리우 지 소사 파리아.

1966년 1월 2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태생. 축구 왕국이 90년대에 낳은 천재 스트라이커. 명문 클럽 바스코 다 가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살 때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 출전, 2년 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선수권의 득점왕에 빛났다. 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해서 득점왕을 획득. 대회 후 네덜란드의 PSV에 이적하자마자 득점왕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89년에는 브라질 대표의 일원으로 자국에서 개최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 베베토와 투 톱을 짜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90년 월드컵 이탈리아에서는 벤치였다. 93년에 이적한 바르셀로나에서 득점왕을 획득하여, 그 기세를 살려 94년 월드컵 미국대회에서는 5골을 넣어 브라질을 6 대회만의 4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1. 33시합 30골. [본문으로]
  2. 그 중 한번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시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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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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