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Brian Glanville
일본어 번역: Katsumi Hond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이 스트라이커는 틀림없이 축구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성된 선수 중의 한 명이다.
그는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볼 컨트롤은 선수 생활 말년까지 여전하였다. 빠른 스피드와 경이적인 스태미나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뛰어다니며 그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파괴적인 오른 발, 공중전에서의 능력, 킬러패스를 만들어 내는 후각, 신출귀몰함 등 그는 혼자서 토탈 사커를 보여주었다.
자신 진영 골문 앞에 갑자기 나타나 상대의 공격을 막고서는 곧바로 볼을 능숙히 다루어 상대 골 앞까지 운반하였다.
장신 1에 두꺼운 갑빠와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은 이탈리아 카프리에서의 이주민으로 리버 플레이트에서 플레이 했었다. 알프레드 자신도 16살에 이 클럽에 가입하여 한 번 우라칸(Club Atlético Huracán)에 임대되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1947년에는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로써 7시합에 플레이 하여 얼마나 많은 대표팀 출장 회수를 늘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지만, 준비되어 있던 운명은 달랐다.
1949년에 같은 세대의 뛰어난 스트라이커 아돌포 페데르네라(Adolfo Pedernera)나 다른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콜롬비아로 건너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말을 바꾸면 나라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FIFA에 가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적료를 제시할 수 있어 원하는 대로 선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디 스테파노는 보고타의 미요나리오스(El Club Deportivo Los Millonarios)에 입단하였다. 그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 귀국하는 일은 있어도 플레이 하지는 않았다. 그를 시작으로 많은 뛰어난 선수들을 잃은 것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아르헨티나가 출전할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53년에는 콜롬비아에서의 모험도 끝을 맞이한다.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가 아닌 에스파냐를 선택하자 영원의 라이벌인 두 빅 클럽 -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그와의 계약을 위해서 다투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의 소유권을 가진 리버 플레이트에게 당시로써는 거금인 3만 4000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했지만 간단히 해결되지 않아 결국 에스파냐 축구 협회가 중재에 들어가 양 클럽이 그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1년마다 팀을 옮기기로 하여 첫해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권리가 주어졌지만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플레이 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에게 있어서는 잊기 힘든 후회로 남았다.
그의 활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에스파냐 리그에서 8번, 컵에서는 1번 우승했다. 에스파냐의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새로운 모국의 대표로써 31시합에 플레이 하였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와 같이 넘치는 힘과 통솔력은 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전혀 활약하지 못했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태평양 연안의 비냐 델 마르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의 호텔에 에스파냐 대표팀이 머물고 있었기에 필자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부친은 마사지 약을 가지고 와 있었다. “이것을 써서 치료하라고 녀석에게 말했지만……” 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들은 이젠 저 악독한 아르헨티나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2) 감독을 위해서 플레이 할 생각이 없다”……고. 바르셀로나와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성공하여 유명한 에레라는 거만한 권위주의자였다. 지배욕이 강한 디 스테파노는 라이벌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 후 두 슈퍼스타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였다. 한 사람은 우승한 브라질의 중반을 떠받쳤던 흑인 지지 3이고 또 한 사람은 스웨덴의 젊은 스트라이커 앙네 시몬손(Agne Simonsson). 그러나 둘 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디 스테파노가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지휘대 위에 누구도 올라서지 못하게 하였다. 지지는 굴욕적인 시즌을 보내는 동안 제대로 볼도 차지 못한 채 빛나는 경력을 되찾기 위해서 모국으로 돌아가 1962년 월드컵에서 2번째 우승을 이룩하게 된다.
헝가리에서 망명해 온 푸슈카시(Puskás Ferenc)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확실히 그때까지 그는 헝가리
대표팀의 주장으로 팀을 통솔해 왔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현실적인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디 스테파노가 왕이었다.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득점왕 경쟁을 하던 둘은 같은 골 수로 마지막 시합을 치르게 되었고, 푸슈카시는 득점을 올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디 스테파노에게 패스를 하여 골을 선물했다. 이리하여 둘의 파트너십은 더욱 강고해 졌다고 한다 4.
그들은 1960년 챔피언스컵 결승 아이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시합에서 둘이서 7골을 넣었다 5.
1962년 벤피카와의 시합에서 푸슈카시는 3골을 넣었는데, 그 중 1골은 디 스테파노에게서의 멋진 스루패스로 인한 것이었다 6.
푸슈카시 이전에 또 한 사람의 세계적인 선수가 디 스테파노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몽 코파(Raymond Kopaszewski)다. 1956년 5월 파리에서 행해진 제1회 챔피언스컵 결승에서 코파도 또한 팀을 지배했다. 랭스에서 코파는 디 스테파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 최초의 결승전에서 4-3으로 승리하였는데, 디 스테파노는 자기 진영에서 출발하여 혼자서 골을 넣는 항상 볼 수 있었던 형식으로 골을 넣었다. 코파는 이 때 이미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에 합의하고 있었지만 이런 완벽한 팀에 어째서 자신이 필요한지를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코파는 오른쪽 윙으로써 명성을 날렸지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게임메이커로 활약하여 프랑스를 3위로 이끌었다.
디 스테파노는 챔피언스컵에서 비할 대 없는 활약을 보여 58시합 7에서 49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 중 7골은 결승전에서 기록한 것이었다.
1964년에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결별하여 바르셀로나의 작은 클럽 에스파뇰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다. 그 후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감독으로써도 성공한다.
하지만 선수로써 보여준 눈부신 광채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Alfredo Di Stefano/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26년 7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바라카스에서 태어났다. 17살에 리버 플레이트의 톱 팀에 데뷔. 처음엔 오른쪽 윙이었지만 우라칸에 임대되어 스트라이커가 되었고,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하여 [라 마키나 8]라 불리는 유명한 공격 라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 1947년에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선출되었다. 그 후 1949년에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보고타’로 이적, 4시즌 동안 대활약 9한 후, 에스파냐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유럽 챔피언스컵 5년 연속 제패 10에 공헌한다. 스트라이커이면서 포지션은 유동적으로 드리블, 슛, 패스 능력을 모두 구사하여 올라운드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 후 에스파냐 대표팀에서도 플레이 했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 결국 본선에서 출장하지 못하였다.(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 178cm. 이 키는 당시로써는 큰 키였었다. [본문으로]
- 세리에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카테나치오 전술을 확립한 전설적인 감독 [본문으로]
- 애칭 Didi로 풀 네임은 Valdir Pereira [본문으로]
- 아마 푸슈카시가 레알 마드리드 입단 첫해인 1958~59 시즌의 이야기 같다. 스테파노 23골, 푸슈카시 21골. 이 시즌 말고는 둘의 골 수에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 시합은 7-3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 디 스테파노: 27분, 30분, 73분. 푸슈카시: 46분, 56분, 60분, 71분. [본문으로]
- 3-5로 패하여 벤피카의 우승. 당시 에우제비우가 3-3 동점 상황에서 쐐기골이 되는 두 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 [본문으로]
- 기록에 따라서는 60시합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 La Máquina, ‘기계’라는 뜻 [본문으로]
- 292시합 출장하여 269골 [본문으로]
- 1955년 ~ 1560년까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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