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c 밀란의 산시로 스타디움의 횡단막이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른다. “판 바스턴이 없는 산시로는 날개 없는 풍차다”.
이 네덜란드 FW는 30세를 조금 넘자마자 플레이를 멈추었다. 1995년 8월 축구계는 눈물을 흘렸다.
이 암사슴과 같은 탄력 넘치며 연약한 네덜란드 선수와의 이별은 필드 상에서 위험한 선수들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 - 즉 디펜더들은 축구를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 올린 한 선수를 말살한 것이다. 그의 연약했던 오른쪽 발목의 마지막 남은 힘을 그들은 잔인하게도 없애버린 것이다.
그의 오른쪽 발목은 4번에 걸친 수술 뒤에도 낫지 않고 [산 마르코]는 은퇴하는 길 말고는 향할 곳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 은퇴 선언은 결국 8월 17일에 행해졌다.
밀란의 오피스에 있던 그를 밖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그런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선, 간결하게 단 3개의 문장을 말했다.
“여러분에게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전 축구를 그만둘 겁니다. 고맙습니다.”
밀란은 147시합에서 90골을 기록한 축구계의 전설적인 센터포워드를 잃었다. 이 우울한 금요일에 그는 보통 사람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드라마를 만들지 않아도 좋다. 축구가 없는 생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밀란에게 있어서 판 바스턴이 없는 상태는 굉장히 큰 타격이었다. 회장 베를루스코니는 “마르코 판 바스턴은 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회장이 말했던 것은 옳았다. 축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판 바스턴이라는 인물은, 축구라는 것을 마치 손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필드위에서 달리는 것이 아니고 춤을 추고 있었다. 판 바스턴이 시합에 나가면 디펜더들은 도미노의 패와 같이 계속해서 쓰러졌고, 그에게는 필드에 난 잔디조차도 머리를 숙였다.
판 바스턴은 [007]과 같은 [살인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느 팬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쓰여 있는, 신이 세계를 만든 것을 본 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신은 8일째에 마르코를 창조했다”
판 바스턴은 골을 넣고도 그다지 골 세레모니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물론 그의 테크닉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그의 풋 워크는 발군으로 그의 슛은 완벽하며 결정적인 것이었다.
판 바스턴은 1982년 4월 3일에 아약스에서 데뷔하였다. 대전 상대는 NEC. 그는 그 때 17살로 요한 크라위프의 대역을 맡았다. 그 시합을 아약스는 5-0으로 승리하였고, 그 중 3점은 판 바스턴이 넣었다. 완벽하게 맡은 일을 처리해 낸 판 바스턴은 “난 크라위프와는 다른 타입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크라위프는 위대한 축구 선수다. 크라위프는 나보다도 다재다능하며 필드 위에 있는 모든 포지션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난 크라위프보다도 많은 골을 넣을 수가 있다. 내가 그보다도 보다 공격적이다.”
판 바스턴은 또한 여러 종류의 골을 넣었다. 어떤 때는 머리로, 또 어떤 때는 멋진 개인기를 펼친 후에 디펜더의 머리를 넘기는 슛을 했다. 그는 누구 봐도 알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그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판 바스턴은 진정한 승리자이기도 했다. 예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스포츠에서는 어떤 것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수 없을 때라도, 팀 동료의 플레이가 나쁠 때라도, 유니폼이 뜯겨 나갈 때라도, 마지막에 시합에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다. 승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승리가 분위기를 만든다. 승리가 불쾌한 상황을 모두 잊게 해 준다. 나는 예전에 시합에 지면 언제나 울었지만 최근은 그런 패배감에서도 해방되었다.”
판 바스턴은 완벽을 노리는 승리의 구도자였다.
87년 컵 위너스 컵 결승, 로코모티프 라이프치히(동독)과의 시합에서도 그러했다. 오른쪽 발목으로 인하여 판 바스턴은 시합에 나갈 예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시합에 나가 아약스에 결승골을 가져다주었다. 이 골은 시로이가 크로스를 올려, 판 바스턴이 머리로 넣은 것이었다.
후에 시로이에게서도 들었지만, 판 바스턴은 당초 유럽 컵을 전부 쉴 예정이었다.
판 바스턴은 네덜란드에서 4회, 이탈리아에서 2회 등 리그 득점왕이 되었다. 세계는 그의 다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유럽선수권에서 왠지 조금은 얌전한 듯 보였다. 네덜란드의 감독 리뉘스 미헬스는 첫 시합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그를 선발로 출장시키지 않고, 이 자랑스러운 존재의 포워드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 대신에 죤 보스먼이 플레이 한 이 시합을 네덜란드는 0-1로 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미헬스의 작전이기도 했다. 이런 작전으로 분발하게 된 판 바스턴은 다음 시합인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힘을 폭발시킨다. 시합은 3-1로 네덜란드가 승리, 판 바스턴은 이 시합에서 전부 득점을 올렸다.
네덜란드의 [발레 댄서]의 활약은 영국 보도진에게도 절찬 받았다. [골든 히어로],[정체를 드러낸 남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네덜란드는 판 바스턴 덕분에 숨을 다시 쉴 수 있었으며, 또한 준결승에서 서독과 맞붙을 때에도 그의 결승골로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20세기 최고의 슛을 보인 것은 결승전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였다. 54분, 신의 아들 판 바스턴은 하늘에서 강림하여 아놀드 뮤렌의 크로스를 발리슛으로 파 사이드의 골 위 구석을 찔렀다. 골키퍼인 다사에프는 순간 볼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사에프는 펀치를 맞은 복서와 같이 멍하니 미사일과 같은 슛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슈퍼 골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크로스가 왔기에 ‘볼을 떨어뜨린 후에 드리블로 가져가지 않으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이 멋대로 슛을 한 것이다. 이것은 조금 설명하기 어렵군”
판 바스턴을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짧았던 그의 캐리어도, 강렬한 재능도.
1999년 아약스 박물관에는 이 천재적인 센터포워드의 코너가 생겼다. 여기에는 그의 캐리어의 모든 것과 그와 관련된 몇 가지가 있다. 판 바스턴은 어렸을 때, 그가 희대의 영웅들의 활약을 쓴 축구 책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판 바스텐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써 넣었다.
“내가 최고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그을 세계에서 최고의 포워드라고 불렀지만,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슈퍼스타라는 것은 마라도나나 크라위프나 펠레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고 1992년에 말했다.
“이러한 선수들은 18살 때부터 이미 스타로써 존재하며, 귀중한 순간을 계속 경험해 왔다. 멕시코 월드컵의 마라도나는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레벨의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판 바스텐 자신도 그러한 슈퍼스타였다. 여러 차례 그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했으며, 예전엔 조금 오만하기도 했다.
“난 에고이즘(=이기주의)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했다. 필드 밖에서라도 말이다. 선수시절 판 바스턴은 자신의 애인에게 스포츠 백을 두개 들리고 옮기게 하였다. 어째서 자기 애인에게 무거운 물건은 들게 하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금 시합을 했지만, 그녀는 하지 않았다”
현재 그는 축구를 하고 있지 않다. 대신 판 바스턴은 골프를 즐겨 하고 있다. 그것도 꽤 실력이 좋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자신의 가방을 옮기지 않는다. 그의 가방을 옮기던 애인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부인인 되었기 때문이다.

Marco van Basten/마크코 판 바스턴.
1964년 10월 31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 좌우 양 발로 정확한 슛, 장신을 살린 강력한 헤딩, 부드러운 페인트, 볼 간수로 찬스메이커도 해냈던 스트라이커. 17살의 어린 나이로 아약스의 톱 팀에서 데뷔. 4시즌 연속 득점왕이 된다. 87년에는 컵 위너스 컵에서 첫 우승, 시즌 종료 후에는 AC밀란으로 이적. 굴리트,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트리오]로, 밀란을 유럽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88,89년에는 유럽최우수선수에 빛났다. 네덜란드 대표로써도 국제 A매치 58시합에 출장하여 24골. 88년 유럽선수권에서는 결승전에서 보인 슈퍼골 등 5득점을 올려 우승에 공헌했다. 4번에 걸친 수술로도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아 아쉬움에 쌓인 채 95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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