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적 번역/사커-영웅들의시대'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06.12.04 "그리고 신은 8일째에 마르코를 창조했다" 마르코 판 바스턴(Marco van Basten) by 渤海之狼 5
  2. 2006.04.08 "밀란의 혼(魂)" 프랑코 바레시 by 渤海之狼 1
  3. 2006.02.14 일세를 풍미했던 “플라토슈” 미셀 플라티니 by 渤海之狼
  4. 2006.01.28 비운에 운 "하얀 펠레" 지쿠 by 渤海之狼 3
  5. 2006.01.23 "토털 사커를 낳은 네덜란드의 [장군] "리뉘스 미헐스" by 渤海之狼
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Ac 밀란의 산시로 스타디움의 횡단막이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른다. “판 바스턴이 없는 산시로는 날개 없는 풍차다”.

이 네덜란드 FW는 30세를 조금 넘자마자 플레이를 멈추었다. 1995년 8월 축구계는 눈물을 흘렸다.

이 암사슴과 같은 탄력 넘치며 연약한 네덜란드 선수와의 이별은 필드 상에서 위험한 선수들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 - 즉 디펜더들은 축구를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 올린 한 선수를 말살한 것이다. 그의 연약했던 오른쪽 발목의 마지막 남은 힘을 그들은 잔인하게도 없애버린 것이다.

그의 오른쪽 발목은 4번에 걸친 수술 뒤에도 낫지 않고 [산 마르코]는 은퇴하는 길 말고는 향할 곳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 은퇴 선언은 결국 8월 17일에 행해졌다.

밀란의 오피스에 있던 그를 밖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그런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선, 간결하게 단 3개의 문장을 말했다.

“여러분에게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전 축구를 그만둘 겁니다. 고맙습니다.”

밀란은 147시합에서 90골을 기록한 축구계의 전설적인 센터포워드를 잃었다. 이 우울한 금요일에 그는 보통 사람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드라마를 만들지 않아도 좋다. 축구가 없는 생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밀란에게 있어서 판 바스턴이 없는 상태는 굉장히 큰 타격이었다. 회장 베를루스코니는 “마르코 판 바스턴은 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회장이 말했던 것은 옳았다. 축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판 바스턴이라는 인물은, 축구라는 것을 마치 손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필드위에서 달리는 것이 아니고 춤을 추고 있었다. 판 바스턴이 시합에 나가면 디펜더들은 도미노의 패와 같이 계속해서 쓰러졌고, 그에게는 필드에 난 잔디조차도 머리를 숙였다.

판 바스턴은 [007]과 같은 [살인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느 팬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쓰여 있는, 신이 세계를 만든 것을 본 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신은 8일째에 마르코를 창조했다”


판 바스턴은 골을 넣고도 그다지 골 세레모니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물론 그의 테크닉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그의 풋 워크는 발군으로 그의 슛은 완벽하며 결정적인 것이었다.

판 바스턴은 1982년 4월 3일에 아약스에서 데뷔하였다. 대전 상대는 NEC. 그는 그 때 17살로 요한 크라위프의 대역을 맡았다. 그 시합을 아약스는 5-0으로 승리하였고, 그 중 3점은 판 바스턴이 넣었다. 완벽하게 맡은 일을 처리해 낸 판 바스턴은 “난 크라위프와는 다른 타입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크라위프는 위대한 축구 선수다. 크라위프는 나보다도 다재다능하며 필드 위에 있는 모든 포지션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난 크라위프보다도 많은 골을 넣을 수가 있다. 내가 그보다도 보다 공격적이다.”


판 바스턴은 또한 여러 종류의 골을 넣었다. 어떤 때는 머리로, 또 어떤 때는 멋진 개인기를 펼친 후에 디펜더의 머리를 넘기는 슛을 했다. 그는 누구 봐도 알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그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판 바스턴은 진정한 승리자이기도 했다. 예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스포츠에서는 어떤 것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수 없을 때라도, 팀 동료의 플레이가 나쁠 때라도, 유니폼이 뜯겨 나갈 때라도, 마지막에 시합에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다. 승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승리가 분위기를 만든다. 승리가 불쾌한 상황을 모두 잊게 해 준다. 나는 예전에 시합에 지면 언제나 울었지만 최근은 그런 패배감에서도 해방되었다.”


판 바스턴은 완벽을 노리는 승리의 구도자였다.

87년 컵 위너스 컵 결승, 로코모티프 라이프치히(동독)과의 시합에서도 그러했다. 오른쪽 발목으로 인하여 판 바스턴은 시합에 나갈 예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시합에 나가 아약스에 결승골을 가져다주었다. 이 골은 시로이가 크로스를 올려, 판 바스턴이 머리로 넣은 것이었다.

후에 시로이에게서도 들었지만, 판 바스턴은 당초 유럽 컵을 전부 쉴 예정이었다.


판 바스턴은 네덜란드에서 4회, 이탈리아에서 2회 등 리그 득점왕이 되었다. 세계는 그의 다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유럽선수권에서 왠지 조금은 얌전한 듯 보였다. 네덜란드의 감독 리뉘스 미헬스는 첫 시합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그를 선발로 출장시키지 않고, 이 자랑스러운 존재의 포워드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 대신에 죤 보스먼이 플레이 한 이 시합을 네덜란드는 0-1로 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미헬스의 작전이기도 했다. 이런 작전으로 분발하게 된 판 바스턴은 다음 시합인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힘을 폭발시킨다. 시합은 3-1로 네덜란드가 승리, 판 바스턴은 이 시합에서 전부 득점을 올렸다.

네덜란드의 [발레 댄서]의 활약은 영국 보도진에게도 절찬 받았다. [골든 히어로],[정체를 드러낸 남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네덜란드는 판 바스턴 덕분에 숨을 다시 쉴 수 있었으며, 또한 준결승에서 서독과 맞붙을 때에도 그의 결승골로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20세기 최고의 슛을 보인 것은 결승전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였다. 54분, 신의 아들 판 바스턴은 하늘에서 강림하여 아놀드 뮤렌의 크로스를 발리슛으로 파 사이드의 골 위 구석을 찔렀다. 골키퍼인 다사에프는 순간 볼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사에프는 펀치를 맞은 복서와 같이 멍하니 미사일과 같은 슛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슈퍼 골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크로스가 왔기에 ‘볼을 떨어뜨린 후에 드리블로 가져가지 않으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이 멋대로 슛을 한 것이다. 이것은 조금 설명하기 어렵군”


판 바스턴을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짧았던 그의 캐리어도, 강렬한 재능도.

1999년 아약스 박물관에는 이 천재적인 센터포워드의 코너가 생겼다. 여기에는 그의 캐리어의 모든 것과 그와 관련된 몇 가지가 있다. 판 바스턴은 어렸을 때, 그가 희대의 영웅들의 활약을 쓴 축구 책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판 바스텐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써 넣었다.

“내가 최고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그을 세계에서 최고의 포워드라고 불렀지만,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슈퍼스타라는 것은 마라도나나 크라위프나 펠레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고 1992년에 말했다.

“이러한 선수들은 18살 때부터 이미 스타로써 존재하며, 귀중한 순간을 계속 경험해 왔다. 멕시코 월드컵의 마라도나는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레벨의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판 바스텐 자신도 그러한 슈퍼스타였다. 여러 차례 그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했으며, 예전엔 조금 오만하기도 했다.

“난 에고이즘(=이기주의)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했다. 필드 밖에서라도 말이다. 선수시절 판 바스턴은 자신의 애인에게 스포츠 백을 두개 들리고 옮기게 하였다. 어째서 자기 애인에게 무거운 물건은 들게 하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금 시합을 했지만, 그녀는 하지 않았다”

현재 그는 축구를 하고 있지 않다. 대신 판 바스턴은 골프를 즐겨 하고 있다. 그것도 꽤 실력이 좋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자신의 가방을 옮기지 않는다. 그의 가방을 옮기던 애인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부인인 되었기 때문이다.


Marco van Basten/마크코 판 바스턴.

1964년 10월 31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 좌우 양 발로 정확한 슛, 장신을 살린 강력한 헤딩, 부드러운 페인트, 볼 간수로 찬스메이커도 해냈던 스트라이커. 17살의 어린 나이로 아약스의 톱 팀에서 데뷔. 4시즌 연속 득점왕이 된다. 87년에는 컵 위너스 컵에서 첫 우승, 시즌 종료 후에는 AC밀란으로 이적. 굴리트,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트리오]로, 밀란을 유럽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88,89년에는 유럽최우수선수에 빛났다. 네덜란드 대표로써도 국제 A매치 58시합에 출장하여 24골. 88년 유럽선수권에서는 결승전에서 보인 슈퍼골 등 5득점을 올려 우승에 공헌했다. 4번에 걸친 수술로도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아 아쉬움에 쌓인 채 95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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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단순한 심벌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였다. 스파이크를 벗은 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프랑코 바레시는 여전히 'AC 밀란의 혼()'인 것이다.

 () 카피탄(캡틴)은 여전히 롯소네로(이탈리아어로 적과 흑. 밀란의 애칭)와의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클럽의 암흑기에도 바레시는 결코 밀란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결코 버리질 않았다.

 바레시에게는 좀 더 편한 길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을 선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운명을 밀란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도박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밀란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하늘이 내려준 천직으로 선택한 것이다.

 

 바레시는 브레시아 교외의 작은 노동자의 마을 트라바리아토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유니온 스포르티바 오라토리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그가 밀란과의 험난 모험을 시작한 것은 1974 7월이었다.


 14살의 여름, 그는 아탈란타의 입단테스트를 받았다. 신장 겨우 164Cm. 어디에 있어도 작은 몸집인 프랑키노는 말랐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이 되었다. 그 후 한 살 위인 형 벳페(쥬세페의 약칭)가 있던 인테르나치오날레에 소개받았지만 여기서도 역시 거부 당했다. 그때 바레시에게 오라고 한 곳이 인테르나치오날레와 같이 밀라노를 본거지를 하고 있던 밀란이었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와 지안니 리베라(Gianni Rivera)가 보는 앞에서 처음엔 풀백으로, 다음에는 리베로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결과 150만 리라, 거기에 키가 1Cm 클 때마다 100만 리라를 추가하는 조건으로 밀란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20살이 될 즈음에는 178Cm가 되어 있었다.

 

 바레시는 항상 풍부한 개성과 더불어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인생을 통해서 그가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인 레지나를 잃는 비극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밀란에 입단한 후에도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리하여 귀중한 조언자인 누나 루치아가 모친 대신 그를 키웠다.

 그는 밀란의 프리마베라(주니어 유스팀)에서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클럽은 월 2만 리라의 급료로 계약을 맺기로 결정한다. 인생의 분기점은 니리스 리드홀름의 감독 취임과 찾아 왔다. 78년 이 스웨덴 감독이 아직 18살도 안 된 바레시를 탑 팁에 데뷔시킨 것이다.


 바레시는 그라운드에 있어서의 자신감과 침착성을 주위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같은 대선배이자 스타에게 볼을 건네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였다.

 주목을 모은 그는 78-79시즌 밀란의 10번째 스쿠데토 주역의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축구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실망을 맛보게 된다. 불법 도박 스캔들로 인하여 밀란이 세리에 B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1980년 바레시는 낮은 수준의 리그로 내려가지만 다음해 곧바로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밀란의 부진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진 않았다.

 1982년 AC밀란은 세리에 A 잔류에 실패한다. 그 시점에서 다른 팀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바레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팬들은 팀과 고난을 함께 하려 한 그의 선택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바레시는 또래 선수들 보다 빨리 캡틴이 되어 있었다. 클럽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금고는 비어있었다. 선수 획득도 어떻게 절약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었다. 바레시에게는 삼프토리아에서 매력적인 오퍼가 있었으나, 거부했다. 인테르도 그를 원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이러한 일들로 서포터는 더욱더 그를 진정한 우상으로 받들게 되었다. 팀을 위한 좋은 기회를 진중히 기다리고 있던 바레시의 판단은 옳았다. 모든 일을 큰 스케일로 생각하는 사업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밀란의 만회극이 시작되었다.

 87, 이 신회장은 새로운 선수를 획득하여 팀을 강화하고 곧이어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명장 아리고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고참도 새로 온 선수들도 신감독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으나 좀 지나자 팀은 강해졌다.

 뤼트 휠리트와 마르코 판 바스턴이라는 네덜란드 콤비를 얻어 밀란은 다시 스쿠데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챔피언즈 컵과 토요타 컵(대륙간 컵)에서도 승리하여 힘들었던 모험의 여정을 끝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바레시는 아주리(대표의 애칭)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말수가 적긴 하였지만 한번 말한 것은 굉장히 명료했다.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콘택트면 충분했다. 소리치지 않아도 그의 존재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동료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그라운드에 한 번도 서진 못했지만 이탈리아는 우승했으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91년 밀란에 있어서의 [사키의 시대]는 끝났지만 바레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파비오 카펠로 지휘하에서 존재감을 더해 갔다.

 4개의 스쿠데토를 획득하였고 챔피언즈 컵을 제패했으며 여전히 그라운드 위에서는 가장 뛰어난 선수로 계속 존재했다. 사키는 언제나 바레시를 대표팀에 있길 원했으나 바레시는 1994 9월 아주리의 셔츠를 벗었다.


 그 수개월 전의 여름, 그는 미국 월드컵 초반 노르웨이전에서 다친 무릎을 20일간에 걸쳐 회복하여 브라질과의 결승전에 겨우 출장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악몽을 보게 된다. 승부차기에서 통한의 킥 미스. 세계의 정점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가 흘린 눈물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후도 밀란에서 플레이를 계속한 바레시는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마크할 수 없을 듯한 선수가 나타났을 때 나는 은퇴할 것이다."

 97년 4월 6. 밀란은 스타디오 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1-6으로 대패했다. 그 시합에서 그는 눈 앞을 화살과 같이 빨리 달리는 크리스챤 비에리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필시 커리어의 막을 내릴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바레시는 97 6월에 현역에서 은퇴를 표명한다. 클럽의 회장인 베를루스코니는 그가 달고 있던 [등번호 6]을 영구 결번으로 정했다. 그리고 뛰어났던 커리어의 포상으로 클럽 부회장에 임명했다.


Franco Baresi

1960 5 8. 북이탈리아의의 트라바리아토 태생. 근대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리베로.

14세때 클럽에 들어가서 37세에 스파이크를 벗을 때까지 커리어 전부를 AC밀란에서 보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우승한 이탈리아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출장하지는 못했다. 세계적으로 평가를 높인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귀재(鬼才)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밀란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 수많은 타이틀을 손 안에 넣었다. 절묘한 수비 라인 제어와 탁월한 수싸움으로 상대 선수를 수비망에 걸리게 하는 디펜스는 예술의 영역. 개성파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발롱도르에 선출되지 못한 것은 운이 없었을 뿐이며 이탈리아 대표에서도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에서 커리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면서도 승부차기에서 패퇴. 그런 만큼 [이탈리아의 바레시]보다는 [밀란의 바레시]라는 인상이 보다 강하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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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Vincent Machenaud
일본어 번역 : Shuichi Ta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미셀 플라티니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던 것은 그가 11살이 되던 해였다. 로렌느지방의 작은 마을 죄프에서 태어난 그는 마을의 클럽인 AS죄프에서 축구선수로써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길바닥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었다. 축구는 굉장히 좋아했지만 놀이이상으론 생각하지 않았다.고 훗날 플라티니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젊어서 아마츄어팀에서 플레이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 어딘가의 클럽에 넣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플라티니가 놀이의 영역을 뛰어넘어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하게 된 것도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축구에 대한 정열이 넘쳤었다. 공부는 특별히 흥미를 가지진 않았지만 축구는 매일 밤 꿈에서도 플레이할 정도였으니까

 이미 그에게 있어서는 축구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성장함에 따라 그 생각은 더 강해져만 갔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르러 플라티니의 부친도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 때로는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부친도 서서히 아들의 재능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반대로 엄격하시기만 하셨지.

 라고는 하지만 플라티니가 당시 로렌느지방 최대의 클럽인 FC메스의 입단테스트를 받은 것도 부친의 어드바이스에 따랐기 때문이다.


 당시 플라티니는 17. 그의 이름이 지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단테스트에서 멋진 테크닉과 뛰어난 잠재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메디컬 체크에서 문제가 생겼다. 호흡기관이 수준 이하며 심장이 스포츠선수로써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메스의 팀닥터가 내린 진단이었다.

 이리하여 메스에의 문은 닫혀져 버렸지만 이 일로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 것은 FC메스쪽이었다.


 부친이 다음으로 아들을 보낸 곳은 옆 마을인 낭시였다. 입단한지 1년 후에는 AS낭시에서 프로 데뷔했으며 명성도 차츰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엔 프랑스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플라티니는 프랑스 축구 희망의 별이었다.

 이즈음부터 플라티니는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젊었기에 자신감과 야심이 온 몸에 충만했다. 프랑스 대표로서 데뷔는 76년 3월 26 파르크 드 프랑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친선시합에서였다. 75, 프랑스는 1-0으로 리드한 상황에서 프리킥을 얻자 캡틴인 앙리 미셀이 볼에 다가갔다. 당시 미셀은 프랑스 축구의 최대 스타이며 프리킥의 명수이기도 했다.

 나에게 맡겨줘. 반드시 넣을 테니까

 미셀의 귓가에서 플라티니는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프랑스는 리드를 2점차로 넓히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의 프리킥은 '플라토슈'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대명사중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가 뛰어난 것은 비단 프리킥뿐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몸싸움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완벽한 선수였다. 그에게는 다른 선수에게는 없는 재능이 있었다. 넓은 시야였다.

 맞어. 확실히 판단은 빨라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넓게 필드를 볼 수 있었었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10번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7년간 낭시에 있은 후 그는 당시 프랑스 최강의 클럽이었던 AS 생떼띠앤느로 이적.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 그리고 진정한 슈퍼스타로 성장해간다

 그는 플레이메이커이면서도 뛰어난 득점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높은 헤딩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또한 강한 슛을 쏘지도 없었다. 그러나 플레이 메이크의 센스와 골 앞에서의 득점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프랑스 대표에서는 72시합에 출장해서 41. 물론 득점은 역대 1위이다. 아마 당분간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희망의 별이 이제는 구세주가 되었다. 플라티니만 있으면 프랑스대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월드컵에 관해서만은 요한 크라위프처럼 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78년 아르헨티나대회에서는 내가 너무 어렸다. 우리들의 세대는 세계에서 이겨나가기 위한 경험이 부족했다. 4년 후의 스페인대회에서는 정말 불운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대회에서는 내가 조금 나이가 들었었다…”


 그렇지만 그 외의 타이틀은 많이 얻었다.

 낭시 최후의 시즌이 된 78년에는 낭시 최초의 타이틀인 프랑스컵을 가져오는데 큰 공헌을 한다. 후에 그가 내 마당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파르크 드 프랑스의 페널티 에리어 왼쪽 30. 거기서 결정한 프리킥이 결승점이 되었다. 프랑스컵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최초의 빅 타이틀이었다.

 다음으로 81년에는 생떼띠앤느에서 프랑스 리그 우승. 또한 이 시즌에는 득점왕도 획득. 명실공히 프랑스 넘버원 플레이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는 가정내의 문제로 인해 만족할만한 활약을 못하고 종료. 이것이 스페인 월드컵이 끝난 후 선조의 땅이기도 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배신행위였다. 월드컵 후 최초의 대표시합인 슈트트가르트와의 친선시합에서 프랑스가 1-3으로 패하자 파르크 드 프랑스의 관중은 플라티니를 향해서 비난의 함성을 보냈다.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나쁜 기억중에 하나다. 프랑스 대표에서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유벤투스에서의 데뷔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월드컵 우승멤버들은 프랑스의 영웅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축구선수로써 최고의 시기를 유벤투스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일요일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칼초의 분위기속에서 보낸 것은 최고의 추억이지.

 여기서 그는 5시즌 동안 2번의 리그 우승과 이탈리아 컵, 유럽 챔피언즈 컵, 컵 위너스 컵, 그리고 인터컨티내탈 컵을 획득. 또한 유럽최우수선수상인 발롱도르도 3년 연속 수상했다. 유벤투스의 서포터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미켈레는 잊을 수 없는 영웅인 것이다.

 발롱도르를 수상한 83~85년이 나의 절정기였다. 신체적인 레벨이 최고조에 도달했었으니까. 생각과 몸이 완전히 일치되었었지. 이탈리아에서의 중압감은 힘들었지만 플레이는 너무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지


 1984. 그는 프랑스 대표에게도 최초의 타이틀을 가져오게 한다. 자국 개최의 84년 유럽선수권 프랑스대회였다. 2번의 헤드트릭을 포함한 5시합 9. 그것은 그야말로 플라티니를 위한 대회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괴로운 일을 경험한다. 리버풀과 행해진 유럽 챔피언즈 컵 결승이었다. 챔피언즈 컵은 월드컵과 더불어 플라티니가 가장 얻고 싶어하는 타이틀이었고 이날 밤은 그 꿈이 이루어질 밤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축구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렸다. 그 날 이후 난 축구를 순수하게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합 전에 일어난 사망자 38명을 낸 훌리건의 폭동, 소위 헤이젤의 비극이 그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결승점이 된 PK를 득점했을 때도 그는 담담히 센터써클로 향했을 뿐이었다.

 시합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관중석에서 일어난 비극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권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로도 2시즌 플레이를 계속했지만 마음속의 에너지는 고갈되었으니까

 모든 것을 축구에 바쳐온 인간의, 이것도 또한 인생일 것이다.



Michel Platini

1955 6 21일생. 프랑스 죄프에서 태어났다. 낭시에서 프로의 캐리어를 스타트해 1976년 프랑스 대표로 데뷔. 그 후 쌩떼띠엔느에서 활약해, 82년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대표로서는 78, 82, 86년 월드컵에 출장하지만 82, 86년의 월드컵에서는 준결승에서 패배하여 세계 넘버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84년 자국 개최인 유럽선수권에서는 9골을 넣은 대활약으로 프랑스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유벤투스에서도 리그우승 2, 유럽 챔피언즈 컵,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 인터콘티네탈 컵도 제패하였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3번의 득점왕과 83년부터 3년 연속 발롱도르를 획득하는 등 세계를 대표하는 넘버 10. 공격적 MF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다. 87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역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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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드의 대관중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지쿠는 천천히 페널티 스팟으로 향했다.

 천천히 달리면서 오른발 인사이드 킥. 정확히 찬 볼이 골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모든 것은 계산대로였을 터였다.


 1986년 6월 21일.

 멕시코의 과다라하라의 하리스코 스태디움.

프랑스와의 8강 전은 20분 남은 상황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스코어는 1-1. 브라질은 PK의 찬스를 얻게 된다. 킥커는 지쿠. 그라운드에 들어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 잡은 볼을 한번의 스루패스로 브랑코에게 연결했고 브랑코가 태클에 쓰러졌다. PK. 자신이 만들어낸 기회를 자신의 결정짓는다 - 그것은 누구나가 생각했던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반전을 거듭하며 수정되었다. 계산대로 날아간 볼이 GK 바츠의 일생일대의 세이브에 의해 막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치며 힘없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은 프로에 들어온 이래 PK의 달인이 범한 단지 세번째의 실축이었다.


 이리하여 브라질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승부차기 끝에 한 번은 쓰러트렸던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33살.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 있던 늙은 영웅은 이 시합을 끝으로 카나리아의 셔츠를 벗게 된다. 이 결과는 어떻게 보면 그의 사커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라 추앙 받는 선수이지만 세계 축구 역사에서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만은 않다. 동시대의 아르헨티나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프랑스의 장군 미셀 플라티니에게 쏟아지는 절찬에 비하면 지쿠는 변변치 못하다. 그러나 마라도나, 플라티니와 지쿠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대표팀 주장을 맡은 수를 비교해 보면 91번의 주장을 맡은 마라도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71번의 주장을 맡은 지쿠 72번의 플라티니에 불과 한번이 모자란 정도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나 프랑스와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쟁이 심한 브라질에서 11년간이나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왔던 것이다.

 무시하지 못할 것은 골을 넣은 수에 있다. 대표에서는 펠레에 이어 역대 2위인 48골을 기록(2000 1월 기준..지금은 아마 호나우도가 넘어섰죠?). 플라티니가 41, 마라도나는 34골이므로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써 그의 득점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득점력의 높음으로 따지자면, 이러한 기록도 있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로 이적한 1년째인 83-84시즌에 24시합에서 19골을 기록득점왕에 오른 플라티니는 30시합에서 20. 1시합 평균 득점률에서는 플라티니를 능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리그를 제패한 유벤투스에서 주위에 뛰어난 선수들에게 도움을 받은 플라티니와는 달리 겨우 세리에B 강등을 면한 약소 클럽에서의 골 러쉬였던 것이다. 플라티니를 제치고 리그 MVP의 수상한 것은 그러한 가치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등번호"10"번으로서 라이벌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면서도 충분한 평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빅 타이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지쿠는 비운의 스타였다.


 본명 알투르 안트네스 코인브라. 결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젯거, 에두(한때 일본 대표팀 테크니컬 디렉터가 된 사람 - 역자주) 두 형이 프로축구 선수였을 정도로 혈통은 좋았다. 어렸을 적부터 두 형을 능가하는 재능은 인정받고 있었으나 주위사람들을 걱정케 하는 것은 빈약한 몸이었다. [사이보그]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 육체개조에 들어간 것은 그런 빈약한 몸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하자 마자 피지컬 코치와 정형외과 의사들로 구성된 "지쿠 개조실"에 의해 4년에 걸친 육체개조가 시작되었다지쿠는 자신 전용의 메뉴에 따라 기절할 정도로 힘든 근력 트레이닝을 담담히 행하면서 빈약했던 몸은 어느새 눈에 뜨일 정도로 튼튼하게 변해 갔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운동 기구와 맞대고 트레이닝을 쌓아가면서도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으며 보냈다고 한다. 근력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은 치아 교정에까지 이르러 얼굴의 응어리까지 없앴다. 괴롭고 힘든 개조계획이 끝날 즈음에는 소년이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콤플렉스는 전부 없어졌다.


 20살에 레귤러가 되면서부터 캐리어는 곧 전설이 되었다. 2년 후인 75년에는 플레멩구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대표팀의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우루과이와의 A매치에서 국가대표 데뷔를 했는데 그 날이 그의 22번째 생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하얀 펠레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던 2의 펠레에 대한 환상이 이제서야 마침표가 찍히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펠레와 같은 화려하고 트릭키한 플레이도, 놀랄만한 스피드도 아니었다. 지쿠 자신은 그것을 방향감각이라고 했다. 자서전에서 지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그라운드의 어디에 있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아래를 쳐다보고 있어도 내가 원하는 장소에 정확한 패스를 하고 또한 슛을 쏠 수가 있었다.

 그것이 선천적인 재능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기술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프리킥도 또한 끊임 없이 반복한 트레이닝의 결과라고 한다. 새로운 펠레는 신의 아들이 아닌 계속해서 땀을 흘린 노력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스루패스의 멋진 광경은 그것을 땀의 결정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의 발끝에서 패스가 혹은 슛이 쏘아질 때마다 관중은 일어섰고 상대팀 수비수의 무리는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한 예술작품의 전람회가 플라멩구의 에이스로써 맞이한 81년 토요타컵이었다.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단지 1번의 프리킥과 2번의 패스로 물리쳤다. 자로 잰 듯이 상대 수비수의 머리 위를 지나 뒤로 떨어지는 절묘한 로빙 패스와 막 닫히려는 듯한 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라운드의 스루 패스. 여기에 GK의 펌블을 유도한 프리킥을 포함한 3개의 어시스트로 플라멩구를 세계의 정점에 이끈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긴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단순히 슈퍼 스타의 탄생의 예고편으로써 기억되어야 했었다. 약 반년 후에 시작되는 스페인 월드컵이야 말로 그 무대에 어울렸기에......


 실제로 대회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는 젊은 날의 마라도나의 눈 앞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과시하였다. 대회 최고의 ‘10인 것을 세계에 인정시킨 지쿠가 가는 길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1982년 바로셀로나의 사리아 스태디움. ‘드림팀이라 절찬 받던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교활한 덫에 걸렸다. 파죽지세로 진군해 온 탤런트 군단이 계속해서 이탈리아가 보낸 암살자들의 손에 걸려 쓰러졌다.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무참하게 찢긴 지쿠도 또한 등뒤에 집요하게 붙은 젠티레의 악랄한 파울에 쓰러진 한 사람이었다29. 캐리어의 절정기였던 지쿠는 결승전은커녕 4강전의 그라운드도 밟지 못한 체 떠났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와의 차이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월드컵의 여신에게 계속 미움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플라티니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84년 유럽선수권에서 프랑스를 국제무대에선 처음으로 빅 타이틀로 이끈 것에 비해서 지쿠에게는 대표 레벨에서 자랑할 만한 실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보는 사람에게 꿈을 주는 것이 스타의 진정한 가치라고 한다면 지쿠 만큼이나 소년들의 마음을 흔든 영웅도 없다. 지쿠의 플레이를 보고 자란 소년들은  90년대 축구계를 석권하게 된다.

하나는 20세기 최후의 판타지스타로, 또 하나는 21세기의 슈퍼스타로......

 로베르토 바조와 호나우도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지쿠처럼 되고 싶었다"


Arthur Antunes Coimbra “Zico”

1953 3 3 리오데자네이로 킨치토에서 태어났다. 80년대를 리드한 이상적인 넘버 10.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소년시대의 우상은 펠레가 아닌 플라멩구의 스타 지자였다. 13살 때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 세밀한 프로그램에 의한 육체개조로 신체의 약점을 극복하여 [사이보그]라 불리었다. 플라멩구에 있을 때 브라질 전국 선수권에서 4번 우승. 81년 리베르타토레스컵에서 우승하였고, 같은 해 토요타컵에서 우승하여 플라멩구를 세계 클럽 넘버원으로 이끌었다. 22세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78년 아르헨티나 대회를 시작으로 월드컵엔 3번 출장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FK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지만 그의 대명사는 예술적인 스루 패스였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에 2년간 재적. 일본에서 현역생활의 피리어드를 찍었다.


;Satoshi Hojo


Ps; 외국어 발음은 아무래도 일본글을 번역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영어는 어떻게 때려 맞추겠는데 그 외의 외국어는 좀….)

Ps2;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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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헤딩의 명수


 리뉘스 미헐스는 네덜란드 풋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종반에 그는 [토탈사커]를 세상에 알렸다. 필드 위에 있는 선수는 어떠한 포지션에서나 플레이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연습 일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 날까지 가장 성공한 네덜란드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도 아래서 아약스와 바르셀로나는 70년대에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헐스 또한 3번에 걸쳐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하여 74년 월드컵에서 준우승, 88년에는 유럽 챔피언이 되었으며, 92년에는 유럽 선수권에서 3위가 되었다.

 리뉘스 미헐스는 1928년 2월 9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축구팬인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그를 축구와 연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1958년까지 미헐스는 아약스의 일원으로써 260시합 출장하였으며 포워드였던 그는 122골을 기록했다. 1946년 그는 명문 아약스 1군팀에서 데뷔하게 된다. 상대는 덴하그. 만약 아약스가 이기면 국내 우승이라는 중요한 시합이었다. 미헐스는 후반 5골을 넣어 팀 우승에 커다란 공헌을 한다. 선수시절 그는 정열적이었고, 시합을 앞두곤 힘든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그 대신 정신적인 면으로 부족한 재능을 보충했다.
 선수로써의 그가 가장 뛰어났던 것은 헤딩 기술이었다. 이 헤딩에 관해서는 월드 클라스급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중전에서 밀리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각도가 없는 곳에서도 믿기 힘든 골을 만들어냈다. 대표팀에서 그는 5번 주장을 맡았지만 만성화 된 부상으로 인해 58년 현역에서 은퇴하게 된다.

타협을 하지 않는 유모어리스트

 미헐스는 은퇴 후 곧바로 프로의 코치가 되진 않았다. 그는 우선 스포츠 인스트럭터가 되었다. 이 전문직은 그가 고교생이었을 때부터의 꿈이었다고 한다. 스포츠 인스트럭터로써 그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몇 년간 일한 뒤 다시 축구계로 돌아가게 된다. 62년 암스테르담의 아마츄어팀 JOS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현역시대 자신의 모든 것을 축구에 받쳐 온 그였기에 감독이 되자 선수들 역시 자신과 같이 모든 것을 축구에 받쳐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우수했지만 타이트한 연습 스케줄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굉장히 엄격한 감독이었다.
 규율을 중시하며 조용하고 온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법에 대해서는 타협을 불허하는 강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법]이었던 것이다.

 연습이 스케줄대로 행해지면 문제는 없었지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겨울 아침. 굉장히 추웠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는 눈보라까지 치고 있었다. 연습은 오전에 행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습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온 선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날씨에서는 누구도 밖에서 연습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헐스조차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창을 통해서 밖의 눈보라를 지켜본 후,미헐스는 모습을 감췄다. 몇 분이 지난 뒤 선수 중에 하나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손목시계를 차고 수영 팬티만 입은 미헐스가 자전거를 타고있었다. 미헐스는 외쳤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는가? 자네들은 올 건가 오지 않을 건가?” 눈보라 속에서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메뉴는 런닝 후 눈싸움으로 바뀌었다. 엄하긴 하지만 유모어가 있었다. 그는 팀에 [올바른 분위기]를 가져오는 것이 가능한 남자였다. 선수들은 자주 힘든 피지컬 트레이닝에 불만을 표했지만 미헐스는 그런 연습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재능은 그가 후에 새로운 축구를 도입할 때 굉장한 도움이 된다.
 JOS에서 3년간 미헐스는 팀 메이크에 수완을 발휘하였고 차츰 커다란 야심을 갖게 되어 프로의 감독이 될 결심을 하게 된다.

 1965년 프로감독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자마자 아약스에서 빅 버킹검의 후임으로 취임을 요청받는다. 버킹검은 비극적일 정도로 비참한 시즌 초반의 책임을 지고 해고당했다. 팀은 리그 최하위로 떨어질 지도 모를 상태로 자칫 잘못하면 2부로까지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아약스의 구세주로서 미헐스가 지목되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시즌. 그는 아약스를 강등의 위기서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음 시즌에는 팀을 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프로 감독으로써 실적이 없던 남자가 이루어낸 특필할 만한 성과였지만 그가 항상 축구만을 생각하며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사명감과 정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축구의 본질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 플레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핸드볼에서는 볼을 손으로 감싸고는 키프하는 것이 가능하다. 축구에서도 플레이어는 볼을 키프할 수 있지만 문자그대로 '감쌀'수는 없다. 왜냐하면 손으로 하듯이 발로 볼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축구에 있어서의 모든 놀라움은 볼 키핑에 있다. 한계가 있을 터인 발로 마치 손으로 볼을 취급하는 것마냥 하는 것에 사람들은 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듯이 도전하는 것이다.”

토탈 풋볼의 탄생까지

크라이프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건 아약스에서건 '토탈 풋볼'의 키맨이었다.


 미헐스는 아약스에 있어서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선수였던 때 아약스의 전통인 공격적이고 매력적인 축구를 알고 있던 미헐스는 이 전통적인 축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철학을 응용해서 그 맛을 더해 주었다. 그가 팀에게 요구했던 것은 공격적인 프로집단이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팀이 아마츄어였던 네덜란드가 프로화 되기 시작했던 것은 60년대 초반이었다. 미헐스는 프로페셔널한 축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진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캐리어를 시작한 첫 팀이 아약스였던 것이다.

 미헐스에 의하면 네덜란드 선수들의 기본은 공격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고로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것이 아약스였던 것이다. 그가 만든 철학은 하나의 기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을 빼앗았으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적의 골까지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선수들에게 공격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볼을 키프하고 게임을 지배하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축구에서 긴 시간 볼을 키프하는 것은 어렵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미헐스는 “볼을 빼앗겼을 때의 대응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볼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베스트라는 것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재빨리 볼을 돌리도록 요구했다. 볼을 돌리면서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선수들은 프리인 상태로 패스를 받을 수 있도록 자주 포지션 체인지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과는 반대로 볼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이론'상 골에 직결되는 패스코스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미헐스는 항상 1명의 키 플레이어(플레이메이커)를 의지하게 된다. 아약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동안, 미헐스는 자신의 철학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토탈 싸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스템에서는 유능한 선수들이 시합 중에 어떠한 국면에서건 필요한 상황에 따라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된다. 누구나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디펜더는 포워드가 되었고 포워드는 디펜더가 되었다. 당초 이 아이디어는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미헐스는 크라위프, 니스켄스, 카이저, 슈르비아, 바소비치라는 우수한 선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탁월한 기술과 올라운드 플레이어이며 또한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미헐스는 선수 전원이 기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동등한 레벨이 될 수 있게 팀 메이크에 정열을 쏟았다. 그 중 가장 중시했던 것은 피지컬 컨디션이었다. 그리고 연습의 기본은 런닝과 전술연습이었다. 선수들의 기술이 굉장히 뛰어났기에 미헐스가 바라는 축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축구는 굉장히 공격적이며 매력적이었기에 네덜란드 축구의 대명사가 된다. 아약스에서는 요한 크라위프가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필드상에서 팀을 이끌고 라인을 설정할 수 있었다. 팀은 윤활유를 충분히 바른 기계와 같이 움직여 이 팀을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아약스와의 결별

 미헐스의 연출에 의한 토탈 싸커는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낸다.
 1967년 아약스는 네덜란드 챔피언이 되었고 컵 대회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1968년 팀은 또다시 국내 리그를 제패하였지만 다음 시즌 유럽 챔피언스 컵에서는 결승전에 진출하여 AC 밀란에게 1-4로 패한다. 이 패배로 미헐스는 보다 큰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수준에 아직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몇 명의 선수를 내치고 자신의 철학에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젊은 선수들을 기용한다. 이것은 현명한 결단이었다. 2년 후 챔피언스 컵에서 아약스가 우승을 이루었기에 이 결단이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클럽 축구의 최고봉을 이루기 위하여 미헐스는 바로셀로나로 떠나게 된다.
 스페인 축구계는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한지 얼마 지나지 않던 때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이러한 배경도 있었다. 미헐스의 완고하며 독단적으로도 보여지는 지도방식에 선수들의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헐스에 대해여 크라위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이 그에게 배운 것은 전술과 개인의 규율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프로페셔널이 되었다. 그러나 아약스에서 종지부를 찍을 즈음에는 미헐스가 더 이상 독재자로 있을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프로였기에 개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헐스 앞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용납 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법]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찬성하지 않는 것, 그러한 태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크라위프가 독재자라고 표현한 것은 틀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것이 곧바로 미헐스의 성격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토탈 싸커를 플레이하기 위해서 선수는 정해진 법에 따라서 민첩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드상에서 서로 포지션을 바꾸어 가며 언제나 역할을 스위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패턴으로 플레이해야 하는 가를 확실히 파악한 잘 조직된 집단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선수에게 막대한 운동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완벽한 피지컬 컨디션이 요구되었다. 규율과 힘든 연습에 의해서만 이것이 가능했기에 미헐스는 선수들에게 규율과 전술 스킬을 겸비한 하드 워커로 플레이 할 것을 요구했다.

 아약스에서 유럽 챔피언이 되었기에 미헐스의 이름은 축구 역사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7년 동안 그는 팀을 유럽 최고의 존재로 이끌며 공격적이고 매력 넘치는 획기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세계에 놀라움을 준 [오렌지 머신]

월드컵 1974에서 시합을 지켜보는 미헐스.

 바로셀로나에서도 미헐스는 토탈사커의 컨셉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는 바로셀로나의 키플레이어로서 크라위프, 니스켄스와 계약했다. 그리고 1974년 그 때까지 2시즌 3위, 2위였던 팀을 스페인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바로셀로나의 감독을 맡으면서 미헐스는 네덜란드 축구협회로부터 74년 월드컵 서독대회를 대비하여 대표감독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 받는다. 미헐스는 이것을 받아들여 네덜란드 대표팀에 토탈사커의 전술을 적용할 것을 결심한다. 그가 결심한 주된 이유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많은 선수가 3년전 아약스에서 챔피언스 컵을 제패한 멤버들이었기 때문이다.

 월드컵까지의 준비기간은 짧았기에 토탈사커를 침투시키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만다. 3년전 아약스의 멤버가 네덜란드 대표의 베이스를 형성하였고 그 밖의 선수들을 여기에 조립해 넣었다. 아약스에서처럼 미헐스는 키플레이어로서 크라위프를 기용했다. 크라위프는 라인을 전후로 움직여 조직적인 디펜스를 지시했다. 거기에 맞추어 선수들은 부지런히 포지션 체인지를 행했다. 더구나 이 팀이 가장 주목받은 것은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는 빠른 속도의 볼 돌리기였다. 이 생동감 넘치는 축구 스타일은 세계의 축구 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었기에 세계에서 절찬이 쏟아졌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네덜란드는 잘 조직된 플레이 스타일로 [오렌지 머신]이라 칭해졌다. 미헐스는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토탈사커의 컨셉에 맞게 그들을 조정해 갔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공격적이고 개방적이며 용감한 게임을 선사해 주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팀이며 그것을 대회기간 중 증명했다. 물론 그들은 결승에서 서독에 1-2로 져버렸지만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헐스와 그 팀은 세계 축구에 역사적인 대전환을 가져왔다.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네덜란드 대표팀이지만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미헐스의 수완이 필요했다.


미헐스의 변신과 유럽선수권 우승

드디어 유로1988에서 네덜라드는 빅 타이틀을 획득.

 1971년의 아약스, 74년의 네덜란드 대표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헐스는 엄격하며 무자비에 가깝다 생각되는 태도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타이트한 스케줄과 규율을 강조했기에 [장군]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또한 [스핑크스]라는 닉네임도 붙게 되는데, 이것은 연습이나 시합 중에 거의 말하지 않았고 미디어에게도 또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완고하며 가까이 다가가기엔 어려운 인간 - 그것이 미헐스의 인상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아약스와 바로셀로나의 감독을 계속하며 성공가도를 질주한다. 토탈사커의 컨셉은 널리 퍼져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것을 플레이하기에 최고의 선수들은 네덜란드 선수들이었다.

 수년이 지나자 미헐스는 다른 사람의 주장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시작했다. 1986년 미헐스는 2년 후의 유럽선수권에 대비하여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리뉘스 미헐스를 보게 되었다. 기자들에게도 개방적이 되었고 선수들 또한 팀을 하나로 모으는 그의 방식을 사랑했다. 88년팀의 키플레이어인 뤼트 휠리트는 미헐스의 방식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팀의 정신적 지주가 미헐스였다. 정상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을 그는 숙지하고 있다. 그는 정상에 서기 위하여 우리들을 준비시켰으며 동시에 자유도 주었다. 모든 것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행해 지고 있다. 그는 [자네들의 플레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좀 더 틀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납득시켰다. 그것은 투쟁심이다. 투쟁함으로써 결투에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결투에 이김으로써 시합에 이길 수가 있다.”

 네덜란드가 해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결승전에서 싸운 것은 74년에 패배한 뒤로 숙명의 라이벌이 된 서독이었다. 74년의 패배를 잊기 위해서도 네덜란드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자 했다. 그리고 긴박했던 시합의 결과 2-1로 서독을 이겼다. 반 바스텐이 결승 골을 넣었을 때 미헐스조차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것이 미헐스의 감독으로써의 캐리어의 하일라이트일 것이다. 이 때 그는 자신이 [굿 가이]인 것을 미디어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가 톱 팀의 감독으로써 최후의 모습을 나타난 것은 1992년 유럽선수권 스웨덴 대회였다. 그는 다시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지만 팀은 PK전 끝에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것을 끝으로 미헐스는 은퇴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그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최고의 네덜란드 감독으로 존경받고 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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