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리면서 오른발 인사이드 킥. 정확히 찬 볼이 골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모든 것은 계산대로였을 터였다.
멕시코의 과다라하라의 하리스코 스태디움.
프랑스와의 8강 전은 20분 남은 상황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스코어는 1-1. 브라질은 PK의 찬스를 얻게 된다. 킥커는 지쿠. 그라운드에 들어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 잡은 볼을 한번의 스루패스로 브랑코에게 연결했고 브랑코가 태클에 쓰러졌다. PK. 자신이 만들어낸 기회를 자신의 결정짓는다 - 그것은 누구나가 생각했던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반전을 거듭하며 수정되었다. 계산대로 날아간 볼이 GK 바츠의 일생일대의 세이브에 의해 막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치며 힘없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은 프로에 들어온 이래 PK의 달인이 범한 단지 세번째의 실축이었다.
이리하여 브라질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승부차기 끝에 한 번은 쓰러트렸던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33살.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 있던 늙은 영웅은 이 시합을 끝으로 카나리아의 셔츠를 벗게 된다. 이 결과는 어떻게 보면 그의 사커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신(神)"이라 추앙 받는 선수이지만 세계 축구 역사에서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만은 않다. 동시대의 아르헨티나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프랑스의 장군 미셀 플라티니에게 쏟아지는 절찬에 비하면 지쿠는 변변치 못하다. 그러나 마라도나, 플라티니와 지쿠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대표팀 주장을 맡은 수를 비교해 보면 91번의 주장을 맡은 마라도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71번의 주장을 맡은 지쿠는 72번의 플라티니에 불과 한번이 모자란 정도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나 프랑스와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쟁이 심한 브라질에서 11년간이나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왔던 것이다.
무시하지 못할 것은 골을 넣은 수에 있다. 대표에서는 펠레에 이어 역대 2위인 48골을 기록(2000년 1월 기준..지금은 아마 호나우도가 넘어섰죠?). 플라티니가 41골, 마라도나는 34골이므로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써 그의 득점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득점력의 높음으로 따지자면, 이러한 기록도 있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로 이적한 1년째인 83-84시즌에 24시합에서 19골을 기록. 득점왕에 오른 플라티니는 30시합에서 20골. 즉 1시합 평균 득점률에서는 플라티니를 능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리그를 제패한 유벤투스에서 주위에 뛰어난 선수들에게 도움을 받은 플라티니와는 달리 겨우 세리에B 강등을 면한 약소 클럽에서의 골 러쉬였던 것이다. 플라티니를 제치고 리그 MVP의 수상한 것은 그러한 가치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등번호"10"번으로서 라이벌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면서도 충분한 평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빅 타이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쿠는 비운의 스타였다.
본명 알투르 안트네스 코인브라. 결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젯거, 에두(한때 일본 대표팀 테크니컬 디렉터가 된 사람 - 역자주) 두 형이 프로축구 선수였을 정도로 혈통은 좋았다. 어렸을 적부터 두 형을 능가하는 재능은 인정받고 있었으나 주위사람들을 걱정케 하는 것은 빈약한 몸이었다. [사이보그]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 육체개조에 들어간 것은 그런 빈약한 몸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하자 마자 피지컬 코치와 정형외과 의사들로 구성된 "지쿠 개조실"에 의해 4년에 걸친 육체개조가 시작되었다. 지쿠는 자신 전용의 메뉴에 따라 기절할 정도로 힘든 근력 트레이닝을 담담히 행하면서 빈약했던 몸은 어느새 눈에 뜨일 정도로 튼튼하게 변해 갔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운동 기구와 맞대고 트레이닝을 쌓아가면서도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으며 보냈다고 한다. 근력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은 치아 교정에까지 이르러 얼굴의 응어리까지 없앴다. 괴롭고 힘든 개조계획이 끝날 즈음에는 소년이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콤플렉스는 전부 없어졌다.
20살에 레귤러가 되면서부터 캐리어는 곧 전설이 되었다. 2년 후인 75년에는 플레멩구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대표팀의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우루과이와의 A매치에서 국가대표 데뷔를 했는데 그 날이 그의 22번째 생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하얀 펠레’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던 ‘제2의 펠레’에 대한 환상이 이제서야 마침표가 찍히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펠레와 같은 화려하고 트릭키한 플레이도, 놀랄만한 스피드도 아니었다. 지쿠 자신은 그것을 ‘방향감각’이라고 했다. 자서전에서 지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그라운드의 어디에 있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아래를 쳐다보고 있어도 내가 원하는 장소에 정확한 패스를 하고 또한 슛을 쏠 수가 있었다.
그것이 선천적인 재능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기술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프리킥도 또한 끊임 없이 반복한 트레이닝의 결과라고 한다. 새로운 펠레는 신의 아들이 아닌 계속해서 땀을 흘린 노력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스루패스의 멋진 광경은 그것을 땀의 결정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의 발끝에서 패스가 혹은 슛이 쏘아질 때마다 관중은 일어섰고 상대팀 수비수의 무리는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한 예술작품의 전람회가 플라멩구의 에이스로써 맞이한 81년 토요타컵이었다.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단지 1번의 프리킥과 2번의 패스로 물리쳤다. 자로 잰 듯이 상대 수비수의 머리 위를 지나 뒤로 떨어지는 절묘한 로빙 패스와 막 닫히려는 듯한 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라운드의 스루 패스. 여기에 GK의 펌블을 유도한 프리킥을 포함한 3개의 어시스트로 플라멩구를 세계의 정점에 이끈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긴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단순히 슈퍼 스타의 탄생의 예고편으로써 기억되어야 했었다. 약 반년 후에 시작되는 스페인 월드컵이야 말로 그 무대에 어울렸기에......
실제로 대회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는 젊은 날의 마라도나의 눈 앞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과시하였다. 대회 최고의 ‘10번’인 것을 세계에 인정시킨 지쿠가 가는 길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1982년 바로셀로나의 사리아 스태디움. ‘드림팀’이라 절찬 받던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교활한 덫에 걸렸다. 파죽지세로 진군해 온 탤런트 군단이 계속해서 이탈리아가 보낸 암살자들의 손에 걸려 쓰러졌다.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무참하게 찢긴 지쿠도 또한 등뒤에 집요하게 붙은 젠티레의 악랄한 파울에 쓰러진 한 사람이었다. 29세. 캐리어의 절정기였던 지쿠는 결승전은커녕 4강전의 그라운드도 밟지 못한 체 떠났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와의 차이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월드컵의 여신에게 계속 미움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플라티니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84년 유럽선수권에서 프랑스를 국제무대에선 처음으로 빅 타이틀로 이끈 것에 비해서 지쿠에게는 대표 레벨에서 자랑할 만한 실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보는 사람에게 꿈을 주는 것이 스타의 진정한 가치라고 한다면 지쿠 만큼이나 소년들의 마음을 흔든 영웅도 없다. 지쿠의 플레이를 보고 자란 소년들은 곧 90년대 축구계를 석권하게 된다.
하나는 20세기 최후의 판타지스타로, 또 하나는 21세기의 슈퍼스타로......
로베르토 바조와 호나우도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지쿠처럼 되고 싶었다"
Arthur Antunes Coimbra “Zico”
글;Satoshi Hojo
Ps; 외국어 발음은 아무래도 일본글을 번역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영어는 어떻게 때려 맞추겠는데 그 외의 외국어는 좀….)
Ps2;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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