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헤딩의 명수


 리뉘스 미헐스는 네덜란드 풋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종반에 그는 [토탈사커]를 세상에 알렸다. 필드 위에 있는 선수는 어떠한 포지션에서나 플레이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연습 일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 날까지 가장 성공한 네덜란드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도 아래서 아약스와 바르셀로나는 70년대에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헐스 또한 3번에 걸쳐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하여 74년 월드컵에서 준우승, 88년에는 유럽 챔피언이 되었으며, 92년에는 유럽 선수권에서 3위가 되었다.

 리뉘스 미헐스는 1928년 2월 9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축구팬인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그를 축구와 연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1958년까지 미헐스는 아약스의 일원으로써 260시합 출장하였으며 포워드였던 그는 122골을 기록했다. 1946년 그는 명문 아약스 1군팀에서 데뷔하게 된다. 상대는 덴하그. 만약 아약스가 이기면 국내 우승이라는 중요한 시합이었다. 미헐스는 후반 5골을 넣어 팀 우승에 커다란 공헌을 한다. 선수시절 그는 정열적이었고, 시합을 앞두곤 힘든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그 대신 정신적인 면으로 부족한 재능을 보충했다.
 선수로써의 그가 가장 뛰어났던 것은 헤딩 기술이었다. 이 헤딩에 관해서는 월드 클라스급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중전에서 밀리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각도가 없는 곳에서도 믿기 힘든 골을 만들어냈다. 대표팀에서 그는 5번 주장을 맡았지만 만성화 된 부상으로 인해 58년 현역에서 은퇴하게 된다.

타협을 하지 않는 유모어리스트

 미헐스는 은퇴 후 곧바로 프로의 코치가 되진 않았다. 그는 우선 스포츠 인스트럭터가 되었다. 이 전문직은 그가 고교생이었을 때부터의 꿈이었다고 한다. 스포츠 인스트럭터로써 그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몇 년간 일한 뒤 다시 축구계로 돌아가게 된다. 62년 암스테르담의 아마츄어팀 JOS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현역시대 자신의 모든 것을 축구에 받쳐 온 그였기에 감독이 되자 선수들 역시 자신과 같이 모든 것을 축구에 받쳐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우수했지만 타이트한 연습 스케줄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굉장히 엄격한 감독이었다.
 규율을 중시하며 조용하고 온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법에 대해서는 타협을 불허하는 강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법]이었던 것이다.

 연습이 스케줄대로 행해지면 문제는 없었지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겨울 아침. 굉장히 추웠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는 눈보라까지 치고 있었다. 연습은 오전에 행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습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온 선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날씨에서는 누구도 밖에서 연습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헐스조차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창을 통해서 밖의 눈보라를 지켜본 후,미헐스는 모습을 감췄다. 몇 분이 지난 뒤 선수 중에 하나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손목시계를 차고 수영 팬티만 입은 미헐스가 자전거를 타고있었다. 미헐스는 외쳤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는가? 자네들은 올 건가 오지 않을 건가?” 눈보라 속에서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메뉴는 런닝 후 눈싸움으로 바뀌었다. 엄하긴 하지만 유모어가 있었다. 그는 팀에 [올바른 분위기]를 가져오는 것이 가능한 남자였다. 선수들은 자주 힘든 피지컬 트레이닝에 불만을 표했지만 미헐스는 그런 연습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재능은 그가 후에 새로운 축구를 도입할 때 굉장한 도움이 된다.
 JOS에서 3년간 미헐스는 팀 메이크에 수완을 발휘하였고 차츰 커다란 야심을 갖게 되어 프로의 감독이 될 결심을 하게 된다.

 1965년 프로감독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자마자 아약스에서 빅 버킹검의 후임으로 취임을 요청받는다. 버킹검은 비극적일 정도로 비참한 시즌 초반의 책임을 지고 해고당했다. 팀은 리그 최하위로 떨어질 지도 모를 상태로 자칫 잘못하면 2부로까지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아약스의 구세주로서 미헐스가 지목되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시즌. 그는 아약스를 강등의 위기서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음 시즌에는 팀을 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프로 감독으로써 실적이 없던 남자가 이루어낸 특필할 만한 성과였지만 그가 항상 축구만을 생각하며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사명감과 정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축구의 본질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 플레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핸드볼에서는 볼을 손으로 감싸고는 키프하는 것이 가능하다. 축구에서도 플레이어는 볼을 키프할 수 있지만 문자그대로 '감쌀'수는 없다. 왜냐하면 손으로 하듯이 발로 볼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축구에 있어서의 모든 놀라움은 볼 키핑에 있다. 한계가 있을 터인 발로 마치 손으로 볼을 취급하는 것마냥 하는 것에 사람들은 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듯이 도전하는 것이다.”

토탈 풋볼의 탄생까지

크라이프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건 아약스에서건 '토탈 풋볼'의 키맨이었다.


 미헐스는 아약스에 있어서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선수였던 때 아약스의 전통인 공격적이고 매력적인 축구를 알고 있던 미헐스는 이 전통적인 축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철학을 응용해서 그 맛을 더해 주었다. 그가 팀에게 요구했던 것은 공격적인 프로집단이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팀이 아마츄어였던 네덜란드가 프로화 되기 시작했던 것은 60년대 초반이었다. 미헐스는 프로페셔널한 축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진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캐리어를 시작한 첫 팀이 아약스였던 것이다.

 미헐스에 의하면 네덜란드 선수들의 기본은 공격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고로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것이 아약스였던 것이다. 그가 만든 철학은 하나의 기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을 빼앗았으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적의 골까지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선수들에게 공격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볼을 키프하고 게임을 지배하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축구에서 긴 시간 볼을 키프하는 것은 어렵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미헐스는 “볼을 빼앗겼을 때의 대응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볼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베스트라는 것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재빨리 볼을 돌리도록 요구했다. 볼을 돌리면서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선수들은 프리인 상태로 패스를 받을 수 있도록 자주 포지션 체인지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과는 반대로 볼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이론'상 골에 직결되는 패스코스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미헐스는 항상 1명의 키 플레이어(플레이메이커)를 의지하게 된다. 아약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동안, 미헐스는 자신의 철학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토탈 싸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스템에서는 유능한 선수들이 시합 중에 어떠한 국면에서건 필요한 상황에 따라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된다. 누구나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디펜더는 포워드가 되었고 포워드는 디펜더가 되었다. 당초 이 아이디어는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미헐스는 크라위프, 니스켄스, 카이저, 슈르비아, 바소비치라는 우수한 선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탁월한 기술과 올라운드 플레이어이며 또한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미헐스는 선수 전원이 기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동등한 레벨이 될 수 있게 팀 메이크에 정열을 쏟았다. 그 중 가장 중시했던 것은 피지컬 컨디션이었다. 그리고 연습의 기본은 런닝과 전술연습이었다. 선수들의 기술이 굉장히 뛰어났기에 미헐스가 바라는 축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축구는 굉장히 공격적이며 매력적이었기에 네덜란드 축구의 대명사가 된다. 아약스에서는 요한 크라위프가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필드상에서 팀을 이끌고 라인을 설정할 수 있었다. 팀은 윤활유를 충분히 바른 기계와 같이 움직여 이 팀을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아약스와의 결별

 미헐스의 연출에 의한 토탈 싸커는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낸다.
 1967년 아약스는 네덜란드 챔피언이 되었고 컵 대회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1968년 팀은 또다시 국내 리그를 제패하였지만 다음 시즌 유럽 챔피언스 컵에서는 결승전에 진출하여 AC 밀란에게 1-4로 패한다. 이 패배로 미헐스는 보다 큰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수준에 아직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몇 명의 선수를 내치고 자신의 철학에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젊은 선수들을 기용한다. 이것은 현명한 결단이었다. 2년 후 챔피언스 컵에서 아약스가 우승을 이루었기에 이 결단이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클럽 축구의 최고봉을 이루기 위하여 미헐스는 바로셀로나로 떠나게 된다.
 스페인 축구계는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한지 얼마 지나지 않던 때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이러한 배경도 있었다. 미헐스의 완고하며 독단적으로도 보여지는 지도방식에 선수들의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헐스에 대해여 크라위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이 그에게 배운 것은 전술과 개인의 규율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프로페셔널이 되었다. 그러나 아약스에서 종지부를 찍을 즈음에는 미헐스가 더 이상 독재자로 있을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프로였기에 개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헐스 앞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용납 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법]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찬성하지 않는 것, 그러한 태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크라위프가 독재자라고 표현한 것은 틀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것이 곧바로 미헐스의 성격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토탈 싸커를 플레이하기 위해서 선수는 정해진 법에 따라서 민첩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드상에서 서로 포지션을 바꾸어 가며 언제나 역할을 스위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패턴으로 플레이해야 하는 가를 확실히 파악한 잘 조직된 집단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선수에게 막대한 운동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완벽한 피지컬 컨디션이 요구되었다. 규율과 힘든 연습에 의해서만 이것이 가능했기에 미헐스는 선수들에게 규율과 전술 스킬을 겸비한 하드 워커로 플레이 할 것을 요구했다.

 아약스에서 유럽 챔피언이 되었기에 미헐스의 이름은 축구 역사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7년 동안 그는 팀을 유럽 최고의 존재로 이끌며 공격적이고 매력 넘치는 획기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세계에 놀라움을 준 [오렌지 머신]

월드컵 1974에서 시합을 지켜보는 미헐스.

 바로셀로나에서도 미헐스는 토탈사커의 컨셉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는 바로셀로나의 키플레이어로서 크라위프, 니스켄스와 계약했다. 그리고 1974년 그 때까지 2시즌 3위, 2위였던 팀을 스페인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바로셀로나의 감독을 맡으면서 미헐스는 네덜란드 축구협회로부터 74년 월드컵 서독대회를 대비하여 대표감독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 받는다. 미헐스는 이것을 받아들여 네덜란드 대표팀에 토탈사커의 전술을 적용할 것을 결심한다. 그가 결심한 주된 이유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많은 선수가 3년전 아약스에서 챔피언스 컵을 제패한 멤버들이었기 때문이다.

 월드컵까지의 준비기간은 짧았기에 토탈사커를 침투시키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만다. 3년전 아약스의 멤버가 네덜란드 대표의 베이스를 형성하였고 그 밖의 선수들을 여기에 조립해 넣었다. 아약스에서처럼 미헐스는 키플레이어로서 크라위프를 기용했다. 크라위프는 라인을 전후로 움직여 조직적인 디펜스를 지시했다. 거기에 맞추어 선수들은 부지런히 포지션 체인지를 행했다. 더구나 이 팀이 가장 주목받은 것은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는 빠른 속도의 볼 돌리기였다. 이 생동감 넘치는 축구 스타일은 세계의 축구 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었기에 세계에서 절찬이 쏟아졌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네덜란드는 잘 조직된 플레이 스타일로 [오렌지 머신]이라 칭해졌다. 미헐스는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토탈사커의 컨셉에 맞게 그들을 조정해 갔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공격적이고 개방적이며 용감한 게임을 선사해 주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팀이며 그것을 대회기간 중 증명했다. 물론 그들은 결승에서 서독에 1-2로 져버렸지만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헐스와 그 팀은 세계 축구에 역사적인 대전환을 가져왔다.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네덜란드 대표팀이지만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미헐스의 수완이 필요했다.


미헐스의 변신과 유럽선수권 우승

드디어 유로1988에서 네덜라드는 빅 타이틀을 획득.

 1971년의 아약스, 74년의 네덜란드 대표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헐스는 엄격하며 무자비에 가깝다 생각되는 태도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타이트한 스케줄과 규율을 강조했기에 [장군]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또한 [스핑크스]라는 닉네임도 붙게 되는데, 이것은 연습이나 시합 중에 거의 말하지 않았고 미디어에게도 또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완고하며 가까이 다가가기엔 어려운 인간 - 그것이 미헐스의 인상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아약스와 바로셀로나의 감독을 계속하며 성공가도를 질주한다. 토탈사커의 컨셉은 널리 퍼져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것을 플레이하기에 최고의 선수들은 네덜란드 선수들이었다.

 수년이 지나자 미헐스는 다른 사람의 주장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시작했다. 1986년 미헐스는 2년 후의 유럽선수권에 대비하여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리뉘스 미헐스를 보게 되었다. 기자들에게도 개방적이 되었고 선수들 또한 팀을 하나로 모으는 그의 방식을 사랑했다. 88년팀의 키플레이어인 뤼트 휠리트는 미헐스의 방식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팀의 정신적 지주가 미헐스였다. 정상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을 그는 숙지하고 있다. 그는 정상에 서기 위하여 우리들을 준비시켰으며 동시에 자유도 주었다. 모든 것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행해 지고 있다. 그는 [자네들의 플레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좀 더 틀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납득시켰다. 그것은 투쟁심이다. 투쟁함으로써 결투에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결투에 이김으로써 시합에 이길 수가 있다.”

 네덜란드가 해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결승전에서 싸운 것은 74년에 패배한 뒤로 숙명의 라이벌이 된 서독이었다. 74년의 패배를 잊기 위해서도 네덜란드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자 했다. 그리고 긴박했던 시합의 결과 2-1로 서독을 이겼다. 반 바스텐이 결승 골을 넣었을 때 미헐스조차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것이 미헐스의 감독으로써의 캐리어의 하일라이트일 것이다. 이 때 그는 자신이 [굿 가이]인 것을 미디어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가 톱 팀의 감독으로써 최후의 모습을 나타난 것은 1992년 유럽선수권 스웨덴 대회였다. 그는 다시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지만 팀은 PK전 끝에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것을 끝으로 미헐스는 은퇴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그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최고의 네덜란드 감독으로 존경받고 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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