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단순한 심벌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였다. 스파이크를 벗은 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프랑코 바레시는 여전히 'AC 밀란의 혼()'인 것이다.

 () 카피탄(캡틴)은 여전히 롯소네로(이탈리아어로 적과 흑. 밀란의 애칭)와의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클럽의 암흑기에도 바레시는 결코 밀란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결코 버리질 않았다.

 바레시에게는 좀 더 편한 길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을 선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운명을 밀란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도박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밀란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하늘이 내려준 천직으로 선택한 것이다.

 

 바레시는 브레시아 교외의 작은 노동자의 마을 트라바리아토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유니온 스포르티바 오라토리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그가 밀란과의 험난 모험을 시작한 것은 1974 7월이었다.


 14살의 여름, 그는 아탈란타의 입단테스트를 받았다. 신장 겨우 164Cm. 어디에 있어도 작은 몸집인 프랑키노는 말랐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이 되었다. 그 후 한 살 위인 형 벳페(쥬세페의 약칭)가 있던 인테르나치오날레에 소개받았지만 여기서도 역시 거부 당했다. 그때 바레시에게 오라고 한 곳이 인테르나치오날레와 같이 밀라노를 본거지를 하고 있던 밀란이었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와 지안니 리베라(Gianni Rivera)가 보는 앞에서 처음엔 풀백으로, 다음에는 리베로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결과 150만 리라, 거기에 키가 1Cm 클 때마다 100만 리라를 추가하는 조건으로 밀란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20살이 될 즈음에는 178Cm가 되어 있었다.

 

 바레시는 항상 풍부한 개성과 더불어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인생을 통해서 그가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인 레지나를 잃는 비극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밀란에 입단한 후에도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리하여 귀중한 조언자인 누나 루치아가 모친 대신 그를 키웠다.

 그는 밀란의 프리마베라(주니어 유스팀)에서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클럽은 월 2만 리라의 급료로 계약을 맺기로 결정한다. 인생의 분기점은 니리스 리드홀름의 감독 취임과 찾아 왔다. 78년 이 스웨덴 감독이 아직 18살도 안 된 바레시를 탑 팁에 데뷔시킨 것이다.


 바레시는 그라운드에 있어서의 자신감과 침착성을 주위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같은 대선배이자 스타에게 볼을 건네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였다.

 주목을 모은 그는 78-79시즌 밀란의 10번째 스쿠데토 주역의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축구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실망을 맛보게 된다. 불법 도박 스캔들로 인하여 밀란이 세리에 B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1980년 바레시는 낮은 수준의 리그로 내려가지만 다음해 곧바로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밀란의 부진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진 않았다.

 1982년 AC밀란은 세리에 A 잔류에 실패한다. 그 시점에서 다른 팀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바레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팬들은 팀과 고난을 함께 하려 한 그의 선택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바레시는 또래 선수들 보다 빨리 캡틴이 되어 있었다. 클럽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금고는 비어있었다. 선수 획득도 어떻게 절약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었다. 바레시에게는 삼프토리아에서 매력적인 오퍼가 있었으나, 거부했다. 인테르도 그를 원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이러한 일들로 서포터는 더욱더 그를 진정한 우상으로 받들게 되었다. 팀을 위한 좋은 기회를 진중히 기다리고 있던 바레시의 판단은 옳았다. 모든 일을 큰 스케일로 생각하는 사업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밀란의 만회극이 시작되었다.

 87, 이 신회장은 새로운 선수를 획득하여 팀을 강화하고 곧이어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명장 아리고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고참도 새로 온 선수들도 신감독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으나 좀 지나자 팀은 강해졌다.

 뤼트 휠리트와 마르코 판 바스턴이라는 네덜란드 콤비를 얻어 밀란은 다시 스쿠데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챔피언즈 컵과 토요타 컵(대륙간 컵)에서도 승리하여 힘들었던 모험의 여정을 끝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바레시는 아주리(대표의 애칭)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말수가 적긴 하였지만 한번 말한 것은 굉장히 명료했다.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콘택트면 충분했다. 소리치지 않아도 그의 존재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동료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그라운드에 한 번도 서진 못했지만 이탈리아는 우승했으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91년 밀란에 있어서의 [사키의 시대]는 끝났지만 바레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파비오 카펠로 지휘하에서 존재감을 더해 갔다.

 4개의 스쿠데토를 획득하였고 챔피언즈 컵을 제패했으며 여전히 그라운드 위에서는 가장 뛰어난 선수로 계속 존재했다. 사키는 언제나 바레시를 대표팀에 있길 원했으나 바레시는 1994 9월 아주리의 셔츠를 벗었다.


 그 수개월 전의 여름, 그는 미국 월드컵 초반 노르웨이전에서 다친 무릎을 20일간에 걸쳐 회복하여 브라질과의 결승전에 겨우 출장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악몽을 보게 된다. 승부차기에서 통한의 킥 미스. 세계의 정점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가 흘린 눈물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후도 밀란에서 플레이를 계속한 바레시는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마크할 수 없을 듯한 선수가 나타났을 때 나는 은퇴할 것이다."

 97년 4월 6. 밀란은 스타디오 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1-6으로 대패했다. 그 시합에서 그는 눈 앞을 화살과 같이 빨리 달리는 크리스챤 비에리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필시 커리어의 막을 내릴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바레시는 97 6월에 현역에서 은퇴를 표명한다. 클럽의 회장인 베를루스코니는 그가 달고 있던 [등번호 6]을 영구 결번으로 정했다. 그리고 뛰어났던 커리어의 포상으로 클럽 부회장에 임명했다.


Franco Baresi

1960 5 8. 북이탈리아의의 트라바리아토 태생. 근대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리베로.

14세때 클럽에 들어가서 37세에 스파이크를 벗을 때까지 커리어 전부를 AC밀란에서 보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우승한 이탈리아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출장하지는 못했다. 세계적으로 평가를 높인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귀재(鬼才)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밀란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 수많은 타이틀을 손 안에 넣었다. 절묘한 수비 라인 제어와 탁월한 수싸움으로 상대 선수를 수비망에 걸리게 하는 디펜스는 예술의 영역. 개성파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발롱도르에 선출되지 못한 것은 운이 없었을 뿐이며 이탈리아 대표에서도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에서 커리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면서도 승부차기에서 패퇴. 그런 만큼 [이탈리아의 바레시]보다는 [밀란의 바레시]라는 인상이 보다 강하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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