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60425-2.html
저자: 스즈이 토모히코

 가난한 생활.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축구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볼을 차고, 꿈을 품었다. 때문에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헝그리하며 터프하다고 한다. 지금의 일본과 비교하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일이나 잉글랜드와 같은 유럽 국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하여도 원래부터 축구에 대한 애정이 틀리다. 부모와 자식이 인생을 걸고 있으니까. “가족을 남미에서 빼내오고 싶다.” 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남미에서도 예외는 있다.

 “처음은 공부가 우선이었다. 그 다음이 축구를 하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야레알의 디에고 포를란이다. 금발의 우루과이 선수는 갑부집 아들이었던 것일까? 유치원 때부터 공부가 우선시되었던 포를란은 지금도 5개국어를 구사한다. 모국어인 스페인어에 더해서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영어. 대학 준비코스까지 나아갔다고 하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축구는 우루과이의 명문 페냐롤에서 스타트했다. 코치를 하고 있던 부친은 페냐롤에서 리베르타토레스 컵이나 토요타 컵(1966년)을 제패하고, 브라질로 건너가 상 파울로에서도 우승했을 정도인 경력의 소유자. 더구나 부친 파블로 포를란은 문디아리스타이기도 하였다. 1966, 1974년 두 번 우루과이 대표로써, 월드컵에 출장했다. 그렇다. DNA는 확실히 계승되어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포를란은 이외인 일면이 아직도 있다.

 “어렸을 때는 주말마다, 형의 시합을 보러 아버지와 함께 간 기억은 있지만, 그 때는 축구보다는 테니스에 인생을 걸었던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보리스 베커 스타일에 빠져 16살이 될 때까지 테니스와 축구를 함께 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결단을 해야만 했던 포를란이다보니 테니스 실력은 지금도 프로급이라고 하니 굉장할 따름이다.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것이 18살 때였다. 인디펜디엔테와 계약을 맺은 포를란은 유스 팀에서 플레이 했지만 곧바로 1부 팀의 부름을 받았다. 인디펜디엔테에서는 포를란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도 굉장히 충실한 시즌이었던 만큼 그 때의 동료였던 가브리엘 밀리토(사라고사), 캄비아소(인테르)들과는 지금도 친한 친구라고 한다.

 4년 후, 포를란은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는데 계약을 맺기 직전까지 퍼거슨에게서 하루에 3번이나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의 포를란은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출장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뿐으로, 3시즌에서 넣은 골은 불과 10골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축구보다도 골프 실력이 늘었다. 핸디캡은 8. 아마 무엇을 시켜도 이 사람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야레알에서의 포를란은 스트라이커이면서도 신기하게 백넘버 5를 달았다. 넘버 5는 현역을 은퇴한 형의 번호였다. 비야레알에서의 첫 번째 시즌, 사무엘 에토와의 득점왕 경쟁에서 이긴 작년 시즌의 포를란은, 앙리와 같은 득점으로 유럽에서 가장 골을 넣은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덴 부츠를 획득했다.

 비야레알은 4만8000인도 채 안되는 마을. 그러한 포를란이 선택한 비야레알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2부와 3부를 오고가는 클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 회장덕”이라 감사한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한 비야레알에게는 포를란이나 리켈메를 노린 고액의 오퍼가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페르난도 로이그회장은 쳐다볼 생각도 안 하고 있다. 로이그는 말한다. “별로 선수를 키워서 팔 생각은 없다. 클럽을 강하게 하고 싶지, 팔아서 배를 채울 생각은 없다”. 선수의 상품화가 발달하고 있는 현대 축구이지만, 이 시골 클럽은 선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 클럽에서 땜빵용 선수로 취급받던 선수들이 부활한 것도 비야레알에는 가족애가 있기 때문이다. 포를란은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등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형이 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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