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07.12.13 [숙명의 대결]에서 발견한 쪼금 좋은 이야기 by 渤海之狼 2
  2. 2007.11.22 팬티 한 장의 조카토레 by 渤海之狼
  3. 2007.08.24 아름다운 투사(鬪士)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by 渤海之狼
  4. 2007.06.19 나폴리와 제노아, 승격의 환희 by 渤海之狼
  5. 2007.05.11 밀란과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말싸움을 멈추게 한 비에리 by 渤海之狼
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serie_a/20071210-1-1.html
저자 사카마키 요우코

서포터 폭동 사건이나 스타디움 주변에서의 난투.....
악평이 끊이질 않는 세리에
A이지만, 122일에 벌어진 리그 제 14라운드에서 숙명의 대결이라 일컬어지는 두 시합에서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우선은 카타니아 VS 팔레르모.
시칠리아 더비’인 것도 있어 시합 개시 직후부터 긴장이 고조되었던 양 팀이었지만, 90분간 페어플레이를 위해 노력했다. 파울이 있어도 평소와 같이 더러운 단어를 써가며 욕하는 것이 아니라 파울을 한 상대가 손을 내미는 장면이 많았다. 또한 팔레르모의 골이 들어간 후 짜증을 내던 카타니아의 MF 바이오코(Davide Baiocco)가 팔레르모의 귀돌린(Francesco Guidolin) 감독에게 대들었을 때도, 팔레르모의 에이스인 FW 아마우리(Amauri, 브라질)가 곧바로 사이에 껴서, “감독에게는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충고. 주장으로서의 책임과 임무를 되찾은 바이오코는 적장에게 사과하였다. 외국인 선수가 짜증을 내는 이탈리아의 선수를 진정시킨 케이스는, 적어도 ‘시칠리아 더비’에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팔레르모의 MF 카세르타(Fabio Caserta)가 전 소속팀을 향해서 호쾌한 슛을 차 골을 넣자, 옛 동료였던 마스카라(Giuseppe Mascara)가 그에게 다가가 찬사를 보냈다. 올해 23일에 서포터들끼리의 폭동에 말려든 지역 경찰관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던 숙명의 대결이었지만, 이번엔 선수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의해 ‘신성한 더비’로 환생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피오렌티나 VS 인테르나치오날레.
리그 선두인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
0-2로 완봉패 당한 피오렌티나의 일레븐이, 시합이 끝난 후에 필드에 도열하여 라커룸으로 향하는 승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럭비 시합이나 유럽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예를 들면 작년 밀란 – 리버풀)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있었지만 세리에 A에서 선수가 [개선문]을 만들어 대전 상대를 라커룸으로 환송하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지난 달 일어난 폭동 사건 이후, 과격 서포터 집단에 대한 스타디움 입장 금지와 세리에 A 8클럽의 서포터에 대해서 원정 관전을 금지함으로써 대신해서 그 자리에 초대한 그 지역의 아이들이 관중석을 메우는 스타디움이 증가했다. 철없는 행동을 일삼던 선수들이 아이들 앞에서는 [모범이 되자]고 하여,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미지가 저하하고 있는 세리에 A의 이미지 향상을 꾀하고자 하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선수들이 페어플레이를 위해 노력하면, 관중석에서의 욕설도 박수도 바뀌어 갈 것이다.

1-0, 2-1이라는 스코어로 승패가 정해지는 축구는 약소 팀이라도 승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필드도 관중석도 흥분하는 것이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으로 여겨지는 요즘의 세리에 A, 선수 개개인의 마음가짐으로 인해 [성전(聖戰)]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두 ‘숙명의 대결’이 증명해 준 것이다.

피오렌티나 일레븐의 축복을 받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선수들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serie_a/20071120-1-1.html
저자: 사카마키 요우코
 예전에 스포츠 선수가 [유니폼을 벗는다]는 뜻은 [현역 은퇴]를 의미했다. 하지만 최근엔 말 그대로 [누드]가 되는 축구 선수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 중의 한 예가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 [D&G]의 언더웨어 광고다.
 작년 독일 월드컵 대회의 패자(覇者)인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 몇 명이 하얀 팬티 차림으로 위풍당당. 단련된 육체를 아낌없이 보여준 이 광고가 이탈리아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모아, 그 회사는 올 여름 모델을 신생 아주리로 바꾸어 [팬티 Ver.2]를 발표했다.

 [D&G]뿐만 아니고, 많은 패션 메이커가 거의 알몸의 축구 선수를 광고에 채용하여 앙리, 륭베리,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의 세미누드를 보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베컴도 앞서 공개된 세미누드를 계기로 [엠폴리오 알마니]의 이미지 캐릭터로 알마니 사(社)와 2800만 유로(약 389억원 – 2007년 11월 22일 기준)라는 계약을 맺었다고, 영국의 대중지가 보도했다. 계약 금액이 다르다는 소문도 있지만, 굉장히 많은 돈이 베컴의 지갑으로 들어 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요즘은 본업인 축구에서 유니폼을 교환하려 벗을 일 없으니, 이 부업쪽에서 옷을 벗는데 힘을 쓰고 있다.

 일세를 풍미하고 있는 축구 선수의 세미누드 광고.
 선구자를 말한 다면 전 AC 밀란의 FW 조지 웨아일 것이다. 노출이 높은 CM으로 방송되었는데, 95년에 발롱도르(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를 수상한 직후였기에, 웨아는 이탈리아에서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 당시 초일류 선수가 알몸이 되는 것에 부정적인 목소리도 많았지만 연예계에 있을 법한 [벗어서 유명하게 된다]는 경우와는 다르게, [스타 선수이기에 벗는다]는 것이 팬 뿐만아니라 현역 선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후 브라질의 호마리우, 아르헨티나의 베론도 경력과 인기가 절정에 달한 시기에 CM에서 세미누드를 공개. 솁첸코도 발롱도르 수상 후에 CM에서 알몸이 되었다. 웨아의 CM 이 후, 세미누드 광고는 선수에게 있어서 하나의 지위가 된 것이다.

 D&G의 광고에서 팬티 한 장만 걸친 가투소는 [단련된 육체는 아름다움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필드에서는 야수로 변하여 사투를 거듭하는 조카토레(Giocatore[각주:1]) 들이지만, 옷을 벗으면 궁극의 육체미인 [다비드]가 되는 것이다.
  1. 이탈리어 어로 ‘선수’를 의미하지만, 요즘은 특히 ‘축구 선수’를 지칭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l

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serie_a/20070615-1-1.html

저자: 사카마키 요우코


제노바의 승격에 공헌한 FW 마르코 디 바이오

 세리에 B는 6월 10일 전 일정을 끝내 유벤투스에 이어 옛 강호인 나폴리와 명문 제노아가 세리에 A행 표를 손에 넣었다. 나폴리는 6시즌 만에 제노바에 이르러서는 1994-95년 시즌 이래 12시즌 만의 쾌거로 옛 강호의 부활에 이탈리아는 전국이 흥분에 쌓여있다.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를 거점으로 하는 전통의 클럽 제노바는 예전 미우라 카즈요시가 소속했던 팀으로 일본인에게도 유명하다. 그러나 미우라가 재적했던 94-95시즌을 마지막으로 제노바는 겉 무대에서 멀어져 명성도 떨어졌다.

2시즌 전 한 번은 염원하던 세리에 A 입장표를 손에 넣었지만 승격이 결정된 다음 날, 클럽 간부가 관여한 승부조작 문제로 세리에 C1으로 강등이라는 엄벌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실력으로 세리에 A를 손에 넣겠다]는 듯이 이번 시즌 제노바는 프랑스 리그 모나코에서 전 이탈리아 대표선수인 FW 디 바이오를 맞이하여, 뛰어난 공격진을 구축했다. [뒷돈]이 원인으로 세리에 A 입장을 박탈당했던 굴욕이 멤버들에게 의지를 보이게 하여 그것이 세리에 A 입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 편 열광적인 서포터들로 유명한 나폴리.

승격이 결정된 날, 옛 시가는 약진의 원동력이 된 FW 카라이오의 유니폼으로 메워져 그 날만은 [나폴리의 보물] 디에고 마라도나(의 사진)도 찾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옛 영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제야 꿈을 실현해 준 현역선수를 절찬한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광경은 아름답게 비추어 졌다.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만한 곳에 돌아와 새로운 시즌의 세리에 A는 격렬한 싸움을 펼치기에 어울리는 팀들이 갖추어졌다. 거기에 13년 만에 재개되는 4도시를 무대로 한 더비 매치는 새로운 시즌 최대의 볼거리가 될 것 같다.


 나폴리와 제노바의 세리에 A 복귀로 스타디움의 열광도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06-07년 시즌의 나폴리 평균 관객 동원수는 23000명. 유벤투스의 18314명이 2위고, 제노바는 3위인 15213명으로 세리에 A 승격 팀들은 성적뿐만이 아닌 인기에서도 상위를 점했다.


 한 편 세리에 B로 하강한 메시나는 평균 15548명의 관중을 유지했지만 키에보, 베로나, 아스콜리는 세리에 A 잔류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13000명 정도이기에, 2부 리그라고는 해도 얼마나 나폴리와 제노바를 지원하는 서포터의 사람수가 많은지 알 수 있다.


 바르셀로나의 FW 에토오나 아스날의 FW 앙리 등 새로운 시즌은 오래간만에 스타 선수의 이탈리아 진출설이 들린다. 라고는 하여도 세리에 A의 진정한 재미는 뭐라 하여도 초만원의 스타디움에 있다. 세리에 A를 취재하는 측에서 보아도, 나폴리와 제노바의 부활은 참을 수 없이 기쁘다.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http://number.goo.ne.jp/soccer/world/serie_a/20070510-1-1.html

저자:사카마키 요우코

35라운드 시에나와의 시합에서 골을 넣은 아탈란타의 크리스티안 비에리.

 유럽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3-0으로 이긴 밀란의 쾌거를 칭송하는 이탈리아 미디어와 밀란 서포터의 광란은 18년 만에 세리에A를 제패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영광을 잊게 할 정도의 기세였다.


 올 시즌 절대적인 강력함으로 스쿠데토를 획득한 인테르나치오날레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유럽 제패의 가능성을 가진 밀란이 인테르나치오날레보다 낫다는 평가가 이어지자 신경이 곤두선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숙적을 향해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모라티회장은 미디어를 통해 "세리에A 부정문제의 중심에 있던 밀란은 챔피언스 리그에 출장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밀란을 비난. 거기에 "밀란은 유럽을 제패할 수 없다"고 말함에 따라 밀란과 인테르나치오날레 사이의 골은 한 층 더 깊어져 양 클럽은 결국 [선전포고]하였다.


 간부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선수나 서포터들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열광적인 밀란 서포터로 유명한 모 이탈리아 배우가 "스쿠데토라는 것은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 출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가치가 있는 타이틀은 챔피언스 리그 제패인 것이다"고 하자,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서포터는 "올 시즌 세리에A에서 인테르는 밀란을 2번 다 이겼다"고 눈에 핏줄을 세우고 반론했다.

 모라티 발언에 분노한 밀란의 MF 세도르프가 "모라티 회장은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지고 있을 때는 젠틀맨이지만 이제 와서는 우리들에게 잘했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그 다음 날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만치니 감독이 "(스쿠데토라는) 목적을 이루었고 리그에서는 단 한번 진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최강이라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단정 지었다.

끝이 보이질 않는 이 두 클럽의 말싸움에 밀라노도 둘로 나뉘었다.


격론이 오고가던 중에 이 둘의 입을 막은 것은 전 이탈리아 대표로 아탈란타의 FW인 비에리의 부활 슛이었다. 예전에 인테르나치오날레와 밀란에 있었던 34세의 베테랑 스트라이커는 제 35라운드 시에나와의 시합에서 약 45미터 롱 슛을 넣어 19개월 만(2005년 10월 26일 밀란-엠폴리의 시합 이후)의 득점을 결정지었다. 55분(후반 10분)부터 도중 출장한 비에리는 그 10분 후에 충격적인 역전 골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흡사 전성기 시절의 플레이로 부활을 어필한 것이었다.


 같은 날 밀란은 MF 카카가 PK를 실축하여 피오렌티나와 무승부. 인테르나치오날레는 강등이 결정된 메시나를 상대로 크레스포가 결승골을 넣은 것 이외는 2%부족한 시합내용이었기에, 비에리의 골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한 곳으로 이끄는데 충분했다. 옛 친정팀인 두 클럽을 조연으로 만들고 이탈리아 미디어의 시선을 듬뿍 받은 비에리의 퍼포먼스에 인테르나치오날레도 밀란도 하찮은 싸움에 마침표를 찍을 마음이 생겼는지 그 날부터 폭언, 잡언은 뚝 그쳤다.


 비에리의 골은 인테르나치오날레와 밀란의 말싸움보다도 몇 배나 더 아름다웠던 것이다.

Posted by 渤海之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