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607/other/column/200706/at00013505.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자칭" 1000골을 달성하여, 축복받는 호마리우(오른쪽)

 호마리우 데 소우자 파리아.

 41세를 맞이하는 [악동]은 5월 20일 스포르치 레시페와의 시합에서 PK를 넣어서 자신의 통산 1000골 째를 기록했다. 아마추어 시대의 득점이나 친선시합에서의 것도 포함하고 있기에, 지금까지도 “자칭”1000골에는 많은 의문부호가 달려있지만 본인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호마리우는 현재도 소속하는 바스코 다 가마에서 1985년 19살로 프로 데뷔를 하고, 88년에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PSV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93년에서 2시즌을 보낸 바르셀로나에서 크라위프가 이끄는 “드림 팀”에서 득점왕에 빛나, 그 후도 세계 이곳저곳의 클럽을 거치면서 현역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바이싱요”(꼬마)라는 닉네임으로도 알 수 있듯이 호마리우는 신체적으로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스트라이커로써 발군의 득점감각으로 골을 넣어왔다.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베베토와의 2톱으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어, 대회 MVP에도 선정되었다.

 스타로써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함과 동시에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한 필드 밖에서는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사랑받는 캐릭터로써, 브라질 국민들에게는 펠레나 지쿠를 뛰어넘는다고도 할 수 있는 인기를 자랑한다.

 통산 1000골 달성을 터닝 포인트로, 지금까지 걸어온 선수생활, 수많은 전설적 에피소드,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하여, 호마리우가 말한다.


■ 은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 통산 1000골을 달성했는데 어떤 기분인지요?


우선은 안심이라고 할까? 이 나이가 되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지만 여기 오기까지는 불안도 있었다. 오랫동안 골을 넣을 수가 없어서, 999골인 채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1000골을 달성할 수 있어서 최고다.


거기에 우리 어머니도 굉장히 힘들었다. 매번 스타디움에 오지 않으면 안 되었지, 나 자신도 어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후 (통산 1281골을 달성한) 펠레도 1969년, 1000골까지 마지막 한 골이 남았을 때 6시합 연속으로 골을 넣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와 같구나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지금은 안정되어있으며 공식적으로도 발표했지만 은퇴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시대는 터닝 포인트를 돈 듯한 느낌도 들며, 톱 레벨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선수라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택된 인간뿐이라는 것도 알 터이다.


- 여기에 이르기까지 FIFA(국제 축구 연맹)가 공식적으로는 1000골이 아니라고 표명하거나 펠레가 자신의 기록에는 281골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등 시끄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던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 않다. 각각 좋을 대로 계산하는 것은 자기들 마음이니까. 각각의 시대, 상황에 따라, 같은 기준으로 골수를 세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펠레같은 경우 산토스에서 약소 클럽을 상대로 넣은 골이라던가, 여러 종류의 골이 카운트되어 있다. FIFA가 무엇을 기준으로 “공식”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기준 같은 것은 신경 쓰고 있지 않다.

내 자신이 이룬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이 계산해준 숫자로는 내가 1000골이라는 꿈을 실현한 것이다. 그걸로 OK다. 거기에, 내 골에 대해서 누구도 불만을 말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며, 상처받는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 브라질에서는 당신과 펠레 외에, 20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Arthur Friedenreich(1892-1969))가 1000골을 달성했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좋지 않나? 어쨌든 (1000골을 달성한 사람은)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밖에 없으니까.


■ 2002년 월드컵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 통산 1000골의 위업은 세계 챔피언보다 나은 것일까요?


각각 다른 것이다. 1000골이 세계 챔피언보다도 나은 것인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이룬 시간이 얼마만큼 걸릴지를 생각해 보면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1000골 쪽의 굉장함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브라질 대표는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니까 그 만큼 해당되는 선수의 수도 많다.


- 펠레와 비교해 본다면?


시대나 플레이 스타일은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창조력 있는 선수이기는 하나 그 시대는 마크가 타이트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는 대부분 브라질에서 보냈다. 내가 플레이한 시대는 마크도 펠레의 시대보다 더 타이트했다. 브라질 외에도 네덜란드나 에스파냐 등 해외에서도 플레이 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둘 다 세계 챔피언도 되었고, 1000이상의 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펠레에게는 [완벽한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당신은 [규율이 없다], [제멋대로]라는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모두 어느 쪽이 나의 “철학”에 맞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며, 실제로 나는 즐기며 그렇게 살아왔다. 풋볼에 있어서도 그러한 정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는 스트라이커로써의 일을 태만히 한 적은 없다. 수비적인 플레이를 하거나, 공격을 하지 않거나, 플레이를 즐기지 않는 것은 문제 외라고 생각한다. 내 언동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나’인 것이다.


- 그래도, 2002년 한일월드컵 멤버에서 제외되었을 때에는, 스콜라리 감독에게 멤버로 뽑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한 적이 있었죠?


그건 끔찍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조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는 레벨이었으며 제외된 것은 풋볼 이외의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브라질 국민들도 내가 월드컵 멤버에 선택되어져야 한다고 항의했었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더 이상 그 때를 머리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 당신의 존재는 그렇게까지 팀을 분열시켰던 것이었나요?


흥미본위로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브라질 대표 팀 동료에게 적대심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위선은 견딜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1998년 프랑스 대회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자갈로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지쿠와는 생각이 틀렸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 말디니(왼쪽)와 경합하는 호마리우.브라질은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4번째 우승을 이루었다.

■ 자신의 경력에는 만족하고 있다.


- 언제까지 현역으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렇게 길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젠 나이가 나이이며, 꿈이었던 1000골을 달성하기 까지 현역으로 남았다. 단지 곧바로 은퇴한다는 것은 아니고 상태를 보면서 결정하고 싶다. 하지만 많은 선수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 냈듯이 내 자신의 경력에는 만족하고 있다.


- 은퇴한다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감독이 된다거나?


모르겠다. 단지 나 자신이 감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개인 사업도 하고 있으며 재산도 많다. 앞으론 아이들과 함께 하거나, 모래사장에서 쉬는 것도 좋아한다. 장래에 대해서는 냉정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급할 것도 없으며 생각할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 이렇게 오랫동안, 당신은 어떻게 풋볼 선수로써 모티베이션(동기부여)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나요? 플레이 하는 것에 질린 적은 없었나요?


플레이 하는 것을 즐기고 있으면 따분해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체적으로는 옛날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언제라도 컨디션을 좋은 상태로 계속 유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 동료가 현역을 은퇴하여도 나는 여전히 계속 뛰고 있다.


몇 번이나 뛰는 클럽이 변했으며 수뇌진이나 팬과 충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합이 되면 나는 골을 넣는 것에 집중해 왔으며, 중요한 대회에서 플레이 하는 것이나 다음 월드컵에 출장하는 것을 모티베이션 해왔다. 그리고 통산 1000골이 가까워져서부터는,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커다란 목적의식이 있으면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은 간단하다. 반대로 어려운 것은 그것을 실현한 뒤에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2002년 월드컵에서 좌절감을 맛보았을 때는 힘들었으며 다음 모티베이션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나에게는 “1000골”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나타났다. 그것이 없었다면 플레이를 관두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베베토가 베스트 플레이어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 해 온 선수 중에서 베스트 플레이어는?


많이 있지만 브라질 대표팀에서 월드컵 타이틀을 함께 딴 베베토이려나.

단지 나는 많은 팀에서 플레이 해 왔으며 명수(名手)는 많이 있었다. 바르셀로나 시대의 미카엘 라우드롭, 스토이치코프, 과르디올라, 쿠어만, 브라질 대표에서 함께 플레이 한 마징요, 마우로 실바, 호나우두……. 운 좋게도 정말 많이 있다.


- 그렇다면 가장 추억에 남는 일은?


그것도 굉장히 많이 떠오르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9년에 행해진 브라질 개최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 나는 우루과이와의 결승에서 골을 넣었다. 그 날은 7월 16일로 딱 1950년의 브라질 월드컵에서 일어난 [마라카난의 비극]에서 39년, 더구나 장소도 똑같은 마라카난 스타디움, 상대도 같은 우루과이였다. 그 사건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있어서 정말 괴로운 사건이었기에 내 결승점으로 우승한 것은 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94년 월드컵, LA에서 행해진 이탈리아와의 결승이다. 브라질은 70년 이후, 24년간이나 우승하지 못했기에, 될 수 있으면 PK가 되기 전에 시합을 끝내고 싶었지만.

세 번째는 다름 아닌 나의 1000골의 순간이다.


- 지금까지 수많은 스캔들에 휩싸였다고 생각하는데, 후회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나는 까다로운 성격으로 몇 번이나 실수를 해왔다. 하지만 악의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내 자신의 생각을 정면에서 전해주었으며 거짓말은 없었다. 이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그 반동이 되돌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니까.

나는 나이며,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스타디움에서도 필드 밖에서도 변함이 없다.


■가장 좋았을 때는 PSV와 바스코 다 가마 시대


- 앞으로 1000골을 달성하는 “제 2의 호마리우”는 출현할까요?


어떨까...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단지 펠레가 1000골을 넣었을 때의 시대는 한 번 끝난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때부터 내가 나왔다. 그렇기에 앞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나와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 첫 골을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이다. 그 날, 나는 바스코 다 가마에서 노바 베네시아를 상대로 2골을 넣었다. 정확하게는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85년 8월 18일이라고 한다. 단지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어디까지나 프로로써 첫 골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미 79년에 오라리아에서 플레이 했을 적에, 리오데자네이로의 아메리카노와의 시합에서 골을 넣었다.(주:1000골은 여기서부터 카운트 한 것). 아직 굉장히 어렸으며, 급료를 받지 않았던 시대다.


- 마지막으로, 당신이 선수로써 가장 빛나고 있었던 적은, 크라위프가 이끌던 바르셀로나의 “드림 팀” 시대일까요?


리가 에스파뇰라는 톱 리그이며, 바르셀로나에는 수많은 스타 선수가 있었기에 나의 선수 경력 중에서 가장 반향이 컸던 시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 가장 좋았던 때는 PSV와 바스코 다 가마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주:1950년 브라질 월드컵대회. 이 대회에서는 1차 리그 수위 4팀이 모두 붙는 결승 리그를 행해서 우승을 결정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2시합을 끝낸 시점에서 브라질이 승점 4, 우루과이가 승점 3.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마지막 시합에서, 무승부 이상이면 우승이 결정되는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1-2로 역전패하여, 우승을 놓쳤다. 비탄에 잠긴 브라질 국민들 중에는, 자살하는 사람이나 쇼크사(死)를 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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