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마드리드'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08.04.15 우고 산체스 - 대표팀에서 해임된 멕시코의 영웅 by 渤海之狼 2
  2. 2008.03.09 그라운드 위의 지배자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efano) by 渤海之狼 7
  3. 2008.01.31 에스파냐 축구의 뜬소문들 by 渤海之狼
  4. 2008.01.17 가지 말아줘~~ 에토오 by 渤海之狼
  5. 2007.10.26 라울의 진가 by 渤海之狼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other/column/200804/at00016872.html
저자
: 세르히오 레빈스키

바라 마지 않던 멕시코 대표팀 감독 취임 회견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던 우고 산체스였지만....

필시 우고 산체스[각주:1]에게 있어서 2008 3 31일은 자신의 캐리어 속에서 최악의 하루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날 멕시코 축구 협회는 국민적 영웅이며 세계에서도 명성을 떨친 선수 중에 한 명이었던 남자에게서 대표팀 감독의 지위를 박탈했다.

■ 프리메라 리가에서 5번 득점왕에 빛났던 영광의 나날들

 산체스는 1980년대 에스파냐에서 활약하며 멕시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칭송 받았다.

 1981년 멕시코 UNAM 푸마스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그 4년 뒤에는 레알 마드리드로 활약의 장소를 옮겨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는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각주:2], 마누엘 산치스[각주:3], 마르틴 바스케스[각주:4], 미첼[각주:5], 미겔 파르데사[각주:6] 5명으로 구성된 [퀸타 델 부이트레][각주:7]가 중심이 되어 영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체스도 리가 에스파뇰라에서 5번의 득점왕에 빛났으며, 골을 넣은 다음에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퍼포먼스도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체스는 모국 멕시코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당시 멕시코는 대표팀이건 클럽이건 산체스만큼의 영광과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산체스는 모든 광고나 잡지의 표지를 독점했다. 당시 멕시코 축구계에서 산체스 외에는 해외에서 플레이 하고 있던 선수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멕시코 자국 클럽의 월급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무엇보다 해외로 나간다는 전통이 멕시코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산체스의 경우 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회장이 이 멕시코 스트라이커를 보자마자 반해버리는 행운이 있었다. 회장은 처음에 크루스 아술의 말도나도를 시찰하러 멕시코에 갔는데, 푸마스에 소속해 있던 산체스가 눈앞에서 연속 골을 넣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었다. 결과 아틀레티코는 산체스를 획득하였고, 그때부터 마니토(산체스의 애칭) 영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에스파냐에서 1년째는 부진하여 주위에서는 푸마스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체스는 성공을 거두기까지 에스파냐에 남겠다고 우겼던 것이다.

■ 산체스의 월드컵이 될 예정이….

 산체스의 경력에서 이상한 점은 에스파냐에서 그처럼 빛나는 실적을 올린 것에 비하여, [엘 트리][각주:8]에서는 그에 필적하는 활약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전성기의 대부분을 해외 클럽에서 보냈기 때문에 대표팀에 그다지 소집되지 못한 것이 이유이다. 그래도 산체스는 78, 86, 94년이라는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다.

 78년 아르헨티나 대회에서는 조 예선에서 3연패를 당하여 승점 0인 채로 귀국길에 올랐다. 더구나 서독과의 시합에서는 0-6이라는 대패였다.

 자국 개최가 된 86년 대회는 누구나가 [산체스의 월드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큰 활약도 하지 못했고, 조 예선 파라과이와의 시합에서는 PK를 실축. 멕시코는 8강에 진출하기는 하였지만 자국민들을 실망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 호된 비난을 받은 감독 시대

 현역을 은퇴하고 지도자가 되어서부터 산체스는 자주 멕시코 언론에게 비난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2000
년 친정인 푸마스 감독에 취임하여 2004년에는 전후기 리그에서 연패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산체스는 불청객이었다. 사람들은 예전의 영웅을 거만하다고 느꼈고, 전술 면에서도 무지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멕시코 미디어는 산체스가 당시 멕시코 대표팀 감독 히카르도 라볼페[각주:9]에 대한 일련의 규탄 캠페인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산체스는 라볼페를 대표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무엇이건 비판을 전개하였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라볼페는 원래 GK였다. 현역 시대에 상대팀 선수로 만났던 경험도 있던 라볼페와 산체스는 필드 밖에서도 대립했다.

 산체스는 외국인인 라볼페가 멕시코 대표팀 감독에 앉아 있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엘 트리]는 조 예선 돌파를 이루었지만 16 1차전 상대는 지휘관의 모국 아르헨티나가 되었다. 결과는 연장전 끝에 1-2로 패배. 산체스는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표팀 감독은 자국 출신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6 11. 결국 산체스는 멕시코 대표팀 감독의 자리에 취임하여, U-21대표( U-23 대표팀 세대)의 감독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임까지의 1년이 넘도록 대표팀에 어울리는 전술을 확립하지도 못하였고, 팀으로써의 형태를 보이는 것 조차도 없었다. 산체스가 취임 시에 내세운 목표는 CONCACAF 골드컵[각주:10] 우승과 코파 아메리카(남미선수권) 4,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메달 획득이었다.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3위에 입상하여 멕시코 국민들 기쁘게 하였지만 나머지 두 개는 실현되지 않았다.

 2007년 골드컵[각주:11]에서 미국에게 패하여[각주:12] 준우승에 그친 것에 더하여, 그지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올림픽 예선 탈락은 산체스의 거취를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그 이전부터 대표팀 감독으로써의 산체스의 수완에는 의문부가 찍혀 있었다. 라볼페 쪽이 좋았다는 목소리도 나올 정도였다.

■ 일류 선수는 감독으로써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인가?

선수와 감독으로 양쪽에서 성공하여 여전히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요한 크라위프

 산체스의 해임으로 인해서 멕시코에서는 '감독론'과 같은 논의가 재연되고 있다. 즉 위대한 선수가 위대한 감독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멕시코 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이번 단 한번으로 자신의 경력 그리고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일류 선수가 감독으로서도 일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예를 들면 알프레도 스테파노[각주:13] 혹은 크라위프와 같은 천재는 지도자로서도 빛나는 실적을 남겼다. 그러는 한편 펠레는 감독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두 개의 클럽을 이끌었지만 스트레스만 쌓였을 뿐이었다. 감독 시대의 마라도나는, “나처럼 플레이하면 된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감독 대 선수라기 보다는 같은 동료로써 선수를 취급했던 듯 하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경우는 감독직을 일찌감치 끝내고 명함을 건네주고 악수를 나누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이다. 프랑스가 낳은 천재 지네딘 지단은 은퇴 후도 감독직에는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가 존경하는 우루과이의 엔소 프란체스콜리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텔레비전 해설자로 축구와 끈을 이어가고 있다.

 일류 선수가 감독에 앉으려 할 때는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명성을 손에 넣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잃는 것은 일순이다. 우고 산체스와 같이 불과 1년 만에 빛나던 명성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이쯤에서 적절한 산체스 (현역 때의) 탑 10 플레이 >

  1. Hugo Sánchez Marquez [본문으로]
  2. Emilio Butragueño, FW [본문으로]
  3. Manuel Sanchís Hontiyuelo, CB [본문으로]
  4. Rafael Martín Vázquez, MF [본문으로]
  5. Míchel, RMF. 현 레알 마드리드 칸테라 총책임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한국과의 시합에서 헤드트릭을 기록했다. [본문으로]
  6. Miguel Pardeza, MF [본문으로]
  7. Quinta del Buitre - ‘독수리(Buitre)의 집(quinta)’이란 뜻으로, 중심 선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별명이 독수리(El Buitre)였기에, 그를 중심으로 한 80년대의 레알 마드리드를 그렇게 불렀다 [본문으로]
  8. El Tri = Los Tricolores의 약자. 삼색(三色)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멕시코의 국기색이 삼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멕시코 대표팀의 애칭 [본문으로]
  9. Ricardo Lavolpe, 재임 2002-2006, 대표팀 해임 후 보카를 거쳐 현재 멕시코 리그 몬테레이(Monterrey)의 감독. 아르헨티나 출신. 융통성 있는 전술과 함께 경기장에서 줄담배로 유명하다고 함 [본문으로]
  10.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 주최의 대륙 선수권 [본문으로]
  11. 미국 개최 [본문으로]
  12. 1-2 [본문으로]
  13. Boca, River에서 리그 타이틀, 발렌시아에서 코파 델 레이, 리그 타이틀, 컵 위너스 컵(현 UEFA컵)를 제패했으며, 1974-75년에는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리스본, 1982-84, 1990-91은 레알 마드리드 등 1967년부터 91년까지 몇 년을 제외하곤 총 8개 팀의 감독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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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an Glanville

일본어 번역: Katsumi Hond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 [스포츠 20세기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이 스트라이커는 틀림없이 축구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성된 선수 중의 한 명이다.

 그는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볼 컨트롤은 선수 생활 말년까지 여전하였다. 빠른 스피드와 경이적인 스태미나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뛰어다니며 그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파괴적인 오른 발, 공중전에서의 능력, 킬러패스를 만들어 내는 후각, 신출귀몰함 등 그는 혼자서 토탈 사커를 보여주었다.

 자신 진영 골문 앞에 갑자기 나타나 상대의 공격을 막고서는 곧바로 볼을 능숙히 다루어 상대 골 앞까지 운반하였다.

 장신[각주:1]에 두꺼운 갑빠와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은 이탈리아 카프리에서의 이주민으로 리버 플레이트에서 플레이 했었다. 알프레드 자신도 16살에 이 클럽에 가입하여 한 번 우라칸(Club Atlético Huracán)에 임대되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1947년에는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로써 7시합에 플레이 하여 얼마나 많은 대표팀 출장 회수를 늘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지만, 준비되어 있던 운명은 달랐다.

 1949년에 같은 세대의 뛰어난 스트라이커 아돌포 페데르네라(Adolfo Pedernera)나 다른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콜롬비아로 건너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말을 바꾸면 나라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FIFA에 가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적료를 제시할 수 있어 원하는 대로 선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디 스테파노는 보고타의 미요나리오스(El Club Deportivo Los Millonarios)에 입단하였다. 그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 귀국하는 일은 있어도 플레이 하지는 않았다. 그를 시작으로 많은 뛰어난 선수들을 잃은 것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아르헨티나가 출전할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53년에는 콜롬비아에서의 모험도 끝을 맞이한다.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가 아닌 에스파냐를 선택하자 영원의 라이벌인 두 빅 클럽 -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그와의 계약을 위해서 다투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의 소유권을 가진 리버 플레이트에게 당시로써는 거금인 3만 4000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했지만 간단히 해결되지 않아 결국 에스파냐 축구 협회가 중재에 들어가 양 클럽이 그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1년마다 팀을 옮기기로 하여 첫해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권리가 주어졌지만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플레이 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에게 있어서는 잊기 힘든 후회로 남았다.

 그의 활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에스파냐 리그에서 8번, 컵에서는 1번 우승했다. 에스파냐의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새로운 모국의 대표로써 31시합에 플레이 하였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와 같이 넘치는 힘과 통솔력은 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전혀 활약하지 못했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태평양 연안의 비냐 델 마르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의 호텔에 에스파냐 대표팀이 머물고 있었기에 필자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부친은 마사지 약을 가지고 와 있었다. “이것을 써서 치료하라고 녀석에게 말했지만……” 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들은 이젠 저 악독한 아르헨티나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각주:2]) 감독을 위해서 플레이 할 생각이 없다”……고. 바르셀로나와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성공하여 유명한 에레라는 거만한 권위주의자였다. 지배욕이 강한 디 스테파노는 라이벌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 후 두 슈퍼스타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였다. 한 사람은 우승한 브라질의 중반을 떠받쳤던 흑인 지지[각주:3]이고 또 한 사람은 스웨덴의 젊은 스트라이커 앙네 시몬손(Agne Simonsson). 그러나 둘 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디 스테파노가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지휘대 위에 누구도 올라서지 못하게 하였다. 지지는 굴욕적인 시즌을 보내는 동안 제대로 볼도 차지 못한 채 빛나는 경력을 되찾기 위해서 모국으로 돌아가 1962년 월드컵에서 2번째 우승을 이룩하게 된다.

 헝가리에서 망명해 온 푸슈카시(Puskás Ferenc)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확실히 그때까지 그는 헝가리 대표팀의 주장으로 팀을 통솔해 왔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현실적인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디 스테파노가 왕이었다.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득점왕 경쟁을 하던 둘은 같은 골 수로 마지막 시합을 치르게 되었고, 푸슈카시는 득점을 올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디 스테파노에게 패스를 하여 골을 선물했다. 이리하여 둘의 파트너십은 더욱 강고해 졌다고 한다[각주:4].

 그들은 1960년 챔피언스컵 결승 아이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시합에서 둘이서 7골을 넣었다[각주:5].

 1962년 벤피카와의 시합에서 푸슈카시는 3골을 넣었는데, 그 중 1골은 디 스테파노에게서의 멋진 스루패스로 인한 것이었다[각주:6].

 푸슈카시 이전에 또 한 사람의 세계적인 선수가 디 스테파노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몽 코파(Raymond Kopaszewski)다. 1956년 5월 파리에서 행해진 제1회 챔피언스컵 결승에서 코파도 또한 팀을 지배했다. 랭스에서 코파는 디 스테파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 최초의 결승전에서 4-3으로 승리하였는데, 디 스테파노는 자기 진영에서 출발하여 혼자서 골을 넣는 항상 볼 수 있었던 형식으로 골을 넣었다. 코파는 이 때 이미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에 합의하고 있었지만 이런 완벽한 팀에 어째서 자신이 필요한지를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코파는 오른쪽 윙으로써 명성을 날렸지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게임메이커로 활약하여 프랑스를 3위로 이끌었다.

 디 스테파노는 챔피언스컵에서 비할 대 없는 활약을 보여 58시합[각주:7]에서 49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 중 7골은 결승전에서 기록한 것이었다.

 1964년에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결별하여 바르셀로나의 작은 클럽 에스파뇰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다. 그 후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감독으로써도 성공한다.

 하지만 선수로써 보여준 눈부신 광채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Alfredo Di Stefano/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26년 7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바라카스에서 태어났다. 17살에 리버 플레이트의 톱 팀에 데뷔. 처음엔 오른쪽 윙이었지만 우라칸에 임대되어 스트라이커가 되었고,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하여 [라 마키나[각주:8]]라 불리는 유명한 공격 라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 1947년에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선출되었다. 그 후 1949년에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보고타’로 이적, 4시즌 동안 대활약[각주:9]한 후, 에스파냐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유럽 챔피언스컵 5년 연속 제패[각주:10]에 공헌한다. 스트라이커이면서 포지션은 유동적으로 드리블, 슛, 패스 능력을 모두 구사하여 올라운드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 후 에스파냐 대표팀에서도 플레이 했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 결국 본선에서 출장하지 못하였다.(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 178cm. 이 키는 당시로써는 큰 키였었다. [본문으로]
  2. 세리에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카테나치오 전술을 확립한 전설적인 감독 [본문으로]
  3. 애칭 Didi로 풀 네임은 Valdir Pereira [본문으로]
  4. 아마 푸슈카시가 레알 마드리드 입단 첫해인 1958~59 시즌의 이야기 같다. 스테파노 23골, 푸슈카시 21골. 이 시즌 말고는 둘의 골 수에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5. 시합은 7-3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 디 스테파노: 27분, 30분, 73분. 푸슈카시: 46분, 56분, 60분, 71분. [본문으로]
  6. 3-5로 패하여 벤피카의 우승. 당시 에우제비우가 3-3 동점 상황에서 쐐기골이 되는 두 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 [본문으로]
  7. 기록에 따라서는 60시합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La Máquina, ‘기계’라는 뜻 [본문으로]
  9. 292시합 출장하여 269골 [본문으로]
  10. 1955년 ~ 1560년까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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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80129-1-1.html

저자: 스즈이토모히코



<허가받지 않은 여행으로 크게 꾸중들은 메시>


시합 후의 휴일이라고는 하여도 리허빌리 중에 메시가 카타르에 개인 여행을 떠난 것에는뭔가 냄새가 난다. 겉으로는 카타르의 내셔널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하였다고 하지만 실은 다른 클럽과 교섭을하고 있었다면?

예를 들면 마라도나를 FC 바르셀로나에서 빼돌려 황금시대를 구축했던 나폴리가 이번엔 메시를 노리고 있다면? 더구나 디에고 마라도나까지 거기에 관여되어 있고, 석유왕이 큰 돈을준비하고 있거나 한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소문이지만말도 안 되는 억측일 것이다.

하지만 클럽의 허가도받지 않고 무단으로 7시간이나 플라이트.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면좋을지…… 크라위프도 화내고 있습니다.

벌금 메겨!!” 라며……

발렌시아도 수수께끼투성이다.

카니사레스와 알벨다가쿠만 감독에게서 갑작스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올 시즌은 더 이상 벤치에도 앉히지 않겠다니까 놀랄따름이다. 이대로는 연습생과 마찬가지.

이유를 원했지만 설명도해주지 않았다고 알벨다는 목을 갸우뚱하였고, “클럽에서나가는 것도 어려워서……”라며 카니사레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팀을 젊게 하기 위한수단이라는 것만으로는 누구도 납득하지 않는다. 에스파냐 대표였던 알벨다도 이 상태로는 유로 2008에 참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도 냄새가 난다.

문제는 돈인가? 솔레르 회장이 높은 급료를 받는 둘을 버렸다는 것일까?

확실히 모르겠다.

왠지 최근은 이렇게어딘가 수상한 뉴스들만이 어지럽게 날라다니고 있는 에스파냐다.

그렇다면 레알 마드리드는아무 소문도 없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코파 델 레이에서 마요르카에게 2패를 하여 16강에서 패퇴. 이미냄새가 난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더비에서 승리하여 리그 1위를달리고 있지만 이 독주 상태야 말로 [위험]인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의통계이지만 터닝 포인트 지점에서 1위였던 클럽이 그대로 우승까지 도착했던 케이스는 7시즌에 2번밖에 없다.

03-04 시즌이 좋은예일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봄까지 승점으로 8P 차이를두고 있던 2위 발렌시아에게 우승을 빼앗겼다. 멀리 갈 것도없이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도 최후의 최후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당하여 악몽을 맛보았다.

[겨울의 승자가 리그를제패한다]라는 대사도 예전엔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반전에너무 무리하여 후반에 헥헥댄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 있다.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가 2위인 FC 바르셀로나에게 7P 차이를두고 있어도 아직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크라위프의 역린을 건드린 메시도 말했다.

지난 시즌처럼 그들이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들을 제칠 수 있다. 올 시즌도전설은 만들어 지는가?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는,마지막에 전설을 만들었지만 결말은 슬펐다. 하지만 뭐 에스파냐 리그도 해피엔드가 아닌 편이재미있다. 올 시즌은 지금까지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온 것도 있으니.

한가지 더.

에스파냐적인 뜬소문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세리에 A의 리보르노에서 약 1년 만에 골을 넣어 부활의 조짐을 보여준 디에고트리스탄에 대한 것인데, 에스파냐에서 그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세비야 출신으로 안달루시아의 피가 흐르는 트리스탄은 도박을 굉장히 좋아했다.2002년 한일 월드컵 에스파냐 10번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뒷세계의 도박에 손을 대었다가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십억이라는 빚을 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천지 이탈리아에서 또다시 큰 거 하나터뜨렸다고.

계속해서 생겨나는 여러가지뜬소문이 에스파냐 축구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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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80117-2-1.html

저자:스즈이 토모히코



<세비야의 케이타(왼쪽. 말리 대표)와 바르셀로나의 에토오(오른쪽. 카메룬 대표)>


어째서1월에 아프리카 선수권이열리는 거야?


몇 년전까지는 아프리카 선수권의 개최 기간(120~220)에대해서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었지만,가나에서 행해지는 이번 대회에서는 투덜거리는불평불만이 들려오고 있다.


이는 요수년 유럽 축구계에 있어서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2008년 아프리카 선수권에서는 에스파냐 리그에서 8,이탈리아, 잉글랜드,프랑스 등 유럽 전체에서 실로 154명이라는아프리카 선수들이 가나로 향한다.최대 세력은 프랑스다.1, 2부를 합쳐 70명정도나 된다. 저번 대회인이집트 대회에서는 10명이나아프리카 선수들을 데리고 있던 AS생테티엔에서 6명이나아프리카 선수들이 모국 대표팀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번 대회도많은 클럽이 피해를 받고 있다.

알기 쉬운곳은 드로그바, 오비 미켈,에시엔, 칼루가 있는첼시. 거기에 투레,에보우에, 송 들이있는 아스날도 몽땅 떠나간다.


단지,감독의 반응은 제각각이다.센터백을 둘이나 빼앗기는 아스날이지만,방제 감독은 “보강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말한다. 에토오와 야야투레를 빼앗기는 레이카르트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메시가전열에서 이탈하고, 호나우지뉴가연습에 막 참가하기 시작했을 뿐인 바르셀로나.

에토오가빠지면 공격진에 보얀과 도스 산토스라는 루키를 동시에스타팅 멤버로 기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때문에 카메룬 축구 협회에 에토오를 소집하지않도록 부탁을 하는 등 (쓸데없는)노력도 했으며, 에토오본인에게도 최후의 최후까지 “가지마~”하고끈질기게 설득하였다. 하지만에토오 입장에선 모국 카메룬과 바르셀로나를 저울에달 것까지도 없었다. 에토오는2007년 아프리카 최우수선수의 후보에도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에 2008년에는이 명예를 되찾고 싶은 것 같으며,가나에서 드로그바보다 위라는 것을 증명하고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점드로그바가 빠지는 첼시는 현명했다.곧바로 프랑스 대표인 아넬카를 볼튼에서 획득.질 수 없다며 바르셀로나는 리옹의 벤제마 획득을위해서 달려들었지만, 유럽각국의 빅 클럽들이 노리고 있어 교섭이 부드럽게진행될 것 같지도 않다.


거기에비해서 리그 1위를 달리고있는 레알 마드리드는 냉정하다.

“아프리카선수권으로 디아라가 빠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있었던 일”이라고 말한 슈스터 감독.가고, 구티,바티스타로 허리진이 튼실하기에 걱정은 없다고한다. 겨울 이적 시장에있어서 레알 마드리드의 테마는 보강보다도 오히려방출일 것이다. 이미 시합에 나갈기회가 확 줄은 사비올라에 대해서,아넬카를 떠나 보낸 볼튼이 노리고 있다.


아프리카선수권으로 약해지는 것은 바르셀로나 뿐만은 아니다.말리 대표인 카누테, 케이타.코트디부아르 대표인 코네까지 3선수를빼앗기는 세비야도 괴로워하고 있다.


말리 대표팀은상당히 펀치력이 있어 보인다.

카누테,케이타에 디아라(레알마드리드)나 시소코(리버룰).....여태껏 월드컵에 나간 적은 없지만 매력적인선수를 갖추고 있다. 이번대회를 재미있게 해 줄 가능성이 충분하다.더구나 나이지리아,코트디부아르와 같은 조.아프리카 선수들이 빠진 빅 클럽의 움직임도 흥미깊지만, 말리의 시합도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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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column_cl/20071023-1-1.html

저자: 스기야마 시게키

레알 마드리드라는 명문 클럽에서 17살이라는 나이로 톱 팀에 데뷔한 라울.

이후, 클럽에서 수 많은 영광을 손에 넣어 온 [에스파냐의 국보]이다.

그러나 지금의 에스파냐 대표팀 감독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그를 소집하고 않고 있다.

1977년 6월 27일생인 30살.

라울은 요 4개월 전만해도 20대였다. 이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있을까?


라울이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의 무대를 밟은 것은 95-94시즌.

12시즌 전의 이야기가 된다. 18살 때였다. 이후, 거의 풀 출장. 통산 출장 시합 수 112는 챔피언스 리그 최다 출장기록이다. 현재도 출장할 때마다 기록을 갱신하는 초 베테랑이면서도 나이는 불과 30살.


필자는 2,3년 전에 그의 움직임을 보고 라울도 이제는 한계이며, 미래는 그다지 남지 않았다고 예상했다. 날카로움, 스피드는 볼 때마다 낮아만 갔다.

당시 27, 28이면서도 말년을 맞이한 선수와 같이 늙어보였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의 토박이 간판선수가 아니었다면, 그 시점에서 방출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그런 가엽다는 시선을 보낼 필요는 전혀 없다. 30살인 지금이 2,3년 전 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다. 날카로움이 되살아났다. 가지고 있던 기술도 여실히 발휘하고 있다. 오히려 나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체형이다.

데뷔 당시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화가 적은 선수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축구 소년 풍의 얼굴은 지금도 건재하다. 나이 먹은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델피에로와 비교하면 알기 쉽다.

그는 라울보다 세살 연상이면서 챔피언스 리그 데뷔는 95-96시즌으로 같다. 이탈리아 기대의 신성(新星)은 그 시즌 21살의 어린 나이로 유럽 챔피언에 빛났다. 이탈리아의 델피에로와 에스파냐의 라울은 양국 기대의 신성(新星)으로 함께 일컬어지는 존재였다.


그리고 델피에로도 27, 28살에 내리막길을 맞이했다.

어느새 체형은 데뷔 당시와는 많이 변화되어 있었다. 체형 그 자체가 노쇠했음을 알 수 있었다. 델피에로는 그 후에도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전성기를 아는 사람에게는 예전과는 다른 조금 둥글해진 등이, 몸의 노쇠한 것으로 보여 참을 수 없다. 동시에 라울의 특수성을 여실히 알려 준다.


플레이의 특징으로도, 달리 닮은 선수를 찾기도 힘들다.

라울은 챔피언스 리그 출장 회수도 1위이면서, 통산 득점 랭킹에서도 1위이다. 112시합에 출장하여 56골을 마크하고 있다.


53점으로 2위인 판 니스텔로이는 본격파 스트라이커. 3위인 ??첸코(46점), 4위인 앙리(43점)도 스트라이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골 헌터이다. 라울과는 특징이 다르다.


닮은 선수를 꼽는다면 73시합에 출장하여 37골(6위)인 델피에로가 된다.


양 선수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기교파 세컨드 스트라이커가 된다.

델피에로는 3-4-1-2로 임했을 때 2톱 아래서 뛸 때도 있지만, 4-4-2에서는 2톱 중의 일각이나, 왼쪽 사이드 하프가 많았다. 즉 유틸리티 성이 높다.


라울에게도 여러 가지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4-2-3-1의 포진이라면, 1톱 아래는 물론 [3]의 좌우에서 Wing적인 플레이도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골 문 앞에 파고들어 온다. 머리로 골도 자주 넣는다.


패서 타입인 델피이로와 비교하자면, 유동적인 플레이가 눈에 띈다. 경기 흐름에서 득점에 가세하는 것이 라울. 특기인 킥으로 득점을 노리는 것이 델피에로.


양 선수가 확실히 다른 점은 신장이다.

델 피에로가 173Cm인 것에 대해, 라울은 181Cm.

얼핏 보면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8Cm의 차이가 있다. 라울을 직접 보고, 새삼 놀랐던 점이다.


일본으로 말하면 대형 FW이다.

대형이면서 기교파인 것이다. 거기에 라울의 특수성이 있다. 델피에로 타입은 일본에도 있을 듯하지만, 라울 타입은 일본은커녕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존재이다. 거기에 통산 득점왕이며, 가장 오랫동안 활약해주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특별한 [상]을 받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플레이보다, 알기 쉬운 플레이 쪽이 평가가 내려가기 쉽다. 통산 성적이 1위이면서,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발롱도르) 수상 경험은 없다.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2001년조차 오언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라울이 판 니스텔로이와 함께 상대 골을 육박하는 모습을 보자 [축구계의 맹점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타입. 그것이 라울의 진수(眞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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