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V'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8.02.07 최강의 징검다리 감독. PSV의 페르호선 by 渤海之狼
  2. 2007.10.13 [마법사]의 생존자 - 호마리우(Romario) by 渤海之狼
  3. 2007.09.26 잘 나가는 PSV를 지탱하는 두터운 선수층 by 渤海之狼
  4. 2007.06.21 "자칭"1000골을 달성한 호마리우 인터뷰 by 渤海之狼 3
  5. 2007.03.28 최고레벨의 시합을 보는 방법 by 渤海之狼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holland/column/200802/at00016180.html

저자: 나카타 토오루


전 나고야의 감독이었던 페르호선은 징검다리 감독으로 올 시즌 종료까지 PSV를 이끌게 된다.

 

■ 팀 붕괴의 위기를 멈추게 한 애정과 열의

 

 세프 페르호선 신 감독(전 나고야 그랜퍼스 감독)이 되고부터 PSV는 파죽지세다.

 1월에 페예노르트(1-0), 아약스(2-0), 2월에 들어서는 AZ(2-0) 등의 라이벌 팀들을 상대로 원정에서 3연승. 더구나 실점은 제로라는 강력함. 격이 떨어지는 VVV(1-1)에게 비겼다고는 하지만 PSV의 실력은 다른 팀들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어, 어느 샌가 PSV 2위 아약스와 승점 8이라는 격차로 독주 태세에 돌입했다.

 

 10월 말 로날트 쿠만이 발렌시아로 떠나면서부터 PSV는 새로운 감독 찾기에 착수. 12월의 마지막까지는 바우터스 코치가 임시 감독을 맡았으며, 1월부터 올 시즌 끝까지 페르호선이 징검다리 감독. 그리고 다은 시즌부터 스테번스(현 함부르거 SV 감독)가 신감독이 되기로 결정되었다. 이 일련의 인사는 작년 가을에 결정되었는데, 마침 주력 선수들의 연장 계약의 교섭 기간과 겹쳤다.

 

 감독이 바뀌면 방침도 선수 기용법도 바뀐다. 때문에 선수들은 감독 인사에 민감해 진다. PSV의 경우 쿠만에서 스테번스까지 불과 1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에 4명이나 감독이 지휘봉을 쥐게 됨에 따라 선수들의 동요도 컸다. 특히 GK 고메스는 축구 잡지를 통하여 PSV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자칫하면 팀 붕괴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겠지만 고메스의 비판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PSV에 대한 애정이었던 것과 또한 고메스가 여태까지 예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서포터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외국인 선수였던 것도 있어 오히려 고메스의 비판은 PSV가 일치단결 할 수 있는 분위기 생성으로 작용했다.

 

 12 7일 로다 JC와의 시합에서 한 번은 0-4가 되는 등 PSV에게는 지옥의 날. 원래대로라면 서포터들의 분노는 정점에 달했겠지만, 시합 중 스타디움은 고메스에 대한 챈트(응원가)가 울려 퍼졌고 2-4로 참패한 뒤에도 고메스는 서포터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새로운 팀 리더인 아펠라이도 조금 클럽과 충돌하였지만, 무사히 계약을 연장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페르호선이 네덜란드에서 공수된 DVD를 구석구석까지 살피며 PSV의 현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Winning Team, Never Change]


 바우터스는 감독으로써의 역할을 마치고 코치 자리로 돌아왔다.

 쿠만 시대에는 주력 선수로 완소 취급을 받던 페레스. 그러나 바우터스 휘하에서는 벤치 요원이 되었기에 겨울 이적 기간에 아약스로 돌아갔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 PSV가 획득한 즉전력은 주작(Dzsudzsak)이라는 무명의 헝가리 선수 단 한 명뿐. 그러나 [슈퍼 스카우터]라 일컬어지는 데 피서르(Piet de Visser)[각주:1]주작은 반드시 활약한다고 자신만만이었다.

 

 1 12. 페르호선이 이끄는 PSV의 첫 시합 상대는 페예노르트였다.

 

                                      라조비치

                         주작       아펠라이      파르판

                                시몬스        바칼

                크롬캄프 마르셀리스  살시도  아우시제스

                                       고메스

 

 시스템은 4-2-3-1. 이것이 뉴 PSV의 포진이었다.

 페르호선은 처음부터 이 멤버와 시스템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엑셀시오르와의 시합에서는 바칼, 아약스와의 시합에서는 아펠라이가 출장 정지였기 때문에 각각 컬리나와 멘데스를 기용했던 것 이외에는 선발 멤버를 바꾸고 있지 않다. 시스템은 아약스와의 시합에서 약간 손 댓을 뿐. 시스템과 레귤러의 고정.

 

 여태까지 레귤러였던 DF 조네베르트, FW 쿠베르만스 거기에 포텐셜이 높은 MF 아이사티의 출장기회가 페르호선 아래서는 확실히 줄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inning team never change]를 페르호선은 관철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인해 불만을 잠재우고 있다.


■ 재능을 개화시킨 젊은 선수들


페르호선에 의해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을 익혀 성장 중인 바칼.


 페르호선 덕분에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을 몸에 익힌 것이 바칼이다.

 바칼은 지금까지 공격형 MF로 기용되어 왔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DF의 뒷 공간을 파고드는 능력이 뛰어난 젊은 선수로 1.5열에서 기용되면 볼을 가져도 앞으로 향하질 못하여 그 좋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합이 많았다. 그러나 중앙 MF로 컨버트 되자 날카로운 예측력을 바탕으로 한 수비로 어느 시합이건 확실히 팀에 공헌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공간으로 타이밍 좋게 파고드는 것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 페르호선의 첫 시합이 된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 귀중한 골을 넣은 것이 바칼이었다. 아약스와의 시합에서도 쿠베르만스가 볼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대 팀 DF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 골 문 앞에 등장하여 골을 넣었다. 바칼은 뛰어난 중앙 MF인 시몬스의 곁에서 플레이하고 있기에, 부담도 적을 것이며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데 피서르가 자신만만해 하는 뉴 페이스 주작은 곧바로 네덜란드에서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2번째 시합인 VVV와의 시합에서 동점 골을 넣었고 이어서 엑셀시오르, 아약스와의 시합에서도 골을 넣었다.

 주작은 2 2 AZ와의 시합에서도 굉장했다.

 올 시즌 부진한 AZ이지만 그런 만큼 어떻게든 PSV에게 이기고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축구를 전개하여 시작부터 10여분 간 PSV를 자신들의 골 문 앞에만 박혀있게 만들었다. 이 흐름을 바꾼 것이 12분에 쏜 주작의 강렬한 미들 슛이었다. GK 바테르만을 당황하게 한 슛은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나왔고 이것을 라조비치가 침착하게 넣었다.

 AZ의 판 할 감독은,

 그렇게 공격하였는데 우리는 0. PSV는 단 한 번 중앙선을 넘었을 뿐인데 1점을 곧바로 넣어 버렸다. 이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주작은 베르캄프와 같은 가치가 있다

 라며 예전 아약스 레전드의 이름을 거론하며 주작의 빅 플레이를 칭송했다.

 페르호선 감독은, “주작은 왼발의 테크닉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볼이 없을 때도 굉장히 지혜로운 플레이를 한다. FK도 뛰어난 완벽한 선수다라고 21살의 어린 선수의 포텐셜을 꿰뚫어 보고 6시합 전부 기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약스와의 시합에서 움직인 페르호선

 

 쿠베르만스가 있음에도 라조비치 1톱을 고집하는 페르호선 감독.

 쿠베르만스는 팀의 톱 스코어러다. 그러나 페르호선 감독은 라조비치는 굉장히 헌신적으로 움직여 주고 있으며 팀에 꼭 알맞은 선수다. 골 문 앞에서는 에너지를 다 써서 골을 넣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팀에 대한 공헌은 상당한 것이라며 라조비치 1톱에 대한 신뢰가 높다.

 

 페르호선 감독은 선수 교대가 적으며 교대를 하여도 시간대가 늦다. 교대의 이유는 부상당했을 경우나 누가 보아도 선수가 지쳤을 경우 혹은 옐로 카드를 받은 선수가 퇴장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에 선수 교대에 따라 시스템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1 26일 엑셀시오르와의 시합에서 쿠베르만스를 시합 중 투입하여 라조비치와 2톱으로 한 정도.

 레귤러와 시스템의 고정. 소극적인 교대. 이것이 페르호선 감독의 방식이지만 물론 예외는 있다.

 

 1 30일 아약스와의 시합에서는 상대 팀의 장점인 중반을 봉쇄하기 위해서 MF진의 포지셔닝을 변경. 시몬스가 혼자서 중앙 MF를 맡았으며, 바칼이 왼쪽에서 가브리(Gabri)에게, 멘데스가 오른쪽에서 에드가 다비즈에게 붙었다. 이 아약스 중반을 봉쇄하는 계책이 성공하여 PSV 2-0으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특히 다비즈에게 멘데스를 맞부딪히게 한 것은 멋지게 들어맞아 멘데스는 다비즈에게 힘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0-2가 된 후 다비즈는 신경질이 최고조에 달하여 파르판에게 파울성의 강력한 태클(시합 후에 비디오 체크를 한 주심은 이 파울로 퇴장시켜도 좋을 뻔 했다고 말했다), 거기에 멘데스에게는 드롭킥 성의 태클을 먹여 퇴장 당했다.

 다비즈는 멘데스의 마크와 PSV의 강력함에 질겨 PSV와의 시합을 포기하였고 페예노르트와의 시합 출장을 포기, 우승도 포기한 듯하다. 그 정도로 가끔이지만 알맞게 움직인 페르호선의 전술이 빛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주는 인터내셔널 매치 위크로 PSV가 본격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것은 금요일 단 하루뿐. 다음 날인 9일에는 강호 헤렌벤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헤렌벤은 5-0으로 AZ VVV를 무릎 꿇게 하였으며, 피테서에게는 7-0으로 이긴 슈퍼 팀이다. 그런 만큼 PSV 대 헤렌벤은 네덜란드 축구팬이라면 요체크 해야 할 시합이다.

  1. 호마리우나 호나우두를 유럽으로 데려 온 세계 최고의 스카우터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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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Satoshi Hojo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있는 힘껏 펼친 양 손으로 브라질 국기를 등에 매고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리는 자신을 한껏 자랑스러워했다.


 1994년 7월 17일. 미국 로즈 보울 스타디움.

브라질 국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던 날은 한 명의 스트라이커가 그 이름을 역사에 아로새긴 날이기도 했다.


 한창 전성기였던 펠레를 중심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1970년 멕시코 대회 후 실로 여섯 번의 대회를 거친 뒤의 월드컵 우승. 땅에 떨어지려하던 축구 왕국의 위신을 되찾은 것은 신사로 알려진 펠레와는 정반대인 악동 호마리우였다.


 남을 깔보는 듯한 발언을 계속하며 수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엄격하게 정해진 규율도 그에게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사생활에서는 밤에 너무 놀러 다닌다고 하여 감독들의 분노를 산 이야기 등은 셀 수도 없이 많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법자는 아니었다.

 유언실행 - 말한 것은 반드시 행한다. 그 하나만을 집어낸다고 해도 같은 시대를 산 다른 어떤 스타보다도 걸출한 존재였다.


 에스파냐의 명문 클럽 바르셀로나에 이적한 93-94시즌.

개막전에 “30골을 넣어 보이마!”라고 예고하여, 그 숫자대로[각주:1] 넣었다. 그 중 해트트릭이 5번[각주:2]. 총 득점의 반은 몰아넣기에 위해 달성된 숫자이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크라위프에게 사생활을 주의받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은 자기 일만 걱정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밤에 놀러 다니기에 골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크라위프라도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사생활이 문란하건, 연습에 지각하건, 정작 게임이 시작되면 벤치의 기대대로 골을 넣어갔다. 프로에게 부과된 사명이 결과라고 한다면 호마리우정도의 프로페셔널도 없었다.


 “이번 월드컵은 호마리우를 위한 대회이다”

 그렇게 선언하고 임한 1994년 월드컵 미국대회. 그리고 선언대로 대회는 호마리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우승이 결정된 순간부터 카니발이 펼쳐지는 듯이 기뻐 날뛰는 팀 동료들과는 대조적으로 경직된 얼굴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베테랑 프랑코 바레시에게 봉쇄된 것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한 골만 더 넣으면 득점왕의 타이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인지……. 어쨌든 그 얼굴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명랑한 브라질리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많은 브라질 국민들이 호마리우에게 가지고 있는 감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24년에 걸친 공백을 메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왕국의 부활을 알려주는 심벌로써, 그를 사랑했다. 90년대에 있어서 그만큼 브라질리언다운 브라질리언은 없었다.


 1966년 1월 29일.

 ‘호마리우 지 소사 파리아’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에서 태어났다.

 사커 닉네임이 주류인 브라질에서는 별나게 호마리우는 본명이다.

 도장공(塗裝工)인 부친은 처음으로 얻은 장남의 이름을 붙이는데 굉장히 고민한 끝에 당시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붙였다.

 [살아있는 사전, 돈 호마리우].

 여러 가지 단어의 의미를 해설하는 호마리우 박사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거기에 부친의 어떤 바람이 담겨져 있었는지는 둘째 치고, 아들은 단어를 설명하는 대신 온갖 패턴의 골을 넣어가는 골의 박사가 되었다.

 공칭 168Cm. 실제로는 더 작을 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소아천식에 걸려서인지 키가 생각대로 커주질 않았다. 그것이 호마리우의 미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리우데자네이루 주(州)의 명문, 바스코 다 가마의 감독의 눈에 띈 것은 13살 때였다. 곧이어 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기대로 가득 찼지만, 결국 입단할 수 없었다.

 “너무 쪼그맣다”
 라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적으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일원이 되지만 그것도 2부 리그인 올라리아(Olaria Atlético Clube)에서 득점왕에 빛난 수년 후의 일이다. 의지가 되는 것은 언제나 두 다리뿐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에서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어 19살 때에는 처음으로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입고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 출장한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였다.


 21살을 맞이한 87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선수권의 득점왕을 획득. 그 다음해에 참가한 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6시합에서 7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다. 호마리우의 명성이 해외의 여러 나라로 울려 퍼지는 것은 이 때부터이다.

 1988년에 네덜란드의 PSV로 탈취 당하게 되는데, 많은 브라질 국민들에게는 [부르터스, 너마저도]라는 명언으로 알려진 로마의 케사르의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브라질에는 [배신]이라는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브라질리언의 해외로의 유출이 본격화 된 것은 1986년 월드컵 멕시코 대회 직후부터이다. 이 대회에서 불과 2명에 지나지 않았던 [해외파]가, 4년 후인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12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유럽으로 건너간 그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볼의 마술사라는 간판을 버리고, 근면성실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노동자로 변해버렸다. 어떤 선수는 브라질계 독일인으로, 어떤 선수는 브라질계 이탈리아인으로써 대표팀에 돌아왔다. 그러한 [유러피언 척하는 선수]들을 긁어모은 카나리아 군단에는 본능대로 마법의 지팡이를 흔들어, 전 세계의 사람들을 매료해 왔던 예전의 자유분방함도 창조력도 실종되어 있었다.

화려함만으로는 더 이상 세계를 제패할 수 없다. 그런 뿌리 깊은 생각이 유럽화로 경도된 배경에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손에 넣은 것은 낙담과 실망뿐인 패배들뿐이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 22살의 호마리우는 바다를 건넜다.

 그로부터 7년여. 작은 거인은 유럽 축구의 냉엄한 세례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브라질리언으로 존재했다. 그에게서 눈부신 마법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브라질의 어느 기자는 상상과 현실을 오고가는 모습을 [악마]라고 표현했다. 걸작인 것은 호마리우가 바르셀로나에 있을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인 호르헤 발다노(Jorge Alberto Valdano Castellanos)의 말이다.

 “정말 불공평한 이야기다. 그는 애니메이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선수이니까”

 즉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발다노에 따르면 호마리우의 움직임은 비디오를 돌려도 코마 단위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이라고까지 불리는 듯한 요술을 호마리우는 떼지어있는 디펜더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던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94년 월드컵 미국대회에서였다.

 러시아의 GK가 “유럽 선수라면 절대 저 코스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인 오른발 아웃사이드에 의한 상식 밖의 다이렉트 슛. 그것을 시작으로 담담히 5골을 넣어갔다. 그건 전부가 세세한 기교로 만들어진 예술품이었다. 동시에 골은 결코 억지로 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 GK의 손이 닿질 않는 곳에 차분히 굴리면 된다. 이정도로 슛의 기본에 충실한 선수도 없다.


 화려함이 사라진 현대 축구에 있어서 멸종되어 가고 있는 마법사의 생존자. 그 호마리우에게 축구의 신인 펠레는 [천재]라는 말을 선사했다.

Romário de Souza Faria/호마리우 지 소사 파리아.

1966년 1월 2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태생. 축구 왕국이 90년대에 낳은 천재 스트라이커. 명문 클럽 바스코 다 가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살 때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 출전, 2년 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선수권의 득점왕에 빛났다. 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해서 득점왕을 획득. 대회 후 네덜란드의 PSV에 이적하자마자 득점왕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89년에는 브라질 대표의 일원으로 자국에서 개최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 베베토와 투 톱을 짜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90년 월드컵 이탈리아에서는 벤치였다. 93년에 이적한 바르셀로나에서 득점왕을 획득하여, 그 기세를 살려 94년 월드컵 미국대회에서는 5골을 넣어 브라질을 6 대회만의 4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1. 33시합 30골. [본문으로]
  2. 그 중 한번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시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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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holland/column/200709/at00014773.html

저자: 나카타 토오루


9월 15일 3연승 중이던 피테세에게 승리.

19일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CSKA 모스크바에게 승리.

23일에는 4연승 중이던 페예노르트에게 승리.

요 일주일간 PSV는 홈에서 강적 3팀을 상대로 연승가도를 달리는 등 승승장구.

그 중에서도 4-0으로 페예노르트를 쳐부순 시합은 서포터들도 흥분.

“지금까지 PSV는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기에 설마 4-0으로 이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고 시합 후 인터넷 팬 포럼은 활기로 가득 찼다.


올 시즌 PSV의 특필할 만 한 점은 선수층이 두터워졌다는 것이다.

시즌 개막 직전 PSV는 부상 선수가 속출. 8월 19일 개막전 헤라클레스(2-0으로 PSV의 승리)와의 시합에서는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겨우 나은 코네(Arouna Koné)를 원 톱에 두는 4-5-1 시스템밖에 할 수 없었다.

계속된 25일 NEC와의 시합은 라조비치(Danko Lazović)를 원 톱으로 했다. 중반은 수비적인 MF 시몬즈(Timmy Simons)의 앞에 아펠라이(Ibrahim Afellay), 페레스(Kenneth Perez), 아이사티(IsmaAissati), 바칼(Otman Bakkal)이라는 4명의 창조적인 MF를 포진시키는 화려함이었다.


곧이어 코네는 세비야로 떠났고, 쿠베르만스(Danny Koevermans)가 AZ에서 이적해 왔다. 9월 1일 트벤테와의 시합(0-0)은 NEC와의 시합과 같은 포메이션으로 임했다.

15일 피테세와의 시합에서는 라조비치와 쿠베르만스의 투 톱으로 행했기에, 아이사티는 벤치로 물러났다. 쿠베르만스는 곧바로 실력을 발휘하여, 지금까지 AZ에서는 볼 수 없었던 멋진 미들 슛을 넣어 PSV 팬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축구 관계자들도 놀라게 했다.


피테세의 연승을 스톱시킨 PSV이었지만, NEC와의 시합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시간대와 상대의 시간대가 너무도 확연했다. 다섯 명이나 공격수를 내세운 포메이션은 공격할 때의 시간대에는 어마어마한 창조성을 발휘했지만, 상대가 반격에 나서자 PSV는 간단히 주도권을 넘겨버렸다.

“이 포메이션은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국내용. 유럽용은 아니다”

피테세와의 시합 후 그렇게 통감한 로날트 쿠만 감독은, CSKA 모스크바와의 시합에서 [위닝 팀, 네버 체인지]의 원칙을 깼다.


■ 4명을 바꾸고, 불의의 사고도 극복한 CSKA와의 시합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 2득점을 올린 새로 입단한 페레스(왼쪽). 올 시즌 PSV의 특징은 선수층이 굉장히 두텁다는 것이다.

CSKA 모스크바와의 시합에서는 피테세와의 시합 선발 멤버에서 DF 크롬캄프(Jan Kromkamp), 조네베르트(Mike Zonneveld)-출장정지처분-, MF 바칼-부상-, 페레스가 빠지고, 다 코스타(Manuel da Costa), 아우시제스(Alcides), MF 멘데스(Edison Mez), 컬리나(Jason Čulina)를 기용, 실로 4명이나 바뀌었다.

다 코스타, 아도(Eric Addo), 살시도(Carlos Salcido) 세 명으로 바그네르 러브(Vagner love)와 죠(J 막고, 멘데스와 아우시제스가 측면을 경계, 시몬즈가 앵커가 되었고, 컬리나가 소방수가 되는 수비 중시의 포진이었다. 그 때문인지 PSV의 전반전은 적극성이 부족하여, CSKA 모스크바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후반 PSV는 CB, 양 사이드의 MF, 컬리나가 공격 참가를 늘려 팀 전체가 전진하여 빅 찬스를 몇 번이나 맞이하였다. 하지만 챔피언스 리그 첫 출장인 투 톱, 쿠베르만스와 라조비치는 슛 순간에 너무 경직되어 0-0인 채로 시합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팀을 구한 것이 전반 도중 발가락이 부러져 퇴장한 아펠라이를 대신해서 등장한 베테랑 페레스였다.

59분, 쿠베르만스가 원 터치로 페레스에게 볼을 흘려주자 상대 DF를 끌어들이면서 페레스는 라조비치에게 스루 패스. 라조비치는 GK의 타이밍을 놓치게 하는 인사이드 킥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멋진 콤비를 쌓아 나가고 있는 라조비치와 쿠베르만스와의 사이에 페레스가 중간에 끼어들어 PSV는 트리오에 위한 콤비네이션을 손에 넣었다.


1점 빼앗긴 CSKA 모스크바는 맹반격에 나섰다.

PSV에게 있어서는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장면이 속출, 언제 동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80분 PSV는 카운터를 멋지게 성공시킨다. 페레스가 CSKA 모스크바 골의 니어 사이드를 꿰뚫는 골로 팀을 2-0으로 이끌었다.

전 시합에서 4명의 선수를 바꾸어, 거기에 전반 도중에 아펠라이를 잃는 불의의 사고를 맞이했던 PSV였지만, 그래도 CSKA 모스크바에 확실히 2-1로 이겼다. 그 중에서도 페레스는 준비도 하지 못했던 급작스런 출장이었지만, 곧바로 시합 흐름을 타고 1골 1어시스트라는 활약을 보였다.


“도중 출장은 당신에게 있어선 특기이죠?”

시합 후 인터뷰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페레스는,

“아니. 마음이 아프다”

라고 미소를 지으면서 곧바로 답변했다.

AZ에서 급성장하여 지난 시즌 아약스로 이적했던 페레스이지만 스나이데르의 영향으로 인해 거의 도중 출장이었다. 그래도 27시합에서 12골은 대단하다. 페레스에게 있어서는 AZ 시대의 13골에 이은 자기 기록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즌에 들어서도 아약스의 텐 카터 감독은 “스나이데르가 이적하게 되어도 페레스는 주전 멤버가 아니다”라고 페레스의 기용법을 명확하게 하여, 페레스를 실망시켰다.

“아약스에서 주전 멤버가 될 수 없다면 다른 팀에서 주전이 되겠다.”

그렇게 결심한 페레스는 라이벌 PSV로 왔다. 그렇기에 “도중 출장은 페레스에게 있어서 특기다”라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말에 페레스가 “예. 그렇죠.”라고 응대할 수가 없었다.


■ PSV의 선수층이 두터워진 4개의 이유


지난 시즌 네덜란드 선수 득점왕 쿠베르만스는 AZ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PSV로 이적해 왔다.

페레스와 같은 분노는, 쿠베르만스와 라조비치에게도 있다.

지난 시즌 22골을 넣어, 네덜란드 선수들 중에서는 톱 스코얼러가 된 쿠베르만스이지만 올 시즌은 여름 준비기간 동안 판 할 감독과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었다.

AZ는 올 시즌 아리(Ari da Silva Ferreira)[각주:1], 펠레(Graziano Pellè)[각주:2]라는 재능 풍부한 FW를 획득하였기에, 판 할 감독은 새로운 시즌의 투 톱의 제 1옵션을 뎀베레(Moussa Dembélé)와 아리의 콤비로 하기로 하여 쿠베르만스는 '핀치히터'[각주:3]로 벤치 스타트의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쿠베르만스는 페예노르트로의 이적을 열망했지만, PSV에 오게 되었다.


라조비치는 몇 년에 걸친 분노다.

페예노르트에서는 휠리트 감독과 에르빈 쿠만 감독도 라조비치를 신뢰하지 않았다. 라조비치는 레버쿠젠, 파르티잔 베오그라드, 피테세를 전전하면서 차츰 네덜란드의 톱 클럽 PSV에 입단하는 찬스를 잡았다.


PSV의 선수층이 두터워진 것은,


1) 지난 시즌과 비교해서 선수가 성장했다.

-> 아도, 컬리나, 아펠라이 등


2) 다른 팀에 렌탈로 가서 성장하여 돌아왔다.

-> 아이사티, 바칼(둘 다 트벤테)


3) 이적이 예상되었지만, 팀에 남았다.

-> 고메스(Gomes), 바이리넨(Mika Vynen), 파르판(Jefferson Farfán)


4) 다른 팀에서 획득

-> 라조비치, 쿠베르만스, 페레스, 조네베르트 등


이란 4개의 항목 별로 이유가 있는데 특히 라조비치, 쿠베르만스, 페레스는 라이벌 팀에서의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빅 클럽에서 쫓겨나 혹은 스스로 떠날 결심을 한 그 들 세 명의 동기 부여가 높았던 점, 새로운 기분으로 리셋된 것은 다른 팀에게 있어선 위협이다.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도 쿠만 감독은 선수를 대폭으로 바꾸었다.

CSKA 모스크바와의 시합에서 뛰던 DF 다 코스타, 아우시제스, MF 아펠라이-부상-, FW 쿠베르만스가 빠지고,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는 DF 크롬캄프, 조네베르트, MF 페레스, FW 파르판이 선발하여, 포메이션은 3-5-2에서 4-4-2로 돌아왔다.


■ 12번째 이후의 선수의 격차


지난 시즌의 대부진이 거짓말같이 개막 4연승으로 절호조인 페예노르트였지만, 전 라운드 로다 JC와의 시합에서 플라르(Ron Vlaar)가 부상-장기 이탈한 만큼 수비진이 무너져, 대량 4실점을 허용해 버렸다. 페예노르트는 주전 11명의 수준은 높지만, 12번 째 이후의 선수와의 수준 차이도 또한 크다.

한 편, PSV는 개막전부터 자유로이 멤버, 포메이션을 바꾸고 있다. 부상으로 인한 소극적인 변경이라도, 전술적인 이유로 인한 적극적인 변경이라도, 쿠만 감독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는 투 톱이면서도, 센터에는 라조비치 한 명을 세우고, 파르판을 일부러 왼쪽 사이드에 붙어있게 하여, 왼발잡이 오른쪽 CB인 호플란트(Kevin Hofland)를 끌어냈다. 이렇게 해서 호플란트는 약점인 쫓아다니며 플레이 하는 것이 많아지게 되었고, 또한 특기인 왼발 롱 패스도 제한되었다.


페레스는 또 다시 CSKA 모스크바와의 시합에 이은 2골로 활약했다. 그러나 쿠만 감독은,

“페레스의 이름을 활약한 선수로써 언급하기는 쉽다. 오늘 굉장했던 선수는 컬리나다.”라고 지금까지 테크닉이 부족하고, 팬들에게서 이름이 꼭 집혀서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컬리나의 성장을 기뻐했다.

컬리나는 테크닉은 여전히 톱 레벨과 비교하면 동떨어진 수준이지만, 최근 여러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올 라운더로써 평가받고 있다. 그러한 멀티 플레이어가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에서는 풍부한 운동량으로 중반에서의 우세를 가져와, 거기에 1어시스트도 기록했다. 컬리나와 같은 지난 시즌부터 있던 선수의 성장. 이것도 또한 PSV의 선수층을 두텁게 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지난 시즌 PSV의 너무나도 얇은 선수층을 걱정했지만 올 시즌은 보강이 잘 이루어져 굉장히 선수층이 두터워 졌다. 지금은 강팀을 쓰러뜨림으로 인해 PSV의 선수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알게 되고, 자신감이 생겨, 더욱 레벨 업하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피테세와의 시합부터 1주일 간, 페예노르트와의 시합으로 팀으로써 일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걱정되는 점도 있다.

지금까지 네덜란드 리그에서 5시합 연속 무실점이라는 견고한 수비가 눈에 띄는 PSV이지만, CSKA 모스크바의 바그네르 러브와 죠에게는 상당히 고전했다. 겨울 모스크바로의 원정 경기도 힘들겠지만 인테르나치오날레, 페네르바체와의 원정 경기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강적과 원정에서 싸울 때 단번에 PSV의 방파제가 무너져,그 후의 국내 리그에 영향이 생긴다는 시나리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Kalmar FF에서 이적. [본문으로]
  2. US Lecce에서 이적. [본문으로]
  3. 야구 용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2005년 야구 월드컵 개최 이후, 축구 용어로도 사용되며 정착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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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607/other/column/200706/at00013505.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자칭" 1000골을 달성하여, 축복받는 호마리우(오른쪽)

 호마리우 데 소우자 파리아.

 41세를 맞이하는 [악동]은 5월 20일 스포르치 레시페와의 시합에서 PK를 넣어서 자신의 통산 1000골 째를 기록했다. 아마추어 시대의 득점이나 친선시합에서의 것도 포함하고 있기에, 지금까지도 “자칭”1000골에는 많은 의문부호가 달려있지만 본인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호마리우는 현재도 소속하는 바스코 다 가마에서 1985년 19살로 프로 데뷔를 하고, 88년에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PSV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93년에서 2시즌을 보낸 바르셀로나에서 크라위프가 이끄는 “드림 팀”에서 득점왕에 빛나, 그 후도 세계 이곳저곳의 클럽을 거치면서 현역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바이싱요”(꼬마)라는 닉네임으로도 알 수 있듯이 호마리우는 신체적으로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스트라이커로써 발군의 득점감각으로 골을 넣어왔다.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베베토와의 2톱으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어, 대회 MVP에도 선정되었다.

 스타로써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함과 동시에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한 필드 밖에서는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사랑받는 캐릭터로써, 브라질 국민들에게는 펠레나 지쿠를 뛰어넘는다고도 할 수 있는 인기를 자랑한다.

 통산 1000골 달성을 터닝 포인트로, 지금까지 걸어온 선수생활, 수많은 전설적 에피소드,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하여, 호마리우가 말한다.


■ 은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 통산 1000골을 달성했는데 어떤 기분인지요?


우선은 안심이라고 할까? 이 나이가 되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지만 여기 오기까지는 불안도 있었다. 오랫동안 골을 넣을 수가 없어서, 999골인 채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1000골을 달성할 수 있어서 최고다.


거기에 우리 어머니도 굉장히 힘들었다. 매번 스타디움에 오지 않으면 안 되었지, 나 자신도 어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후 (통산 1281골을 달성한) 펠레도 1969년, 1000골까지 마지막 한 골이 남았을 때 6시합 연속으로 골을 넣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와 같구나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지금은 안정되어있으며 공식적으로도 발표했지만 은퇴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시대는 터닝 포인트를 돈 듯한 느낌도 들며, 톱 레벨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선수라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택된 인간뿐이라는 것도 알 터이다.


- 여기에 이르기까지 FIFA(국제 축구 연맹)가 공식적으로는 1000골이 아니라고 표명하거나 펠레가 자신의 기록에는 281골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등 시끄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던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 않다. 각각 좋을 대로 계산하는 것은 자기들 마음이니까. 각각의 시대, 상황에 따라, 같은 기준으로 골수를 세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펠레같은 경우 산토스에서 약소 클럽을 상대로 넣은 골이라던가, 여러 종류의 골이 카운트되어 있다. FIFA가 무엇을 기준으로 “공식”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기준 같은 것은 신경 쓰고 있지 않다.

내 자신이 이룬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이 계산해준 숫자로는 내가 1000골이라는 꿈을 실현한 것이다. 그걸로 OK다. 거기에, 내 골에 대해서 누구도 불만을 말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며, 상처받는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 브라질에서는 당신과 펠레 외에, 20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Arthur Friedenreich(1892-1969))가 1000골을 달성했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좋지 않나? 어쨌든 (1000골을 달성한 사람은)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밖에 없으니까.


■ 2002년 월드컵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 통산 1000골의 위업은 세계 챔피언보다 나은 것일까요?


각각 다른 것이다. 1000골이 세계 챔피언보다도 나은 것인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이룬 시간이 얼마만큼 걸릴지를 생각해 보면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1000골 쪽의 굉장함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브라질 대표는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니까 그 만큼 해당되는 선수의 수도 많다.


- 펠레와 비교해 본다면?


시대나 플레이 스타일은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창조력 있는 선수이기는 하나 그 시대는 마크가 타이트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는 대부분 브라질에서 보냈다. 내가 플레이한 시대는 마크도 펠레의 시대보다 더 타이트했다. 브라질 외에도 네덜란드나 에스파냐 등 해외에서도 플레이 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둘 다 세계 챔피언도 되었고, 1000이상의 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펠레에게는 [완벽한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당신은 [규율이 없다], [제멋대로]라는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모두 어느 쪽이 나의 “철학”에 맞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며, 실제로 나는 즐기며 그렇게 살아왔다. 풋볼에 있어서도 그러한 정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는 스트라이커로써의 일을 태만히 한 적은 없다. 수비적인 플레이를 하거나, 공격을 하지 않거나, 플레이를 즐기지 않는 것은 문제 외라고 생각한다. 내 언동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나’인 것이다.


- 그래도, 2002년 한일월드컵 멤버에서 제외되었을 때에는, 스콜라리 감독에게 멤버로 뽑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한 적이 있었죠?


그건 끔찍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조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는 레벨이었으며 제외된 것은 풋볼 이외의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브라질 국민들도 내가 월드컵 멤버에 선택되어져야 한다고 항의했었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더 이상 그 때를 머리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 당신의 존재는 그렇게까지 팀을 분열시켰던 것이었나요?


흥미본위로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브라질 대표 팀 동료에게 적대심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위선은 견딜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1998년 프랑스 대회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자갈로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지쿠와는 생각이 틀렸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 말디니(왼쪽)와 경합하는 호마리우.브라질은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4번째 우승을 이루었다.

■ 자신의 경력에는 만족하고 있다.


- 언제까지 현역으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렇게 길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젠 나이가 나이이며, 꿈이었던 1000골을 달성하기 까지 현역으로 남았다. 단지 곧바로 은퇴한다는 것은 아니고 상태를 보면서 결정하고 싶다. 하지만 많은 선수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 냈듯이 내 자신의 경력에는 만족하고 있다.


- 은퇴한다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감독이 된다거나?


모르겠다. 단지 나 자신이 감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개인 사업도 하고 있으며 재산도 많다. 앞으론 아이들과 함께 하거나, 모래사장에서 쉬는 것도 좋아한다. 장래에 대해서는 냉정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급할 것도 없으며 생각할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 이렇게 오랫동안, 당신은 어떻게 풋볼 선수로써 모티베이션(동기부여)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나요? 플레이 하는 것에 질린 적은 없었나요?


플레이 하는 것을 즐기고 있으면 따분해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체적으로는 옛날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언제라도 컨디션을 좋은 상태로 계속 유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 동료가 현역을 은퇴하여도 나는 여전히 계속 뛰고 있다.


몇 번이나 뛰는 클럽이 변했으며 수뇌진이나 팬과 충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합이 되면 나는 골을 넣는 것에 집중해 왔으며, 중요한 대회에서 플레이 하는 것이나 다음 월드컵에 출장하는 것을 모티베이션 해왔다. 그리고 통산 1000골이 가까워져서부터는,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커다란 목적의식이 있으면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은 간단하다. 반대로 어려운 것은 그것을 실현한 뒤에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2002년 월드컵에서 좌절감을 맛보았을 때는 힘들었으며 다음 모티베이션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나에게는 “1000골”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나타났다. 그것이 없었다면 플레이를 관두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베베토가 베스트 플레이어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 해 온 선수 중에서 베스트 플레이어는?


많이 있지만 브라질 대표팀에서 월드컵 타이틀을 함께 딴 베베토이려나.

단지 나는 많은 팀에서 플레이 해 왔으며 명수(名手)는 많이 있었다. 바르셀로나 시대의 미카엘 라우드롭, 스토이치코프, 과르디올라, 쿠어만, 브라질 대표에서 함께 플레이 한 마징요, 마우로 실바, 호나우두……. 운 좋게도 정말 많이 있다.


- 그렇다면 가장 추억에 남는 일은?


그것도 굉장히 많이 떠오르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9년에 행해진 브라질 개최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 나는 우루과이와의 결승에서 골을 넣었다. 그 날은 7월 16일로 딱 1950년의 브라질 월드컵에서 일어난 [마라카난의 비극]에서 39년, 더구나 장소도 똑같은 마라카난 스타디움, 상대도 같은 우루과이였다. 그 사건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있어서 정말 괴로운 사건이었기에 내 결승점으로 우승한 것은 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94년 월드컵, LA에서 행해진 이탈리아와의 결승이다. 브라질은 70년 이후, 24년간이나 우승하지 못했기에, 될 수 있으면 PK가 되기 전에 시합을 끝내고 싶었지만.

세 번째는 다름 아닌 나의 1000골의 순간이다.


- 지금까지 수많은 스캔들에 휩싸였다고 생각하는데, 후회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나는 까다로운 성격으로 몇 번이나 실수를 해왔다. 하지만 악의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내 자신의 생각을 정면에서 전해주었으며 거짓말은 없었다. 이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그 반동이 되돌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니까.

나는 나이며,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스타디움에서도 필드 밖에서도 변함이 없다.


■가장 좋았을 때는 PSV와 바스코 다 가마 시대


- 앞으로 1000골을 달성하는 “제 2의 호마리우”는 출현할까요?


어떨까...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단지 펠레가 1000골을 넣었을 때의 시대는 한 번 끝난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때부터 내가 나왔다. 그렇기에 앞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나와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 첫 골을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이다. 그 날, 나는 바스코 다 가마에서 노바 베네시아를 상대로 2골을 넣었다. 정확하게는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85년 8월 18일이라고 한다. 단지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어디까지나 프로로써 첫 골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미 79년에 오라리아에서 플레이 했을 적에, 리오데자네이로의 아메리카노와의 시합에서 골을 넣었다.(주:1000골은 여기서부터 카운트 한 것). 아직 굉장히 어렸으며, 급료를 받지 않았던 시대다.


- 마지막으로, 당신이 선수로써 가장 빛나고 있었던 적은, 크라위프가 이끌던 바르셀로나의 “드림 팀” 시대일까요?


리가 에스파뇰라는 톱 리그이며, 바르셀로나에는 수많은 스타 선수가 있었기에 나의 선수 경력 중에서 가장 반향이 컸던 시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 가장 좋았던 때는 PSV와 바스코 다 가마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주:1950년 브라질 월드컵대회. 이 대회에서는 1차 리그 수위 4팀이 모두 붙는 결승 리그를 행해서 우승을 결정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2시합을 끝낸 시점에서 브라질이 승점 4, 우루과이가 승점 3.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마지막 시합에서, 무승부 이상이면 우승이 결정되는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1-2로 역전패하여, 우승을 놓쳤다. 비탄에 잠긴 브라질 국민들 중에는, 자살하는 사람이나 쇼크사(死)를 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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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기야마 시게키

챔피언스리그 떨어진 팀끼리 붙은 클라시코. 메시의 활약으로 바르셀로나는 3골을 넣었지만, 레알 마드리드도 판 니스텔로이의 2골을 포함한 3골을 넣어 시합은 비겼다.

“메시, 해트트릭!!”


클라시코를 관전한 다음 날 에스파냐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오자 메시의 활약에 일본은 들끓고 있었다. “굉장하군요!!”라면서 어떤 텔레비전 해설자는 시합의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그의 플레이를 절찬하였다.


그건 아니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절찬을 받아 마땅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그 4일전 앤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침묵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이다. 이제는 옛날이야기인 것인가? 적어도 지금 메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클라시코가 아닌 챔피언스 리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합의 중요도가 다르다. 클라시코도 중요한 시합이지만 챔피언스 리그와 비교해서는 아니다. 에스파냐에서 가장 주목도가 높은 카드라고는 하지만 이번 시합과 같은 경우는 서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떨어져나간 바로 다음 시합. 패전의 충격이 아직 남아있던 탓인지 긴장감이 조금은 떨어진 듯이 보인 시합이었다. 이런 구별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뉴스를 전달하는 측은.


오히려 일본에서는 [굉장해!!]라고 절찬 받는 선수가 어째서 리버풀과의 시합에서 활약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리버풀이 어떻게 메시를 막을 수 있었는지를. 이런 것이야말로 가져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메시가 없으니까. 언젠가 메시와 같은 굉장한 선수와 시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무대에 서면 일본은 약팀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르셀로나와 시합한 리버풀과 입장이 비슷하다. 메시 공략법이야 말로 지켜봐야할 포인트인 것이다. [메시는 굉장해!]로 끝나서는 일반 시청자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리버풀은 메시에게 볼이 건네지면, 반드시 두 선수가 달라붙었다. 그래도 메시는 특기인 드리블로 돌파하려고 기를 썼다. [알까기 돌파]를 성공시켜 한 선수를 돌파하자 앤필드에서 순간 감탄사로 가득 찼다. [적이지만 굉장해!] 입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한 사람의 축구 팬으로써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선수 연속으로는 불가능한 플레이. 자연스레 공격은 거기서 멈추게 된다. 알까기 돌파를 당한 첫 번째 선수도 곧바로 커버로 돌아갔다. 2초, 3초, 4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그러면 메시는 어쩔 수 없이 백패스를 했다.


이러한 장면을 몇 번씩이나 보았다. 메시가 특기인 드리블로 국면을 타개한 장면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가랑이 돌파를 해보았자 대국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마이너스 작용을 한 경우 쪽이 많았을 정도였다. 엑스맨이라고까지 할 순 없지만 리버풀에게 진 패인의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메시는 확실히 잘한다. 하지만 팀플레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플한 플레이하는 지윌리가 출장하는 쪽을 리버풀은 싫어했음에 틀림이 없다.


굉장한 선수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초일류는 아니다. 진정한 슈퍼스타는 리버풀과의 시합 같은 챔피언스리그의 큰 무대에서 활약해야 정상이다. 메시는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진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놀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재방송된 시합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시합은 아스날과 PSV로 결과는 PSV의 승리. 이변이 일어난 시합이었다. 해설자는 시합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스날의 문제는 자기 진영에서 수비만 하는 상대를 어떻게 공략해야할까 입니다. PSV의 수비적인 축구는 그다지 좋아지질 않습니다만” 이라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둘째 치고 PSV가 수비만 했다고 하는 관점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 확실히 2차전은 아스날이 볼을 지배하는 시간이 길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경향은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PSV가 수비만 한 축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스날이 홈이었기 때문이며 기본적으로 강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팀에 대하여 약팀을 자처하는 PSV는 1차전에서 과감한 작전을 썼다. 항상 써 오던 4-3-3을 4-4-2로 변경하여 시합에 임하였는데, 그 4-4-2가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요점은 2톱이 포지션을 잡은 위치였다. 중앙부근에 있는 일반적인 스타일과는 다르게, 두 선수는 각각 좌우의 윙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즉, PSV는 아스날이라는 강팀에 대하여 센터포워드를 두지 않고 싸운 것이다. 어떻게 점수를 올릴 생각인가? 일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포진을 쿠만은 이런 큰 무대에서 감행했다.


그는 그 전에 강팀이 싫어하는 것을 생각했다. 양 사이드에 각각 세 명(SDF-SMF-WF)의 선수를 배치하여, 그곳에서 수적인 우위를 살리려고 한 것이다. 강팀의 공격 루트는 자연스레 중앙으로 집중되어 버렸다. 비효율을 불러온 것이다.


아스날은 PSV의 전술적인 덫에 빠진 것이다. 쿠만의 지휘는 빛을 발했다. 마치 히딩크처럼 기책(奇策)을 발휘한 것이다. 이것도 약팀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일본이 참고해야만 할 작전이다. 물러나 수비만 하는 축구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챔피언스리그를 관전할 때 어쨌든 일본인은 강팀 측에 서는 경향이 있다. 인기팀 편에 서, 인기선수를 응원하면서 시합의 행방을 지켜본다. 그것은 그걸로 좋지만 일본이 처해진 상황을 생각하면 그것은 현명한 관전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이변이 일어날 때 정도는 약팀의 전법을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챔피언스리그에서 배울만한 것은 별로 없다. 세계에서 뒤쳐지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챔피언스리그를 지켜보는 것인가?

슈퍼스타의 플레이를 감상만하는 시대는 일찌감치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ps; PSV의 시합을 볼 때, PSV의 관중이 외치는 소리..

[부엔~~]인지 [보엔~~]인지... 하여튼 이 뜻은 [슈퍼 약팀]이라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원래는 네덜란드 어느 시골팀의 응원인데, PSV가 따라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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