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07.04.12 네덜란드를 떠받치고 있는 육성 피라미드 by 渤海之狼
  2. 2006.06.15 6월 12일 호주 vs 일본 by 渤海之狼
  3. 2006.06.07 호주 감독 히딩크의 도전 by 渤海之狼
  4. 2006.04.21 짧은 거 두개 by 渤海之狼
  5. 2006.03.23 제라르 울리에 by 渤海之狼 2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607/holland/column/200703/at00012782.html
저자: 나카타 토오루

인조 잔디 필드를 가진 아마추어 클럽 아르곤은 나쁜 날씨라도 연습에 지장이 없다.


■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축구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

 저공비행하는 유럽의 비행기를 타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곧이어 수많은 축구장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실감한다.

 [지금 난 네덜란드로 돌아왔구나~]하고.

 한국의 반 정도의 크기인 소국(小國) 네덜란드에는 4000개가 넘는 축구 클럽이 있다.
 각각의 팀에 축구 구장 하나와 연습장 몇 개, 클럽 하우스를 갖추고 있다. 각 클럽들이 축구 구장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없다. 예를 들면 페넨달이라는 마을에는 DOVO와 GVVV라는 네덜란드에서는 유명한 클럽이 있지만 양 클럽이 떨어진 거리는 불과 5M폭의 길 하나. 각각이 축구 구장, 연습장, 클럽 하우스, 주차장, 유스 육성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더비에는 3000명 정도의 관객이 열광한다. 거기에 DOVO의 옆에는 또 하나의 무명 축구 클럽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치스러울 수가……. 필자가 살고 있는 집에서도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두 개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이 있다.

 네덜란드의 축구라고 하면 [아약스], [페예노르트], [PSV], [AZ], [네덜란드 대표], [토털 풋볼], [공격형 축구], [4-3-3] 그리고 크라위프로 대표되는 수많은 [명선수] 등이 키워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네덜란드에 살아보면, 이런 키워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각 마을에 여러 개 있는 아마추어 클럽의 존재에 있다 - 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인은 1군, 2군, 3군 등 레벨에 따라 플레이 할 수 있으며 어느 클럽이라도 유스 팀을 각 세대별로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약 4000개의 클럽에, 6만에 가까운 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라도]

 이것이 축구가 가진 원래의 재미였을 터.
 여기에는 싼 티켓을 시합 당일 사서 프로의 축구를 즐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금의 프로 축구 세계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많은 나라에서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특히 네덜란드의 아마추어 축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라도]의 정신이 지켜지고 있다. 어디에 살고 있건, 어떤 레벨이건 사람들에게는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 있으며, 플레이 할 수 있는 팀과 장소가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아마추어 클럽

 [한 번 톱 클럽의 관계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게 생각하여, 네덜란드의 톱 아마추어 클럽, 아르곤을 방문해 보았다.
 아르곤은 1만 60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 마이드레히트에 있다. 위트레흐트 주(州)이지만 실제로는 위트레흐트의 마을에서는 30Km 떨어져 있으며 철도는 없고, 고속도로에서도 떨어져 있는 육지의 섬이다. 아르곤은 마이드레히트의 중심지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공식전을 치루는 메인 축구 구장에는 작은 스탠드가 있다. 천연 잔디의 연습장은 5개. 인공 잔디의 연습장은 1개.
 필자가 아르곤을 방문했던 때는 평일 밤 연습이 있었는데 날씨는 최악으로 큰 비가 내렸다. 그러나 인공 잔디덕분에 유스 세대에서 톱 팀까지 시간을 조금씩 늦추거나, 필드를 서로 나누거나 해서 평소와 다름없이 연습하고 있었다.

톱 팀의 감독, 얀 자우트만(37세)의 말에 따르면,
[필드는 전부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소유. 클럽 소유가 아니다]라고 한다.

- 그렇다면, 인조 잔디도?

[그렇다. 인조 잔디 필드도 지자체의 소유이다. 클럽의 소유물은 조명, 스탠드, 클럽 하우스 등이다. 우리들이 인조 잔디 필드를 만들어 달라고 지자체에게 계속 조른 것이 결실을 맺었다. 덕분에 이런 나쁜 날씨에서도 보통과 같은 메뉴의 연습을 짤 수 있게 되었다.]

- 그렇다는 것은 잔디 관리도 지자체가 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일주일에 2번 정도 지자체에서 사람이 와서 잔디를 손질한다. 때문에 지자체에게 “첨엔 돈이 좀 들겠지만, 인조 잔디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인건비가 절약된다”고 말하니 OK사인을 내려주었다. 아르곤만 인조 잔디를 설치하는 것은 다른 클럽에겐 불공평하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아마추어 클럽에도 인조 잔디가 깔린 연습장이 만들어졌다(웃음)]

- 과연~. 우선 한 가지 묻겠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마추어 클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 병원, 경찰 등은 생활하는데 불가결한 것. 축구 클럽도 그런 것처럼 당연한 것?

[뭐, (네덜란드라면 어느 마을이건 반드시 있는)교회 같은 것이다(웃음). 그러나 요즘 아마추어 클럽이 마을 중심에서 외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마을이 점점 커지면 지자체는 축구 클럽이 있는 장소에 주택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르곤도 가까운 미래에 교외 혹은 공업단지의 구석으로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때는 연습 필드뿐만 아니라, 공식시합용의 축구 구장도 인조 잔디가 될 것이다.]

 가령 클럽의 이전을 지자체가 결정한다고 하여도 이사갈 곳의 토지를 준비해주는 것도 지자체가 해준다는 안심감이 네덜란드 아마추어 클럽에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축구 구장이 지자체의 소유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날씨로 인한 시합 중지 결정권도 지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식시합을 치루는 구장의 필드가 인조 잔디라면 정비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날씨가 나빠도 필드가 악화하지 않기 때문에 시합 중지가 되는 경우도 굉장히 줄어든다는 것이 된다.

■네덜란드 독자적인 육성 시스템이라는 것은?

네덜란드 아마추어 축구를 이야기해 준 자우트만. 다음 시즌에는 프로 감독이다.


 네덜란드의 아마추어 클럽은 우승하여도 프로의 2부 리그에 승격하지 않는다.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인 상태다. 그 결과 다른 유럽 축구 강국에서는 상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프로 1부 리그를 정점으로 한 2부, 아마추어 톱 리그, 하위 리그, 유스 육성……이라는 피라미드형 조직이 되어 있지 않다. 네덜란드는.

 자우트만은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네덜란드 축구 조직은 피라미드로 되어있지 않다. 왜냐면 네덜란드의 아마추어 클럽은 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연습 환경은 잘 갖추어져 있어도 프로로써 공식전을 싸워나가기 위한 시설이 빈약하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상태로 있고 싶어 하는 팀이 많다. 그러나 유스 육성과 스카우팅에 관해서는 네덜란드도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각 프로 클럽이 유스 육성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아마추어 클럽의 유스 육성 부분도 프로를 향한 등용문이 되어 있다.
 FC위트레흐트는 [아카데미]라 불리는 유스 육성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주(州)안에 있는 아마추어 클럽과도 계약을 맺어 좋은 재능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어있다. 산하에 있는 아마추어 클럽은 선수의 공급뿐만 아니라 축구 클리닉, 연습 시합 등으로 프로 팀과 교류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아약스, AZ도 그 지역의 유력 아마추어 클럽과의 유스 육성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엔 FIFA 룰에 따라 프로선수의 계약금 일부가 유스 시대를 보낸 클럽에 환원되게 되어 있다. 페예노르트에서 리버풀로 옮긴 카이트 이적료의 일부는 네덜란드의 아마추어의 명문 클럽 퀵 보이스의 주머니로 들어가 스타디움의 메인스탠드를 개조한다고 한다.
 아마 그 이름도 [디르크 카이트 스탠드]가 될 터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웃음) 아마추어 클럽에게 있어서도 유스 육성은 중요한 것. 아르곤에선 RKC의 캡틴 판 디에먼(patrick van diemen)이 자랐다. 지난 시즌은 (2부인) FC 옴니월드에서 2명이 프로가 되었다. 물론 모두가 전부 프로에서 성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우리 팀이 반드시 또 받아 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어린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영웅”이니까!]

■ 작은 국토이기에 가능한 “피라미드형 육성 시스템”

 자우트만이 말하는 피라미드의 이유는 또 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서 보면 역시 네덜란드의 유스 육성환경이 제일 낫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독일의 육성환경이 좋다”고 말들 하지만 네덜란드만큼은 아니다. 잉글랜드는 프레미어의 팀이라면 “아카데미”를 반드시 소유해야하며 아스날같은 곳은 10개 이상 되는 멋진 잔디 필드가 있다. 하지만 그건 프로 뿐. 아마추어의 그라운드는 잔디가 벗겨져 있고 골포스트는 녹이 슬었으며 골망도 없다. 네덜란드는 아무리 작은 클럽이라도 육성환경이 굉장히 잘 되어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도 독일도 나라가 너무 크다. 유스 세대에서 뉴캐슬에서 포츠머스로 리그의 원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네덜란드는 북쪽의 그로닝겐에서 남쪽의 로다JC까지 유스라도 간단히 원정할 수 있다.
 물론 네덜란드도 아이가 어렸을 적에는 지역 리그가 되지만, 좁은 나라에 프로팀이 북적북적된 덕분에 레벨 높은 몇 개의 프로 클럽과 톱 아마추어 클럽의 유스팀으로 리그를 짤 수 있다. 이것은 작은 나라인 덕분에 가능한 우리들의 이점이다]

 그야말로 스몰 이즈 뷰티풀.
 커다란 나라에서도 작은 나라에서도 프로 1부, 2부 리그가 각각 18~20팀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은 다름없지만 지역 리그를 형성했을 경우 작은 나라 쪽이 그만큼 프로를 모체로 하는 팀이 더 많아져 레벨 높은 경쟁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피라미드형 육성 시스템"을 완성시킨 것이다.

 칼럼을 쓰고 있던 중에 우연히 자우트만에 관한 빅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시즌부터 프로 2부 리그의 하를렘과 2년 계약을 맺어 1군 감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우트만은 아르곤에서 유스 선수를 키워 제자들과 함께 1군으로 승격. 2005년에는 팀을 전국 2위로 이끌었다. 아직 35살이었던 자우트만은 네덜란드에서도 주목을 받는 지도자가 되어, 그 해의 리뉘스 미헐스 어워드를 수상.
[1년 전이었다면 미헐스(1974년 월드컵 때의 네덜란드 감독. 2005년에 사거)에게 직접 트로피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래도 히딩크에게 트로피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은 페트로비치, 프랑크 데 보어, 판 룬 등 왕년의 명선수들과 함께 프로 코칭 라이센스 코스를 다니며, AZ의 판 할 감독 아래서, 연수를 받고 있다.
 [디프로마(졸업증서)를 딴 후엔, 프로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말했던 자우트만이 디프로마 획득을 눈앞에 두고 그 꿈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Posted by 渤海之狼
l

저자: 나카무라 토오루


모든 것은 계산대로


히딩크 감독은 평범하면서도 정확한 지휘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승리를 불러들였다.

 일본과의 시합에서 호주는 큐얼이 스타팅 멤버가 된 것 이외에는, 6월 4일에 행해진 네덜란드와의 시합(1-1로 무승부)과 같은 스타팅 멤버로 임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4-3-3에서 3-5-1-1로 크게 변했다.


 독일과 일본의 친선시합이 행해진 5월 30일 히딩크 감독은 현지에서 스카우팅 활동을 했다. 히딩크는 DVD를 활용해서, [우리팀과 상대팀의 분석], [선수, 팀에의 피드백], [전술결정], [게임 계획의 설정]을 행했는데 이것이 굉장했다. 아놀드 코치는 코칭 스텝의 미팅에 관하여 [이것은 전날 밤에 행했다. 냉정한 상태에서 모든 것이 확인되었다]고 증언한다.


 히딩크 감독은 일본과의 시합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은 중반을 지배당했다. 투 톱인 야나기사와와 타카하라는 스피드가 있으며 위험한 선수들이다. 보통은 '일본의 FW를 마크해'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FW에게 보내는 볼 공급을 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나카무라와 나카다 히데를 밀착마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호주는 네덜란드와의 시합과 거의 같은 멤버이면서 크게 시스템을 바꾸게 되었다. 나카무라에게는 중반의 에이스 킬러인 그렐라, 나카다 히데에게는 오른쪽 사이드의 에머턴이 안으로 들어와서 마크. 그리고 후쿠니시에 대해서는 브레시아노가 붙게 된 것에 의해 이 3-5-1-1은 중반에서 그렐라를 아래 꼭짓점으로 하는 역삼각형이 되었다.


 네덜란드와의 시합에서 그렐라와 중앙 MF의 콤비를 짜고 있던 윌크셔는 오른쪽에 붙여서 반대편의 산토스를 마크했다. 히딩크의 '일본 중반 뭉개기'의 요체가 된 것은 에머턴과 윌크셔의 포지션 체인지였다.


 "에머턴과 그렐라가 멋진 플레이를 했다"
 고 히딩크는 말했다. 에머턴의 장기인 측면 오버래핑이 준다는 결점은 있었지만 일본의 무기를 봉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이상의 장점이 있었다. 더구나 네덜란드적인 역삼각형의 MF 포지션에 위해서 패스코스도 늘어났다. 에머턴은 예전에 페이예노르트에서 플레이 한 적이 있었기에 그 방면의 이해도가 높았을 것이다.


 일본의 3백에 대하여 히딩크는,
 "우리들은 (비두카와 큐얼의) 2톱으로 싸웠다"
 고 코멘트. 히딩크는 또한, '전반의 계획'과 '필드상의 현상'에 관하여,
 "큐얼은 실제로는 조금 쳐진 위치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였다. 이것으로 일본은 3명의 DF가 비두카 한 사람을 마크하는 것이 되어 큐얼이 남는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전반에는 득점하지 못하고 효율이 떨어졌다"
 고 분석.

 따라서 후반 도중부터는
 "2톱 아니 '명확한 2톱(비두카, 케네디)'으로 하였다. 큐얼은 왼쪽 MF로 내리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플레이하게 하였다. 전날 연습에서도 했었다. 계획대로의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반을 0-1로 끝나는 것은 계획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고 히딩크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필시 농담일 것이다. 리드 당했을 때의 계획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히딩크가 보여 왔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 날도 한 명 한 명씩 공격선수를 늘려가, 상대 수비진 앞에 '스트라이커의 벽'을 만들었다.

 "하프타임에 선수들에게는 '후반 개시 10분에 한 명(케이힐, 실제로는 후반 개시 8분 후였다), 그 때부터 두 명(16분, 케네디), 세 명(30분, 알로이지)을 들여보낸다.'고 말했다"


 스로우인에서의 골도 연습한 대로. 지쿠감독은,
 "호주의 골은 길게 찬 볼이 아무나 맞고 또 맞아서 들어간 우연에 우엽이 겹친 것"
 이라고 불운을 탓했다. 그러나 호주 쪽에서 본다면 이것은 로지컬(논리적)인 골이다.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 내에서 선수가 밀집된 상태를 만들어 두면 축구에서는 뭔가가 일어난다. 스로우인은 발로 찬만큼의 스피드가 없는 만큼 상대 DF는 헤딩으로 멀리 날려 보내지 못하며 클리어 하기 위해서는 발로 확실히 차줄 필요가 있다. 호주는 스로우인에서의 혼란을 억지로 만들어 내어 동점골을 넣었다.

 히딩크 감독은 어려운 상황에서 따라붙고, 역전, 더욱이 추가점을 넣는 승리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멋졌다. 팀에게 커다란 찬사를 주고 싶다"
 며 기뻐했다. 그 기쁨의 크기는 중요한 시합에서 이겼을 때 히딩크가 보여주는 '어퍼컷 포즈'를 더욱 화려하게 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시합 전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한편 호주에게는 오산도 있었다. 후반 너무 롱 볼이 많아져 축구의 질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전반 호주는 일본 진영에서 '볼을 가진 채로 압박'이라는 전술을 사용했다. 일본의 마크는 호주 MF 3명을 어떻게 마크해야 할지 그때 그때 가까운 선수를 마크했다. 볼을 사이드 쪽으로 더욱 깊게 패스하자 그것에 따라 반응하여 일본의 마크가 따라 붙었다. 그러자 호주는 중반으로 볼을 되돌렸고 계속해서 이번에는 반대편 사이드로 볼을 보냈다. 일본의 DF는 방향을 바꾸어 볼을 소유한 선수를 마크하러 오지만 호주는 또 다시 중반으로 재빨리 볼을 보내 다시 반대편 사이드로……라는 시합운영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지키고 있던 일본 선수들은 상대편의 움직임에 따라 볼을 향해 갈 수 밖에 없으니까 자연히 슬슬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호주는 볼을 가진 상태이면서 상대 진영에 밀집상태를 만든 상태가 되었다.


 일본은 볼을 소유하게 되더라도 눈앞에 호주의 선수들이 밀집상태로 꽉 들어차 있으니까 짧은 패스로 이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길게 클리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호주는 어렵지 않게 볼을 다시 소유하여 2차, 3차 공격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적인 '볼을 가진 압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반 16분에 투입된 장신 FW 케네디의 장점인(일본의 약점이기도 하다) '높이'를 선수들이 너무 의식해 버렸다. 이것에는 히딩크 감독도,
 "너무도 직선적으로 패스했다. 좌우로 돌려서 대각적인 패스를 섞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점은 불쾌했다"
 고 답하고 있다. 후반 호주는 대형 FW를 이용하여 긴 패스로 일본 DF를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래서는 DF라인과 FW까지의 거리가 너무 넓어져 밀집상태를 만들지 못한다. 이것은 '압박 사커'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오포튜니즘 풋볼(임기웅변식 축구)'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도 뻥축구라고 하는 것이 이것에 해당한다. 이 축구를 사용하는 것은 최후의 긴급 상태에 이르러서이다.


 이날의 승리는 운도 따랐던 호주. 히딩크는 그것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운이 따랐다. 하지만 우리들은 시합이 어떻게 전개해 가는가, 그것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계획이 있기에 준비를 하여 그것을 실행했다. 이렇게 해서 운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선수들의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전술의 실행력은 정말 멋졌다. 선수 교대도 제대로 먹혔다."


 일본의 중반을 뭉개는 등 히딩크의 전술, 지휘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일본의 대응책이 빈약했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웠다. 시합을 하기도 전에 시합의 행방은 정해져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웹번역 > 축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키나르디 인터뷰  (0) 2006.08.16
프랑스는 기사회생 할 것인가!?  (0) 2006.06.18
SCG(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감독 페트코비치 인터뷰  (0) 2006.06.15
푸욜 인터뷰  (0) 2006.06.15
라울 인터뷰  (0) 2006.06.15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wcup/06germany/column/200606/at00009281.html

저자: 이이다 히로코


작년 11월, 남미 예선 5위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임한 오스트레일리아는 PK전 끝에 32년만의 월드컵 출장을 이루었다. 오세아니아의 맹주로 군림하면서도 꿈으로만 끝나던 월드컵의 문은 한 사람의 네덜란드 감독의 “매직”에 의해서 열렸다.


가장 가혹한 일에 잘 오셨습니다.


[어느 쪽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물 실업가 겸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연맹(FFA)의 회장인 프랑크 로위는 약 3년 전에 처음으로 거스 히딩크와 접촉했던 때의 인상을 이렇게 회상했다. 2003년 7월에 FFA 회장에 취임했을 때부터 로위는 히딩크를 감독으로 초빙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당시의 FFA는 5억 호주 달러라는 막대한 적자 때문에 재정 재건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세계적 명장을 맞아들이기 위한 체제는 되어있지 않았다. FFA가 로위 회장 주도에 의한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히딩크는 모국 네덜란드 리그에서 PSV의 감독으로써 여전히 맹활약하고 있었다.


월드컵 독일 대회 예선이 막바지에 다다른 2005년, 국내에서는 당시의 감독 프랑크 파리나를 경질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대표팀 감독을 잡고 있던 파리나 전 감독은, 2001년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는 우루과이에게 패배. 국민의 축구에 대한 관심을 단 번에 저하시켰으며, 연맹이 파탄에 빠지게 된 것은 그 직후였다. 월드컵 독일 대회에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의 미래가 걸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아래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감독은 역시 히딩크이외에는 없었다. 작년 5월, 로위회장은 최고 경영책임자인 존 오닐에게 히딩크와의 교섭을 지시. 오닐은 곧바로 네덜란드로 향했다.


작년 6월 컨퍼더레이션 컵에서, 파리나가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룹리그에서 3전 전패. 10실점으로 그룹리그 패퇴가 되었다. 월드컵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 솔로몬 제도와의 시합을 약 2개월 남겨둔 시점에서의 대패로, 팀에는 암운이 드리워졌다. FFA는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히딩크와의 교섭이 막바지에 다다른 6월 하순, FFA는 [컨퍼더레이션 컵의 부진]을 이유로 파리나를 해고. 남은 것은 히딩크의 승낙을 받는 것만 남았다.


히딩크는 당시 다섯 개의 나라에게서 오퍼를 받았다고 한다. 대리인인 판 누에하우젠씨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오퍼는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다.]한다. 판 누에하우젠씨는 또한 [간단한 선택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오고가는 데만도 큰일 이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는 32년간 월드컵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라고 말했으며, 히딩크가 당초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 감독 취임에 난색을 표명했다는 것을 고백했다. 지구 남반구 최대의 [축구 발전도상국]의 미래를 건 임무라는, 다른 의미에서의 중압감도 있었다. 오닐과의 대화로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히딩크는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풋볼 브레인(축구를 숙지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다. 당신은 아니다.]


히딩크는 대표선수로써 4회, 어시스턴트 코치로써 1회 월드컵 예선을 경험한 그레함 아놀드를 교섭 상대로 지명했다. 아놀드는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사정에 정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가 어느 정도 월드컵 출장에 목이 말라 있는가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현역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플레이 했던 경험이 있는 아놀드에 대하여, 히딩크는 친근감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풋볼 브레인”끼리 서로 맘을 열고 이야기하여, 히딩크의 결심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신력을 좋아한다. 그들은 프로이지만, 마음에는 아마추어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것이다.] 교섭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러한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작년 7월 22일.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로위회장의 2년에 걸친 희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FFA는 [2005년 11월 16일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의 계약서, 그리고 승리했을 경우에 유효가 되는 [2005년 11월 17일 오전 0시부터 월드컵 독일 대회가 끝날 때까지]라는 두 건의 계약서를 작성. PSV와의 겸무를 인정하는 [파트 타임]이라는, 이례적인 대우로 히딩크를 맞이했다.


히딩크는 파리나 시대부터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고 있던 아놀드에게 계속해 줄 것을 요청. 선수와의 파이프역활 뿐만 아니고, 분석용 비디오의 수록, 젊은 선수의 발굴, A리그의 시찰 등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활동의 전책임을 주었다. 히딩크 자신은 네덜란드에 있어도, 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태세를 취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언론은 [Welcome to the hardest job in Australian Sport(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에서 가장 가혹한 일에 잘 오셨습니다.)]라는 타이틀로 히딩크를 환영. 히딩크 자신도 취임 회견장에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돌파를 [미션 임파시블]이라 하였다.


오지 거스


FFA는 히딩크의 감독취임 발표 3일전, 한 달 후 행해질 예정이었던 콜롬비아와의 친선 시합을 취소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콜롬비아와 대전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히딩크가 지시했던 것이었다. 그 대신 취해진 네덜란드 합숙에서, [히딩크 오스트레일리아 호]는 출범했다. 명장을 지휘관으로 삼게 된 선수들은 활기에 차 [Let's go, Let's go]라는 큰 소리를 내며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수를 보고, 히딩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치는 것으로, ‘열심히 하고 있구나‘고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큰 소리를 내면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열심히 하는 것에도 밸런스가 필요하다.]


히딩크는 팀에 결여되어 있던 [냉정]을 인스톨했다. 연습을 시찰한 오닐은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고 히딩크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네덜란드, 한국을 연속으로 월드컵 4강으로 인도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위업을 달성해 온 히딩크는, 그 업적으로 “명장", ”지장“, ”마술사“, ”미러클맨“ 등,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히딩크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식“이 있었다.

아놀드는 어느 날, 선수들의 위해서 특별한 비디오를 준비했다. 이 비디오는, 수영 선수 이언 소프나 크리켓 선수인 스티브 워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 스포츠 선수의 퍼포먼스나 메시지를 수록한 것이었다. 선수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열의를 높이고자 한 아놀드에게 히딩크는 [그런 것이 효과가 있나?]고 회의적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어도, ‘기껏해야 수영이잖아? 그래서?’하면서 상대도 안 해줄 것이다]


히딩크의 말에 아놀드는 잠깐 기가 죽었지만 곧바로 자신을 가지고 [물론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놀드의 생각대로 선수들은 환성을 올리고 박수를 치면서 비디오를 감상했다. 히딩크는 그러한 선수들의 반응을 “감상”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식의 동기부여 방식을 새로운 발견으로 받아들였다.


슬리퍼를 신고 연습하러 오는 선수들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던 히딩크도 곧이어 오스트레일리아 독특의 “캐쥬얼”로 받아들였다. 기자회견에서는 [No worries, mate(친구여, 걱정하지마)라는 단어를 배웠다]며 막 주어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의 영어를 말하거나 죠크를 말해서 기자들을 자주 웃겼다.

선수들이 히딩크의 색깔로 물들어 가는 것과 동시에,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의 외향적인 면을 자신의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에게서 친근함을 담아 “오지 거스”라 불리게 되었다.


환호성은 연기자가 받게 하는 것


월드컵으로의 최종 관문이 되는 남미 5위와의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 히딩크에게 주어진 기간은 4개월. 실전을 쌓을 기회는,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인 솔로몬제도와의 시합(홈 & 어웨이), 그리고 친선 시합인 쟈마이카 등 합계 세 시합뿐이었다. 지금까지 오세아니아 예선에서는 국내 클럽에 소속하고 있는 지명도가 낮은 선수들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런 전례 속에서 히딩크는 이런 시합에 부상자를 제외한 베스트 멤버로 임했다.


그리고 맞이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상대는 기이하게도 4년 전과 같은 우루과이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 여기서 선수들을 기가 죽게 해서는 안 되었다. 히딩크는 [나를 믿어주길 바란다]고 말하며 선수들에게 강한 신념을 가지게 하고, 엄격한 훈련에 의한 만전의 전략을 준비했다.


원정 첫 시합. 옐로카드를 받고 있던 선수가 7명이나 있어서 오스트레일리아는 도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시합을 노린 히딩크는 MF 팀 케이힐과 MF 마르코 브레시아노를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하였다. 이 시합은 졌지만,히딩크는 [원정에서 0-1은 오케이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리고 홈에서 맞이한 두 번째 시합. 이 이상 실점이 용납할 수 없었기에 히딩크가 취한 것은 수비태세였다. 대담하게도 주력인 MF 해리 큐얼을 벤치 스타트 시켰다. 그리고 양 팀이 무득점인 상태로 맞이한 전반 32분, 히딩크는 경고를 받은 DF 포포비치를 불러들이고 큐얼을 투입. 이 교대로 분위기가 확 바뀌자 3분 후에는 그 큐얼이 브레시아노의 귀중한 선제점을 어시스트했다.


두 시합 합계 1-1이 된 시합은 연장에서도 결착이 나지 않아, 월드컵 플레이오프 사상 처음인 PK전으로. 다섯 번째 킥커인 FW 존 알로이지가 찬 볼이 넷을 흔든 순간, 오스트레일리아는 32년 만이 되는 월드컵 출장이 결정되었다. 알로이지는 양 손을 쭉 뻗고, 벗은 유니폼을 휘두르면서 스탠드를 향해서 달렸고, 다른 선수들도 기쁨을 표출하면서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히딩크는 벤치에서 팔짱을 낀 채로, 필드 위에서 기뻐 날 뛰는 선수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감독의 역할은, 영화감독의 역할과 같다. 영화가 성공으로 끝나면, 환호성은 연기자가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달려온 선수 한사람 한사람을 악수로 맞이하여, 꽉 껴안았다.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1페이지를 쓴 선수들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32년간 월드컵과 멀어져 있던 그들은, 어떻게든 예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이런 멋진 선수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날, 시드니 시내의 광장에서 열린 승리 기념 파티에서, 히딩크는 트레이닝셔츠로 단상에 올라, [오늘은 캐주얼하게 차려입고 왔다]고 말하여 웃음을 유발했다. 사회자가 [월드컵에서는 결승까지 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진지한 얼굴로 [최후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긴 여정이다]고 전제한 후, 살짝 미소 지으며, [오케이. 오늘은 모두 기분이 좋으니까 [마지막까지 간다]고 할까]라 코멘트. 기지가 뛰어난 히딩크의 화술은, 쾌거의 흥분에 취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꽉 잡아, 회장을 환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맨 매니지먼트의 천재


그런데 히딩크의 이미지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엄격한 지도자]라는 것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드 위에서는 엄격한 연습을 행하지만, 필드 외에서의 히딩크는 지적이며 유모어가 풍부하고, 고르고 고른 단어 하나하나가 인간으로써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오닐이 [맨 매니지먼트의 수완은 일류]라고 절찬하듯이, 선수의 개성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최대한 살리는 히딩크의 수완은 멋지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지도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아놀드에 의하면, 히딩크는 [선수와 마인드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히딩크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격려할 때도, 껴안아야 할 선수와, 질타해야 할 선수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PSV 감독과 오스트레일리아 감독이라는 양다리를 걸친 히딩크에게 있어서, 대표팀에 할당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취임 시부터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의 4개월, 히딩크가 대표팀을 지도한 것은 실질 3주간 정도였다. 이 적은 기간동안, 히딩크는 선수 한 사람 한 사람과 신뢰관계를 쌓고, 천성의 구심력으로 팀의 결속을 높여갔다.


주장으로 발탁한 FW 마크 비두카는 히딩크를 [스승님 같은 리더]라 표현한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100% 의욕에 차게 하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에게 조차 [팀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라 생각하게 한다. 이런 감독과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이 한 적이 없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자랑하는 스트라이커인 비두카이지만, 1994년 6월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후부터 국제 A 매치에서의 성적은 31시합 6득점에 불과하다(2006년 5월 20일 시점). 이 데이터가 나타내는 대로 비두카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는 의문부호가 찍혀 있었다. 2004년 2월 베네주엘라와의 시합 직전에는, 햄스트링 부상을 이유로 결장을 표명. FFA는 화풀이로 대표 소집에 응하지 않았던 선수에 관한 FIFA의 조항을 행사하여, 당시 소속하고 있던 리즈에서의 시합 출장을 금지했다.

그러한 비두카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히딩크였다. 비두카는 [주장으로 임명받아, 주어진 책임을 이루기 위하여, 팀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코멘트했다.


대표 팀 중에서 히딩크와의 관계가 가장 깊은 것은 MF 제이슨 컬리나(PSV)일 것이다. 파리나 감독시대에는 조연에 불과했으며, 소속팀이었던 아약스나 트벤테에서도 묻혀있던 존재였던 컬리나. 그러나 히딩크의 손짓에 입단한 PSV에서 급성장을 하여, 지금은 대표팀과 클럽, 양 쪽에서 주력으로 정착했다.

[신경질적인 코치는, 이렇게 해, 저렇게 해하며 선수를 신경질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거스에게 그러한 면은 없다. 거스는 갑자기 탈의실에 모습을 나타내는데, 등을 살짝 치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 할 때도 있다. 플레이어를 편안하게 해주며, 시합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하는 컬리나. 자신의 재능을 살려준 히딩크에게 컬리나는 커다란 신뢰를 보내고 있다.


선수의 개성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분발하게 하는 방식도 선수별로 나뉘어 사용한다.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 솔로몬제도와의 첫 번째 시합, 브레시아노를 후반 13분까지 출장시키지 않았다. 시합 후, 브레시아노는 입을 꽉 다물고 이렇게 말했다.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서 깜짝 놀랐다. 분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나, 아놀드는 이것이 히딩크식의 선수조종술. 일부러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시켜서, 브레시아노에게 헝그리 정신을 되찾게 하여, 보다 높은 레벨에서 플레이하기 위함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대륙간 플레이오프 두 번째 시합에서 우루과이에게서 귀중한 동점골을 넣은 것은 그 브레시아노였다.


“오랜 강호”를 부활시키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묘미


FFA는 동국 대표팀이 월드컵 출장을 정한 직후부터, 히딩크에게 월드컵 후에도 계속 해주길 요청해 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며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2006년 1월, 잉글랜드 대표팀의 스벤 예란 에릭손감독이 월드컵 후에 퇴임을 표명한 이래, 잉글랜드의 후임감독 후보에는 항상 히딩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오닐은 2월 중순, 네덜란드까지 가서 히딩크의 잔류를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히딩크의 회답은,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풀타임으로 지도하고 싶다]라는 것. 결국 FFA는 3월 상순에 [히딩크의 잔류는 없다]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표이후, 히딩크의 거취를 둘러싼 논의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내뿐만 아니고, 전 세계가 활발해졌다. 그런 논의를 진정시키는 듯이, 히딩크는 조금씩 자신의 진퇴를 알려갔다. 3월 하순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PSV의 감독 사임을 표명하자, 계속해서 잉글랜드 대표팀 후임 후보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외시켰다. 한 때는 할 듯이 보였던 이 포지션에 등을 돌리 이유를, 히딩크의 대리인 판 뉴에하우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FA(영국 축구 협회)는 진실되지 않았다. 그들은 홍차를 마시며, 거스가 [최종후보자에 적합한지 어떤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거스와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는, 취임 요청을 하는지 안 하는지 둘 중에 하나다. [최종후보자]라는 생각은, 거스의 지금까지의 공적을 무시하는 것이다.]


히딩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판 뉴에하우젠의 설명에서는 히딩크의 명장으로써의 프라이드가 보였다. 그리고 4월 상순, 히딩크는 월드컵 후의 행선지를 [러시아]라고 단언했다.


러시아는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패퇴하여, 작년 11월에 전 감독 유리 세민이 사임. 그 이후, 감독 부재인 상태가 계속 되고 있었다. 히딩크 획득의 배경에는, 첼시의 오너인 러시아의 대부호 로만 아브라모히치씨가 움직이고 있었다. 러시아 축구 연맹은 2년 계약으로 연봉 약 600만 유로라는 높은 대우로 히딩크를 초빙했다고 한다.


[러시아 축구 향상을 위해서, 그리고 러시아가 다시 강호국이 되기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성공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다. 나는 인구 1600만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이지만, 러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딩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월드컵 통산 다섯 번이나 출장하면서도 1승도 할 수 없었던 한국을 월드컵 한일 대회 4강에,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32년 만에 월드컵 출장으로 이끌었듯이, 히딩크는 “오랜 강호”를 부활시키는 것이야 말로 지휘관의 묘미라 느끼고, 러시아를 선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본선에서 “미러클”은 일어날까?


독일 월드컵 개막까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PSV 감독을 퇴임하고, 월드컵 후의 거취도 명확하게 된 지금,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지도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GK 마크 슈워처는, [월드컵 출장을 정해진 뒤조차, 우리들은 거스가 잔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월드컵 기간동안에 거스에게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23명의 선수들은, 히딩크와 함께 보내는 남겨진 시간을 충실히 하여, 월드컵에서 한 번이라도 더 시합을 하고 싶다고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경험이라는 면에 있어서 F조 중 다른 세 개의 나라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히딩크가 오스트레일리아의 팀 정신을 표현할 때 빈번히 사용하는 [Eager(열의)]로는 어느 나라에게도 지지 않는다.


1998년 월드컵 프랑스 대회에서 4강이었던 네덜란드의 멤버였던 DF 히오반니 판 브롱크호르스트는 은사가 지도하는 미지의 나라를 경계한다.

[히딩크는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는 히딩크 아래서 국제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월드컵에서 서프라이즈를 일으킬 나라일 지도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가능성”과 히딩크의 “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교묘한 전술, 전략이 융합하면, “미러클”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증명해 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일 월드컵에서 어떠한 미러클을 보여줄 것인가? “미션 임파써블”을 “미션 파시블”로 바꾼 지휘관이 이끄는 나라다. 이것만은 예상할 수가 없다.

'일본웹번역 > 축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상최강 브라질 대표팀  (0) 2006.06.07
이탈리아 대표, 부정의혹과의 싸움  (0) 2006.06.07
지단 인터뷰  (1) 2006.06.07
레몽 도메네크  (0) 2006.06.07
히딩크의 콤플렉스  (0) 2006.06.07
Posted by 渤海之狼
l

 히딩크가 말하길...
 "아주리는 한국에게 이기지 못한 것에 굉장히 낙담하고 있었다. 주심, 부심에 관해서 굉장히 격한 논쟁이 일어난 것도 알고 있다. 이탈리아는 한국보다도 훨씬 강한 팀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자신들에게 대해서도 비판적이 되어, 실력이 낮은 팀에게 졌을 때는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생각할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보다 약한 팀에게 이기지 못했을 때 시합 후에 낙담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필시 싸우기 전부터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이긴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로 자신들의 포텐셜 이상의 것을 해냈다."
...........라고 일본 스카이 스포츠1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아드리아노가 말하길...
 베론과는 말 한마디도 안하고 있으며 컨디션도 안 좋은 때, 밀란 더비에서 원톱으로 플레이 시킨 만치니를 비판.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했다는 군요.
"내가 골을 넣기 위해서는 만티니보다 호나우지뉴의 미소쪽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라고 브라질의 웹싸이트 "우니베르소(??) 온라인"에서 밝혔다 합니다.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506/france/column/200603/at00008439.html

저자 : 데무라 켄지[出村 謙智]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감독 교대를 단행한 프랑스 3대 클럽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울리에


 "사커는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뱉을 턱이 없을 말이지만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다.

 제라르 울리에[각주:1]. 현 리옹 감독. 확실히 그는 육체적으로 생사가 걸린 듯한  어려움과 정신적인 지옥에 떨어진 듯한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철저하게 현장에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는 58세의 명장이다.


 리옹, 파리 SG, 마르세유, 프랑스의 3대 클럽은 작년 시즌부터 이번 시즌에 걸쳐, 감독 교대를 단행했다.


 리옹 / 르 갱 -> 울리에

 파리 SG / 후르니에 -> 라콤브

 마르세유 / 트루시에 -> 페르난데스

 

 이들 중에서 전임자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확실시 되는 감독은 울리에뿐이다.

 약 10개월 전. 리그 5위인 상태에서 작년 시즌을 끝낸 트루시에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페르난데스의 마르세유는 3월 21일 현재는 작년과 같은 5위. '챔피언스 리그 출장 가능성이 있는 3위가 되지 않으면 감독으로써는 낙제점이다'며 트루시에의 목을 자른 마르세유지만, 페르난데스체제에서도 성적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파리 SG에 이르러서는 라콤브체제가 되어서부터 점점 순위를 낮아질 뿐이었다(현재 8위).


 이 두 사람에 비교해서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가 쉬운 일이었냐고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 라고 할까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 그것은 프랑스리그에서 네 번 왕좌에 오른 팀을 다섯 번으로 이끌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적어도 작년과 같은 8강에 오르는 것이다. 신임 감독에게는 굉장히 높은 목표치가 주어진 것이 울리에였다.


숫자가 증명하는 이번 시즌 리옹의 강세.


 올 시즌의 프랑스리그도 거의 3/4가 경과했는데 앞에서 말한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는 거의 클리어했다고 말해도 좋은 상황이다.

 3월 21일 현재, 리옹은 2위인 보르도와 승점 11점차로 수위를 독주하고 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 1회전에서 작년 시즌 8강에서 패배한 PSV에게 1-0, 4-0으로 쾌승, 여유 있게 8강에 올랐다.

 “작년과 비교해서 리옹은 훨씬 좋은 팀이 되어 있다. 가장 발전한 점은 중반이후의 안정감. 이것은 제라르 울리에의 능력에 의한 것일 것이다.”

 올해는 리옹에게 완패를 당한 PSV의 히딩크감독은 울리에 체제가 된 리옹의 강함에 대해여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는 4-3-3인 시스템으로 시작하여 전임자 르 갱이 만들어 낸 팀을 계승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울리에 체제의 리옹. 단, 세밀한 숫자를 비교해 보면, 작년과의 차이가 명확해 진다. 프랑스리그 작년 30시합 경과 시점에서 +25점이었던 득실점차는 올해는 +33이며, 챔피언스리그 1차리그에서는 작년도 올해도 +9였지만, 작년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5-0으로 대승해서 벌어들인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용적으로 올해가 더 나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5승 1무승부라는 멋진 성적으로 그룹을 1위로 돌파했다.

 이러한 숫자에서도 히딩크감독이 보낸 올해 리옹에의 찬사가 외교적인 발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올해 리옹 감독에 취임한 울리에는 고부, 빌토르라는 경량급의 테크니션이 많았던 FW에 193Cm, 90Kg인 카류를 보강. 압도적인 운동량과 테크닉을 자랑하던 에시엔(첼시로 이적)이 빠진 중반에는 페드렛티, 티아고라는 서로 다른 타입의 MF를 획득하여 종합적으로는 구멍을 메워 보였다. “종합력에서는 작년보다도 향상된 느낌을 받는다”고 평가를 내린 것은 프랑스 대표 GK인 쿠페.


 앞서 말한 에시앙과 쥬닝요의 MF진은 초인적인 움직임이 작년 시즌 리옹의 특징의 하나였는데, 올해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인다고는 해도, 그것이 반드시 쥬닝요만이 눈에 띈다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숫자에서도 명확하다.


<작년 시즌 = 쥬니뉴 11, 고부 5, 플로 5, 베르구뉴 4, 말루다 4>

<올 시즌 = 빌토르 11, 프레드 8, 쥬니뉴 7, 카류 6, 말루다 5, 고부 4>


 이것은 30전을 치른 상태에서 리옹의 개인 득점을 작년과 올해를 비교한 것. 작년 시즌 리옹이 쥬닝요의 개인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 것에 비하여 올해는 공격진이 두루두루 득점 분포가 퍼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던 풋볼에 있어서 진정 강함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력이 뛰어나며 비슷한 5명의 FW, 8명의 MF, 8명의 DF, 그리고 3명의 GK가 필요하다.”

 그러한 울리에의 지침이 올해 리옹의 팀 만들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게 능력 있는 선수를 모으는 것은 어떠한 감독이나 꿈꾸는 일이다. 단 좋은 선수를 모은다면 그것만으로 이길 수 있는 팀이 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또한 별다른 문제다.

 “올해의 레알 마드리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선수가 아무리 많아도, 팀으로써 기능시키기는 간단하지 않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압도한 리옹을 이끄는 울리에의 말이니만치 설득력이 있다.

 “팀의 모든 선수가 팀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이 상승 군단이 되어 가는 첫걸음이다”고 말하는 울리에는 스타 선수들이라고 하여도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프랑스 대표, 그리고 리버풀에서의 감독 경험에서 이끌어 낸 방법론이기도 할 것이다.


감독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역사적 패전


 프랑스 축구팬에게는 생애 잊을 수 없는 날이 세 개 있다고 한다.


 1982년 7월 8일

 1993년 11월 17일

 1998년 7월 12일


 위에 적은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답할 수 있는 독자님들은 굉장한 프랑스 축구의 매니아라고 자부해도 좋을 지도 모르겠다.

 1982년 7월 8일은 “세비야의 비극”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스페인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서독과 대전한 날. 그리고 1998년 7월 12일은 자국 개최의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프랑스가 처음으로 월드컵을 제패한 날이다.


 자 그럼 1993년 11월 17일은 무슨 날인가 하면, “파리의 임종”이라 하여 울리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다.

 이날, 파리의 파르크 드 프랑스 경기장에서는 94년 월드컵 예선 최종전, 프랑스 대 불가리아의 일전이 행해지고 있었다. 시합은 1-1인 상태로 인져리타임에 돌입했다. 울리에가 이끄는 프랑스는 비겨도 월드컵 출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종료 직전에 지노라가 불가리아 진영에서 간단히 빼앗긴 볼에 역습당하여 마지막에는 코스다티노프에게 역전 골을 허용.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끊어졌다. 이 때 프랑스는 지노라를 시작으로 칸토나, 파팽등 개성적인 스타가 즐비하여 80년대의 흐름을 잇는 화려한 축구를 보여주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것이 발목을 잡아 커다란 오점을 남겨 버렸다.


 당연하게도 이 세계축구사에 남을 패전은 지도자인 울리에에게 훗날 커다란 영향을 준다. 울리에는 곧바로 대표팀 감독을 사임. 뒤를 이어 받게 된 에메 자케를 지원하는 DTN(내셔널 테크니컬 디렉터)에 취임한다. 그리고 나라를 둘로 나누는 논쟁으로까지 발전한 [칸토나, 파팡을 대표에서 빼라]는 것을 자케에게 강력하게 조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케가 칸토나, 파팽이 없는 프랑스 대표팀을 만들어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루어낸 것을 지켜본 직후인 1998년 여름, 울리에는 DTN을 사임하고 리버풀의 감독에 취임했다.


잉글랜드 명문클럽에서 일으킨 혁명


 그 후 2004년 그 자리를 떠나기까지 6년간 리버풀 감독으로 울리에가 이루어낸 위업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프리미어리그에서 순위는 2위가 1회, 3위가 1회, 4위가 2회).


FA컵 우승(2001년)

리그 컵 우승(2001년, 2003년)

채리티 실드(현 커뮤니티 실드)우승(2001년)

UEFA 컵 우승(2001년)

UEFA 슈퍼 컵 우승(2001년)


 과거 15번 리그 제패와 같은 빛나는 역사 그리고 울리에가 떠난 직후 따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는 빅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부족한 전적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울리에가 취임했던 당시의 리버풀은 80년대에 일어난 2번의 비극(헤이젤, 힐즈보로)를 겪고, 1990년 마지막으로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마지막으로 긴 기간에 걸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기에 클럽에서는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울리에를 초빙한 것이다.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시합 다음 날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습조차 시키는데 힘들었지. 취임 당시, 리버풀에서는 사커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식생활의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 시합이 끝나면 chips에 맥주의 세계였었다고”

 지금은 프로 선수라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실행시키면서 근대화를 기도했던 울리에.

“30명의 전 플레이어, 거기에 30명의 전 코치인 평론가나 저널리스트가 주위에 진을 치고 있으며, 2시합 계속해서 패하면 사임의 위기를 맞이한다.”는 리버풀이기에 느껴야만 했던 압박감 속에서 6년간 감독의 자리를 계속 지켜낸 것은 앞서 이야기 한 울리에가 추진하는 클럽의 근대화가 착실하게 결실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법은 급성장을 하고 있던 젊은 선수들에게서도 지지받았다.

 “오언, 제라드라는 젊은 스타들을 주위에서 존경받는 팀 플레이어로 키워 낸 자부심이 있다.”

 확실히 10대부터 리버풀에서 스타 가도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선수는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항상 for the team을 느끼게 하는 플레이는 프랑스 대표감독 시대에 스타 선수의 취급에 실패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울리에류의 영재교육에 영향 받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지내는 것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프랑스 대표, 그리고 리버풀에서의 경험을 살려 유능한 선수들을 팀으로써 기능시키는 수완이 뛰어난 울리에. 17년 만에 돌아온 프랑스 리그에서 그리고 유럽의 강호들과 싸우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옹에게 영광을 안겨주기 위하여 '생사보다도 중요한 사커'현장을 지켜 나간다.


ps; 제가 프랑스 리그를 잘 모르며, 일본어 번역인 관계로 고유 명사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를 바랍니다.

  1. Gerard Houllier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