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wcup/06germany/column/200606/at00009281.html
저자: 이이다 히로코
작년 11월, 남미 예선 5위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임한 오스트레일리아는 PK전 끝에 32년만의 월드컵 출장을 이루었다. 오세아니아의 맹주로 군림하면서도 꿈으로만 끝나던 월드컵의 문은 한 사람의 네덜란드 감독의 “매직”에 의해서 열렸다.
가장 가혹한 일에 잘 오셨습니다.
[어느 쪽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물 실업가 겸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연맹(FFA)의 회장인 프랑크 로위는 약 3년 전에 처음으로 거스 히딩크와 접촉했던 때의 인상을 이렇게 회상했다. 2003년 7월에 FFA 회장에 취임했을 때부터 로위는 히딩크를 감독으로 초빙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당시의 FFA는 5억 호주 달러라는 막대한 적자 때문에 재정 재건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세계적 명장을 맞아들이기 위한 체제는 되어있지 않았다. FFA가 로위 회장 주도에 의한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히딩크는 모국 네덜란드 리그에서 PSV의 감독으로써 여전히 맹활약하고 있었다.
월드컵 독일 대회 예선이 막바지에 다다른 2005년, 국내에서는 당시의 감독 프랑크 파리나를 경질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대표팀 감독을 잡고 있던 파리나 전 감독은, 2001년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는 우루과이에게 패배. 국민의 축구에 대한 관심을 단 번에 저하시켰으며, 연맹이 파탄에 빠지게 된 것은 그 직후였다. 월드컵 독일 대회에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의 미래가 걸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아래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감독은 역시 히딩크이외에는 없었다. 작년 5월, 로위회장은 최고 경영책임자인 존 오닐에게 히딩크와의 교섭을 지시. 오닐은 곧바로 네덜란드로 향했다.
작년 6월 컨퍼더레이션 컵에서, 파리나가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룹리그에서 3전 전패. 10실점으로 그룹리그 패퇴가 되었다. 월드컵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 솔로몬 제도와의 시합을 약 2개월 남겨둔 시점에서의 대패로, 팀에는 암운이 드리워졌다. FFA는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히딩크와의 교섭이 막바지에 다다른 6월 하순, FFA는 [컨퍼더레이션 컵의 부진]을 이유로 파리나를 해고. 남은 것은 히딩크의 승낙을 받는 것만 남았다.
히딩크는 당시 다섯 개의 나라에게서 오퍼를 받았다고 한다. 대리인인 판 누에하우젠씨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오퍼는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다.]한다. 판 누에하우젠씨는 또한 [간단한 선택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오고가는 데만도 큰일 이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는 32년간 월드컵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라고 말했으며, 히딩크가 당초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 감독 취임에 난색을 표명했다는 것을 고백했다. 지구 남반구 최대의 [축구 발전도상국]의 미래를 건 임무라는, 다른 의미에서의 중압감도 있었다. 오닐과의 대화로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히딩크는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풋볼 브레인(축구를 숙지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다. 당신은 아니다.]
히딩크는 대표선수로써 4회, 어시스턴트 코치로써 1회 월드컵 예선을 경험한 그레함 아놀드를 교섭 상대로 지명했다. 아놀드는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사정에 정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가 어느 정도 월드컵 출장에 목이 말라 있는가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현역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플레이 했던 경험이 있는 아놀드에 대하여, 히딩크는 친근감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풋볼 브레인”끼리 서로 맘을 열고 이야기하여, 히딩크의 결심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신력을 좋아한다. 그들은 프로이지만, 마음에는 아마추어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것이다.] 교섭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러한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작년 7월 22일.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로위회장의 2년에 걸친 희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FFA는 [2005년 11월 16일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의 계약서, 그리고 승리했을 경우에 유효가 되는 [2005년 11월 17일 오전 0시부터 월드컵 독일 대회가 끝날 때까지]라는 두 건의 계약서를 작성. PSV와의 겸무를 인정하는 [파트 타임]이라는, 이례적인 대우로 히딩크를 맞이했다.
히딩크는 파리나 시대부터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고 있던 아놀드에게 계속해 줄 것을 요청. 선수와의 파이프역활 뿐만 아니고, 분석용 비디오의 수록, 젊은 선수의 발굴, A리그의 시찰 등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활동의 전책임을 주었다. 히딩크 자신은 네덜란드에 있어도, 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태세를 취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언론은 [Welcome to the hardest job in Australian Sport(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에서 가장 가혹한 일에 잘 오셨습니다.)]라는 타이틀로 히딩크를 환영. 히딩크 자신도 취임 회견장에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돌파를 [미션 임파시블]이라 하였다.
오지 거스
FFA는 히딩크의 감독취임 발표 3일전, 한 달 후 행해질 예정이었던 콜롬비아와의 친선 시합을 취소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콜롬비아와 대전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히딩크가 지시했던 것이었다. 그 대신 취해진 네덜란드 합숙에서, [히딩크 오스트레일리아 호]는 출범했다. 명장을 지휘관으로 삼게 된 선수들은 활기에 차 [Let's go, Let's go]라는 큰 소리를 내며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수를 보고, 히딩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치는 것으로, ‘열심히 하고 있구나‘고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큰 소리를 내면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열심히 하는 것에도 밸런스가 필요하다.]
히딩크는 팀에 결여되어 있던 [냉정]을 인스톨했다. 연습을 시찰한 오닐은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고 히딩크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네덜란드, 한국을 연속으로 월드컵 4강으로 인도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위업을 달성해 온 히딩크는, 그 업적으로 “명장", ”지장“, ”마술사“, ”미러클맨“ 등,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히딩크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식“이 있었다.
아놀드는 어느 날, 선수들의 위해서 특별한 비디오를 준비했다. 이 비디오는, 수영 선수 이언 소프나 크리켓 선수인 스티브 워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 스포츠 선수의 퍼포먼스나 메시지를 수록한 것이었다. 선수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열의를 높이고자 한 아놀드에게 히딩크는 [그런 것이 효과가 있나?]고 회의적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어도, ‘기껏해야 수영이잖아? 그래서?’하면서 상대도 안 해줄 것이다]
히딩크의 말에 아놀드는 잠깐 기가 죽었지만 곧바로 자신을 가지고 [물론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놀드의 생각대로 선수들은 환성을 올리고 박수를 치면서 비디오를 감상했다. 히딩크는 그러한 선수들의 반응을 “감상”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식의 동기부여 방식을 새로운 발견으로 받아들였다.
슬리퍼를 신고 연습하러 오는 선수들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던 히딩크도 곧이어 오스트레일리아 독특의 “캐쥬얼”로 받아들였다. 기자회견에서는 [No worries, mate(친구여, 걱정하지마)라는 단어를 배웠다]며 막 주어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의 영어를 말하거나 죠크를 말해서 기자들을 자주 웃겼다.
선수들이 히딩크의 색깔로 물들어 가는 것과 동시에,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의 외향적인 면을 자신의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에게서 친근함을 담아 “오지 거스”라 불리게 되었다.
환호성은 연기자가 받게 하는 것
월드컵으로의 최종 관문이 되는 남미 5위와의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 히딩크에게 주어진 기간은 4개월. 실전을 쌓을 기회는,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인 솔로몬제도와의 시합(홈 & 어웨이), 그리고 친선 시합인 쟈마이카 등 합계 세 시합뿐이었다. 지금까지 오세아니아 예선에서는 국내 클럽에 소속하고 있는 지명도가 낮은 선수들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런 전례 속에서 히딩크는 이런 시합에 부상자를 제외한 베스트 멤버로 임했다.
그리고 맞이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상대는 기이하게도 4년 전과 같은 우루과이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 여기서 선수들을 기가 죽게 해서는 안 되었다. 히딩크는 [나를 믿어주길 바란다]고 말하며 선수들에게 강한 신념을 가지게 하고, 엄격한 훈련에 의한 만전의 전략을 준비했다.
원정 첫 시합. 옐로카드를 받고 있던 선수가 7명이나 있어서 오스트레일리아는 도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시합을 노린 히딩크는 MF 팀 케이힐과 MF 마르코 브레시아노를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하였다. 이 시합은 졌지만,히딩크는 [원정에서 0-1은 오케이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리고 홈에서 맞이한 두 번째 시합. 이 이상 실점이 용납할 수 없었기에 히딩크가 취한 것은 수비태세였다. 대담하게도 주력인 MF 해리 큐얼을 벤치 스타트 시켰다. 그리고 양 팀이 무득점인 상태로 맞이한 전반 32분, 히딩크는 경고를 받은 DF 포포비치를 불러들이고 큐얼을 투입. 이 교대로 분위기가 확 바뀌자 3분 후에는 그 큐얼이 브레시아노의 귀중한 선제점을 어시스트했다.
두 시합 합계 1-1이 된 시합은 연장에서도 결착이 나지 않아, 월드컵 플레이오프 사상 처음인 PK전으로. 다섯 번째 킥커인 FW 존 알로이지가 찬 볼이 넷을 흔든 순간, 오스트레일리아는 32년 만이 되는 월드컵 출장이 결정되었다. 알로이지는 양 손을 쭉 뻗고, 벗은 유니폼을 휘두르면서 스탠드를 향해서 달렸고, 다른 선수들도 기쁨을 표출하면서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히딩크는 벤치에서 팔짱을 낀 채로, 필드 위에서 기뻐 날 뛰는 선수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감독의 역할은, 영화감독의 역할과 같다. 영화가 성공으로 끝나면, 환호성은 연기자가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달려온 선수 한사람 한사람을 악수로 맞이하여, 꽉 껴안았다.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1페이지를 쓴 선수들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32년간 월드컵과 멀어져 있던 그들은, 어떻게든 예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이런 멋진 선수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날, 시드니 시내의 광장에서 열린 승리 기념 파티에서, 히딩크는 트레이닝셔츠로 단상에 올라, [오늘은 캐주얼하게 차려입고 왔다]고 말하여 웃음을 유발했다. 사회자가 [월드컵에서는 결승까지 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진지한 얼굴로 [최후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긴 여정이다]고 전제한 후, 살짝 미소 지으며, [오케이. 오늘은 모두 기분이 좋으니까 [마지막까지 간다]고 할까]라 코멘트. 기지가 뛰어난 히딩크의 화술은, 쾌거의 흥분에 취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꽉 잡아, 회장을 환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맨 매니지먼트의 천재
그런데 히딩크의 이미지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엄격한 지도자]라는 것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드 위에서는 엄격한 연습을 행하지만, 필드 외에서의 히딩크는 지적이며 유모어가 풍부하고, 고르고 고른 단어 하나하나가 인간으로써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오닐이 [맨 매니지먼트의 수완은 일류]라고 절찬하듯이, 선수의 개성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최대한 살리는 히딩크의 수완은 멋지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지도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아놀드에 의하면, 히딩크는 [선수와 마인드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히딩크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격려할 때도, 껴안아야 할 선수와, 질타해야 할 선수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PSV 감독과 오스트레일리아 감독이라는 양다리를 걸친 히딩크에게 있어서, 대표팀에 할당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취임 시부터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의 4개월, 히딩크가 대표팀을 지도한 것은 실질 3주간 정도였다. 이 적은 기간동안, 히딩크는 선수 한 사람 한 사람과 신뢰관계를 쌓고, 천성의 구심력으로 팀의 결속을 높여갔다.
주장으로 발탁한 FW 마크 비두카는 히딩크를 [스승님 같은 리더]라 표현한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100% 의욕에 차게 하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에게 조차 [팀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라 생각하게 한다. 이런 감독과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이 한 적이 없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자랑하는 스트라이커인 비두카이지만, 1994년 6월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후부터 국제 A 매치에서의 성적은 31시합 6득점에 불과하다(2006년 5월 20일 시점). 이 데이터가 나타내는 대로 비두카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는 의문부호가 찍혀 있었다. 2004년 2월 베네주엘라와의 시합 직전에는, 햄스트링 부상을 이유로 결장을 표명. FFA는 화풀이로 대표 소집에 응하지 않았던 선수에 관한 FIFA의 조항을 행사하여, 당시 소속하고 있던 리즈에서의 시합 출장을 금지했다.
그러한 비두카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히딩크였다. 비두카는 [주장으로 임명받아, 주어진 책임을 이루기 위하여, 팀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코멘트했다.
대표 팀 중에서 히딩크와의 관계가 가장 깊은 것은 MF 제이슨 컬리나(PSV)일 것이다. 파리나 감독시대에는 조연에 불과했으며, 소속팀이었던 아약스나 트벤테에서도 묻혀있던 존재였던 컬리나. 그러나 히딩크의 손짓에 입단한 PSV에서 급성장을 하여, 지금은 대표팀과 클럽, 양 쪽에서 주력으로 정착했다.
[신경질적인 코치는, 이렇게 해, 저렇게 해하며 선수를 신경질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거스에게 그러한 면은 없다. 거스는 갑자기 탈의실에 모습을 나타내는데, 등을 살짝 치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 할 때도 있다. 플레이어를 편안하게 해주며, 시합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하는 컬리나. 자신의 재능을 살려준 히딩크에게 컬리나는 커다란 신뢰를 보내고 있다.
선수의 개성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분발하게 하는 방식도 선수별로 나뉘어 사용한다. 오세아니아 예선 플레이오프 솔로몬제도와의 첫 번째 시합, 브레시아노를 후반 13분까지 출장시키지 않았다. 시합 후, 브레시아노는 입을 꽉 다물고 이렇게 말했다.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서 깜짝 놀랐다. 분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나, 아놀드는 이것이 히딩크식의 선수조종술. 일부러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시켜서, 브레시아노에게 헝그리 정신을 되찾게 하여, 보다 높은 레벨에서 플레이하기 위함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대륙간 플레이오프 두 번째 시합에서 우루과이에게서 귀중한 동점골을 넣은 것은 그 브레시아노였다.
“오랜 강호”를 부활시키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묘미
FFA는 동국 대표팀이 월드컵 출장을 정한 직후부터, 히딩크에게 월드컵 후에도 계속 해주길 요청해 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며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2006년 1월, 잉글랜드 대표팀의 스벤 예란 에릭손감독이 월드컵 후에 퇴임을 표명한 이래, 잉글랜드의 후임감독 후보에는 항상 히딩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오닐은 2월 중순, 네덜란드까지 가서 히딩크의 잔류를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히딩크의 회답은,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풀타임으로 지도하고 싶다]라는 것. 결국 FFA는 3월 상순에 [히딩크의 잔류는 없다]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표이후, 히딩크의 거취를 둘러싼 논의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내뿐만 아니고, 전 세계가 활발해졌다. 그런 논의를 진정시키는 듯이, 히딩크는 조금씩 자신의 진퇴를 알려갔다. 3월 하순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PSV의 감독 사임을 표명하자, 계속해서 잉글랜드 대표팀 후임 후보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외시켰다. 한 때는 할 듯이 보였던 이 포지션에 등을 돌리 이유를, 히딩크의 대리인 판 뉴에하우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FA(영국 축구 협회)는 진실되지 않았다. 그들은 홍차를 마시며, 거스가 [최종후보자에 적합한지 어떤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거스와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는, 취임 요청을 하는지 안 하는지 둘 중에 하나다. [최종후보자]라는 생각은, 거스의 지금까지의 공적을 무시하는 것이다.]
히딩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판 뉴에하우젠의 설명에서는 히딩크의 명장으로써의 프라이드가 보였다. 그리고 4월 상순, 히딩크는 월드컵 후의 행선지를 [러시아]라고 단언했다.
러시아는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패퇴하여, 작년 11월에 전 감독 유리 세민이 사임. 그 이후, 감독 부재인 상태가 계속 되고 있었다. 히딩크 획득의 배경에는, 첼시의 오너인 러시아의 대부호 로만 아브라모히치씨가 움직이고 있었다. 러시아 축구 연맹은 2년 계약으로 연봉 약 600만 유로라는 높은 대우로 히딩크를 초빙했다고 한다.
[러시아 축구 향상을 위해서, 그리고 러시아가 다시 강호국이 되기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성공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다. 나는 인구 1600만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이지만, 러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딩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월드컵 통산 다섯 번이나 출장하면서도 1승도 할 수 없었던 한국을 월드컵 한일 대회 4강에,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32년 만에 월드컵 출장으로 이끌었듯이, 히딩크는 “오랜 강호”를 부활시키는 것이야 말로 지휘관의 묘미라 느끼고, 러시아를 선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본선에서 “미러클”은 일어날까?
독일 월드컵 개막까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PSV 감독을 퇴임하고, 월드컵 후의 거취도 명확하게 된 지금,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지도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GK 마크 슈워처는, [월드컵 출장을 정해진 뒤조차, 우리들은 거스가 잔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월드컵 기간동안에 거스에게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23명의 선수들은, 히딩크와 함께 보내는 남겨진 시간을 충실히 하여, 월드컵에서 한 번이라도 더 시합을 하고 싶다고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경험이라는 면에 있어서 F조 중 다른 세 개의 나라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히딩크가 오스트레일리아의 팀 정신을 표현할 때 빈번히 사용하는 [Eager(열의)]로는 어느 나라에게도 지지 않는다.
1998년 월드컵 프랑스 대회에서 4강이었던 네덜란드의 멤버였던 DF 히오반니 판 브롱크호르스트는 은사가 지도하는 미지의 나라를 경계한다.
[히딩크는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는 히딩크 아래서 국제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월드컵에서 서프라이즈를 일으킬 나라일 지도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가능성”과 히딩크의 “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교묘한 전술, 전략이 융합하면, “미러클”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증명해 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일 월드컵에서 어떠한 미러클을 보여줄 것인가? “미션 임파써블”을 “미션 파시블”로 바꾼 지휘관이 이끄는 나라다. 이것만은 예상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