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토나'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7.01 새로운 프랑스가 나아갈 길 - 유로 패퇴, 그 후... by 渤海之狼
  2. 2007.11.20 유아독존(唯我獨尊)인 “KING” - 에릭 칸토나(Eric Cantona) by 渤海之狼 8
  3. 2007.03.22 발렌시아 난투극의 시작부터 끝 by 渤海之狼
  4. 2006.06.07 레몽 도메네크 by 渤海之狼
  5. 2006.03.23 제라르 울리에 by 渤海之狼 2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ro/08/text/200806280003-spnavi_1.html

저자: 키무라 카야코


 열기가 식어 한발 물러나 조기에 패퇴한 대표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원인이 된 여러가지 실패, 의견대립, 불운이 떠오른다. 프랑스에서는 지금 패한 원인이 무엇이었나? 누구의 책임인가? 다음 감독은 누가 되는가? 하는 이야기로 한창이다.

 유로는 에스파냐가 창조성 있는 스피디한 패스 사커로, 독일이 끈질긴 투쟁심으로 세계를 들끓게 하여 조금 있으면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 패하여 쓸쓸히 떠난 국가들은 이미 유로를 머리에서 지우고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고자 하고 있다.


■ 부정할 수 없는 도메네크의 전술 미스


 나는 의사소통의 미스를 범했다. 이 팀은 2010년을 위한 팀이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확실히 말해 두었어야 했다

 전략적 센스는 없어도 머리 회전은 빠른 프랑스 대표팀 감독 도메네크는 패배한 직후에 이렇게 말하며 재빨리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 들어갔다.

 [2010년을 위해서 팀을 구성했어야만 했다(즉 멕세나 플라미니 등 좀 더 젊은 선수를 소집했으면 좋았다)]고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알겠는데, “실은 2010년을 시야에 넣고 팀을 구성했지만 그것을 확실히 말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말투가 아무래도 변명 같다. 그래서 다음 날, 기자들이 그 주장은 베테랑을 중심으로 했던 당신의 선택과는 모순이 된다고 지적하자, 도메네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세대교체라는 것은 계승을 말하는 것이며 베테랑이 젊은 선수에게 그 경험을 전해주며 가는 것이다하고 반론했다.

 

 도메네크의 미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몇 개인가 있다.

 우선 대회 시작 전까지 강점이라고 여겨졌던 중앙 수비가 본선이 시작되자 무너졌기에 필립 멕세가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것은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더 욕심을 말하자면 좀더 빨리 그를 CB의 주요 후보 선수로 도입해 두었으면 했다. AS로마와 함께 유럽 톱 레벨의 경험을 쌓으며 멋진 시즌을 보낸 멕세는 본선이 시작되어 쇠약함을 노출한 CB에 좋은 대역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리옹 출신의 도메네크는 아무래도 리옹 선수를 우대하는 경향이 있어 이탈리아 신문들에게 [프랑스에는 좀 제대로 하는 선수는 없는 것인가?]하고 바보취급을 받은 클러크(François Clerc)를 고집하고, 이탈리아 세리에A의 선수에게는 굉장히 차가웠던 것이다. 듣기로는 청소년 대표팀 시대 멕세와 당시 유스 감독이었던 도메네크는 그다지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비달을 CB로 하여 본선에서 갈라스와 짝을 맞춘 것도 특히 결과를 보면 패착이었다. CB 페어에게는 어택 페어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의사 소통이 필요하다. 멕세를 제외하고 일부러 그다지 좋지 못한 붐송을 선택한 것은 리옹의 스킬라치(Sébastien Squillaci)와 짝 맞추기 위해서라고 누구나가 믿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좋은 상태가 아니었던 말루다를 계속 사용한 것, 이탈리아와의 시합에서 10명이 되었을 때 득점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잠재능력이 큰 나스리를 빼고 DF를 집어 넣은 소극적인 자세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전술 미스가 클로즈업되어 현재 주범으로 공격 받고 있는 것이 감독인 도메네크다. 원래부터 젊은 선수를 좋아하여 2004-05년에 베테랑을 너무 빨리 제외한 것에 공격받았던 그이지만, 이번엔 [월드컵 때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발언과는 반대로 베테랑을 너무 신뢰하였다]고 비판 받고 있다.

 안티 도메네크인 축구 현자 기 루(Guy Roux) 프랑스에서는 말을 조심하였지만 스위스의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
 “
월드컵 때의 것이 이번에도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와는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스타트를 해야만 할 때가 왔다
 
고 열을 내며 말하고 있었다.

 

■ 선수들에게 있던 4개의 문제

 

 그러나 도메네크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조금 안이한 생각일 것이다.

 실제로 대회 시작 전에 튀랑 등 베테랑 기용에 이의를 외친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까.

 가장 큰 책임은 우리들 선수에게 있다고 비에라가 말했듯이 요컨대 선수들이 베스트인 상태로 플레이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수들 불발의 원인은 크게 나누어 4개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거듭 언급되고 있는 [긴 시즌 뒤의 에너지 결여].

 그 증거로 이번 대회는 러시아나 터키 등 리그가 조금 널널한 국가의 대표팀이 종반으로 갈수록 생동감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승리해 나갔다.

 한편 프랑스 대표팀은 프랑스 컵 결승이 5 24일에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에 보름밖에 준비기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컨디션 조절이 어려운 베테랑 선수가 많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실제로 UEFA미셸 플라티니 회장은 소위 강호 팀들이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는 것을 목격한 뒤 유로를 8월에 치를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스타 선수일수록 많은 게임을 치러야 하며 클럽과 함께 컵 시합도 이겨서 올라가기에 시합 수는 증가한다. 그 결과 주력 선수들이 피곤에 쩔어 강호국이 승리해 나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유럽 No.1을 정하기 위한 유로의 의미도 반감(半減)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프랑스 미디어는 앙리, 말루다, 튀랑 등 클럽에서 주전 자리를 잃거나 부진으로 비판 받고 있는 선수들이 시합의 리듬, 무엇보다 자신감 결여를 이유의 하나로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시합에 반드시 따라붙는 - 불운도 있었다. 이번 프랑스에는 대회의 마지막까지 이겨 나아갈 기세가 없었던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그 기세가 있는 듯이 보였던 네덜란드나 포르투갈이 무너진 것과 같이 조 예선을 돌파했다면 상황은 급변될 수도 있었다. 네덜란드와의 시합에서 PK를 얻어[각주:1] 1-1이 되었다면 네덜란드도 크게 당황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와의 시합에서도 수많은 불운이 없었더라면 역시 부진했던 이탈리아에게 승리할 수도 있었을 터.

 그러나 운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도 역시 실력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자신감 상실과는 모순되는 4번째 이유는 2002년 월드컵에서 이미 보았던 [자만심]이었다. 유로 패퇴 후 몇 일 뒤에 처음으로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한 캡틴 비에라는,
 필시 우리들은 너무도 릴렉스하여 우리들 자신의 힘, 팀의 능력에 대해 너무 과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고 말했다. 즉 은퇴를 결심한 지단이 팀 내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긴다]며 군기를 잡고 있던 2006년 월드컵 때와는 달리 대회 시작 전에 보여준 평화로운 무드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2006년은 긴장감 속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팀이 하나가 되어 갔다. 하지만 이번에 첫 시합에서 패배하여 자신을 잃은 르 블뢰(프랑스 대표팀의 애칭)’, 생각했던 바와는 반대로 시합을 거듭할 수록 분열되었다고 한다. 본국에서는 시합 후 선수들이 로커룸으로 가는 통로의 영상이 방영되어 벤제마와 마켈렐레, 에브라와 비에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연히 선수들은 [팀 내의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고 말하며 이 의혹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프랑스에는 팀의 두뇌가 되는 선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유로에서부터 시작된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는 데샹이, 그리고 2006년에는 지단이 행하던 역할, 즉 앞장을 서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선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독이 그런 지휘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 도메네크가 계속할 것인가, 데샹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인가


 그러나 지금에 와선 모든 것은 뒷북.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2010년 월드컵을 노리는 대표팀의 감독이 될 것이냐는 문제이다. 도메네크는 자기가 계속 맡기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지만 패퇴 직후에 행해진 스포츠 전문의 전국지인 [레퀴프]의 여론 조사에서 도메네크에게 계속 맡기자는 사람은 불과 15%, 83%가 해임를 요구하였고, 2%가 노코멘트.

 한편 [파리지앵]지가 27일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25%였다. 반대로 도메네크의 능력에 관해서는 56% [용기가 있다]고 답하는 등 호의적인 의견도 있었다. 현재 차기 감독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1998년 월드컵 챔피언 팀의 주장이었던 디디에 데샹이다.

 

 선수일 때부터 필드 위의 감독이었다고 일컬어지는 데샹은 모나코의 감독으로 에브라, 로텡, 지윌리, 지베 등을 중심으로 젊은 팀을 구축하여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을 달성하여 일약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역시 선수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뚜렷한 데샹은 취임 당시 주력이었던 마르코 시모네 등, 맘에 들지 않는 선수들을 계속해서 팔아 치웠고 후에 패배가 이어졌을 때에는 선수를 [무능]하다고 하여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결국에는 모나코는 빅 클럽이 아니다고 너무 정직하게 말하여 알베르 공작[각주:2]의 분노를 사서 클럽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데샹은 도메네크 이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타입.

 유벤투스에서의 임기도 세리에A 승격을 이루어서 1년으로 끝났지만 이탈리아의 기자에 따르면 그것은 너무도 완고하며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클럽 간부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수 기간 중에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젊고 혈기왕성했던 그가 스타 선수들로 가득한 대표팀을, 그런 자세로 잘 이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은 남는다.

 

 그 때문도 있어서인지 조금 이외인 것이 현역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도메네크 감독이 남아주길 기대하고 있다.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도 도메네크가 계속 감독이어야 하나?”는 물음에 비에라는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나는 지속성이 있는 쪽을 원한다. 이번에 실패했다고 하여, 모든 것을 창문으로 내 던지고 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비에라의 뒤를 이어 리베리도, “도메네크는 떠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감독과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도메네크는 떠나선 안 된다. 이 팀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만약 미스가 있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감독만의 책임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남아주길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뇰도 지속성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뛰어난 젊은 선수들이 많았기에 패퇴한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1998년 팀은 1994년의 실패 위에 구축되었다. 2008년의 경험이 2010년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도한다. 감독은 유능했다고 생각한다. 2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그가 다른 사람 이상으로 이번 대회의 책임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지단 등 영광스런 98년 팀원들의 의견은?

 

 반대로 이미 은퇴한 98년의 선수들은 전부 데샹을 밀고 있다.

 2006년 월드컵 때도 눈에 띄게 도메네크와 맞지 않았던 지단은 일찌감치 이상적인 일레븐? 그것은 새로 오는 감독에게 물어봐야지~”하고 '실언'. 그 후 데샹의 등용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7 3일에 결정되지만 만약 감독이 바뀐다면 데샹이 적임이다고 코멘트 하였다.

 

 한편 지금은 해설자가 된 역시 전 세계 챔피언 팀의 크리스토퍼 뒤가리는 도메네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만하다. 언제나 멋대로 원맨쇼를 하고 있다고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맘껏 내뱉었다. “도메네크에게는 재능도 머리도 없다. 만약 지단이 튀랑, 마켈렐레와 함께 복귀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캐리어는 아주 옛날에 끝났었다. 이제 그는 나나 프랑스 축구의 눈을 속일 수 없다. 그를 동정하려고 하여도 이제는 무리다. 도메네크에 대해서 긍정적인 점이라는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리자라쥐, 카랑뵈도 합세. 이렇게 영광스런 98년의 챔피언들은 지금 손에 손잡고 [데샹 응원단]이 되어 있다.

 

 또한 이번 시즌 보르도와 함께 성공을 거두어 꿋꿋하면서도 데샹보다는 침착함이 있는 로랑 블랑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보르도와의 계약 기간 중이며 감독으로써 챔피언스 리그 첫 도전이라는 것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 유로 2004 후에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지단을 포함한 베테랑 선수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블랑이지만 당시는 감독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선택 받지 못하였다.

 

■ 이제는 도박에 가까운 상태. 이외로 칸토나!?

 

 한 세대가 끝나 지리멸렬한 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프랑스와 굉장히 닮았던 입장인 이탈리아는 26일 도나도니의 목을 자르고 2006년 월드컵 우승 감독인 마르첼로 리피를 부활시켰다. 도나도니의 계약 연장시의 조건으로 [준결승까지 가는 것]이라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 정해놓았던 것을 재빨리 실행에 옮긴 것이다. 후임자가 전술의 달인 리피라면 결정하는 것도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후임자 중 누구 하나 고민 없이 정할 정도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프랑스의 감독은 원래부터 전술의 달인이라기 보다는 좋은 육성자 타입이 많다. 하지만 대표팀 감독에게는, 예를 들어 교체가 곧바로 적중 - 이라는 느낌의 도박사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메네크의 지휘 능력은 불충분하다.

 한편으로 선수 시대의 데샹은 지단과 같은 예술가적인 능력은 없었지만 지구력에 더하여 그 리더성과 전술적 안목의 날카로움으로 유명했던 사나이였다. 단지 감독으로써의 경험이 부족한 그가 벤치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든 소질은 있다.

 

 [프랑스 풋볼]지가 무리인 것을 알면서 이름을 거론한 이상적인 감독 모리뉴와 히딩크는 지휘, 전술능력뿐만이 아니라 선수의 신뢰를 얻고 팀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도 뛰어나다. 데샹의 경우 인적 관리 부분이 조금 걱정되지만, 조금만 신경을 끄고 있으면 겁먹고 소극적이 되는 프랑스 대표팀인 만큼, 데샹 정도로 열정적인 감독이 키를 잡는 편이 열정적인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지 않나 하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데샹이 감독이 되었을 경우에는 알랑 보고시앙(Alain Boghossian)을 조감독으로 붙이는 안도 부상했다. 차기 감독 유력 후보 둘이 전부 전 세계 챔피언인 것을 보니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듯 하지만, 새로운 스타트에 새로운 감독 이라는 쪽이 기분적으로도 산뜻한 것은 확실. 그러나 또한 기죽지 않은 도메네크의 끈질김에도 머리가 숙여진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도박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의견으로써 대표팀에서는 무관의 제왕이었던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웅 에릭 칸토나의 말을 소개한다.

 도메네크도 데샹도 찬성하지 않는 듯한 그는,
 플레이의 플랜이라는 의미에서는 데샹이라도 도메네크 노선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한 것이다.

 프랑스 대표팀을 보고 있으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가 축구계에서 가장 싫어하고 있는 것 전부이다. 특히 하품밖에 나오지 않는 플레이로 월드컵에서 우승한 르 블뢰는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름다운 축구로 이기지 못할 이유는 어디도 없다

 

 현재 비치 사커 국가 대표팀 감독인 칸토나는 덧붙여 자신의 야망도 알려주었다.
 “
나는 11명이 뛰는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창조자, 아티스트로서 그 일을 할 생각이다. 축구계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싶다. 그래 70년대 아약스의 토털 사커와 같은 무언가를 말이지. 그것을 어디서 하느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혹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서가 좋겠지
 
프랑스 대표팀을 내다 버린 듯한 칸토나이지만 여전히 빅 마우스인 이단아가 감독이 된다면 즐거울 것만은 확실하다.

 

  2년 동안 프랑스의 플레이는 [견고한 디펜스. 그리고 언제 어느 때라도 골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로 표현돼왔다. “언제 어느 때가 쉽사리 오지 않지만 말이지하고 말한 것은 다름아닌 도메네크 감독이다. 어쨌든 이번 유로에서 에스파냐가 화려한 축구를 무기로 승리해 나간 것을 거울삼아 신생 프랑스 대표팀에는 요 2년간 보여주고 있던 [겁나게 재미없는] 축구에서 탈피해 주길 바랄 뿐이다.

  1. 네덜란드 수비수 오이여르의 핸들링이 그냥 넘어 감. [본문으로]
  2. 모나코 공국의 국가 원수이자 모나코 구단주.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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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cent Machenaud
일본어 번역
: Shuichi Ta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에릭 칸토나의 생애.
 그것은 사랑과 증오의 반복이었다.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칸토나 만큼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감정을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준 축구 선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칸토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따르는 것을 일절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필드 위에서건 사생활에서건 일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칸토나는 세계 유일무이한 선수였다.
 그 정도로 전형적이라는 말과 거리가 먼 선수도 없다.

 1966년 5월 24일에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칸토나는 지역 클럽인 케롤(SO Caillols – 장 티카나(Jean Amadou Tigana)도 여기서 뛰었었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15살 때부터 상대 팀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부터 그는 반역자였다. 재능은 주목받고 있었지만 획득을 노린 어느 클럽도 그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우선 그의 부모와 이야기를 한 후 이어서 칸토나 본인을 납득시킨 것이 오세르(AJ Auxerre)의 스카우터였다.
 “그는 정직했으며 총명했다. 그렇게 납득시켜주면 ‘농(non)’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2부리그 마르티그(FC Martigues)에서 1시즌 임대 이적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오세르에서 7년을 보냈다.
 바지르 볼리(Basile Boli[각주:1]), 장 마르크 페레리(Jean-Marc Ferreri[각주:2]) 등을 키워 낸 오세르의 유소년 육성 센터는 프랑스에서 가장 정평난 곳이었다. 거기서 프로가 무엇인지를 배울 동안에도 칸토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바꾸지 안않다. 재능있는 선수인 것은 누구나가 인정했다. 오세르의 명물 감독인 기 루(Guy Roux[각주:3])도, 이 ‘놀라운 아이’에게 기대하였다. 다른 선수는 용납되지 않는 것도 칸토나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기 루는 칸토나를 1부 리그에 데뷔시켰고 필드 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이 소년에게 프랑스 미디어가 주목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수로서 평가가 높아짐에 따라 기이한 행동도 눈에 띄게 되었다. 멋진 골을 넣음과 동시에 상대 선수에 대한 폭력 행위나 심판, 관객에 대해 욕을 하는 칸토나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프랑스 대표팀에 데뷔도 하였다.
 1987년 8월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동독과의 시합(2-1로 동독 승리)에서 처음으로 삼색 유니폼을 입게된 그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펼쳤다.

 당시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스킨헤드를 처음으로 행한 것도 칸토나였다. 머리를 빡빡 밀고 등장한 메츠와의 시합에서는 플라티니처럼 프리킥을 넣어 전 프랑스의 화제를 독점했다.

 독설은 독해져 갔지만 또한 확고부동한 스타가 되어갔던 것이다.
 “별로 내 인생에 축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감독이나 팀 동료들이 뭐라 말하건 나하곤 상관 없다. 흥미가 일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은 그런 특이한 행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프로로서의 캐리어는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는 말만 보면 이미 천하무쌍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오세르의 GK는 프랑스 대표팀의 브르노 마르티니(Bruno Martini)였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난 뒤에, 마르티니는 칸토나에게 자신의 가방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칸토나는 거절했다.
 “나는 니 명령같은 건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선 마르티니의 얼굴에 펀치를 먹였다.

 망나니 기질은 더욱 커져만 갔다.
 1988년 5월 오세르와의 계약을 끝났을 때, 그를 획득하고자 했던 팀은 올림피크 마르세유와 마트라 라싱[각주:4]이라는 2大 클럽이었다. 치열한 획득 경쟁이 벌어졌고 결국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프랑스 신기록인 180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제시한 마르세유였다. 큰 실적을 남기지도 않은 젊은 선수에 대한 계약금으로써는 파격의 액수였다. 교섭의 자리에는 칸토나 자신도 참석하여,거기서 마르세유의 회장이며 사회당 소속의 국회의원 겸 실업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베르나르 타피(Bernard Tapie)에게 대들었다. 후에 타피는 이렇게 회고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는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타피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칸토나에게 있어서도 태어난 고향으로 개선했다고는 하여도 결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타피의 방식도, 또한 마르세유라는 도시의 분위기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바로 전에 칸토나는 프랑스 대표팀에 자신을 부르지 않은 앙리 미셀을 공공의 자리에서 “10할NOM”이라고 욕하여 큰 문제를 일으켰다. 사태를 중히 여긴 프랑스 축구협회는 그에게 1년간 국제 시합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칸토나는 자신만만히 이렇게 말했다.
 “옳은 것은 나다. 확신한다.”

 한편 마르세유에서도 타피가 맘에 들어했던 것은 칸토나가 아닌 이미 에이스 자리를 확보하고 있던 장 피에르 파팡(Jean-Pierre Papin)이었다. 때문에 칸토나는 보르도와 몽페리에에 2시즌간 임대된다. 그 후 또다시 마르세유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도,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국은 곧바로 찾아온다. 어느 시합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그는 유니폼을 벗어 던진 채 스타디움을 뒤로 한 뒤 그 상태로 3일간 행방 불명이 되었다. 할머니와 오세르 시대의 친구인 미셸 피네다와 만나러 카탈루냐까지 간 것이다.

 타피는 칸토나를 방출할 것을 맘먹고 님(Nîmes Olympique)에 그를 팔아 넘겼다. 이 작은 클럽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킨다. 공격적 미드필드로써 필드에 군림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트러블은 끊이지 않았다.
 심판에게 항의하던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볼을 심판에게 차서 퇴장당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위기였다. 아무리 칸토나라고 하여도 이때는 은퇴를 결심하였다. 그것을 번복시킨 것은 미셸 플라티니의 어드바이스였다. 플라티니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행선지는 리즈 유나이티드.
 시즌 도중에 입단한 그는 리즈에게 프레미어 우승을 안겨주며 곧바로 잉글랜드에서도 절찬을 받는다. 그런 그를 주목한 것이 당대 제일의 인기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5시즌을 보낸 그는 [에릭 더 킹]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활에 큰 공헌을 한다. 옷깃을 세운 백넘버 7의 유니폼은 클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칸토나 자신도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정신적인 아버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비호 아래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 그는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져 잉글랜드 넘버 원 선수라는 평가를 획득한다.

 한편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그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미셸 플라티니도 울리에도 칸토나를 파팡에 버금가는 에이스로써 계속 기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파팡이 프랑스 국민의 아이돌이었던 것에 비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우승 4회, 컵 우승 2회라는 위대한 결과를 남긴 칸토나는 그런 영광만큼의 인기를 프랑스에선 얻지 못했다. 프랑스 대표팀이 이기면 물론 박수를 받았지만 패했을 때의 모든 비난과 야유가 그에게만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파팡과의 차이는 뚜렷했다.
 “녀석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라고 불가리아에게 패하여 미국 월드컵 출장권을 잃은 직후에 그는 말했다.

 그 시합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월드컵 기회였다.
 프랑스 대표 출장 45회, 19득점을 올린 칸토나도 대표에서의 타이틀은 불운했다. 1996년 유럽 선수권은 그의 홈 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있는 잉글랜드에서 개최. 그러나 에메 자케는 애지중지하던 지네딘 지단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칸토나를 대표팀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이때 그의 영광도 끝을 고했다.
 이 시기의 그는 정신적인 황폐가 두드러진다. 상대 선수에 대한 공격, 심판에 대한 욕설, 나중에는 상대 팀 서포터에게 날라치기를 먹여 3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다. 결국 TV 광고에서만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은퇴가 거론되었지만 그가 미디어와 이야기하지 않게 된 때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때문에 누구도 그가 언제 현역 생활의 마침표를 찍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맨체스터와의 계약을 1년 남기고 은퇴는 97년 5월에 발표되었다. 클럽에서 짧은 프레스 릴리스가 배포도었을 뿐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은퇴 선언.

 마지막까지 칸토나는 유아독존이었다.


Eric Cantona/에릭 칸토나.

1966년 5월 24일.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오세르에서 캐리어를 스타트시켜 21살에 대표팀에 데뷔하지만 너무도 강한 퍼스널리티로 인하여 클럽 수뇌진 등과 트러블이 끊이질 않아 자주 소속 클럽이 바뀌었다. 92년에 잉글랜드 리즈에 이적하여 팀을 리그 우승에 이끌었고, 다음 시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겨서는 젊은 선수들을 리드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90년대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94-95 시즌에 팬과의 트러블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지만, 95-96시즌에 복귀하여 리그와 컵 2관왕에 공헌했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불운이 많아 1998년 월드컵 멤버에서 제외된 것을 계기로 선수로써의 캐리어도 막혀버렸다. 독특한 외모, 강렬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위키피디아에 있던 말 추가

칸토나 어록

  • 세상에는 보통과 다른 인간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자랑스럽다.
  • 갈매기들이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95년 날라차기 사건으로 24시간 구치소에 있은 후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을 갈매기로 비유하며)
  • 팀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 내가 눈에 띄면 된다.! 
  • 내 묘비석에는 아무런 말도 새겨 넣고 싶지 않다. 새하얀 돌인 상태로 좋다. 나란 인간을 언제까지고 수수께끼인 채로 남겨 두고 싶다.
  • 내가 보스다!
  • 나는 신이다!
  •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써 무엇을 하는가다. 개인으로써 주목을 받고 싶다면 난 테니스를 할 것이다. 혹은 멋진 여성을 파트너로 삼아 혼합 복식을 하거나.
  • 나는 축구에 대한 정열을 잃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은퇴 회견에서)
  • 내 최고의 순간? 나에겐 많은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는 녀석을 발로 찼을 때이다.
    (관객에게 날라차기 한 뒤에)
  • 아니! 그건 나다.(지네딘 지단과 미셸 플라티니 중 어느 쪽이 프랑스 역대 최고의 선수인가를 질문받았을 때)
  • 골은 아기와 같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칸토나에 대해서..

  • 내가 지금까지 마신 모든 샴페인을, 올드 트래포드에 영광을 가져다 준 칸토나에게 바친다.(조지 베스트)

  • 칸토나를 데리고 있는데, 누가 펠레를 필요로 할까요.
    (영국 해설자 마틴 테일러. 1993~94시즌 첼시와의 경기에서, 칸토나가 중앙선에서 찬 킥이 골 대를 맞추었을 때)

  • 앨런 시어러를 획득함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PK를 차고 싶어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백넘버 9를 달고 싶다는 것. 백넘버 문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즈음 우리 팀에서 PK를 차고 있던 것은 칸토나였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앨런 시어러 획득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
  • 확실히 칸토나에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의 지시를 받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팀에 가져다 준 최대의 공적은, 완벽을 목표로 한다면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알렉스 퍼거슨)

  •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는 그가 최고. 그와 같은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 나의 꿈.(데이비드 베컴)


  1. DF. 마르세유 재적 시에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어 챔피언스 리그 우승. 별명 ‘골 문 앞의 암살자’ [본문으로]
  2. AMF/FW. 대표력 37경기 3골. 84년 유럽 선수권 당시의 중심 선수. [본문으로]
  3. 선수 생활(1952-1961)과 감독 생활(1961-2005) 을 합하여 50년 넘게 오세르에만 있었다. 현 RC Lens의 감독. [본문으로]
  4. (Racing Club de France – 파리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지만, 경영 악화로 현재는 아마추어 팀. 마트라(Matra )는 당시 클럽 회장이 경영하던 자동차 회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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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스즈이 토모히코


바로(왼쪽 끝)의 일격이 대참사의 시작이었다.

 메이져리그에서는 난투에 참가하지 않으면 벌금에 처하는 구단이 있다고 한다.

 NBA 규정으로는 난투극이 일어났을 때 벤치에 있던 선수가 일어선 것 만으로도 벌금이라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난투에 참가하지 않으면 팀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할 것이기에 벌금보다도 싸우는 것을 선택한다.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 VS 발렌시아는 1차전이 벌어진 밀라노 산시로에서 2 대 2 무승부로 마쳤고, 2차전은 발렌시아의 리듬으로 경기가 진행되어 원정에서 얻은 2골이 힘을 발휘하여 결국 0-0으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날 가장 뜨거웠던 것은 시합종료 후의 난투였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마테라치와 발렌시아의 아얄라가 공중전을 행한 직후 종료의 휘슬. 발렌시아의 선수들은 필드 중앙에서 기뻐하며 외쳤다. 마르체나가 승리 포즈. 호아킨이 달려들었으며 실바가 가세했다.


 그러나 어깨를 떨구며 필드에서 물러가는 인테르나치오날레 선수들 중에서 혼자서 발렌시아 선수들이 기뻐하는 곳에 가까이 있던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미소 가득한 호아킨에서 방송금지용어를 내뱉었다. 당연 발렌시아의 캡틴 마르체나도 맞받아쳤다. “!@#$$”


 처음 화낸 것은 부르디소였다. 호아킨과 우고비아나가 말렸지만 부르디소는 멈추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 마르체나에게 달려들었다. 눈은 이미 야수의 눈. 이미 전투태세다.


 마르체나도 몇 센티 앞까지 온 부르디소에게 킥으로 응수했다. 그러는 사이 코르도바와 이브라히모비치가 부르디소를 뒤에서 껴아아 얌전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 순간의 틈을 타고 다시 마르체나에게 돌진. 끈질긴 아르헨티나 사람. 미겔이 목을 제압하지만 돌격.


 거기서 나타난 것이 발렌시아의 나바로였다. 오오~~~ 라이트 스트레이트 작렬. 털썩~ 부르디소 다운~~. 유혈. 코뼈 골절.


 형세 역전. 도망가는 나바로. 이번에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차례다. 파비오 그로소, 코르도바, 마리아노 곤잘레스, 사무엘, 이브라히모비치.....등등이 무서운 얼굴로 쫓아갔다. 목숨을 건 술래잡기. 우선은 그로소가 날랐다. 슬라이딩 태클로 나바로의 다리를 멈추려했지만 30센티 차이로 닿질 않았다. 어떻게든 잡힐락 말락한 차에 나바로는 필드에서 도망쳤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난투는 재연장전으로 돌입했다. 한 발 먼저 도망친 나바로를 쫓아서 톨도가 발렌시아의 라커룸에 난입한 것이다. 하지만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나바로는 키케 플로레스 감독의 재빠른 판단으로 스타디움을 이미 떠난 상태였다. 분노를 참을 수 없던 톨도는 스타디움 바깥 입장권 판매소까지 달려갔다고 한다.


 밀라노에 도착해서도 톨도의 분노는 여전했다.


 “부르디소를 막고 있었는데 나바로라는 어처구니 없는 녀석이 부르디소의 얼굴에 펀치를 날렸다. 더구나 도망까지 쳤다. 코르도바가 발을 날렸지만 닿질 않았다. 마지막은 경찰에게 막혀서...”


 마르체나, 나바로(발렌시아)와 마이콘, 부르디소, 코르도바(인테르나치오날레) 등 5명의 처분은 3월 22일 UEFA 규율위원회에서 내려진다. 또한 경비원을 밀쳐버리고 발렌시아의 라커룸에 난입한 톨도와 돌아가면서 비야에게 달려든 사무엘도 어떻게든 처벌이 내려질 거라는 의견도 있다.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나바로가 말했다.


“만약 (사죄가)부족하다고 한다면 이탈리아에 가서 사죄하겠습니다.”


 그날 밤 그는 한 잠도 못 잤다. 걱정해 준 아버지와 함께 보낸 밤은 부엌에서 계속 울었다고 한다. 아침이 되자마자 키케 플로레스감독에게 전화를 하였고 그 후 곧바로 부르디소의 휴대전화의 번호를 눌렀다. 5시간 동안 몇 번이나 리다이얼을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다비드 나바로입니다.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어제 제 행동을 용서받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르디소에게서 답장이 왔다.


[오늘은 계속 전화가 왔었지만 누구인지 몰라서 받지 않았습니다. 진정하세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옛날, 칸토나가 크리스탈 팰리스 서포터의 야유 "칸토나 꺼져. 샤워나 하고 꺼지란 말야"에 화가 나서, 날라 차기를 관객에게 먹인 적이 있다. 4개월의 사회 봉사활동과 1년여의 출장정지 처분. "이상한 놈이라고 불리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다"는 명언을 남긴 칸토나이기에 가능한 액션이었지만 나바로는 굉장히 평범한 발렌시아의 청년이다.


 이 날 가장 냉정했던 것은 스타디움에 남겨진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서포터였다. 발렌시아의 승리를 축하하고 물러났으며 메스테야에는 조명이 꺼질 때까지 [발렌시아]를 외치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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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wcup/06germany/column/200605/at00009273.html

저자: 데무라 켄지


 챔피언스 리그 결승은 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꿈의 무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자신들의 모국에서 행해진다고 한다면 -.

 5월 17일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행해진 곳은 파리 근교에 있는 스타드 드 프랑스였다.


 이날 결승에 진출한 바르셀로나 또는 아스날의 일원으로 꿈을 실현시킨 프랑스 선수는 3명. 바르셀로나의 MF 지윌리와 아스날의 FW 앙리 그리고 피레스였다.

 그런데 이 3명, 10일 후에 같은 장소에서 행해진 월드컵을 향한 예행연습 프랑스 대 멕시코전(1-0으로 프랑스의 승리)에서는 셋 다 뛰지를 않았다. 그 중에 앙리는 시즌 중의 피곤을 참고하여 면제받은 케이스였지만, 남은 두 명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사정이 있었다.


 [지윌리 대 피레스]

 실은 그런 식으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프리뷰하는 프랑스 미디어가 많았는데 그것은 그 두 선수가 월드컵 멤버 23인에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 최고의 클럽을 정하는 시합에 진출한 팀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라 하여도 프랑스 대표에는 필요 없다. 그것이 프랑스 대표 레몽 도메네크감독이 내린 결론이었다.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쏟아진 야유


 홈그라운드에서 예정된 평가전 세 시합의 시작인 멕시코전. 이미 월드컵 종료 후에 현역 은퇴를 발표한 지단에게 있어서는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플레이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월드컵으로의 준비를 하는 한 편 1998년에 처음으로 세계 넘버원의 자리를 획득한 장소에서 지단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시합. 원래대로라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따뜻한 성원이 보내져야할 시합에서 프랑스 대표팀에게 보내진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야유였다.


 홈그라운드의 팬들에게서 야유를 받은 프랑스 대표 선수는 주로 두 명이었다. 한 선수는 후반 지단과 교대하여 출장한 MF 도라소였다.

 예전 "나는 프랑스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뉴칼레도니아 사람"이라고 말했던 MF 카랑뵈가 대표팀 경기에서 프랑스 팬들에게서 야유를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도 비슷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배경이 야유의 뒤편에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보았지만 도라소가 동성애자들의 축구 팀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파리 생제르망 소속 선수가 팀의 본거지이기도 한 파리에서 커다란 욕지거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이유는 또 한사람 야유를 받고 있던 선수와 도라소와의 공통점을 찾고 있던 중에 차츰 알게 되었다.


 또 한 명의 표적은 GK 바르테즈였다.

 "일반 팬들 중에는 (도메네크 감독이 선택한 23명의) 선출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DF 사뇰)

 즉 도라소나 바르테즈는 월드컵에서 프랑스 대표로써 플레이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라고 생각하는 팬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유라는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그런 분석이 적중했다는 것은 멕시코와의 시합에서 가장 커다란 야유가 일어난 순간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명확해진다.


 [프랑스 대표팀 감독 레몽 도메네크]

 시합전에 도메네크 감독의 이름이 소개되어진 순간 일어난 야유는 선수에게 향해진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선출, 그리고 설명부족


 지윌리 81.54%, 피레스 63.79%

 이것은 [레퀴프]지가 멤버 발표 전에 인터넷상에서 행한 [누가 독일로 가는 23명에 어울리는가?]라는 앙케트의 결과이다. 특히 지윌리의 숫자는 공격적 MF중에서는 지단의 95.28%의 다음 가는 것이었다. 한편 도라소는 MF진 10명의 이름이 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랭크 밖이었다.

 그리고 도메네크 감독이 바르테즈를 레귤러 GK로써 지명한 건에 관해서는 약 70%가 [그레고리 쿠페를 레귤러 GK로 해야 한다]고 답한 사실도 있다([프랑스 풋볼]지). 역시 야유의 원인은 지윌리나 피레스를 대표에서 제외하고, 바르테즈를 레귤러 GK로 선택한 도메네크 감독의 선출에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감독에게서 설명도 없었으며 어떠한 이유로 대표에서 제외되었는지 알 수 없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출장하면서도 월드컵이라는 또 하나의 꿈의 무대에서의 플레이를 거부당하게 된 두 명의 MF는 낙선이 결정된 후 비슷한 낙담의 코멘트를 발표했다.

 이 두 선수가 지적하는 [설명 부족]은 도메네크 감독이 되어서부터 프랑스 대표에 정말로 현저히 보이는 경향이다. 긴 시간 유스 대표의 지도를 맡아왔던 도메네크 감독이지만, 그 [설명 부족]은 그 시대부터의 경향이기도 한 모양이다. DF 튀랑은 모나코 재적하고 있을 당시에 유스 대표의 일원으로 유럽 선수권에 출장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 '이유도 알 수 없이 갑자기 멤버에서 제외되어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유스 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것이 바로 도메네크 감독. 지금까지도 그 때의 사건을 포함하여 도메네크 감독과 1대 1로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튀랑은 말하고 있다.


멤버 발표할 때의 “폭거”


 그런 도메네크 감독의 [설명 부족]이라는 모습이 단 번에 화제가 된 것은 월드컵 멤버 23명의 발표라는 프랑스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가 주목하는 중요한 이벤트를 할 때였다.


 독일 월드컵의 프랑스 대표 멤버는 FIFA가 지정한 기한에서 하루 빠른 5월 14일 발표되었다. 그것은 매주 일요일에 방영되고 있는 인기 축구 프로그램 [텔레-풋] 속에서 멤버 발표의 모습을 생중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랑스 대표와의 계약을 가지고 있는 방송국 TF1이 기획한 생중계는 뒷맛이 개운치 않게 끝난다. 프랑스 국민이 주목하고 있는 중에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도메네크 감독에게서 23명의 이름이나 그 선출 이유를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발표 회장이 된 크레르 퐁테누의 회견장에 있었던 프로젝터에는 23명의 이름이 찍혔던 듯하지만 그 정보가 일반 시청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TF1의 저널리스트가 대신 23명의 이름을 읽게 되었다. 물론 선출 이유의 설명 등이 없는 채로…….


 텔레비전 중계 시는 물론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도 선출 이유를 명확히 하지 않았던 도메네크 감독은 자신이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던 이동통신회사 SFR에게 제공하고 있는 다이어리 속에서 독점적으로 멤버 선출 이유를 발표하는 '폭거'에 나섰다. 즉 월드컵 멤버 23명의 발표라는 것은 프랑스 국민 전체에게 전해질 종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맺고 있는 스폰서에게만 살짝 알려주면 된다는 종류의 것. 그렇게 도메네크 감독은 생각했다 - 라고 보일만 한 행동이었다.


 이미 멤버 발표 전부터 [이번 월드컵에서 도메네크 감독은 팀에 어떤 선수가 필요한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단이 누구와 플레이 하고 싶은가로 대표팀 멤버가 정해진다고 여겨진다]([르 파리지앵]지)라고, 도메네크 감독의 능력에 의문부를 찍는 경향이 있던 프랑스의 미디어는 멤버 발표 시의 폭거로 인해 완전히 뚜껑이 열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멤버 발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도자와 협회에게 독일에서 행해질 중요한 대회에 임하는 23명의 선도자가 될 수 있는가는 커다란 의문이다]([프랑스 풋볼]지)


 그러한 프레스에서의 이의신청, 거기에 일반 팬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압력도 있어 프랑스 협회는 도메네크 감독과 SFR과의 사이에 있었던 개인 계약을 강제로 끝내게 만들었다.

 [도메네크 감독과 우리들이 취한 방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면이 있는 것은 사실. 이 이상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SFR과 도메네크 감독과의 사이에 있던 개인 계약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레몽 도메네크의 고용자는 프랑스협회 하나만이 되었다.]


 대표 감독이 협회의 관할 아래 있으며, 그 협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팬들이 지탱하고 있다. 또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대표팀 감독의 의무이다. 더 말하자면 협회는 정부의 관할 아래 있다는 점에서 말하여도 월드컵 멤버 발표라는 국민적인 관심사에 관해서 의도적으로(또는 돈과 교환하여), 하나의 스폰서에게 한하여 정보를 흘리는 것은 용서받을 턱이 없다. 도메네크 감독에게는 그러한 기본적인 인식도 없었다는 것이 된다.

 [월드컵을 창시한 나라로써 창피한 실태이다.]([프랑스 풋볼]지)


제 2의 에메 쟈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월드컵 개막전에 커다란 실태를 보인 도메네크 감독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을 봉하고 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연하지만 월드컵 대회에서 호성적을 남기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8년 전 자국 개최의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처음으로 정상으로 이끈 에메 자케 감독도 미디어에게 계속된 비판을 받았었다.

 [자케 감독 아래서 프랑스가 우승한다면, 채찍질을 당해도 좋다)([레퀴프]지)

 개막 직전에는 그러한 바보 같은 선언을 하는 미디어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과연 도메네크 감독은 제 2의 자케 감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8년 전의 자케 감독은 칸토나, 파팡, 지노라라는 그 때까지의 주력 선수들을 멤버에서 제외하고, 당시는 어렸던 지단을 중심으로 하는 팀 만들기를 단행. 그리고 영광을 손에 넣었다. 그것에 비하여 도메네크 감독은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있던 지단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으로 힘들게 예선을 돌파했다.

 전혀 반대의 접근법을 취하면서도 결국 지단을 중심으로 한 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케 감독 시대의 프랑스 대표와 현재의 프랑스 대표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라 생각한다. 자케 감독이 끈질기게 미디어에게 대응을 계속 한 점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대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대회 전에 큰 비판을 받았다는 점은 공통된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축구를 하고 싶으니까, 나나 지단이 필요하다. - 라는 이야기는 없었고, 어쨌든 [너희들이 되돌아오면 예선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말만 들었다. 그 외에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지단과 함께 한 번은 대표팀에서 은퇴했으면서도, 월드컵 예선 탈락의 위기를 맞이했던 작년 여름에 부름을 받아 대표팀으로 복귀를 한 튀랑은 도메네크 감독의 복귀 요청의 모습을 그렇게 말했다. 불명예인 예선 탈락을 피하기 위해, 취임 시에 대표팀에서의 플레이 속행을 요청하여 거부당한 지단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고 복귀해 주길 바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도메네크 감독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한 경위를 거슬러 올라가면, [월드컵 멤버는 도메네크가 아닌 지단이 고른다]라는 소문도 단순한 소문은 아닌듯한 느낌이 든다.


 멕시코와의 시합, [신체적인 면에서 100%는 아니었다.] 지단의 플레이는 혹평을 받았다.([레퀴프]지는 10점 만점에 3.5점). 그러나 그 이상 심했던 것은 지단이 필드를 떠난 후반의 프랑스 대표팀이었다. 멕시코가 60%이상 볼을 지배하여 특히 중반의 싸움에서는 완전히 대응이 늦어졌다. 적어도 멕시코와의 시합에서 프랑스의 싸우는 모습에서 지단의 상태가 안 좋았을 경우에 필요한 다른 작전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미 도메네크 감독은 지단과 운명을 함께 하려고 맘속으로 정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확실히 지윌리도 피레스도 필요없다.


 [이 23명의 선수를 믿고 있으며, (월드컵 결승이 행해지는) 7월 9일을 노리고 있다.]

 이제는 쓸데없는 일을 아니 필요한 일 조차 설명하지 않는 것이 스타일이 된 듯한 느낌조차 있는 도메네크 감독은 그렇게 말한다. 도메네크 감독이 제 2의 자케 감독이 될 수 있는가 어떤가는 오로지 지단의 플레이에 따른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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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506/france/column/200603/at00008439.html

저자 : 데무라 켄지[出村 謙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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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교대를 단행한 프랑스 3대 클럽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울리에


 "사커는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뱉을 턱이 없을 말이지만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다.

 제라르 울리에[각주:1]. 현 리옹 감독. 확실히 그는 육체적으로 생사가 걸린 듯한  어려움과 정신적인 지옥에 떨어진 듯한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철저하게 현장에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는 58세의 명장이다.


 리옹, 파리 SG, 마르세유, 프랑스의 3대 클럽은 작년 시즌부터 이번 시즌에 걸쳐, 감독 교대를 단행했다.


 리옹 / 르 갱 -> 울리에

 파리 SG / 후르니에 -> 라콤브

 마르세유 / 트루시에 -> 페르난데스

 

 이들 중에서 전임자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확실시 되는 감독은 울리에뿐이다.

 약 10개월 전. 리그 5위인 상태에서 작년 시즌을 끝낸 트루시에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페르난데스의 마르세유는 3월 21일 현재는 작년과 같은 5위. '챔피언스 리그 출장 가능성이 있는 3위가 되지 않으면 감독으로써는 낙제점이다'며 트루시에의 목을 자른 마르세유지만, 페르난데스체제에서도 성적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파리 SG에 이르러서는 라콤브체제가 되어서부터 점점 순위를 낮아질 뿐이었다(현재 8위).


 이 두 사람에 비교해서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가 쉬운 일이었냐고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 라고 할까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 그것은 프랑스리그에서 네 번 왕좌에 오른 팀을 다섯 번으로 이끌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적어도 작년과 같은 8강에 오르는 것이다. 신임 감독에게는 굉장히 높은 목표치가 주어진 것이 울리에였다.


숫자가 증명하는 이번 시즌 리옹의 강세.


 올 시즌의 프랑스리그도 거의 3/4가 경과했는데 앞에서 말한 울리에에게 주어진 임무는 거의 클리어했다고 말해도 좋은 상황이다.

 3월 21일 현재, 리옹은 2위인 보르도와 승점 11점차로 수위를 독주하고 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 1회전에서 작년 시즌 8강에서 패배한 PSV에게 1-0, 4-0으로 쾌승, 여유 있게 8강에 올랐다.

 “작년과 비교해서 리옹은 훨씬 좋은 팀이 되어 있다. 가장 발전한 점은 중반이후의 안정감. 이것은 제라르 울리에의 능력에 의한 것일 것이다.”

 올해는 리옹에게 완패를 당한 PSV의 히딩크감독은 울리에 체제가 된 리옹의 강함에 대해여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는 4-3-3인 시스템으로 시작하여 전임자 르 갱이 만들어 낸 팀을 계승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울리에 체제의 리옹. 단, 세밀한 숫자를 비교해 보면, 작년과의 차이가 명확해 진다. 프랑스리그 작년 30시합 경과 시점에서 +25점이었던 득실점차는 올해는 +33이며, 챔피언스리그 1차리그에서는 작년도 올해도 +9였지만, 작년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5-0으로 대승해서 벌어들인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용적으로 올해가 더 나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5승 1무승부라는 멋진 성적으로 그룹을 1위로 돌파했다.

 이러한 숫자에서도 히딩크감독이 보낸 올해 리옹에의 찬사가 외교적인 발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올해 리옹 감독에 취임한 울리에는 고부, 빌토르라는 경량급의 테크니션이 많았던 FW에 193Cm, 90Kg인 카류를 보강. 압도적인 운동량과 테크닉을 자랑하던 에시엔(첼시로 이적)이 빠진 중반에는 페드렛티, 티아고라는 서로 다른 타입의 MF를 획득하여 종합적으로는 구멍을 메워 보였다. “종합력에서는 작년보다도 향상된 느낌을 받는다”고 평가를 내린 것은 프랑스 대표 GK인 쿠페.


 앞서 말한 에시앙과 쥬닝요의 MF진은 초인적인 움직임이 작년 시즌 리옹의 특징의 하나였는데, 올해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인다고는 해도, 그것이 반드시 쥬닝요만이 눈에 띈다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숫자에서도 명확하다.


<작년 시즌 = 쥬니뉴 11, 고부 5, 플로 5, 베르구뉴 4, 말루다 4>

<올 시즌 = 빌토르 11, 프레드 8, 쥬니뉴 7, 카류 6, 말루다 5, 고부 4>


 이것은 30전을 치른 상태에서 리옹의 개인 득점을 작년과 올해를 비교한 것. 작년 시즌 리옹이 쥬닝요의 개인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 것에 비하여 올해는 공격진이 두루두루 득점 분포가 퍼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던 풋볼에 있어서 진정 강함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력이 뛰어나며 비슷한 5명의 FW, 8명의 MF, 8명의 DF, 그리고 3명의 GK가 필요하다.”

 그러한 울리에의 지침이 올해 리옹의 팀 만들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게 능력 있는 선수를 모으는 것은 어떠한 감독이나 꿈꾸는 일이다. 단 좋은 선수를 모은다면 그것만으로 이길 수 있는 팀이 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또한 별다른 문제다.

 “올해의 레알 마드리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선수가 아무리 많아도, 팀으로써 기능시키기는 간단하지 않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압도한 리옹을 이끄는 울리에의 말이니만치 설득력이 있다.

 “팀의 모든 선수가 팀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이 상승 군단이 되어 가는 첫걸음이다”고 말하는 울리에는 스타 선수들이라고 하여도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프랑스 대표, 그리고 리버풀에서의 감독 경험에서 이끌어 낸 방법론이기도 할 것이다.


감독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역사적 패전


 프랑스 축구팬에게는 생애 잊을 수 없는 날이 세 개 있다고 한다.


 1982년 7월 8일

 1993년 11월 17일

 1998년 7월 12일


 위에 적은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답할 수 있는 독자님들은 굉장한 프랑스 축구의 매니아라고 자부해도 좋을 지도 모르겠다.

 1982년 7월 8일은 “세비야의 비극”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스페인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서독과 대전한 날. 그리고 1998년 7월 12일은 자국 개최의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프랑스가 처음으로 월드컵을 제패한 날이다.


 자 그럼 1993년 11월 17일은 무슨 날인가 하면, “파리의 임종”이라 하여 울리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다.

 이날, 파리의 파르크 드 프랑스 경기장에서는 94년 월드컵 예선 최종전, 프랑스 대 불가리아의 일전이 행해지고 있었다. 시합은 1-1인 상태로 인져리타임에 돌입했다. 울리에가 이끄는 프랑스는 비겨도 월드컵 출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종료 직전에 지노라가 불가리아 진영에서 간단히 빼앗긴 볼에 역습당하여 마지막에는 코스다티노프에게 역전 골을 허용.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끊어졌다. 이 때 프랑스는 지노라를 시작으로 칸토나, 파팽등 개성적인 스타가 즐비하여 80년대의 흐름을 잇는 화려한 축구를 보여주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것이 발목을 잡아 커다란 오점을 남겨 버렸다.


 당연하게도 이 세계축구사에 남을 패전은 지도자인 울리에에게 훗날 커다란 영향을 준다. 울리에는 곧바로 대표팀 감독을 사임. 뒤를 이어 받게 된 에메 자케를 지원하는 DTN(내셔널 테크니컬 디렉터)에 취임한다. 그리고 나라를 둘로 나누는 논쟁으로까지 발전한 [칸토나, 파팡을 대표에서 빼라]는 것을 자케에게 강력하게 조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케가 칸토나, 파팽이 없는 프랑스 대표팀을 만들어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루어낸 것을 지켜본 직후인 1998년 여름, 울리에는 DTN을 사임하고 리버풀의 감독에 취임했다.


잉글랜드 명문클럽에서 일으킨 혁명


 그 후 2004년 그 자리를 떠나기까지 6년간 리버풀 감독으로 울리에가 이루어낸 위업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프리미어리그에서 순위는 2위가 1회, 3위가 1회, 4위가 2회).


FA컵 우승(2001년)

리그 컵 우승(2001년, 2003년)

채리티 실드(현 커뮤니티 실드)우승(2001년)

UEFA 컵 우승(2001년)

UEFA 슈퍼 컵 우승(2001년)


 과거 15번 리그 제패와 같은 빛나는 역사 그리고 울리에가 떠난 직후 따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는 빅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부족한 전적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울리에가 취임했던 당시의 리버풀은 80년대에 일어난 2번의 비극(헤이젤, 힐즈보로)를 겪고, 1990년 마지막으로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마지막으로 긴 기간에 걸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기에 클럽에서는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울리에를 초빙한 것이다.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시합 다음 날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습조차 시키는데 힘들었지. 취임 당시, 리버풀에서는 사커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식생활의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 시합이 끝나면 chips에 맥주의 세계였었다고”

 지금은 프로 선수라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실행시키면서 근대화를 기도했던 울리에.

“30명의 전 플레이어, 거기에 30명의 전 코치인 평론가나 저널리스트가 주위에 진을 치고 있으며, 2시합 계속해서 패하면 사임의 위기를 맞이한다.”는 리버풀이기에 느껴야만 했던 압박감 속에서 6년간 감독의 자리를 계속 지켜낸 것은 앞서 이야기 한 울리에가 추진하는 클럽의 근대화가 착실하게 결실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법은 급성장을 하고 있던 젊은 선수들에게서도 지지받았다.

 “오언, 제라드라는 젊은 스타들을 주위에서 존경받는 팀 플레이어로 키워 낸 자부심이 있다.”

 확실히 10대부터 리버풀에서 스타 가도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선수는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항상 for the team을 느끼게 하는 플레이는 프랑스 대표감독 시대에 스타 선수의 취급에 실패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울리에류의 영재교육에 영향 받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지내는 것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프랑스 대표, 그리고 리버풀에서의 경험을 살려 유능한 선수들을 팀으로써 기능시키는 수완이 뛰어난 울리에. 17년 만에 돌아온 프랑스 리그에서 그리고 유럽의 강호들과 싸우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옹에게 영광을 안겨주기 위하여 '생사보다도 중요한 사커'현장을 지켜 나간다.


ps; 제가 프랑스 리그를 잘 모르며, 일본어 번역인 관계로 고유 명사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를 바랍니다.

  1. Gerard Houllier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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