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809/other/text/200812290012-spnavi.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 3팀에 의한 플레이오프 끝에 우승


[보카 주니어스는 플레이오프 끝에 2008년 전기리그를 제패하였다]

 아르헨티나 리그의 2008년은 12월 23일 보카 주니어스가 새로운 영광을 손에 넣으며 막을 내렸다. 3팀에 의한 플레이오프라는 역사에 남을 격전 끝에 움켜쥔 극적인 우승이었다. 축구계에서 빛나는 역사를 가진 보카가 요 11년간 아무런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했던 적은 2002년뿐이다. 자국 리그뿐만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수다메리카나 등의 큰 무대에서 멋진 결과를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실패를 교훈 삼으며 그럴 때마다 클럽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카는 그 팬이 많음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횟수로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지만 2008년 전기 리그에서는 결코 평온함 속에 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기는 19시합을 끝낸 상태에서 산 로렌소, 보카, 티그레 3팀이 12승 3무 4패로 승점 39이어서 3팀에 의한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에 돌입(아르헨티나 리그의 정규 시즌에서 득실점차는 순위에 고려되고 있지 않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팀이 승점 3으로 동점이 되어 불과 1골의 차로 보카가 23회째의 영광을 손에 넣었다.

 우승을 결정짓는 3팀에 의한 미니 리그에서 우선 산 로렌소가 티그레(최근 승격한 팀으로 1부에 참전한지 이제 2년째이다)에 2-1로 승리하였다. 이어서 보카가 산 로렌소에 3-1로 승리. 보카의 우승은 너무도 쉬운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보카가 티그레에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1점차로 지더라도 득실점차에서 챔피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카는 티그레에 0-1로 패하여 우승을 손에 넣은 것인데 타이틀을 다른 팀에게 빼앗길 위기도 있었다. 67분에 실점하였을 때 상대 선수와 맞부딪친 젊은 GK 하비에르 가르시아(Javier Hernán García)가 부상으로 떠남으로 해서, 이 큰 무대가 데뷔전이 되는 약관 20살의 호수에 아얄라(Josué Ayala)가 교체 출장하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공세를 거듭하는 티그레에 보카도 반격. 결국 0-1인 채 시간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려 보카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 만신창이인 상태로 움켜쥔 영광

 최종적으로는 우승하였다고는 하지만 올 시즌 보카가 고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제일 먼저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캡틴이며 에이스 FW인 마르틴 팔레르모(Martín Palermo)의 부재이다. 1930년대에 활약했던 프란시스코 바라요(Francisco Varallo - 현재도 살아있다[각주:1])의 보카의 역대 최다 골 기록[각주:2]을 갱신한 스트라이커는 8월 24일 CA 라누스와의 시합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를 다쳐 장기간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또한 팔레르모와 짝을 이루며 국내에서는 베스트 FW라고도 말할 수 있는 로드리고 팔라시오(Rodrigo Palacio)도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예전 리버풀에서 뛰었던[각주:3] CB 가브리엘 팔레타(Gabriel Paletta), 퍼스트 GK인 마우리시오 카란타(Mauricio Caranta)는 감독인 카를로스 이스치아(Carlos Ischia)와 논쟁을 벌인 끝에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더욱이 경험 풍부한 SB인 우고 이바라(Hugo Ibarra)와 클라우디오 모렐 로드리게스(Claudio Morel Rodríguez)도 부상당해버렸다.

 그래서 보카는 새로운 인재를 발굴했다. 유스 팀에서 21살의 GK 가르시아, 20살의 DF 후안 포를린(예전 레알 마드리드B에 소속[각주:4]해 있었다), 21살의 DF 파쿤도 롱카글리아(Facundo Roncaglia), 22살의 볼란치인 크리스티안 마누엘 차베스(Cristian Manuel Chávez) 그리고 앞 선에는 21살의 두 공격수 리카르도 노이르(Ricardo Noir)와 놀랄만한 득점감각을 갖춘 루카스 비아트리(Lucas Viatri)를 승격시킨 것이다. 그들은 주력선수들의 포지션을 빼앗을 정도로 성장하여 팀 승리에 공헌하였다.

■ 1998년부터 시작된 팀 개혁

 
[팬들의 존재는 보카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예전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랜 기간 트로피에서 멀어져 있던 보카는 이 해에 새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미디어에 이용당하고 있던 팀을 해체하고 선수나 감독을 일신했다. 당시의 보카는 ‘마라도나 2세’라 일컬어졌던[각주:5] 디에고 라토레(Diego Latorre)가 “보카는 난장판이다”고 말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새로운 지휘관으로 카를로스 비안치[각주:6]가 취임하면서 보카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시작으로 한 수많은 영광을 획득하게 된다.

 1995년에 회장에 선출된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 현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장을 맡고 있다)는 어떻게 하면 팀을 재건할 수 있는지 몰랐다. 카를로스 빌라르도[각주:7]에 이어서 엑토르 베이라[각주:8]를 감독에 앉힌 것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98년 마크리는 팀을 프로페셔널 집단으로 하기 위해서 비안치를 초빙하였고 동시에 하부조직의 충실을 꾀했다. 또한 보카는 유소년을 위해 ‘클럽 파르케(Club Social y Deportivo Parque)’와 협력체제를 확립하였고 현재는 하부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큰 선수로는 레돈도(Fernando Redondo), 소린(Juan Pablo Sorín), 리켈메, 가고, 테베스 등 쟁쟁한 면면들이다.

 예전 보카는 선수들을 사 모으는 측이었다. 그러나 마크리는'”10년 안에 11명 중 9명은 클럽 토박이 선수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 당시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평정을 되찾은 팀은 승리를 거듭하며 클럽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 라이벌 리베르의 존재.

 보카는 개혁 이후 국내에서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4번, 토요타 컵(현 클럽월드컵)을 2번 제패했다. 또한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2번, 레코파 수다메리카나[각주:9]에서도 3번 우승하였다. 이것은 전부 1998년 이후에 획득한 타이틀이다. 아르헨티나, 남미대륙 거기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선수들 대부분은 자신의 가치를 높여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페르난도 가고(레알 마드리드), 에베르 바네가(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에밀리아노 인수아(Emiliano Insúa, 리버풀), 오스칼 트레호(Oscar Trejo, 마요르카), 세바스티안 나야르(Sebastián Nayar, 레크레아티보), 파비안 몬손(Luciano Fabián Monzón, 베티스), 카를로스 테베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현재 보루시아 MG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FW 로베르토 콜라우티(Roberto Colautti)도 보카의 유스 출신이다.

 한편 보카는 하부조직의 선수육성만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으로 보낸 클럽을 상징하는 선수들을 몇 년인가 후에 다시 불러들임으로 인해 팀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 세바스티안 바타글리아(Sebastián Battaglia, 전 비야레알), 후안 로만 리켈메(바르셀로나, 전 비야레알), 우고 이바라(FC 포르투, 모나코, 에스파뇰), 팔레르모(비야레알, 베티스, 알라베스) 등의 면면들이다. 또한 보카는 ‘등번호 12’로 알려진 가장 잔소리가 심한 팬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거대한 깃발을 휘날리며 팀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보켄세[각주:10](보카의 팬)에게 있어 2008년 전기 리그 우승은 특별한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팀 우승은 물론이거니와 최대의 라이벌인 리버플레이트(리베르)가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최하위로 떨어진 것이다. 1931년 프로 리그화된 이후 리그 우승회수를 따지면 23번의 보카에 비해 리베르는 국내 최다인 33회를 자랑한다(국제 타이틀까지 포함하면 보카는 리베르를 크게 앞서고 있다). 2008년 후기 리그에서는 리베르에 우승을 허용하여 2위로 마쳤던 만큼 그 반년 후에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였기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베르가 곧바로 2부로 강등당하지는 않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과거 3년(전기, 후기 3대회 씩)의 성적에서 평균값을 산출하여 하위 2팀이 강등당하기 때문이다(17, 18위 팀은 교체전을 행하게 된다).

  1. 1910년 2월 5일생. [본문으로]
  2. 194골. 보카의 아마 시절까지 포함하면 로베르토 체로(Roberto Cherro)의 221골. [본문으로]
  3. 2006-2007시즌 3경기 출장. [본문으로]
  4. 2007년. [본문으로]
  5. 이 선수가 처음으로 '마라도나2세(New Maradona 혹은 New Diego)'라고 불렸다. [본문으로]
  6. 현재는 보카의 GM [본문으로]
  7. Carlos Bilardo. 그는 1983~1990년까지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이다. 월드컵 우승 1회, 준우승 1회. 1996년 보카 감독으로 당시 리그 5위. [본문으로]
  8. Héctor Veira - 1996~1998의 감독. 리그 순위는 각각 9위, 2위, 6위. [본문으로]
  9. Recopa Sudamericana.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수다메리카나의 우승팀이 격돌하는 UEFA의 슈퍼컵과 같은 대회이다. [본문으로]
  10. 철자는 boquense....굳이 각주를 단 이유는....철자 찾기 힘들었거든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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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other/text/200807090001-spnavi.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 에콰도르의 첫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지금까지 에콰도르의 풋볼은 [남미의 약소국]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근래는 그 평가를 반환하면서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특히 요즘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여서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전통의 남미 강국들에게 서서히 따라붙고 있다. 이번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LDU 키토(Liga Deportiva Universitaria, LDU de Quito)’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우승을 거두며 에콰도르에 첫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결승에서 물리친 상대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본거지로 하는 강호 플루미넨세. 더구나 2차전은 9만 명이 넘는 상대 서포터들로 미어 터질듯한 전설의 마라카난 스타디움에서 행해졌다.


 올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LDU 키토는 결코 우승후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48번째를 맞이한 이 대회에서 에콰도르의 클럽이 우승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도 전 대회의 우승팀인 보카 주니어스를 시작으로 한 리버 플레이트, CA 산로렌소, 에스투디안테스 등 아르헨티나의 강호. 플라멩구, 상파울루, 산토스 등 브라질의 실력파, 신흥국인 멕시코에서도 치바스, 과다라하라, 클럽 아메리카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LDU 키토는 16강에서 에스투디안테스, 8강에서 CA 산로렌소, 4강에서 클럽 아메리카 등 난적들을 상대로 간신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 플루미넨스와의 결승 1차전에서 4-2로 먼저 승리는 하였지만, 적지에서의 2차전은 90분을 끝내고 1-3. 유럽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원정 골 룰이 없기 때문에 합계 스코어는 5-5로 시합의 행방은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20분을 마치고서도 결착이 나지 않아 승부차기에 돌입. 예전 우라와[浦和]에 있었던 플루미넨세의 와싱턴이 실패한 순간 사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 힘겨웠던 승승장구


  조 예선에서 LDU 키토는 결코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6강에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에스투디안테스를 물리치는 서프라이즈를 일으키면서부터이다.


  공격수인 루이스 보라뇨스(Luis Bolaños), 아르헨티나 국적의 MF 다미안 만소(Damian Manso) 등이 팀의 중핵에 자리잡고 있으며, 최대의 스타는 스피드감 넘치는 오른쪽 윙인 호프레 게론(Joffre Guerrón[각주:1])이다.

  또한 37살의 베테랑 GK 호세 프란시스코 세바요스(José Francisco Cevallo)가 입단한 뒤부터는 디펜스 라인이 안정되었다. CA 산로렌소와의 8강에서 전 에콰도르 대표팀의 수문장은 합계 스코어 2-2로 맞이한 승부차기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또한 특필해야만 할 것은 플루미넨세와의 결승 2차전이다. 세바요스는 플루미넨세가 찬 4개의 슛 중 다리오 콩카(Darío Conca, 아르헨티나 국적), 치아고 네베스(Thiago Neves), 와싱톤이 찬 3번의 슛을 막은 것이었다.


  그러나 남미 챔피언이 된 LDU 키토가 단순히 좋은 팀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디펜스보다는 공격에 중점을 두고 있어 이번 대회도 가까스로 승리해 왔다. 그 시합 방식은 오히려 이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실력의 차이가 심하며 때때로 수비에서 큰 구멍을 만들어 버린다. 항상 약점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승에서도 플루미넨세는 측면에서 1점을 올렸는데 LDU 키토의 수비진은 모두 잠이라도 자고 있는 듯했다.


  전술면에 있어서 아르헨티나 국적의 감독 에드가르도 바우사(Edgardo Bauza) – 에콰도르에서 LDU 키토를, 그 전에는 페루에서 스포르팅 크리스탈(Sporting Cristal) 2005년에 우승으로 이끌었다 는 기본적으로 3백을 채용하여 중반을 두텁게 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 선수 4명의 공헌도도 크다.

  앞서 말한 다미안 만소에 더해, CB인 노르베르토 아라우호(Norberto Araujo), FW인 클라우디오 비에레르(Claudio Bieler)의 아르헨티나 트리오. 그리고 파라과이 국적의 MF 엔리케 베라(Enrique Vera[각주:2])이다.

팀을 하나로 묶은 주장 파트리시오 우루티아(Patricio Urrutia, WF), 좌측 WB인 파울 암브로시(Paul Ambrosi)도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2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출장한 에콰도르 대표

 

 20086 15.

 리버 플레이트의 본거지 모누멘탈에서 행해진 2010 월드컵 예선에서 에콰도르 대표팀은 시합 종료 직전까지 아르헨티나에게 1-0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반 인저리 타임 때 로드리고 팔라시오에게 골을 허용하여 아르헨티나에서의 승리는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1-1은 충분히 훌륭한 결과이다. 아르헨티나에는 리오넬 메시, 세르히오 아궤로, 후안 로만 리켈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즐비했으니까.

 

 에콰도르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이때는 조 예선에서 패퇴하였지만, 저번 2006년 독일대회에서는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잉글랜드에 0-1로 석패하기는 하였어도, 멋지게 16강 진출. 에콰도르의 풋볼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웃나라인 콜롬비아 90년대에 그러했듯이, 운 좋게 동시대에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배출되었을 뿐인 것은 아니다. 당시 콜롬비아에는 발데라마, 발렌시아, 코르도바 등 굉장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콰도르의 경우는 그때와 다르다. 퍼포먼스라는 면에서 본다면 당시의 콜롬비아에 미치지 못하지만, 기본 전술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 미디어의 풋볼에 대한 열기는 뜨거우며, 지도자들이 새로운 전술이나 전략을 흡수하고자 하는 의욕도 높다.

 

 따라서 이번 LDU 키토의 파죽지세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 2회 연속으로 월드컵 출장 또한 그렇다. 에콰도르의 축구계가 이대로 지속성을 계속 유지해 나아갈 수 있다면, 국제 대회에의 단골이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1. 현 에콰도르 젊은 선수(1985년생) 중 장래성이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번 대회 MVP. 2008년 6월 6일 리가 에스파뇰의 헤타페와 4년 계약을 맺었다. [본문으로]
  2. 2008년 7월 8일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와 4년 계약을 맺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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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카와사키 산교우

“봄보네라”에서 보카를 맞이한다.


 표고 2660미터.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 톨루카를 본거지로 하는 데포르티보 톨루카(이하 톨루카). 그리고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강팀 보카 후니오르스. 이 두 팀이 3월 14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그룹리그에서 시합을 하였다.


 시합은 톨루카의 홈 스타디움 네메시오 디에스. 보카의 홈 스타디움의 명칭이 [봄보네라 - 초코렛 상자, 라는 뜻]라는 것은 유명한데 톨루카의 스타디움도 그 지역에서는 똑같은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름대로 인공위성 시점에서 보면 과자상자를 연상케 하는 장방형. 거기에 스탠드 삼면에 걸쳐 지붕이 있고 필드와 스탠드와의 거리가 가까워서 잉글랜드의 스타디움을 연상하게 한다. 단 잉글랜드의 스타디움과 닮은 것은 형태뿐이다. 가까이서 보거나 실제로 안에 들어가 보면 굉장히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콘크리트 바닥이나 벽은 거무스름하고 금이 가있다. 화장실 수도 적고 겉치레라도 청결하다고는 말 할 수없다. 스타디움 제일 상단에 있는 기자용 부스에 도착하기에는 스탠드 외측 벽에 달라붙어 있는 난간 없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기자석에 책상도 없다. 좁은 장소에 의자가 빈틈없이 있을 뿐이다.

 필드도 사정은 비슷하다. 군데군데 잔디가 까져 맨 땅이며 보수를 위하여 새로운 잔디판이 이식된 부분도 있다.

 여기는 17일 일본 여자 대표팀이 월드컵 플레이오프 원정이 행해진 장소이기도 하다.

 보카가 나오는 리베르타도레스의 시합이라는 바라마지 않던 카드도 볼 수 있고 거기다 3일후에 행해지는 일본 대 멕시코의 플레이오프 2차전을 보기위한 스타디움의 견학도 겸할 수 있다. 이런 시합에 취재신청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남미클럽 간에 벌어지던 리베르타도레스라는 역사와 권위 있는 대회의 시합을 우리 마을에서 벌어진다는 톨루카의 서포터들의 모습에도 흥미가 있었다.


멕시코에서 가장 차가운 인간?


 지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멕시코의 클럽도 출장자격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유럽 챔피언스리그가 지금은 전 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주목받는 대회로 성장한 것에 자극받은 남미축구연맹(CONMEBOL)은 뒤늦게나마 시장의 확대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우선은 가까운 곳부터 개척하기 위하여, 그들은 북중미카리브지역 연맹소속(CONCACAF)의 팀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CONMEBOL에게는 TV방영권이 보다 많은 나라에게 팔 수 있으며 CONCACAF 소속의 팀에게는 레벨을 높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가 된다.

 단 CONCACAF에게도 리베르타도레스에 상당하는 챔피언스 컵이라는 대회가 있다. 그 대회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리베르타도레스의 출장자격은 전전년도의 성적에 의해 결정된다. CONCACAF의 나라들의 전년 패자(覇者)는 챔피언스 컵에 출장하기 때문에 두 대회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멕시코에서는 1시즌을 전기와 후기 리그로 나뉜다. 각각 리그의 1위끼리 벌어지는 종합왕자결정전의 승자는 무조건적으로 다다음해의 리베르타도레스의 출전권을 얻는다. 그리고 종합순위 2위 이하의 상위 팀은 예비예선으로 돌려져 다른 CONCACAF 소속국의 비슷한 상태에 놓인 팀과 리베르타도레스 출장을 놓고 다투는 규칙으로 되어있다. 톨루카는 2005년 멕시코 종합왕자로서 2007년도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톨루카 시(市)는 그 높은 위치로 인해 겨울엔 상당히 춥고 여름이라도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하다. 멕시코에서는 이런 기후에서 살아가는 톨루카 시민을 [멕시코에서 가장 차가운 인간]이라며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톨루카 시의 사람들이라도 굉장히 밝고 외향적이며 친절하게 느껴진다. 단 이 날의 톨루카 서포터들을 보고 있자니 '차갑다'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라틴 도시의 축구 팬으로서는 냉정하다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곳과 같이 시합시작하기 몇 시간 전부터 시내의 도로는 톨루카의 붉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채워 넣은 차들로 혼잡했다. 그러나 다른 라틴 도시들처럼 클랙슨을 빵빵거리거나 차에 클럽의 깃발을 세우거나 하는 광경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걸어서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얌전했다. 확실히 길은 새빨간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지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술에 취해 기세를 올리는 서포터의 모습은 없었다. 각각 생각한 것을 말하면서 정연히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타코스 노점상에 들려서 시합 시작 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때문에 스타디움 주변 도로를 봉쇄하여 경비를 맡고 있던 기동대나 경찰들이 필요이상으로 과장대고 삼엄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얌전함도 스타디움에 들어서기까지만.

 스탠드에서는 사람들이 킥오프하기 전부터 나팔을 울리거나 멕시코 대표의 응원가이기도 한 [멕시코, 멕시코, 라, 라, 라!]의 멕시코 부분을 톨루카로 바꾸어 대합창하거나, '디아브로스(스페인어로 악마. 톨루카의 닉네임)'를 한 목소리로 외치거나. 또한 전원이 웃통을 벗은 한 편의 무리도 있었다. 스타디움의 수용인원은 불과 2만7000명이지만 스탠드를 감싸고 있는 지붕으로 인한 메아리 효과 때문에 인원보다 몇 배나 많은 듯한 박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 높은 경기력으로 낚아챈 승리


 슬슬, 시합에 대한 것도 언급하고자 한다.

 톨루카가 3-5-2, 보카는 4-4-2의 포진으로 스타트했다. 아쉽게도 보카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팔레르모(전 알라베스), 리켈메(전 비야레알)의 두 선수의 이름이 이 날 등록멤버에는 없었다. 둘 다 내전근(內轉筋)[각주:1]이 당기는 증상을 호소했기 때문에 루소 감독이 앞으로 계속 될 과밀일정을 고려하여 이 원정시합에는 참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톨루카는 양 사이드에 준족의 테크니션을 배치하여 빈번히 아래와 위를 오고 갔다. 그리고 중반 중앙의 3명이 유동적으로 포지션을 바꾸며 때때로 FW중 한 명과 자리를 바꾸거나 했다. 기본적으로 카운터를 노리는 축구이다.

 보카는 기본적으로 볼 점유율을 높이면서 전체적으로 라인을 올려 마지막에는 상대 마크의 틈을 노려 슛을 노리는 스타일이다.


 시합 시작 5분정도 까지는 보카의 이름값에 압도당하였는지 톨루카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7분, 톨루카 왼쪽 사이드의 카를로스 모랄레스가 드리블로 돌파한 후 올린 크로스에 그에게서의 볼이 올 것이라 믿고 달려 든 반대편 사이드의 세르히오 폰세가 슬라이딩 발리슛으로 선취점을 올리자 흐름은 단 번에 톨루카쪽으로 흘렀다.

 하프라인 근처까지는 보카에게 볼을 가지게 하고 거기부터 앞으로 침입해 오면 톨루카의 중반 선수들이 둘러싸 볼을 빼앗아 단번에 텅 빈 보카 DF라인 뒤편으로 패스를 넣었다. 특히 양 사이드의 모랄레스와 폰세를 막질 못하여 보카는 몇 번이나 두 선수에게 돌파를 허용했다. 이러한 시간대가 계속 되어 톨루카가 카운터어택으로 볼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한 시합이 되어있었다.

 20분경 조바심이 더해진 보카의 CB 다니엘 디아스가 결국 상대 선수에게 박치기를 하여 레드카드. 이렇게 되자 보카의 루소감독은 중반 왼쪽 사이드의 카르도소를 수비라인으로 내려 중반을 3명으로 줄였다. 시합 개시 20분 만에 10명이 되어버려서는 아무리 보카 후니오르스라고 하여도 힘들다. 더구나 고지(高地)에서의 시합인 것이다. 보카는 중반에 머리수가 부족해지자 그 때까지보다 더욱더 사이드를 공격당해 슛을 허용하는 상황이 계속되어졌다. 예상치 못했던 전개로 인하여 충분히 뜨끈뜨끈해졌던 스타디움은 중장거리 패스가 프리로 되어있던 톨루카 선수에게 이어질 때마다 [올레~!]하는 추임새로 가득 찼다. 맞아 맞아, 멕시코의 스타디움은 원래 이렇지 않으면 안 되지~


 후반에 들어서자 엷은 공기 탓인지 한 선수가 없어져서 인지, 완전히 보카선수들이 다리가 멈추었다. 대조적으로 톨루카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만큼 날뛰었다. 전반전 이상으로 중반중앙의 3선수가 전후좌우로 분주히 뛰며 게임을 만들어갔다. 공격할 때뿐만 아니고 수비할 때에도 헌신적으로 움직였기에 보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던 톨루카의 추가점은 57분.

 어시스트는 또다시 모랄레스. 그의 세로 패스에 민감히 반응한 FW 비센테 산체스가 상대 DF라인 뒤편으로 파고들어 앞으로 나온 GK의 눈앞에서 토킥으로 골.

 그 후는 이미 톨루카의 원사이드 게임이다. 스타디움에서 [올레~!]의 성원이 몇 번이나 울려 퍼졌던가…….


 2-0이라는 점수차 이상으로 톨루카가 압도한 내용이었다. 상대인 보카가 주력선수 둘이 빠지고 더구나 이른 시간대에 퇴장이 나왔던 것 그리고 고지(高地)에서 홈 어드밴티지라는 후원도 있었지만 높은 경기력으로 낚아챈 승리이다. 이것에 의해 3라운드를 끝낸 시점에서 톨루카는 그룹 7의 선두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큰 승리에도 불구하고 역시 톨루카의 서포터는 냉정했다. 스타디움을 나오면 방금 전의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봄보네라의 주변에서 환호를 외치는 사람도 목소리높이 서포터 송을 부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싸움도 없었다. 쓰레기도 거의 없었다. 차의 클랙슨은 본래의 목적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붉은 집단은 모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단지 물론 그들의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를 머금었지만.


■ 가까운 듯이 보이면서 먼 멕시코의 실력


 스타디움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든 생각이 있다.

 이날 톨루카의 축구는 카운터를 주체로 한 스타일이었지만 굉장히 치밀하고 스펙터클한 것이었다. 디펜스라인부터 세밀한 짜임세. 중반에서 선수가 자유로이 포지션을 바꾸면서 짧은 패스의 교환. 양 사이드의 피곤함을 모르는 아래 위 움직임과, 정확한 센터링. 포워드의 집착심.

 일본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요즘 멕시코 대표가 큰 인기다. 큰 몸집의 선수가 적은 만큼 상대와의 접촉을 어떻게든 피하면서 개개인의 높은 기술을 살려 계속해서 패스 코스를 만들어 상대팀 골대로 육박한다. 그런 방식은 일본 선수로도 실현가능하며 지금부터 목표로 할 만한 축구라는 것이다.

 과연 정말로 그러할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톨루카는 멕시코 대표와 완전히 같은 스타일은 아니다. 선수의 면면이 틀리다. 그러나 재작년 시즌 멕시코 리그의 패자(覇者)이다. 어떤 면에선 멕시코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멕시코와 일본은 선수의 실력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양국 선수의 특징이 닮았다 또는 크게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은 아닐까?

 톨루카의 선수들은 군데군데 파인 필드에서도 상대 선수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볼을 컨트롤하여 정확하게 패스를 하였다. 나서서 육탄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격한 몸싸움을 벌여도 지지 않았으며 확실히 볼을 간수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골문에 육박한 선수는 살짝 상대에게 발이 걸린 정도로 간단히 넘어져 심판의 얼굴을 보거나 하지 않았다. 곧바로 일어나거나 기면서도 슛까지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장면을 지금의 J리그에서 얼마만큼이나 볼 수 있을까?

 너무도 플레이가 조잡하며 그런 주제 허약하고 가냘픈 선수가 너무 많지는 않은가?

 지금의 일본이 멕시코와 같은 축구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알파벳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으면서 영어로 된 학술 논문을 읽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멕시코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좀더 개개인의 기술 레벨을 올리고 볼에 대한 집념을 키우고 나서부터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러한 격차를 없애기 위해서 전국의 어린 선수층 지도자분들이 열심히 육성에 임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을 다해도 여전히 일본선수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톨루카라는 세계적으로는 무명의 팀이 보카를 상대로 보여준 축구는 통쾌했다. 스태디움에 있었던 서포터들에게는 잊지 못할 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경꺼리로만 생각했던 일본인 필자에게 있어서는 일본과 가까운 듯 보이면서 먼 멕시코 축구의 실력을 알게 된 밤이 되어버린 것이다.

  1. 팔다리나 손가락 등을 몸통으로 끌어당기게 하는 근육.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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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토쿠하라 타카모토


[처음으로 남미의 패자에 오른 인테르나시오날]


붉은 군단 인테르나시오날 사상 최초의 왕좌


 격전의 끝을 알리는 시합 종료의 휘슬이 포르투 알레그리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을 때, 남미다운 광량이 부족한 조명이 비추어진 비이라 히우의 필드에 선 양 팀의 선수들의 모습은 실로 대조적이었다. 남미의 흰 거인이라는 이명을 가진 상 파울로 FC의 선수들은 힘없이 어깨가 축 쳐졌고 처음으로 남미 챔피언 자리에 앉은 인테르나시오날의 붉은 사나이들은 끝없는 기쁨에 휩싸였다.


 남미 클럽의 챔피언을 가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결승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브라질 클럽끼리의 대결이 되었다. 2년 연속으로 결승전에 진출한 상 파울로 FC는 지금까지 세 번의 세계정상에 오른 실적을 가진 남미에 있어선 최상급의 명문 클럽이다. 상대하는 팀은 26년 만의 빅 타이틀 획득의 기회를 얻은 남부의 강호 인테르나시오날.


 국내 리그전의 틈새를 타서 광대한 남미 대륙 전토를 돌아다니며 시합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힘든 싸움의 연속이다. 적 서포터에게서는 통렬한 “입 공격”을 받으며, 때로는 높은 지대 등의 특수한 기후 조건에서도 플레이를 하고 투지를 뿜어내며 부딪쳐 오는 상대 선수의 과격한 파울에도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승까지의 여정이 격전의 연속인 만큼 상 파울로 FC가 최종 결전에서 받아들이게 된 모든 것이 허무한 노력이 된 패배자라는 현실은 너무나도 잔혹했다. 대조적으로 승리자라는 칭호를 받은 인테르나시오날의 선수와 스태프는 기쁨을 폭발시켰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흐르는 사람도 있었다.


절대적 우위일 터인 홈에서 진 상 파울로 FC


 인테르나시오날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많은 서포터가 지켜보는 홈그라운드에서 클럽 사상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 클럽이 지역에 밀착되어 있고 전국적인 인기 클럽이 존재하지 않는 브라질에서는 국내 클럽끼리의 시합이라고 하여도 원정은 말 그대로 적지가 된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서포터의 절대적인 성원을 지원 받으며 싸우는 홈 게임은 절대적 우위에 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상 파울로 FC는 9일 행해진 홈인 모룽비에서의 1차전을 1-2로 져 버렸다. 홈 팀에게 있어서는 전반 초반에 josoe가 레드 카드를 받아 퇴장 당해 필드에서 떠남으로 시합이 결정되었다. 프라이드와 프라이드가 맞부딪혀 계속된 파울로 과격한 시합 내용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던 시합이었기에 중반의 다이나모를 불과 9분 만에 잃은 상 파울로 FC는 팀의 리듬을 공수에 걸쳐 만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인테르나시오날도 38분에 파비뉴(fabinho)가 퇴장. 파울로 의해 시합이 자주 끊겨 교착상태가 되었고 스코어도 변동 없이 전반 내내 0-0인 상태로 종료되었다. 계속 된 후반도 답답한 흐름을 끊어 주는 슈퍼 플레이는 어느 누구도 보여주지를 않았다. 그래도 53분과 61분에 인테르나시오날의 하파엘 소비스가 연속 골을 기록. 붉은 군단은 75분에 상 파울로 FC의 CB 에드카를로스(edcarlos)에게 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실점을 이 1점만으로 막아 내용은 재미 없었지만 불리한 조건 아래서 싸우는 것을 강요받는 원정 경기에서 승리라는 최고의 결과로 돌파한 것이었다.


 양 팀 다 임팩트가 부족했던 1차전을 끝낸 결과 상 파울로 FC는 16일의 2차전에서는 승리 해야만 하는 힘든 상황에 몰렸다. 그에 비해 인테르나시오날은 비겨도 우승이라는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최후의 시합에 임하게 된 것이었다.


포르투 알레그리가 낳은 파워 축구


 결승전의 무대가 된 두 스타디움은 기이하게도 전 대회와 같은 모룽비와 비이라 히우였다. 그러나 작년 결승전에 진출한 팀은 상 파울로 FC와 아틀레찌쿠 파라나엔시였기에 이번과는 다르다. 결승에 진출했던 팀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개최 스타디움이 같게 된 이유는 아틀레찌쿠 파라나엔시의 본거지인 쿄우세라 어리나에 있었다. 2만 4000명을 수용하는 쿄우세라 어리나는 남미 축구 연맹이 정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스타디움 규정 수용 인원인 4만 명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스타디움이 비이라 히우로 변경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홈 팀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 시합은 스탠드에 빈 자리가 눈에 띄었고 활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홈 & 어웨이가 된 이번 대회는 1차전인 모룽비에 7만 1456명의 서포터가 집결. 비이라 히우도 5만 5000명의 축구 팬으로 가득 차 스탠드는 두 시합 다 활기로 넘쳤다. 무엇보다도 우승에 한 발자국만 다가서면 되는 홈 팀을 지원하고자 비이라 히우에 몰려 든 인테르나시오날의 서포터들은 뜨거웠다. 그들의 정신적인 강인함, 클럽에 대한 애착심, 강렬한 단결력을 나타낸 성원은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11명의 인테르나시오날 선수들을 약동시켰다.


 예전에 소속했던 적이 있는 둥가로 상징되듯이 브라질 남부의 도시 포루투 알레그리시를 본거지로 하는 인테르나시오날은 용감한 가우쇼(카우보이)의 땅으로 알려진 토지 특색과 마찬가지로 파워 축구를 특기로 하고 있는 팀이다. 이 지역의 클럽은 상 파울로 주나 히우지자네이루 주의 테크닉을 주체로 하는 팀과는 달리 국경에 가까운 아르헨티나의 축구와 닮은 스타일이 특징이다.


 파워 축구를 무기로 이기는 것보다도 우선은 지지 않는 축구를 전개하는 팀은 토너먼트 전에서 강함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시의 라이벌, 그레미우도 이 강건한 스타일로 이미 2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거두고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파워 축구는 항상 대전 상대와의 생존을 건 시합이 되는 컵 전에서 강함을 발휘하는 것이 증명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상 파울로 결전을 제패하고 온 인테르나시오날은 파워로 상대의 전의를 꺾고 디펜스를 강고히 하는 패턴으로 2차전을 싸우려 했다.


 그러나 배수의 진으로 싸우는 상 파울로 FC도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1차전의 재미없는 시합과는 반대로 2차전은 일진일퇴의 터프하고 박력이 있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29분에 홈 팀의 페르난동이 선제점을 올리자, 51분에 어웨이 팀인 파붕이 동점탄으로 시합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65분 다시 인테르나시오날의 팅가가 헤딩 슛을 넣어 1점 앞서나가자, 디펜딩 챔피언도 종료 5분전에 의지를 보여 레니우송이 득점. 인테르나시오날의 팅가가 골 직후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유니폼을 벗는 행위로 2번째 옐로카드를 받아 퇴장이 되었지만, 두 팀 다 한 발도 물러나지 않는 전개로 결국 2-2의 스코어로 끝났다. 이 결과, 2시합에서 1승 1무승부의 성적을 거둔 인테르나시오날이 올 해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제패한 것이었다.


[인테르나시오날은 12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클럽 월드컵의 출전권을 획득했다]


인테르나시오날 출신의 팔칸이 유럽에서 성공했던 이유


 1909년 창립이래 처음으로 남미의 왕자가 된 인테르나시오날의 역사 속에서 최대의 스타 플레이어는 파울로 호베르토 팔칸이다. 브라질 대표로써 지쿠, 소크라테스, 토니뇨 세레죠와 함께 황금의 콰르텟을 형성하여 명장 텔레 산타나가 이끄는 1982년 월드컵 스페인 대회에서는 강렬한 공격 축구를 필드에서 창조했었다.


 소속 클럽에서는 아직 남미와 유럽의 축구 스타일의 차이가 명확히 존재하고 있던 80년대에 황금의 콰르텟 중에 최초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의 AS 로마로 이적. 1984년 리버풀을 상대로 PK전 끝에 패하기는 했지만, 유럽 챔피언스 컵 결승의 무대도 경험하여 “로마의 매”라는 이명을 얻으며 군림했던 명선수였다.

 이탈리아의 지방 클럽인 우디네세에서 플레이 했던 지쿠, 피오렌티나에서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도망 온 소크라테스와 비하여 팔칸은 이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활약한 브라질 선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팔칸이 이탈리아에서 성공했던 이유는 브라질적인 테크닉에 더하여 유럽적인 체력도 겸비하고 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포지션도 원 포지션인 볼란치에 머물지 않고 최종 라인에서 최전선까지 맡을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이 기술과 체력을 융합시킨 올라운드한 플레이는 그야말로 브라질에서도 이색인 포르투 알레그리의 땅에 의해 자란 것이었다.


클럽 월드컵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유럽 이외의 팀


 이번에 남미 챔피언이 된 인테르나시오날에는 팔칸과 같은 걸출한 슈퍼스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에 슈퍼스타가 보여 준 축구 스타일은 팀 속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스타 선수 부재를 메우기 위해서 선수 전원이 브라질임을 나타내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파워도 무기로 팀 전원이 하나가 되어 플레이하고 있다. 앞 선의 밀집지대에서도 빠른 움직임으로 빈틈없이 득점을 올리는 라파엘 소비스. 2차전에소도 선취점을 넣은 190센티의 장신 FW 페라난동. 풍부한 운동량으로 중반을 지탱하는 팅가 등이 팀의 중심선수다. 단지 많은 주력 선수의 이적 소문이 있어 앞으로의 팀 편성은 유동적이다. 12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되는 [TOYOTA 프레젠트 FIFA 클럽 월드컵 저팬 2006](이하 클럽 월드컵)에 남미대표로써 참가한다.


 예전 남미에는 브라질의 산토스 FC나 플라멩구, 상 파울로 FC에 아르헨티나의 인디펜디엔테 등 실력적으로 봐서 유럽의 빅 클럽에도 뒤지지 않는 강호가 존재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일부의 유럽 강호 팀이 가진 풍부한 자금에 의해 남미의 우수한 선수는 계속해서 자국을 떠나 남미 클럽의 레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남미 스타 선수까지도 획득하여 강화를 노리는 유럽의 강호가 출장하는 클럽 월드컵에서 인테르나시오날이 우승을 하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선수 개개인의 레벨이라는 것이 축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하나의 요소일지도 모르겠지만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개인 레벨은 FC 바르셀로나가 다른 팀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인테르나시오날이 FC 바르셀로나와 대전하게 된 다면 반드시 고전할 것이다. 그러나 축구는 테니스나 배구와 같이 강호가 승리하는 확률이 높은 스포츠는 아니다. 축구는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7월 독일에서 브라질의 10번을 달고 싸우다 거기서 괴로운 경험을 한 포니 테일의 천재 브라질리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강호가 유럽에 집중되고 있는 현대 축구에 있어서 각 대륙의 챔피언들이 모여 세계 넘버원을 다투는 대회의 의미를 확인시키기 위해서는 “유럽 외 지역”의 팀이 우승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 중에서도 인테르나시오날은 유럽 클럽의 선수 공급원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남미에는 여전히 높은 재능을 가진 선수가 있다는 것, 거기에 자신들이 승리에 대하여 강렬한 투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임을 우승이라는 결과로 나타내고 싶을 것이다.


 과연 인테르나시오날은 4개월 후 클럽 월드컵의 최종 시합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자신들의 축구를 해낼 수만 있다면 충분히 세계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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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60425-2.html
저자: 스즈이 토모히코

 가난한 생활.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축구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볼을 차고, 꿈을 품었다. 때문에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헝그리하며 터프하다고 한다. 지금의 일본과 비교하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일이나 잉글랜드와 같은 유럽 국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하여도 원래부터 축구에 대한 애정이 틀리다. 부모와 자식이 인생을 걸고 있으니까. “가족을 남미에서 빼내오고 싶다.” 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남미에서도 예외는 있다.

 “처음은 공부가 우선이었다. 그 다음이 축구를 하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야레알의 디에고 포를란이다. 금발의 우루과이 선수는 갑부집 아들이었던 것일까? 유치원 때부터 공부가 우선시되었던 포를란은 지금도 5개국어를 구사한다. 모국어인 스페인어에 더해서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영어. 대학 준비코스까지 나아갔다고 하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축구는 우루과이의 명문 페냐롤에서 스타트했다. 코치를 하고 있던 부친은 페냐롤에서 리베르타토레스 컵이나 토요타 컵(1966년)을 제패하고, 브라질로 건너가 상 파울로에서도 우승했을 정도인 경력의 소유자. 더구나 부친 파블로 포를란은 문디아리스타이기도 하였다. 1966, 1974년 두 번 우루과이 대표로써, 월드컵에 출장했다. 그렇다. DNA는 확실히 계승되어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포를란은 이외인 일면이 아직도 있다.

 “어렸을 때는 주말마다, 형의 시합을 보러 아버지와 함께 간 기억은 있지만, 그 때는 축구보다는 테니스에 인생을 걸었던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보리스 베커 스타일에 빠져 16살이 될 때까지 테니스와 축구를 함께 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결단을 해야만 했던 포를란이다보니 테니스 실력은 지금도 프로급이라고 하니 굉장할 따름이다.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것이 18살 때였다. 인디펜디엔테와 계약을 맺은 포를란은 유스 팀에서 플레이 했지만 곧바로 1부 팀의 부름을 받았다. 인디펜디엔테에서는 포를란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도 굉장히 충실한 시즌이었던 만큼 그 때의 동료였던 가브리엘 밀리토(사라고사), 캄비아소(인테르)들과는 지금도 친한 친구라고 한다.

 4년 후, 포를란은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는데 계약을 맺기 직전까지 퍼거슨에게서 하루에 3번이나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의 포를란은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출장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뿐으로, 3시즌에서 넣은 골은 불과 10골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축구보다도 골프 실력이 늘었다. 핸디캡은 8. 아마 무엇을 시켜도 이 사람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야레알에서의 포를란은 스트라이커이면서도 신기하게 백넘버 5를 달았다. 넘버 5는 현역을 은퇴한 형의 번호였다. 비야레알에서의 첫 번째 시즌, 사무엘 에토와의 득점왕 경쟁에서 이긴 작년 시즌의 포를란은, 앙리와 같은 득점으로 유럽에서 가장 골을 넣은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덴 부츠를 획득했다.

 비야레알은 4만8000인도 채 안되는 마을. 그러한 포를란이 선택한 비야레알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2부와 3부를 오고가는 클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 회장덕”이라 감사한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한 비야레알에게는 포를란이나 리켈메를 노린 고액의 오퍼가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페르난도 로이그회장은 쳐다볼 생각도 안 하고 있다. 로이그는 말한다. “별로 선수를 키워서 팔 생각은 없다. 클럽을 강하게 하고 싶지, 팔아서 배를 채울 생각은 없다”. 선수의 상품화가 발달하고 있는 현대 축구이지만, 이 시골 클럽은 선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 클럽에서 땜빵용 선수로 취급받던 선수들이 부활한 것도 비야레알에는 가족애가 있기 때문이다. 포를란은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등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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