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에로'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7.10.26 라울의 진가 by 渤海之狼
  2. 2007.08.24 아름다운 투사(鬪士)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by 渤海之狼
  3. 2007.04.12 프링스의 유벤투스 이적이야기 by 渤海之狼
  4. 2006.06.09 지단과 앙리 - 공존해 가는 두 스타 by 渤海之狼 1
  5. 2006.06.07 이탈리아 대표, 부정의혹과의 싸움 by 渤海之狼

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column_cl/20071023-1-1.html

저자: 스기야마 시게키

레알 마드리드라는 명문 클럽에서 17살이라는 나이로 톱 팀에 데뷔한 라울.

이후, 클럽에서 수 많은 영광을 손에 넣어 온 [에스파냐의 국보]이다.

그러나 지금의 에스파냐 대표팀 감독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그를 소집하고 않고 있다.

1977년 6월 27일생인 30살.

라울은 요 4개월 전만해도 20대였다. 이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있을까?


라울이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의 무대를 밟은 것은 95-94시즌.

12시즌 전의 이야기가 된다. 18살 때였다. 이후, 거의 풀 출장. 통산 출장 시합 수 112는 챔피언스 리그 최다 출장기록이다. 현재도 출장할 때마다 기록을 갱신하는 초 베테랑이면서도 나이는 불과 30살.


필자는 2,3년 전에 그의 움직임을 보고 라울도 이제는 한계이며, 미래는 그다지 남지 않았다고 예상했다. 날카로움, 스피드는 볼 때마다 낮아만 갔다.

당시 27, 28이면서도 말년을 맞이한 선수와 같이 늙어보였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의 토박이 간판선수가 아니었다면, 그 시점에서 방출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그런 가엽다는 시선을 보낼 필요는 전혀 없다. 30살인 지금이 2,3년 전 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다. 날카로움이 되살아났다. 가지고 있던 기술도 여실히 발휘하고 있다. 오히려 나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체형이다.

데뷔 당시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화가 적은 선수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축구 소년 풍의 얼굴은 지금도 건재하다. 나이 먹은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델피에로와 비교하면 알기 쉽다.

그는 라울보다 세살 연상이면서 챔피언스 리그 데뷔는 95-96시즌으로 같다. 이탈리아 기대의 신성(新星)은 그 시즌 21살의 어린 나이로 유럽 챔피언에 빛났다. 이탈리아의 델피에로와 에스파냐의 라울은 양국 기대의 신성(新星)으로 함께 일컬어지는 존재였다.


그리고 델피에로도 27, 28살에 내리막길을 맞이했다.

어느새 체형은 데뷔 당시와는 많이 변화되어 있었다. 체형 그 자체가 노쇠했음을 알 수 있었다. 델피에로는 그 후에도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전성기를 아는 사람에게는 예전과는 다른 조금 둥글해진 등이, 몸의 노쇠한 것으로 보여 참을 수 없다. 동시에 라울의 특수성을 여실히 알려 준다.


플레이의 특징으로도, 달리 닮은 선수를 찾기도 힘들다.

라울은 챔피언스 리그 출장 회수도 1위이면서, 통산 득점 랭킹에서도 1위이다. 112시합에 출장하여 56골을 마크하고 있다.


53점으로 2위인 판 니스텔로이는 본격파 스트라이커. 3위인 ??첸코(46점), 4위인 앙리(43점)도 스트라이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골 헌터이다. 라울과는 특징이 다르다.


닮은 선수를 꼽는다면 73시합에 출장하여 37골(6위)인 델피에로가 된다.


양 선수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기교파 세컨드 스트라이커가 된다.

델피에로는 3-4-1-2로 임했을 때 2톱 아래서 뛸 때도 있지만, 4-4-2에서는 2톱 중의 일각이나, 왼쪽 사이드 하프가 많았다. 즉 유틸리티 성이 높다.


라울에게도 여러 가지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4-2-3-1의 포진이라면, 1톱 아래는 물론 [3]의 좌우에서 Wing적인 플레이도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골 문 앞에 파고들어 온다. 머리로 골도 자주 넣는다.


패서 타입인 델피이로와 비교하자면, 유동적인 플레이가 눈에 띈다. 경기 흐름에서 득점에 가세하는 것이 라울. 특기인 킥으로 득점을 노리는 것이 델피에로.


양 선수가 확실히 다른 점은 신장이다.

델 피에로가 173Cm인 것에 대해, 라울은 181Cm.

얼핏 보면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8Cm의 차이가 있다. 라울을 직접 보고, 새삼 놀랐던 점이다.


일본으로 말하면 대형 FW이다.

대형이면서 기교파인 것이다. 거기에 라울의 특수성이 있다. 델피에로 타입은 일본에도 있을 듯하지만, 라울 타입은 일본은커녕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존재이다. 거기에 통산 득점왕이며, 가장 오랫동안 활약해주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특별한 [상]을 받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플레이보다, 알기 쉬운 플레이 쪽이 평가가 내려가기 쉽다. 통산 성적이 1위이면서, 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발롱도르) 수상 경험은 없다.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2001년조차 오언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라울이 판 니스텔로이와 함께 상대 골을 육박하는 모습을 보자 [축구계의 맹점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타입. 그것이 라울의 진수(眞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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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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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도우 마사즈미

대표팀 캡틴을 맡은 것도 66회인 프링스.

 브레멘과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링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30살이라는 현역 막바지에 접어든 그에게 유벤투스에서 이적 오퍼가 온 것이다.

 [언젠가는 외국에서 플레이 해보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던 만큼 본인은 굉장히 기쁜 듯 하다. 잉글랜드에서도 오퍼가 있었지만 [관심이 있는 것은 빅 클럽]이라며 안중에 있는 것은 유벤투스뿐이다.


 추정되는 이적료는 800만유로(약 100억원). 앙리의 1600만유로, 램퍼드의 1200만유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에인세와는 같은 값, 제라드(750만)보다도 비싸다. 델 피에로가 800만, 트레제게가 500만인 것을 보면 유벤투스가 프링스를 얼마나 높은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로 마켈렐레는 500만. 34살이라는 나이가 가격을 내렸다.


 아군의 공격을 도와주면서 열심히 뛰어다녀야 하는 DMF는 어느 팀에서건 완소취급을 받는다. 요 수년 브레멘의 성적이 이 정도로 안정된 것도 프링스의 존재를 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표팀에서도 그렇다. 작년 월드컵에서는 팀 넘버 원의 운동량으로 중반을 안정시켰고 발락의 수비부담을 덜어주는데 성공.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에게 진 것도 프링스가 결장했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있다. 그 정도로 그의 공헌도는 발군인 것이다.


 프링스의 장점은 항상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요 수년 계속 안정되어 있으며 요전번 유로 예선(원정인 체코와의 시합)에서도 90분간 필드를 휘저었고 쿠라니의 선취점에 공헌했다.


 주니어 시대부터 득점능력이 뛰어나 유스를 졸업할 때까지 포지션은 항상 FW이었다. MF로 전향한 것은 97년, 20살에 브레멘에 입단해서부터다. 단 입단 당초는 아마추어였다.

 당시의 감독은 프링스를

 "점프력이 없다. 이래서는 FW로 힘들다. 그러나 스태미나는 굉장하군. 아무리 달려도 피곤을 못 느끼는 모양이다. 거기에 팀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뛰어나다"고 판단하여 MF로 컨버트하였다. 이 아마추어 시대의 감독이 현재의 감독인 토마스 샤프다.


 집에 뜬금없이 찾아온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서 함께 축구를 할 정도로 소탈한 프링스가 감독이나 팀 동료와 불화를 일으킨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것도 포함하여 그는 어느 팀에 가서도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킬 리는 없으며 퍼포먼스 측면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UEFA컵 시합 전날, 그는 "이적문제로 클럽이 날 길거리의 돌멩이 취급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비꼬면서 이야기했다. 브레멘과의 계약은 2009년까지. 날 자유롭게 해줘~라는 메시지이다.


 클럽의 철학(떠나는 자는 잡지 않는다)과 경영진의 정책(새로운 인재를 발굴한다면 보강은 가능하다)을 보면, 필시 큰 지장 없이 프링스는 동경하던 외국으로의 이적이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성격으로 과연 토리노에서 통용될지 어떨지가 의문이다.


 2004년 열렬한 러브 콜을 받고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1년 만에 전 소속팀인 브레멘으로 돌아온 과거를 떠올리길 바란다. 일치감치 바이에른을 떠난 이유가 실력이나 전술이라는 필드 상의 문제가 아니고 시골에서 자란 그가 대도시인 뮌헨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에른의 GM은 프링스를 "강렬한 정신력이 부족하다. 상승하고자 하는 의향이 적다"고 말했다.


 토리노의 인구는 100만 명, 뮌헨은 120만 명. 브레멘은 이 들의 반도 안 된다. 휴일에는 인구 수 천명인 고향으로 돌아가 옛 친구와 만나는 것을 즐긴다는 프링스. 필자 개인적으로는 플레이어로써 한 단계 더 성장하길 바라며 이적이 그를 성장시켜 준다면 필자도 힘껏 응원할 생각이다.


 하지만 유벤투스의 데샹감독이 필자의 지인과 행한 최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말을 했다.

 "트레제게와 타입이 비슷한 독일 선수인 클로제가 내 취향이다"


 엣~ 브레멘에서 두 명이나 빼내갈 생각입니까? 이래선 브레멘도 간단히 YES라고 하진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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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키무라 카야코


조용히 퍼지는 앙리와 지단의 불화설


불화설이 있는 앙리와 지단. 실상은??

 작년 여름, 2004년 유럽선수권 후에 한 번은 대표팀에서 은퇴했던 지네딘 지단이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고전하던 프랑스 대표팀을 구하기 위해서 복귀했을 때 티에리 앙리는 '신이 돌아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요점을 명확히 집은 듯한 이 말을 빈정대는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적진 않았다.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확실치 않지만, 앙리가 유럽선수권 당시 '지단이 나한텐 어시스트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내비친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그는 지단 은퇴 직후 '대표의 리더가 될 결심이 섰다.'며 의욕이 넘쳤기 때문에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터인 팀이 기능성에서 떨어지고 고전한 끝에 지단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앙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추측이 자연히 부상한 것이다.


 스타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하고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이미지의 예술가 지단은 기적을 일으키는 플레이 능력뿐만 아니라 그 인품으로 인해 온 국민에게 사랑받고 있다. 한편 앙리의 경우 세계 정상급의 능력을 누구나가 인정하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Moi, Moi (나는, 나는)]이라고 말하는 좀 자기중심적인 프리마돈나로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언제나 다 함께 모여 연습할 수 없는 대표팀에서는 선수간의 결속이 성공의 열쇠가 된다. 유능한 선수가 즐비했던 2002년 이탈리아 대표가 팀 내의 질투심으로 내부분열을 일으켰고, 그런 모습에 진저리가 난 주장 말디니가 대표팀 은퇴를 결심한 것을 아는 독자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을 고친다고 선언하며 임한 유로 2004에서도 이탈리아는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담당기자가 밝힌 유로 2004 초반에 웃기는 일지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6월 8일: 가투소가 밀란식의 시스템을 부정하고 자신과 피를로를 벤치에 앉힌 트라파토니 감독을 비판.

 6월 9일: 코라티가 카사노가 자신에게 어시스트 패스를 보내지 않았다고 화내며 욕하여 큰 싸움으로 발전. 델 피에로도 토티만을 칭찬하는 감독에게 '이렇게 한 쪽만 편드는 것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어쨌든 감독이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고 불평을 했다.

 6월 10일: 네스타, 부폰, 비에리 등이 연습의 밀도가 낮다며 감독에게 직접 담판.

 6월 12일: 원래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이탈리아 국적을 획득하여 대표팀으로 들어온 카모라네시와 포지션 경쟁자였던 피오레가 '각자가 자신의 나라의 대표팀에서 플레이 해야만 한다'고 빈정대는 발언.

 6월 15일: 공식 운동화에 불평을 말하는 토티에게 네스타가 '그럼 맨 발로 뛰어'라고 비난. 가투소는 '맨발로 1000킬로미터 달리는 민족도 있다'며 바보 같은 발언으로 네스타를 감쌌다.

 즉 당시의 이탈리아 대표팀은 단결은커녕 팀 스피릿이 금이 갈 때까지 가서 파스타와 햄을 대량으로 공수했던 노력도 허무하게 예상대로 조기 탈락하였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리피는 우선 팀 스피릿의 중요성을 선수들에게 깨닫게 하여(부정의혹 문제로 다른 또 다른 장해가 만들어졌지만) 현재의 팀은 연대감을 되찾았다.


 또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판 바스턴은 취임하자마자 월드컵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1990년 월드컵 이탈리아 대회에 임했던 네덜란드 대표팀은 재능이라는 면에서 커다란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팀 내의 분위기는 썩었었기 때문에 결코 팀으로써 기능하지 않았다. 팀 속에 파벌이 있어서 트레이닝 캠프에서 왕따나 파벌 대립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넌더리가 났다. 개인을 버리고 같은 목표를 향해서 손을 잡고 나아가지 못하는 팀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프랑스대표팀은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현재의 팀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우정에 의해 뭉쳐진 집단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다. 당시의 중심멤버였던 로랑 블랑은 "현재의 프랑스 대표팀에는 비할 데 없는 국제적인 스타가 9명이나 있지만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무엇보다도 전원이 하나가 되어 플레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팀 스피릿, 진정한 집단 그리고 각자가 같은 방향을 향해서 동시에 온 힘을 쏟아 붓는 것이 필요하다"고 암시적인 말을 남기고 있다.


 시간이 지났어도 호흡이 맞지 않으며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는 르 블뢰를 보고 국내에는 비관론이 일었다. 한편 네덜란드의 판 바스턴감독은 프랑스의 유럽예선을 본 적이 없었는지 프랑스를 유력한 우승후보중의 하나로 꼽았다. 확실히 프랑스는 얼굴들만 본다면 강력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노 젓는 사람들이 있어도 전원이 같은 방향으로 향해서 호흡을 맞추어 젓지 않으면 배는 나아가지 않는다.


앙리와 지단은 정말로 사이가 안 좋은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머리에 떠오른다 ― 앙리와 지단은 정말로 사이가 나쁜가?

 2003년 지단이 주도가 되어 지진이 발생한 알제리를 위문하려는 친선시합이 행해질 때 앙리가 "하자고 한 것은 지주(지단의 애칭)다. 거절할 수 없잖아"하고 빈정대는 말투로 말하는 것을 주위에 있던 몇 명의 기자가 들었다.

 거기에 지단이 월드컵 후에 은퇴를 발표한 것에 대하여 벵거가 "어째서 지금 발표하는 지 의문이지만..."이라며 조금은 비판적인 의견을 말했을 때 옆에 있던 앙리가 그것에 동의하였다고 해서 미간을 찡그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둘을 잘 아는 프랑스 대표팀 담당기자는 그런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이 돌아왔다'고 코멘트 했을 때 앙리는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고 생각한다. 조금 빈정댄 투로 들렸을 지도 모르지만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앙리는 축구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 그는 축구를 보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며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로 연구하고 있다. 해외 리그나 대표, 다른 나라의 선수 실력에 관한 지식에는 놀랄 정도다.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지단 없이는 프랑스가 예선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유일한 기회는 지단, 마켈렐레, 튀랑 등 경험 있는 선수들의 복귀라고. 그 역시 자신이 스타가 되어 예선에서 떨어지는 것 보다 월드컵에 갈 수 있는 편이 좋은 테니"
 하고 [레퀴프 매거진]의 파스칼 그로 기자는 말한다.


 그로 기자는 1998년 월드컵 이전부터 프랑스 대표팀을 따라 다니고 있으며 시합뿐만 아니고 캠프에도 붙어살며 대회에서 프랑스가 지면 곧바로 돌아가 버린다. 과거에 앙리가 있던 베르사유에서 플레이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주니어 시대의 앙리도 취재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히 앙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단이 복귀했을 때 '지단이 돌아왔다!'며 메일을 보내 온 것을 보면, 그는 지단에게도 호의를 가지고 있는듯하다. 더욱이 모두 싫어하고 있는 도메네크 감독에게도 이해심을 가지고 있다. 그로 기자에게 질문을 한 것은 그가 대표팀 멤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며 거기다가 그 의견도 굉장히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앙리는 여러 선수를 잘 알고 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비야레알과의 시합에서 종반 리켈메의 PK 때, 앙리는 GK 레만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말했다. '리켈메는 중요한 순간에서 가운데로 PK를 찰 때가 많다고 말했지'하고 앙리는 후에 밝혔지만 이 어드바이스가 제대로 적중했다.

 또한 아스날에서 주장에 임명받고 나서부터 젊은 선수들을 잘 챙기게 되었다. 앞서 대표 데뷔를 이룬 리베리도 앙리에게 '마르세유에서 했던 대로 맘껏 사이드를 올라가. 볼을 빼앗겨도 신경 쓰지 마'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정말로 앙리는 이기주의자일까? 공격수에게는 때론 이기적인 면도 필요하지 않을까?


 앙리가 지단은 자신에게 어시스트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말했다는 에피소드에 관해서 그로 기자는
 "그 자신이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앙리가 공적인 자리에서 불만을 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저널리스트가 꾸며낸 것이라 생각한다"
 고 못을 박았다.

 "지단은 앙리에게 좋은 패스를 많이 보내고 있다. 단지 앙리는 대표에서 지단의 어시스트로 골을 넣은 적이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말을 바꾸면 지단은 앙리에게 한 번도 골을 넣는 패스를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 된다. 어시스트가 될 듯한 패스를 받아도 그것을 넣지 못했으니까. 왜일까? 누구도 그 답을 알지 못하며, 단순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단이 있을 때의 프랑스는 지단을 축으로 플레이한다는 것이다. 아스날은 앙리를 위해서 플레이하지만 프랑스 대표는 다르다. 그런 이유도 있어 대표팀에서 앙리는 아스날에서 플레이할 때만큼 빛나지 않는다"


앙리 부진의 원인은, 중반과 수비진에 있다.

먼 길을 돌아 온 프랑스 대표팀. 이제서야 팀에는 일체감이 생겨, 그것에 의해 앙리도 대표팀에서도 광채를 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지단이 은퇴한 후 도메네크 감독은 앙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프랑스를 구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랬으면서도 팀은 지리멸렬하여 지단 복귀 이전에 월드컵 예선에서 앙리의 골은 키프로스와의 시합에서 넣은 1점뿐이었다(2004년 10월).

 그로 기자의 의견에 따르면 그 이유는 앙리의 뒤에 있던 선수들의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자신의 볼이 되면 앞선에 있는 앙리에게 신속한 패스를 보내는 아스날 식의 플레이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 필요하다. 지단 외에 리자라쥐, 드사이, 튀랑 등이 떠나 디펜스 진이 물갈이되어, 대신 들어온 스키라치, 지베, 붐송 등은 좋은 DF이기는 하나 빠르고 능수능란하게 앙리에게 볼을 보낼 기술과 여유가 부족했다. 처음으로 임무가 맡겨진 그들의 우선 사항은 수비였다. 때문에 신생 프랑스는 거의 골을 먹지 않아 수비면에서는 굉장한 견고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DF는 단지 수비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격수를 지원하며 터치라인을 파고 올라가 크로스를 올리며, 볼을 뺏은 뒤에는 그것을 공격으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공격 일선에는 앙리, 트레제게, 골 문 앞에는 바르테즈가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선수들은 그런 다채로운 일을 하기에는 너무 젊었으며 경험이 부족했다. 사뇰은 예선 시작할 당시에는 부상이 많았고 비에라도 요 수 시즌 대표에서도 클럽에서도 조금 능력이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도메네크 감독은 아스날 식의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피레와 싸우고 헤어졌다.


 2004년 여름 베테랑들의 은퇴 후 도메네크 감독은 보다 신속하게 볼을 공격진에게로 운반하는 플레이를 목표로 세웠다. 확실히 유로 2004에서는 모두가 지단에게 패스를 했기에 플레이 전개가 조금 늦어졌다. 그러나 지단이 플레이를 늦게 한 것은 아니며 그가 볼을 자신에게 패스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지단에게 건네주면 그가 해결책을 찾아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다른 선수들은 곤란할 땐 언제나 지단에게 볼을 건넸다. 결국 신속하게 앙리에게 볼을 건네는 편이 좋았을 때조차 지단에게 볼을 보낸 것이다.


 그로 기자는 [지단인가 앙리인가?]라는 국내의 논쟁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티티(앙리의 애칭)는 빈 공간으로 달려 들어가는 빠른 전개의 플레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단과 앙리 어느 쪽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굉장히 높은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라면 반드시 함께라도 기능할 수 있다."
 그것은 공격에 다채로움을 주는 것이 되는 것일 것이다. 베스트인 것은 지단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닌 상황이나 상대의 시스템에 따라 지단이나 앙리 양쪽을 나누어 쓰는 것이다.


세대교체의 실패


 또한 도메네크 감독은 몇 개인가 미스를 범했다.

 "예를 들면 페로 제도와의 시합 등에는 출장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중요한 시합에서 젊은 선수들을 도와주기를 부탁하며 지단, 마켈렐레, 튀랑을 처음부터 잔류시켜 팀의 골격을 유지시키면서 젊은 선수들을 거기에 더해 갔어야 했다. 그러나 도메네크 감독은 입으로는 남아 주길 바란다면서 실상은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만들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베테랑들을 잔류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선수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팀을 떠나버렸다."
 고 그로 기자는 말한다.
 "더욱이 그는 베테랑들과 젊은 선수들의 연결파이프가 되어줄 피레, 타쿠르와 같은 선수를 제외했다. 피레는 필시 지금이 전성기이며 성격도 좋기에 팀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데 최적인 귀중한 인물이었는데"


 너무 급격한 세대교체를 시도한 것은 감독 자신이기에 반은 자업자득일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에게는 차분히 팀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1998년 대회의 팀은 94-95년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96년에는 결속이 생겼으며 더욱이 개최국이었기 때문에 예선에 신경 쓸 필요 없이 96년부터 98년까지 같은 멤버로 2년 걸쳐 조직과 연대감을 키워 가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도메네크 감독에게는 2년이 주어졌지만 젊은 선수들로 팀을 재건하면서 동시에 유럽 예선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예선에서의 부진 때문에 방향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되어 1년을 허비하였다. 최초 1년째는 지단 등 베테랑이 없었으며 또한 마브바나 지베, 페드레티 등 여러 젊은 선수들을 시험했기에 두 시합 연속으로 같은 시스템으로 플레이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2005년에 보다 못한 베테랑들이 복귀했을 때 그들 대부분은 젊은 선수들을 몰랐다. 스타선수들은 해외에서 플레이하고 있다. 그들은 지베 등 젊은 선수의 플레이를 거의 본 적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겨우 생겨난 팀 스피릿


 팀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를 아는 기회를 얻은 것은 2005년 11월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행해진 코스타리카와의 친선시합이었다고 그로 기자는 생각한다.
 "그때 선수들은 처음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비행기 여행은 길었고 가족도 있었기에 그런 환경이 그들을 서로 가까이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팀이 하나가 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그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 대회를 향해서 티뉴에서 합숙이 있었다. 너무도 짧고 고지에서의 트레이닝은 육체적 효과를 얻기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선수가 가족을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 선수들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때문에 팀 스피릿은 코스타리카와의 시합에서 그리고 티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확실히 쿠페와 바르테즈의 마찰은 있었지만 그것이 빨리 일어난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겨우 고정된 사뇰, 튀랑, 갈라스, 아비달의 4백은 5월 27일 멕시코와의 시합에서 처음으로 함께 플레이했다. 때문에 그들의 플레이에는 '오토마티즘(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연계플레이)'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선수들이 커다란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은 저절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5월 31일 덴마크와의 시합에서 우리들은 그 효과를 목격할 수 있었다. 디펜스의 연계는 개선되었고 뒤에서 앞으로의 움직임에 물이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친한 친구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팀 스피릿이 만들어지면 서로가 서로를 위한 플레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기능하여 모두가 자신감을 가지면 지단에게 너무 의존할 필요 없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시합에서는 말루다, 아비달, 사뇰, 리베리 등 스타 이외의 선수들이 자신 넘치는 플레이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그런 자신감을 지탱해주는 지단과 앙리가 거기에 있다.

 "1998년의 쾌거로 모두 잊고 있지만 지단 이전의 프랑스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90년, 94년 프랑스는 월드컵에 못 나갔으며 그리고 98년에는 개최국이었기 때문에 예선이 없었다. 그 이전의 위대한 프랑스는 플라티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로 2004에서 그리스가 우승한 예외는 있지만 보통 위대한 팀에는 위대한 선수가 필요하다. 때문에 한 시대가 끝났을 때 다음에 또 위대한 팀이 만들어지기까지 몇 십 년이나 걸리는 때도 있다. 참을성을 필요하다"
 고 그로 기자는 말한다.


물론 모두가 몇 십 년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단이 돌아와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월드컵이 된다. 덴마크와의 시합에서 골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단은 앙리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롱 패스를 보냈다. 시간은 걸렸지만 5년, 10년 후 위대한 팀으로 이어질 무언가가 싹트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진정한 팀이 만들어졌다면 우리들은 그 증거를 독일의 필드에서 목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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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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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portsnavi.yahoo.co.jp/soccer/wcup/06germany/column/200606/at00009275.html

저자: 혼마 요시카

여러 부정 의혹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리피감독. 월드컵에서는 중압감을 떨쳐내고, 승승장구할 수 있을것인가?

월드컵보다 부정 의혹을 파고드는 기사가 대부분


 월드컵 개막까지 별로 안 남았다. 지금까지 개막하기 전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근황이나 인터뷰 거기에 월드컵에서 대전하는 상대 팀의 분석 등이 미디어에서 크게 다루어지며 싫건 좋건 축제 분위기가 되어갔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대표 팀의 화제도 이번 대회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어떠한 결과를 남길까? 라는 순수하게 축구만을 분석하는 기사가 아니라 대대적인 부정 의혹을 포함한 보도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부정 의혹의 주모자로 지목되는 전 유벤투스의 제너럴 매니저 루치아노 모지의 의향에 따라 대표 선수를 소집한 의심을 받고 있는 리피 감독과 이탈리아 국내에서 행해지는 시합을 대상으로 한 불법 도박에 관여한 의심을 받고 있는 GK 부폰이나 이아퀸타의 대표팀 사퇴를 주장하는 기사 등이다.


 도청된 대화의 내용을 읽는 한 리피는 모지의 희망대로 캄피오나트(리그 전)의 시합에 대비하여 유벤투스 소속의 칸나바로를 벨라루시와의 월드컵 예선 시합에 (부상당하지도 않았는데) 뛰지 않게 하거나, 델 피에로를 유벤투스의 일본 원정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같은 시기에 행해진 이탈리아 대표의 테스트 매치에는 선출하지 않거나하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행동도 보인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 칸나바로는 모지의 지시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회장 모라티니를 속이는 방식으로 유벤투스로 이적을 이루었지만 이 이적 방식을 언급하며 칸나바로에게 캡틴의 자격을 박탈하라고 주장하는 기사도 있다.


일본이라면 월드컵 참가 사퇴도 있을 수 있다.


 리피에 관해서는 모지의 아들이 운영하는 GEA 월드사와 사업상 연관이 있는 리피의 둘째아들의 존재가 대표팀 감독 리피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지적받고 있다. 예를 들면 리피의 둘째 아들이 직접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선수 중에 유벤투스의 MF인 브라지가 있다. 브라지의 전 매니저는 리피의 둘째 아들이 브라지를 빼 갈 때, '나와 계약하면 보다 쉽게 이탈리아 대표팀에 선출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꼬셨다고 말한다. 확실히 브라지가 가진 실력에 비하여 한 때 계속해서 대표팀에 선출된 적이 있었다.


 단 이번에 리피가 선출한 월드컵 대표 23명에 대해서는 리피가 주장하듯이 모지나 GEA월드사의 영향은 없었다고 믿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 23명 중에는 GEA 월드사와 계약하고 있는 선수(마테라치, 오도, 아멜리아)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선수는 이번 시즌 칸피오나트에서 대표팀에 선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플레이를 보여주었기에 특별히 GEA 월드사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 중 마테라치는 이런 부정 의혹이 발각된 후 GEA 월드사와의 계약을 끝냈으며, 또 한 명 GEA 월드사의 계약 선수라고 생각되어지던 이탈리아 대표팀 부동의 레귤러인 네스타는, 의혹 발각 전에 계약을 끝냈다는 것을 발표했다.


 일본의 경우 무언가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나면 책임자가 정해진 듯이 사죄회견을 열며 출석자 일동이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해서 머리를 숙여 겉으로만 사과하는 모습은 너무도 뻔하고 농담처럼 느껴지며, 또한 고교야구 부원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발각되었을 때처럼 야구 부원 전원이 책임을 지는 것도 조금은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죄의 자세(그것이 본심이 아닌 겉모양이라고 하여도)를 전혀 보이는 것 없이 자신도 피해자라는 식의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변호만 해대는 사건 당사자들의 언동을 읽거나 보고 있으면 '조금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봐!'하고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서 화를 내고 싶어진다. 특히 모지나 지라우드(공모자로 보이는 전 유벤투스의 임원)는 적어도 유벤투스의 팬들에게만 이라도 공공의 장소에서 사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일본 대표팀의 감독이나 몇 명인가의 선수가 이탈리아 대표팀과 같은 스캔들에 휩싸인다고 하면 축구 협회는 어떤 처치를 취할까? 의혹 받고 있는 감독이나 선수를 대표팀에서 제외할 뿐만 아니라 일본 대표의 월드컵 불참을 결정할 지도 모르겠다.


월드컵에서는 부정 의혹이라는 중압과도 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이번의 스캔들이 발각된 후에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이탈리아 축구 협회 특별 커미셔너에 임명된 구이드 로시가 의혹의 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을 처분하지 않고 월드컵에 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의혹만으로는 벌주지 않는다.]라는 생각과 리피가 이끄는 대표팀이 지금까지 멋진 내용의 게임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월드컵 개최 중에도 부정 의혹에 관하여 조사는 계속 진행되며 새로운 의혹이 나타날 것도 예상된다. 또한 월드컵 중에 행해지는 감독이나 선수에 대한 인터뷰에서는 전 세계의 저널리스트들에게서 시합에 관한 질문 이외에도 부정 의혹에 관한 질문도 나올 것이다. 지금까지도 정신면에서 약함을 보여주는 일이 있던 리피가, 그러한 상황에서 팀을 하나로 묶어서 승리해 나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며, 만약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진출하여 우승한다고 하여도 의혹이 있는 감독과 선수가 있는 팀을 세계는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이번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가 활약하길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유럽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에서 남미의 우승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던 필자는 이탈리아 대표가 우승 후보의 필두라고 주변에 공언했으며 커다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이 있는 감독과 선수가 있는 이탈리아로는 솔직히 응원하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어버렸다. 이탈리아 국내에서도 의혹이 있는 감독이나 선수는 대표팀에서 제외해야만 한다는 의견도 있으며 그 중에는 (극히 소수지만) 이탈리아 대표는 월드컵 출장을 사퇴해야만 한다는 의견도 들린다.

 대회 불참은 극단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의혹이 있는 감독과 선수를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것만으로도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깨끗한 이미지로 대회에 도전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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