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Ac 밀란의 산시로 스타디움의 횡단막이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른다. “판 바스턴이 없는 산시로는 날개 없는 풍차다”.

이 네덜란드 FW는 30세를 조금 넘자마자 플레이를 멈추었다. 1995년 8월 축구계는 눈물을 흘렸다.

이 암사슴과 같은 탄력 넘치며 연약한 네덜란드 선수와의 이별은 필드 상에서 위험한 선수들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 - 즉 디펜더들은 축구를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 올린 한 선수를 말살한 것이다. 그의 연약했던 오른쪽 발목의 마지막 남은 힘을 그들은 잔인하게도 없애버린 것이다.

그의 오른쪽 발목은 4번에 걸친 수술 뒤에도 낫지 않고 [산 마르코]는 은퇴하는 길 말고는 향할 곳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 은퇴 선언은 결국 8월 17일에 행해졌다.

밀란의 오피스에 있던 그를 밖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그런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선, 간결하게 단 3개의 문장을 말했다.

“여러분에게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전 축구를 그만둘 겁니다. 고맙습니다.”

밀란은 147시합에서 90골을 기록한 축구계의 전설적인 센터포워드를 잃었다. 이 우울한 금요일에 그는 보통 사람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드라마를 만들지 않아도 좋다. 축구가 없는 생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밀란에게 있어서 판 바스턴이 없는 상태는 굉장히 큰 타격이었다. 회장 베를루스코니는 “마르코 판 바스턴은 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회장이 말했던 것은 옳았다. 축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판 바스턴이라는 인물은, 축구라는 것을 마치 손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필드위에서 달리는 것이 아니고 춤을 추고 있었다. 판 바스턴이 시합에 나가면 디펜더들은 도미노의 패와 같이 계속해서 쓰러졌고, 그에게는 필드에 난 잔디조차도 머리를 숙였다.

판 바스턴은 [007]과 같은 [살인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느 팬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쓰여 있는, 신이 세계를 만든 것을 본 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신은 8일째에 마르코를 창조했다”


판 바스턴은 골을 넣고도 그다지 골 세레모니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물론 그의 테크닉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그의 풋 워크는 발군으로 그의 슛은 완벽하며 결정적인 것이었다.

판 바스턴은 1982년 4월 3일에 아약스에서 데뷔하였다. 대전 상대는 NEC. 그는 그 때 17살로 요한 크라위프의 대역을 맡았다. 그 시합을 아약스는 5-0으로 승리하였고, 그 중 3점은 판 바스턴이 넣었다. 완벽하게 맡은 일을 처리해 낸 판 바스턴은 “난 크라위프와는 다른 타입의 포워드다”라고 말했다.

“크라위프는 위대한 축구 선수다. 크라위프는 나보다도 다재다능하며 필드 위에 있는 모든 포지션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난 크라위프보다도 많은 골을 넣을 수가 있다. 내가 그보다도 보다 공격적이다.”


판 바스턴은 또한 여러 종류의 골을 넣었다. 어떤 때는 머리로, 또 어떤 때는 멋진 개인기를 펼친 후에 디펜더의 머리를 넘기는 슛을 했다. 그는 누구 봐도 알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그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판 바스턴은 진정한 승리자이기도 했다. 예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스포츠에서는 어떤 것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수 없을 때라도, 팀 동료의 플레이가 나쁠 때라도, 유니폼이 뜯겨 나갈 때라도, 마지막에 시합에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다. 승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승리가 분위기를 만든다. 승리가 불쾌한 상황을 모두 잊게 해 준다. 나는 예전에 시합에 지면 언제나 울었지만 최근은 그런 패배감에서도 해방되었다.”


판 바스턴은 완벽을 노리는 승리의 구도자였다.

87년 컵 위너스 컵 결승, 로코모티프 라이프치히(동독)과의 시합에서도 그러했다. 오른쪽 발목으로 인하여 판 바스턴은 시합에 나갈 예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시합에 나가 아약스에 결승골을 가져다주었다. 이 골은 시로이가 크로스를 올려, 판 바스턴이 머리로 넣은 것이었다.

후에 시로이에게서도 들었지만, 판 바스턴은 당초 유럽 컵을 전부 쉴 예정이었다.


판 바스턴은 네덜란드에서 4회, 이탈리아에서 2회 등 리그 득점왕이 되었다. 세계는 그의 다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판 바스턴은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유럽선수권에서 왠지 조금은 얌전한 듯 보였다. 네덜란드의 감독 리뉘스 미헬스는 첫 시합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그를 선발로 출장시키지 않고, 이 자랑스러운 존재의 포워드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 대신에 죤 보스먼이 플레이 한 이 시합을 네덜란드는 0-1로 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미헬스의 작전이기도 했다. 이런 작전으로 분발하게 된 판 바스턴은 다음 시합인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힘을 폭발시킨다. 시합은 3-1로 네덜란드가 승리, 판 바스턴은 이 시합에서 전부 득점을 올렸다.

네덜란드의 [발레 댄서]의 활약은 영국 보도진에게도 절찬 받았다. [골든 히어로],[정체를 드러낸 남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네덜란드는 판 바스턴 덕분에 숨을 다시 쉴 수 있었으며, 또한 준결승에서 서독과 맞붙을 때에도 그의 결승골로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20세기 최고의 슛을 보인 것은 결승전인 소련과의 시합에서 였다. 54분, 신의 아들 판 바스턴은 하늘에서 강림하여 아놀드 뮤렌의 크로스를 발리슛으로 파 사이드의 골 위 구석을 찔렀다. 골키퍼인 다사에프는 순간 볼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사에프는 펀치를 맞은 복서와 같이 멍하니 미사일과 같은 슛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슈퍼 골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크로스가 왔기에 ‘볼을 떨어뜨린 후에 드리블로 가져가지 않으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이 멋대로 슛을 한 것이다. 이것은 조금 설명하기 어렵군”


판 바스턴을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짧았던 그의 캐리어도, 강렬한 재능도.

1999년 아약스 박물관에는 이 천재적인 센터포워드의 코너가 생겼다. 여기에는 그의 캐리어의 모든 것과 그와 관련된 몇 가지가 있다. 판 바스턴은 어렸을 때, 그가 희대의 영웅들의 활약을 쓴 축구 책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판 바스텐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써 넣었다.

“내가 최고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그을 세계에서 최고의 포워드라고 불렀지만,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슈퍼스타라는 것은 마라도나나 크라위프나 펠레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고 1992년에 말했다.

“이러한 선수들은 18살 때부터 이미 스타로써 존재하며, 귀중한 순간을 계속 경험해 왔다. 멕시코 월드컵의 마라도나는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레벨의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판 바스텐 자신도 그러한 슈퍼스타였다. 여러 차례 그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했으며, 예전엔 조금 오만하기도 했다.

“난 에고이즘(=이기주의)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했다. 필드 밖에서라도 말이다. 선수시절 판 바스턴은 자신의 애인에게 스포츠 백을 두개 들리고 옮기게 하였다. 어째서 자기 애인에게 무거운 물건은 들게 하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금 시합을 했지만, 그녀는 하지 않았다”

현재 그는 축구를 하고 있지 않다. 대신 판 바스턴은 골프를 즐겨 하고 있다. 그것도 꽤 실력이 좋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자신의 가방을 옮기지 않는다. 그의 가방을 옮기던 애인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부인인 되었기 때문이다.


Marco van Basten/마크코 판 바스턴.

1964년 10월 31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 좌우 양 발로 정확한 슛, 장신을 살린 강력한 헤딩, 부드러운 페인트, 볼 간수로 찬스메이커도 해냈던 스트라이커. 17살의 어린 나이로 아약스의 톱 팀에서 데뷔. 4시즌 연속 득점왕이 된다. 87년에는 컵 위너스 컵에서 첫 우승, 시즌 종료 후에는 AC밀란으로 이적. 굴리트,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트리오]로, 밀란을 유럽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88,89년에는 유럽최우수선수에 빛났다. 네덜란드 대표로써도 국제 A매치 58시합에 출장하여 24골. 88년 유럽선수권에서는 결승전에서 보인 슈퍼골 등 5득점을 올려 우승에 공헌했다. 4번에 걸친 수술로도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아 아쉬움에 쌓인 채 95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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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506/italy/column/200604/at00008659.html

저자 : Yoshika Homma


패배 분위기를 날려버린 인차기


 이탈리아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 이탈리아의 3팀(밀란, 유벤투스, 인테르)이 전부 진출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이 많았지만 결과는 다들 아시는 대로 밀란만이 준결승에 진출했다. 

 리옹과의 1차전을 0-0으로 비겼던 밀란은 전반 25분에 왼쪽 사이드에서의 크로스를 골문 앞으로 재빨리 뛰어든 인차기가 헤딩으로 선취점. 그들이 바라던 대로 시합이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6분 뒤 리옹도 디아라의 헤딩슛으로 동점. 제1차전과는 다르게 테크니션을 많이 기용한 리옹의 업 템포 싸커에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밀란.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령탑 피를로도 리옹의 미드필드진에게 패스 코스가 막혀버려 게임을 생각대로 전개시키지 못 한 채로 시합은 진행되어 갔다.

 이대로 종료되면 1차전과 같은 무승부라도 원정에서 골을 넣은 리옹이 진출하게 된다. 후반 20분을 지난 시점에서 기자석의 분위기도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패퇴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패퇴 분위기를 날려버린 것이 선취점을 넣은 인차기였다.

후반 43분, 센터라인 왼쪽 후방에서 말디니(후반 33분에 카투소와 교대 출장)가 골문 앞으로 롱패스를 하여 볼을 받은 솁첸코가 골문 오른쪽 사이드에서 슛. 볼은 처음엔 파포스트에 맞은 다음 니어포스트에 맞아서 튕겨 나온 것을 달려들던 인차기가 오른발로 집어넣었다. 인차기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골 문 앞 혼전상황에서의 골로 밀란은 추가점을 넣게 된다. 그리고 추가시간 3분에는 느슨해진 상대 마크의 틈을 노려 솁첸코가 드리블을 시도하여 각도가 별로 없는 왼쪽 사이드에서 오른쪽 발로 슛. 이것이 들어가 3-1로 시합이 종료되었다.


 인차기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 복귀해서부터 밀란은 중요한 경기에서 승부욕이 강해졌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대표팀 감독인 리피는 월드컵 출장 23명의 멤버에 인차기를 선출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리피는 대표팀에서 레귤러인 질라르디노를 벤치로 몰아내고 더구나 중요한 시합에서 결정적인 골을 넣은 인차기의 존재를 내심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세리에A에선 독주하지만 허무하게 아스날에게 무릎을 꿇은 유벤투스.


 밀란 이외의 이탈리아의 팀 유벤투스와 인테르는 불완전연소인 상태로 8강에서 패퇴.  이번 시즌 유럽에서의 싸움에 막이 내려가는 결과가 되었다.

 우선 리그에서 수위를 독주중인 유벤투스를 보자. 올 해 들어서부터 그들은 명확히 컨디션이 저하되어 있다. 당초 2위 밀란과의 승점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 유벤투스는 여유를 가지고 유럽 무대에 집중하기 위하여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 토너먼트에 맞추어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컨디션이 올라가지 않은 상태로 아스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편 아스날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순위(11일 현재 6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몇 년 전의 강함을 찾아 볼 수도 없지만 대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듯한 안정된 실력을 바탕으로 승리가도를 질주 하고 있다. 아스날의 홈 하이버리에서 행해진 1차전에서도 스피드가 있는 앙리를 최전방에 배치하고 중반이나 양 사이드백 선수들이 빈번히 사이드에서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으로 유벤투스를 압도했다. 그런 아스날에 비하여 유벤투스의 양 사이드는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했다. 골문 앞으로 효과적인 크로스를 공급하는 것이 불가능해 골문 앞 트레제게가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결국 유벤투스는 골 찬스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한 채 적지에서 0-2로 패했다.


 지금의 유벤투스의 컨디션을 생각해보면 홈이라고는 하지만 2차전에서 유벤투스가 2골의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5일 토리노에서 열린 2차전도 예상대로라고 할까 역시 골 찬스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시합은 0-0으로 종료.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라운드를 뒤로 하는 선수들에게 응원하러 모인 유벤투스의 서포터들은 야유를 보냈다.

 이러한 서포터들의 반응에 대하여 부폰을 비롯한 유벤투스의 선수나 관계자들은 '리그에서 수위를 독주하고 있는 유벤투스에 대해 실례인 행위'라 항의하고 있다. 확실히 리그에서의 성적을 보면 이번 시즌에서도 충분히 절찬을 받을 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 유벤투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리그가 아닌 챔피언스 리그였을 터이다.


데이터가 나타내는 유벤투스의 또 하나의 패인.

 

 유벤투스는 패배의 방식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원정에서의 1차전을 0-2로 완패. 계속된 2차전에서도 관중에게 역전의 기대를 전혀 느끼게 하는 것도 없이 패했다. 거듭 언급하지만 최대의 패인은 선수가 최악의 컨디션으로 이 시합에 임한 것. 그리고 또 하나 선수에게 파울이 많았던 것도 패인으로 들고 싶다. 이것은 유벤투스의 관계자나 팬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이전부터 언론을 비롯해 다른 팀의 관계자나 팬들이 지적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요 근래의 몇몇 시즌에 걸쳐 유벤투스의 선수가 범한 파울 수는 세리에A 클럽 중에서도 가장 많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옐로카드나 레드카드의 숫자를 보면 세리에 A의 클럽 중 가장 적은 클럽의 하나가 유벤투스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 이번 시즌의 통계를 보면 유벤투스의 지금까지 총 파울 수는 [764]로, 이것은 [765]인 레체 다음으로 많다. 참고로 밀란은 [585]로 가장 적고, 인테르는 [604]로 세 번째로 적다. 그런데 가장 파울수가 많은 레체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의 총 수도 [96(옐로 88, 레드 8)로 가장 많지만, 유벤투스는 [58(옐로 55, 레드 3)]. 밀란의 [43(옐로 41, 레드 2)]의 다음으로 2번째로 적은 것이다. 덧붙여 인테르는 [65(옐로 62, 레드 3)]로, 세리에 A에서 6번째로 적다.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는 파울은 지적받지만 다음 시합, 또는 다음 시합에 영향을 주는 카드를 받는 경우는 다른 클럽에 비해서 월등히 적다. 특히 다음 라운드에 중요한 시합을 앞 둔 경우, 경고 누적으로 다음 시합의 출장이 위험해 질 것 같은 선수가 파울을 범해도, 그 선수에게 옐로카드가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무대를 유럽으로 옮기면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유벤투스의 선수들이라고 하여도 주심은 망설임 없이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내민다. 실제로 아스날과의 1차전에서도 카모라네시와 제비나의 양 선수가 이 시합에서 옐로카드 2장을 받고서 퇴장 처분을 받았다.

 유벤투스의 카펠로 감독은 "제비나의 두 번째 카드는 너무 엄격한 판정이다."라고 시합 후의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에게 얼마나 느슨한 판정이 계속되어 왔는가를 증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럽의 무대에서 명확해진 이탈리아 팀들의 [고령화]


 그런데 아스날의 축구를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젊은 선수의 발탁과 활약이다. 특히 1차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파브레가스와 같은 10대의 젊은 선수가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진출이 걸린 중요한 시합에 기용되어 선수 자신도 두려움 없이 생동감 넘치는 플레이를 펼쳐 보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예를 들면 로마와 같은 클럽은 때때로 10대의 선수를 기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벤투스와 밀란, 인테르와 같은 빅 클럽에서는 어지간히 선수가 부족하지 않는 한 10대의 선수가 기용되는 것은 우선 생각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군 팀에 등록되어 있는 10대의 선수는 전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경향 상 경험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즉시 전력이 되는 베테랑을 중심으로 팀이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유벤투스나 밀란, 인테르의 1군 등록선수의 평균연령은 30.5세인 밀란을 선두로, 인테르가 29.1세, 유벤투스의 28.5세로 세 팀 다 8강에 진출한 클럽 중 가장 많다.

 시즌의 결과만을 너무 중시하는 터라 미래를 생각한 팀 만들기를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이탈리아의 현 상태다. 하지만 타이틀 획득을 놓쳤을 경우 이 문제는 언젠가 떠오를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베테랑과 젊은 선수가 잘 혼합되어 신진대사가 활발히 기능하는 팀 구성이 이상적이다. 물론 이탈리아의 빅 클럽도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역시 베테랑선수에게 비중을 둔 팀 구성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현 상태이다.


대진 운이 좋았을 터인 인테르였지만...


 유벤투스 이상으로 문제를 드러낸 것이 인테르였다. 뭐 이미 몇 시즌이나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 있기에 그렇게 이외인 결과는 아니고 오히려 '흠, 또 이렇게 되었군...'이란 느낌이 들었다.


 인테르는 밀란이나 유벤투스와 다르게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는 대진 운이 좋았다. 챔피언스 리그도 여기까지 오면 아주 쉬운 상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팀들과 마찬가지로 우승을 노리는(그리고 그런 실력도 있는) 리옹이나 아스날에 비하면 비야레알은 쉬운 상대라 할 수 있었다. 산시로에서의 1차전은 시작하자마자 1분만에 디펜스진(특히 wome)의 부주의로 선제 점을 헌납했지만 그 후에는 페이스를 되찾아 6분후인 전반 7분에는 아드리아누가 스탄코비치가 공급한 크로스를 득점으로 연결시켜 동점으로 따라 붙었다.

 그 후는 완전히 인테르의 페이스로 시합이 진행되어, 후반 9분에는 또다시 스탄코비치의 크로스에서, 마르틴스가 골문 앞에서 몸으로 볼을 맞추어 추가점을 올려 파이널 스코어 2-1로 승리했다.


 만약 시합 개시하지 마자 있던 정신적인 느슨함이 없었다면 그리고 몇 번이나 잡았던 골 찬스를 하나라도 더 잡았다면 이 산시로에서의 1차전으로 인테르는 준결승 진출의 티켓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적지에서의 2차전에서는 1차전을 부상으로 결장했던 피구가 복귀. 베스트 멤버로 싸울 수 있었으며 원정이기에 힘들 수는 있어도 인테르의 4강 진출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1차전을 보는 한 양 팀의 종합적인 힘의 격차는 점수 이상의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시합을 밀란-리옹 전을 관전하면서 라디오로 듣고 있었다. 후반 13분 비야레알에게 선취당하고 있을 때까지 밀리면서도 차분히 게임을 컨트롤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시합의 녹화방송을 보고 있자 컨트롤은커녕 비야레알의 공격에 놀림을 당할 뿐이었다. 그라운드에 있는 인테르 선수들의 움직임은 전원이 양 다리에 철추라도 매단 듯 무거웠다.

 반대로 비야레알은 아르헨티나 대표인 리켈메의 마술에 조종되는 듯이 경쾌하며 다이내믹한 공격을 계속 펼쳤다. 이 정도로 공격하면서도 골을 넣지 못 할 경우 조급함 때문에 신경질적인 플레이가 되어버리는 패턴이 많지만 이날의 비야레알은 달랐다. 그들은 반드시 골을 넣을 수 있다는 듯한 확신을 갖고 있는 듯이 끝날 때까지 침착한 플레이를 하고 있던 것이 인상 깊었다.


이번 시즌도 문제가 산더미 같은 인테르.


 결과를 알고 영상을 보았지만 인테르 선수들 전원의 플레이에 애가 타서 안타까웠다. 특히 신경 쓰였던 것은 상대 디펜스진에게 완전히 봉쇄되었던 아드리아누. 1차전에서 골을 넣어 부활의 징조가 보인 듯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었나 보다.


 아드리아누의 상태가 안 좋은 것에 대해서는 '월드컵에 몸 상태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던가, '무의식적으로 플레이 중에 딴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등의 목소리도 들리지만 그것은 너무 신빙성이 없는 설이라고 생각한다.

 현 시점에서 브라질 대표팀 공격진의 포진은 아드리아누, 호나우도, 호나우지뉴 거기에 카카를 더한 4명이지만, 호나우지뉴를 제외한 3명에 대해서는 컨디션이 좋고 나쁨에 따라서 호비뉴와 교체당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를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대표팀에서의 레귤러 포지션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 4년에 한 번인 월드컵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생각이라면 비야레알의 리켈메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 대표의 앙리나 우크라이나 대표인 솁첸코를 시작으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플레이 하고 있는 선수라면 누구나가 아드리아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보다 아드리아누가 사생활에서 뭔가 커다란 고민을 갖고 있어 그것이 플레이에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만...


 결국 2차전은 홈에서 비야레알이 1-0으로 승리. 인테르는 원정 골 우선 룰에 따라 눈물을 삼키는 결과가 되었다. 거기에 더 안타까운 것이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서포터들의 야유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8일 토요일에 행해진 아스콜리와의 원정(2-1로 인테르의 승리)에서 돌아 온 인테르의 선수 몇 명이 심야의 밀란의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포터에게 폭행 당한 것이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서포터 그리고 만치니 감독의 거취문제 등 같은 문제가 인테르에서는 매번 일어나 문제만이 산더미같이 쌓여 간다. 그리고 이번 시즌도 인테르의 타이틀은 코파 이탈리아만이 될 가능성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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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단순한 심벌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였다. 스파이크를 벗은 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프랑코 바레시는 여전히 'AC 밀란의 혼()'인 것이다.

 () 카피탄(캡틴)은 여전히 롯소네로(이탈리아어로 적과 흑. 밀란의 애칭)와의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클럽의 암흑기에도 바레시는 결코 밀란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결코 버리질 않았다.

 바레시에게는 좀 더 편한 길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을 선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운명을 밀란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도박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밀란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하늘이 내려준 천직으로 선택한 것이다.

 

 바레시는 브레시아 교외의 작은 노동자의 마을 트라바리아토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유니온 스포르티바 오라토리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그가 밀란과의 험난 모험을 시작한 것은 1974 7월이었다.


 14살의 여름, 그는 아탈란타의 입단테스트를 받았다. 신장 겨우 164Cm. 어디에 있어도 작은 몸집인 프랑키노는 말랐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이 되었다. 그 후 한 살 위인 형 벳페(쥬세페의 약칭)가 있던 인테르나치오날레에 소개받았지만 여기서도 역시 거부 당했다. 그때 바레시에게 오라고 한 곳이 인테르나치오날레와 같이 밀라노를 본거지를 하고 있던 밀란이었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와 지안니 리베라(Gianni Rivera)가 보는 앞에서 처음엔 풀백으로, 다음에는 리베로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결과 150만 리라, 거기에 키가 1Cm 클 때마다 100만 리라를 추가하는 조건으로 밀란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20살이 될 즈음에는 178Cm가 되어 있었다.

 

 바레시는 항상 풍부한 개성과 더불어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인생을 통해서 그가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인 레지나를 잃는 비극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밀란에 입단한 후에도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리하여 귀중한 조언자인 누나 루치아가 모친 대신 그를 키웠다.

 그는 밀란의 프리마베라(주니어 유스팀)에서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클럽은 월 2만 리라의 급료로 계약을 맺기로 결정한다. 인생의 분기점은 니리스 리드홀름의 감독 취임과 찾아 왔다. 78년 이 스웨덴 감독이 아직 18살도 안 된 바레시를 탑 팁에 데뷔시킨 것이다.


 바레시는 그라운드에 있어서의 자신감과 침착성을 주위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같은 대선배이자 스타에게 볼을 건네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였다.

 주목을 모은 그는 78-79시즌 밀란의 10번째 스쿠데토 주역의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축구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실망을 맛보게 된다. 불법 도박 스캔들로 인하여 밀란이 세리에 B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1980년 바레시는 낮은 수준의 리그로 내려가지만 다음해 곧바로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밀란의 부진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진 않았다.

 1982년 AC밀란은 세리에 A 잔류에 실패한다. 그 시점에서 다른 팀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바레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팬들은 팀과 고난을 함께 하려 한 그의 선택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바레시는 또래 선수들 보다 빨리 캡틴이 되어 있었다. 클럽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금고는 비어있었다. 선수 획득도 어떻게 절약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었다. 바레시에게는 삼프토리아에서 매력적인 오퍼가 있었으나, 거부했다. 인테르도 그를 원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이러한 일들로 서포터는 더욱더 그를 진정한 우상으로 받들게 되었다. 팀을 위한 좋은 기회를 진중히 기다리고 있던 바레시의 판단은 옳았다. 모든 일을 큰 스케일로 생각하는 사업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밀란의 만회극이 시작되었다.

 87, 이 신회장은 새로운 선수를 획득하여 팀을 강화하고 곧이어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명장 아리고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고참도 새로 온 선수들도 신감독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으나 좀 지나자 팀은 강해졌다.

 뤼트 휠리트와 마르코 판 바스턴이라는 네덜란드 콤비를 얻어 밀란은 다시 스쿠데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챔피언즈 컵과 토요타 컵(대륙간 컵)에서도 승리하여 힘들었던 모험의 여정을 끝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바레시는 아주리(대표의 애칭)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말수가 적긴 하였지만 한번 말한 것은 굉장히 명료했다.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콘택트면 충분했다. 소리치지 않아도 그의 존재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동료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그라운드에 한 번도 서진 못했지만 이탈리아는 우승했으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91년 밀란에 있어서의 [사키의 시대]는 끝났지만 바레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파비오 카펠로 지휘하에서 존재감을 더해 갔다.

 4개의 스쿠데토를 획득하였고 챔피언즈 컵을 제패했으며 여전히 그라운드 위에서는 가장 뛰어난 선수로 계속 존재했다. 사키는 언제나 바레시를 대표팀에 있길 원했으나 바레시는 1994 9월 아주리의 셔츠를 벗었다.


 그 수개월 전의 여름, 그는 미국 월드컵 초반 노르웨이전에서 다친 무릎을 20일간에 걸쳐 회복하여 브라질과의 결승전에 겨우 출장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악몽을 보게 된다. 승부차기에서 통한의 킥 미스. 세계의 정점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가 흘린 눈물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후도 밀란에서 플레이를 계속한 바레시는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마크할 수 없을 듯한 선수가 나타났을 때 나는 은퇴할 것이다."

 97년 4월 6. 밀란은 스타디오 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1-6으로 대패했다. 그 시합에서 그는 눈 앞을 화살과 같이 빨리 달리는 크리스챤 비에리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필시 커리어의 막을 내릴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바레시는 97 6월에 현역에서 은퇴를 표명한다. 클럽의 회장인 베를루스코니는 그가 달고 있던 [등번호 6]을 영구 결번으로 정했다. 그리고 뛰어났던 커리어의 포상으로 클럽 부회장에 임명했다.


Franco Baresi

1960 5 8. 북이탈리아의의 트라바리아토 태생. 근대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리베로.

14세때 클럽에 들어가서 37세에 스파이크를 벗을 때까지 커리어 전부를 AC밀란에서 보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우승한 이탈리아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출장하지는 못했다. 세계적으로 평가를 높인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귀재(鬼才)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밀란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 수많은 타이틀을 손 안에 넣었다. 절묘한 수비 라인 제어와 탁월한 수싸움으로 상대 선수를 수비망에 걸리게 하는 디펜스는 예술의 영역. 개성파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발롱도르에 선출되지 못한 것은 운이 없었을 뿐이며 이탈리아 대표에서도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에서 커리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면서도 승부차기에서 패퇴. 그런 만큼 [이탈리아의 바레시]보다는 [밀란의 바레시]라는 인상이 보다 강하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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