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910/spain/text/200908090003-spnavi.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2억 5000만 유로를 투자한 레알 마드리드

Xabi Alonso, Clint Dempsey  1990년대 초반, 토리노의 상징이었던 지안루이지 렌티니(Gianluigi Lentini(en))를 밀란이 돈을 쏟아 부으며 탈취하자 엄청난 비난이 일었다. 당시로써는 세계최고인 2150만 달러가 투자되었다고 하자 로마교황청까지 나서 축구선수 한 명에게 그렇게 막대한 돈을 쓰는 것에 부정적인 성명을 표할 정도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1992년의 사건은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로부터 17년. 올 여름 레알 마드리드는 21세기 초반의 영광스런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두 번째로 정권을 잡은 플로렌티노 페레스와 함께 유례가 없었던 돈을 쏟아 붙고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카, 벤제마, 라울 알비올, 아르벨로아, 사비 알론소… ‘흰 거인(레알 마드리드의 애칭)’이 소비한 액수는 밀란이 렌티니에게 투자한 돈의 10배 이상 - 2억 5000만 유로(약 445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들 한다.

2000~06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을 역임했던 페레스는 약 2개월 전 선거를 치르지 않고 회장 자리에 다시 앉자마자 실추된 명문팀의 이미지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했다. 2003년 이후 특히 라몬 칼데론 회장시대의 레알 마드리드는 자국 리그에서 우승을 거두긴 했지만, 유럽무대에서는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에게 엄청 뒤쳐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레스는 예전 [은하계군단]라 불렸던 스타선수들이 즐비한 팀을 재현하고자 계속해서 빅 네임을 획득하였다.

■ 플라티니와 방제의 비판

 그런 레알 마드리드를 보고 유럽 각국에서 서서히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난의 급선봉은 UEFA 회장인 미셸 플라티니와 아스날의 아르센 방제라는 두 프랑스인이었다. 후자는 레알 마드리드가 새로운 지휘관으로 데려오려 노력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지난 시즌까지 비야레알를 이끌던 칠레의 마누엘 페예그리니가 감독에 취임하였다.

 플라티니와 방제가 지적하는 것은 축구 이적시장에 끼친 클럽간 불균형이다. 더구나 지금은 전세계를 휩쓴 경제위기가 한창이어서 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흘러 넘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거기에 더해 일부 선수 이적료의 급격한 상승이 다른 선수들의 가치까지 필요이상으로 높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방제는 요 몇 일전 높은 가격으로 스타선수들을 사 모으는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에 대해 ‘재정 도핑’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어린 선수를 쓸어 모으는 아스날의 선수획득 방식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스날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후진국에서 어린 선수를 데리고 와서 팀의 유스 팀에서 키운다. 그렇게 ‘런던출신’의 선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또한 칸테라(하부조직) 중시 정책을 관철하는 팀이다. 하지만 같은 유스 출신이라도 아스날보다 자국선수의 비율이 높아 유소년일 때부터 ‘바르셀로나 외길’이라는 선수도 드물지 않다. 클럽 전체의 스타일이 확립되어 있어 아무리 어린 선수라도 같은 시합 방식에서 뛰기에 톱 팀에 오르더라도 혼란을 겪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빅 클럽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바르셀로나도 이번 오프에서 이브라히모비치 획득에 큰 돈을 쏟아 부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새로운 시즌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레알 마드리드의 테크니컬 디렉터와 회장 보좌를 맡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발다노는 1974년~98년까지 FIFA 회장을 역임했던 주앙 아벨란제가 진행시킨 ‘축구의 상품화’를 비판해 왔다. 하지만 지금 발다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막대한 지출을 정당화하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에는 투자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있으며 그것을 회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것은 그야말로 80년대 아벨란제가 주장해 왔던 이론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클럽에게 있어 선수의 이적료나 텔레비전 방영권에 의한 수입은 생명선이다. 에스파냐에서는 텔레비전 방영권에 대해서 각 클럽 별로 단독계약을 할 수 있기에, 각자 그 가격을 높이고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그 때문에 프리사와 미디어프로라는 두 텔레비전 회사간에 방영권 쟁탈전이 펼쳐져 방영권료의 급격한 상승을 불러일으켰다. 레알 마드리드는 2006년에 미디어프로 사와 2012-13시즌까지 7시즌 총액 11억 유로라는 파격적인 계약을 맺었다.

Cristiano Ronaldo practices for big game with DC United in Largo Maryland

 이렇게 투자를 했기에 단순히 생각한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지난 시즌보다 승점을 더 쌓을 확률이 늘어날 터이다. 또한 그럼과 동시에 지금까지와 같은 실패는 용서받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998년부터 2002년에 걸쳐 5시즌에 3번 타이틀을 획득한 이래, 5시즌 연속으로 결승 토너먼트 1회전에서 패퇴하고 있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리버풀에게 2시합 합계 0-5로 완패. 당시 감독 후안데 라모스는 시합 후 “이것이 현 레알 마드리드의 실력이다”고 패배선언을 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후안데 라모스이지만 지난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종반까지 리가 1위인 바르셀로나를 몰아 부치고 있었다. 하지만 34라운드 홈에서 펼쳐진 클라시코에서 라이벌에게 2-6으로 대패함으로써 우승과 멀어졌다. 그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가 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고는 해도 대부분 살얼음 위를 지나가는 듯한 승리로 예전의 강함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프의 화제를 독점하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가 2009-10시즌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거액 투자에 대해서는 찬불양론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잡생각할 틈이 없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카카는 이미 흰 유니폼을 걸친 것이다. 단지 이만큼의 보강을 감행한 만큼 레알 마드리드의 어깨에 걸쳐진 압박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그들이 어떠한 축구를 할지,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결과를 남길 수 있을 것인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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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2008/20080519-1-1.html
저자
: 쿠마자키 타카시

사진: 스기야마 타쿠야

 축구의 신은 여전히 장난을 좋아하는 듯 하다.

 조 예선이라는 이른 단계에서 2년 전 월드컵 결승 대결이 재현되게 되었다.

 

 조금 더 운이 좋았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의 도나도니 감독은 떫은 표정으로 말하였는데 무리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예선에서 격렬하게 부딪힌 사이였었으니까.

 

 예선 대결에서는 1 1무로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1위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원정에서 스코틀랜드를 제치고 1시합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예선 통과를 결정지었지만, 종료 직전에 만들어진 파누치의 결승점은 프랑스의 통과도 결정짓는 일격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와의 원정시합을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있던 프랑스는 라이벌에게 도움을 받은 꼴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이탈리아를 도발해 왔던 도메네크 감독에게는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탈리아가 스코틀랜드에게 이긴 것은 우리들의 도발이 그들의 의욕을 높였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이기에 시합은 보지 않았다

 

 밉살스런 말투로 이탈리아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 vs. 이탈리아.

 조 예선 최고의 대결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호적수라 부르기에 어울리는 실력이 서로 갖추어진 것은 1998년에 프랑스가 처음으로 세계 제패를 이룩하면서부터이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축구를 하였기에 이탈리아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7시합에서 2실점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8강전에서는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물리쳤다.

 

 프랑스의 무엇이 바뀌었던 것일까?

 플라티니가 말했듯이 드사이, 튀랑, 지단…… 많은 주력선수가 세리에A에서 단련되어 승리자가 되기 위한 정신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세계 챔피언이 된 프랑스는 2년 후, 유로를 제패한다. 이때 쾌조의 진격을 이어가는 지단과 그 동료들 앞을 마지막에 막아선 것이 이탈리아였다.

 

 승리의 개선가는 카테나치오의 나라에서 울려 퍼질 것이라 예상되었다. 델베키오의 일격으로 선취했던 이탈리아는 밀리면서도 막강한 수비로 버티었고 중요한 순간에는 날카로운 역습을 시도하였다. 델피에로가 결정적인 찬스만 놓치지 않았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뀌었다.

 

 인저리 타임이 끝나려고 할 즈음. 바르테즈, 트레제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윌토르. 절벽 끝에서 따라붙은 프랑스는 트레제게의 불을 뿜는듯한 [골든 골] 103분간의 혈투를 끝낸다.

 델피에로나 토티가 울면서 무너진 그날 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는 50만 명의 인파가 쏟아져 나와 위대한 승리에 취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분노한 베를루스코니가 조프 감독을 규탄.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관은 사의를 표명한다.

< 유로 2000 결승전. 프랑스 vs. 이탈리아 >

숙명의 대결은 장외로도 이어졌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결승에서 이탈리아가 6년 전의 복수를 하였다.

 

 이탈리아가 우리들에게 이기기에는 2030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국 내의 미디어를 통해서 심리전을 걸어온 플라티니에게 멋지게 한 방 먹였다.

 

 하지만 승패 이상으로 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것은 지단이 마테라치에게 한 박치기였다. 현역생활 라스트 게임에서 지단이 퇴장을 당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스포츠의 틀을 뛰어넘어 인종 차별 문제로까지 발전한다. 프랑스 그리고 지단의 뿌리이기도 한 북아프리카에서 분노를 산 마테라치는 반대로 이탈리아에서 영웅이 되었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 소속하는데도 불구하고 원수인 밀란의 팬들에게까지 칭송을 받았다.

 

 경험 풍부한 베테랑이 핵으로 있는 세계의 왕자 이탈리아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스리, 벤제마 등 젊은 선수의 태두가 눈에 띄는 프랑스일까?

 혈투를 거듭할수록 열기가 더해가는 숙명의 대결은 6 13 20 45. 네덜란드도 동거하는 [죽음의 그룹]인 만큼 어느 쪽인가가 떨어질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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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headlines/20080122-00000011-spnavi-socc.html

유럽클럽 협회(ECA - European Club Association) 설립에 대한 합의가 월요일 스위스 니옹에서 행해졌다. 15일에 G-14이 해산될 시에 약속한대로, UEFA(유럽 축구 연맹) 미셸 플라티니 회장의 의향에 따른 새로운 단체의 설립을 향한 회의가 행해졌다.

이날 교환된 합의 문서에는 2중의 효력이 있다.

UEFA는 유럽에서 클럽의 이익을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써 ECA를 인정하고, ECA는 유럽 축구계의 통괄 기관으로써 UEFA, 세계 축구계의 통괄 기관으로써 FIFA(국제 축구 연맹)을 인정하는 것이다.

ECA UEFA에 가맹된 53개의 각국 축구 협회를 기반으로 하여 기본적으로는 103개 클럽으로 구성될 듯하다. 각 협회마다 클럽 수는 UEFA 랭킹과 그 외의 일정한 기준에 따라 2년마다 시즌 종료 후에 결정된다.

랭킹 최상위 3개의 협회에서는 5개의 클럽.
그아래 3개의 협회에서는 4개의 클럽.
랭킹 7위부터 15위까지의 협회에서는 3클럽.
16
위부터 26위까지의 협회에서는 2클럽. 그외의 협회에서는 1클럽이 참가한다.

한편 ECA와 그 16개의 설립 멤버의 대표로써 활동하는 임시위원회도 발족했다.
시즌 종료 후에 총회가 열려 새로운 집행 위원회가 선출될 때까지 활동하게 된다. ECA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11명의 멤버와 위원회가 UEFA 프로 축구 전략 회의를 위해서 선출했던 4명의 대표자. UEFA 클럽 컨페티션 위원회의 멤버 중 50% ECA에서 선출된다. 임시 위원회는 움베르토 간디니(AC 밀란 스포츠 디렉터) 등과 ECA 설립 멤버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된다.

합의문서의 일환으로써 보다 중요 문제도 해결되게 되었다.

각 클럽은 앞으로 각국 대표팀으로 보내는 소속 선수들에 대한 보상금으로써 4년마다 유럽 선수권의 수익에서 어느정도 일정액을 받게 된다. 금액은 [선수 1명당 1일 얼마]라는기준으로 결정된다. 유로 2008에서는 약 4000유로( 550 만원– 2008 1 22일기준)로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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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cent Machenaud
일본어 번역
: Shuichi Ta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에릭 칸토나의 생애.
 그것은 사랑과 증오의 반복이었다.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칸토나 만큼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감정을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준 축구 선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칸토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따르는 것을 일절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필드 위에서건 사생활에서건 일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칸토나는 세계 유일무이한 선수였다.
 그 정도로 전형적이라는 말과 거리가 먼 선수도 없다.

 1966년 5월 24일에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칸토나는 지역 클럽인 케롤(SO Caillols – 장 티카나(Jean Amadou Tigana)도 여기서 뛰었었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15살 때부터 상대 팀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부터 그는 반역자였다. 재능은 주목받고 있었지만 획득을 노린 어느 클럽도 그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우선 그의 부모와 이야기를 한 후 이어서 칸토나 본인을 납득시킨 것이 오세르(AJ Auxerre)의 스카우터였다.
 “그는 정직했으며 총명했다. 그렇게 납득시켜주면 ‘농(non)’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2부리그 마르티그(FC Martigues)에서 1시즌 임대 이적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오세르에서 7년을 보냈다.
 바지르 볼리(Basile Boli[각주:1]), 장 마르크 페레리(Jean-Marc Ferreri[각주:2]) 등을 키워 낸 오세르의 유소년 육성 센터는 프랑스에서 가장 정평난 곳이었다. 거기서 프로가 무엇인지를 배울 동안에도 칸토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바꾸지 안않다. 재능있는 선수인 것은 누구나가 인정했다. 오세르의 명물 감독인 기 루(Guy Roux[각주:3])도, 이 ‘놀라운 아이’에게 기대하였다. 다른 선수는 용납되지 않는 것도 칸토나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기 루는 칸토나를 1부 리그에 데뷔시켰고 필드 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이 소년에게 프랑스 미디어가 주목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수로서 평가가 높아짐에 따라 기이한 행동도 눈에 띄게 되었다. 멋진 골을 넣음과 동시에 상대 선수에 대한 폭력 행위나 심판, 관객에 대해 욕을 하는 칸토나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프랑스 대표팀에 데뷔도 하였다.
 1987년 8월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동독과의 시합(2-1로 동독 승리)에서 처음으로 삼색 유니폼을 입게된 그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펼쳤다.

 당시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스킨헤드를 처음으로 행한 것도 칸토나였다. 머리를 빡빡 밀고 등장한 메츠와의 시합에서는 플라티니처럼 프리킥을 넣어 전 프랑스의 화제를 독점했다.

 독설은 독해져 갔지만 또한 확고부동한 스타가 되어갔던 것이다.
 “별로 내 인생에 축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감독이나 팀 동료들이 뭐라 말하건 나하곤 상관 없다. 흥미가 일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은 그런 특이한 행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프로로서의 캐리어는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는 말만 보면 이미 천하무쌍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오세르의 GK는 프랑스 대표팀의 브르노 마르티니(Bruno Martini)였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난 뒤에, 마르티니는 칸토나에게 자신의 가방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칸토나는 거절했다.
 “나는 니 명령같은 건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선 마르티니의 얼굴에 펀치를 먹였다.

 망나니 기질은 더욱 커져만 갔다.
 1988년 5월 오세르와의 계약을 끝났을 때, 그를 획득하고자 했던 팀은 올림피크 마르세유와 마트라 라싱[각주:4]이라는 2大 클럽이었다. 치열한 획득 경쟁이 벌어졌고 결국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프랑스 신기록인 180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제시한 마르세유였다. 큰 실적을 남기지도 않은 젊은 선수에 대한 계약금으로써는 파격의 액수였다. 교섭의 자리에는 칸토나 자신도 참석하여,거기서 마르세유의 회장이며 사회당 소속의 국회의원 겸 실업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베르나르 타피(Bernard Tapie)에게 대들었다. 후에 타피는 이렇게 회고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는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타피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칸토나에게 있어서도 태어난 고향으로 개선했다고는 하여도 결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타피의 방식도, 또한 마르세유라는 도시의 분위기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바로 전에 칸토나는 프랑스 대표팀에 자신을 부르지 않은 앙리 미셀을 공공의 자리에서 “10할NOM”이라고 욕하여 큰 문제를 일으켰다. 사태를 중히 여긴 프랑스 축구협회는 그에게 1년간 국제 시합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칸토나는 자신만만히 이렇게 말했다.
 “옳은 것은 나다. 확신한다.”

 한편 마르세유에서도 타피가 맘에 들어했던 것은 칸토나가 아닌 이미 에이스 자리를 확보하고 있던 장 피에르 파팡(Jean-Pierre Papin)이었다. 때문에 칸토나는 보르도와 몽페리에에 2시즌간 임대된다. 그 후 또다시 마르세유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도,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국은 곧바로 찾아온다. 어느 시합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그는 유니폼을 벗어 던진 채 스타디움을 뒤로 한 뒤 그 상태로 3일간 행방 불명이 되었다. 할머니와 오세르 시대의 친구인 미셸 피네다와 만나러 카탈루냐까지 간 것이다.

 타피는 칸토나를 방출할 것을 맘먹고 님(Nîmes Olympique)에 그를 팔아 넘겼다. 이 작은 클럽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킨다. 공격적 미드필드로써 필드에 군림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트러블은 끊이지 않았다.
 심판에게 항의하던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볼을 심판에게 차서 퇴장당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위기였다. 아무리 칸토나라고 하여도 이때는 은퇴를 결심하였다. 그것을 번복시킨 것은 미셸 플라티니의 어드바이스였다. 플라티니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행선지는 리즈 유나이티드.
 시즌 도중에 입단한 그는 리즈에게 프레미어 우승을 안겨주며 곧바로 잉글랜드에서도 절찬을 받는다. 그런 그를 주목한 것이 당대 제일의 인기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5시즌을 보낸 그는 [에릭 더 킹]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활에 큰 공헌을 한다. 옷깃을 세운 백넘버 7의 유니폼은 클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칸토나 자신도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정신적인 아버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비호 아래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 그는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져 잉글랜드 넘버 원 선수라는 평가를 획득한다.

 한편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그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미셸 플라티니도 울리에도 칸토나를 파팡에 버금가는 에이스로써 계속 기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파팡이 프랑스 국민의 아이돌이었던 것에 비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우승 4회, 컵 우승 2회라는 위대한 결과를 남긴 칸토나는 그런 영광만큼의 인기를 프랑스에선 얻지 못했다. 프랑스 대표팀이 이기면 물론 박수를 받았지만 패했을 때의 모든 비난과 야유가 그에게만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파팡과의 차이는 뚜렷했다.
 “녀석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라고 불가리아에게 패하여 미국 월드컵 출장권을 잃은 직후에 그는 말했다.

 그 시합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월드컵 기회였다.
 프랑스 대표 출장 45회, 19득점을 올린 칸토나도 대표에서의 타이틀은 불운했다. 1996년 유럽 선수권은 그의 홈 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있는 잉글랜드에서 개최. 그러나 에메 자케는 애지중지하던 지네딘 지단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칸토나를 대표팀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이때 그의 영광도 끝을 고했다.
 이 시기의 그는 정신적인 황폐가 두드러진다. 상대 선수에 대한 공격, 심판에 대한 욕설, 나중에는 상대 팀 서포터에게 날라치기를 먹여 3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다. 결국 TV 광고에서만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은퇴가 거론되었지만 그가 미디어와 이야기하지 않게 된 때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때문에 누구도 그가 언제 현역 생활의 마침표를 찍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맨체스터와의 계약을 1년 남기고 은퇴는 97년 5월에 발표되었다. 클럽에서 짧은 프레스 릴리스가 배포도었을 뿐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은퇴 선언.

 마지막까지 칸토나는 유아독존이었다.


Eric Cantona/에릭 칸토나.

1966년 5월 24일.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오세르에서 캐리어를 스타트시켜 21살에 대표팀에 데뷔하지만 너무도 강한 퍼스널리티로 인하여 클럽 수뇌진 등과 트러블이 끊이질 않아 자주 소속 클럽이 바뀌었다. 92년에 잉글랜드 리즈에 이적하여 팀을 리그 우승에 이끌었고, 다음 시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겨서는 젊은 선수들을 리드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90년대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94-95 시즌에 팬과의 트러블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지만, 95-96시즌에 복귀하여 리그와 컵 2관왕에 공헌했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불운이 많아 1998년 월드컵 멤버에서 제외된 것을 계기로 선수로써의 캐리어도 막혀버렸다. 독특한 외모, 강렬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위키피디아에 있던 말 추가

칸토나 어록

  • 세상에는 보통과 다른 인간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자랑스럽다.
  • 갈매기들이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95년 날라차기 사건으로 24시간 구치소에 있은 후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을 갈매기로 비유하며)
  • 팀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 내가 눈에 띄면 된다.! 
  • 내 묘비석에는 아무런 말도 새겨 넣고 싶지 않다. 새하얀 돌인 상태로 좋다. 나란 인간을 언제까지고 수수께끼인 채로 남겨 두고 싶다.
  • 내가 보스다!
  • 나는 신이다!
  •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써 무엇을 하는가다. 개인으로써 주목을 받고 싶다면 난 테니스를 할 것이다. 혹은 멋진 여성을 파트너로 삼아 혼합 복식을 하거나.
  • 나는 축구에 대한 정열을 잃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은퇴 회견에서)
  • 내 최고의 순간? 나에겐 많은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는 녀석을 발로 찼을 때이다.
    (관객에게 날라차기 한 뒤에)
  • 아니! 그건 나다.(지네딘 지단과 미셸 플라티니 중 어느 쪽이 프랑스 역대 최고의 선수인가를 질문받았을 때)
  • 골은 아기와 같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칸토나에 대해서..

  • 내가 지금까지 마신 모든 샴페인을, 올드 트래포드에 영광을 가져다 준 칸토나에게 바친다.(조지 베스트)

  • 칸토나를 데리고 있는데, 누가 펠레를 필요로 할까요.
    (영국 해설자 마틴 테일러. 1993~94시즌 첼시와의 경기에서, 칸토나가 중앙선에서 찬 킥이 골 대를 맞추었을 때)

  • 앨런 시어러를 획득함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PK를 차고 싶어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백넘버 9를 달고 싶다는 것. 백넘버 문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즈음 우리 팀에서 PK를 차고 있던 것은 칸토나였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앨런 시어러 획득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
  • 확실히 칸토나에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의 지시를 받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팀에 가져다 준 최대의 공적은, 완벽을 목표로 한다면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알렉스 퍼거슨)

  •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는 그가 최고. 그와 같은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 나의 꿈.(데이비드 베컴)


  1. DF. 마르세유 재적 시에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어 챔피언스 리그 우승. 별명 ‘골 문 앞의 암살자’ [본문으로]
  2. AMF/FW. 대표력 37경기 3골. 84년 유럽 선수권 당시의 중심 선수. [본문으로]
  3. 선수 생활(1952-1961)과 감독 생활(1961-2005) 을 합하여 50년 넘게 오세르에만 있었다. 현 RC Lens의 감독. [본문으로]
  4. (Racing Club de France – 파리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지만, 경영 악화로 현재는 아마추어 팀. 마트라(Matra )는 당시 클럽 회장이 경영하던 자동차 회사.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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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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