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대표팀'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7.08.24 아름다운 투사(鬪士)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by 渤海之狼
  2. 2007.05.11 독일 축구 협회는 일본을 어떻게 분석했나 by 渤海之狼
  3. 2007.03.30 낭떠러지에서 멈춘 이탈리아 by 渤海之狼
  4. 2006.12.06 DF라도 발롱도르에 선출될 수 있다. by 渤海之狼 3
  5. 2006.10.16 새로운 스캔들과 도나도니의 시련 by 渤海之狼

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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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키자키 신야

구체적인 도면이 많아 알기 쉬운 구성. 일본은 지적된 결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월드컵에 대해서 흥미로운 분석한 책을 손에 넣었기에 소개하고 싶다.

 독일 축구 협회가 작년 월드컵을 분석하여 간행한 [Analyse Weltmeisterschaft 2006]이라는 104페이지짜리 비매품으로 이번에 독일 축구 협회가 특별히 제공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책은 굉장하다. 출장한 32개국의 특징이나 단점을 철저 분석. 예를 들어 일본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여 있다.


[3백의 좌우의 두 선수(나카자와와 츠보이)가 사이드를 커버하지 않기 때문에 SB인 산토스와 카치는 긴 거리를 오고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비할 때의 포지셔닝은 좋았지만 너무 수동적이었다]


[2톱은 거의 포지션 체인지를 하지 않았고 1.5열인 나카무라는 수평으로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축구 협회도 월드컵 분석을 한 책을 펴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시합은) 비극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패배 방식]

 [브라질이 높은 경기력으로 싸웠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등의 감정적인 분석이 되어 있기에 그에 비해 독일의 책은 구체적인 전술의 개선점이 쓰여 있다. 어느 쪽이 우수한 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참고로 옆 나라인 한국은,

 [너무 당황한다]

 [시합의 템포를 바꾸질 못한다]라고 결점을 지적하면서도,


 [강건한 팀 스피릿과 공격적인 자세]

 [뛰어난 민첩성과 운동량] 등 일본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가 우승한 비결로 “안전제일”이라는 것을 근본에 두고 있다고 한다.


 [상대에게서 볼을 빼앗으면 곧바로 선수들은 넓게 퍼졌다. 그리고 공격의 제 1옵션은 롱 볼. 수비할 때는 DF라인을 끌어 내리고 골문 앞에 밀집시켰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독일 월드컵에서 보인 새로운 트렌드이다.

 [게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선수를 사이드에 둔다]

 [천천히 안전한 패스에서 갑자기 템포 업해서 공격한다]

 이제부터라도 일본 대표에게 참고가 될 지식일 것이다. 오심 감독은 다이렉트 패스를 이어가는 축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이번 분석에 따르면 [단순]한 것이 된다.


 어서 빨리 일본 선수가 오심의 기초를 이해하여 응용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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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ro/08/column/200703/at00012787.html
저자: 혼마 요시카

■ 도나도니를 민감하게 만든 차기 감독 소문

차기 감독의 소문 그리고 토티의 대표팀 참가 거부로 인하여, 시합 전의 도나도니 감독은 민감한 상태였다.

 유로2008 예선에서 고전을 계속하고 있는 이탈리아.

 3월 28일, 이탈리아의 남부 바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시합에서 겨우 원래 가진 힘을 발휘하여 2-0 승리를 이루었다. 옛날부터 이탈리아는 자신들보다 격이 낮은 팀에게는 고전하는 것이 '특기'가 되어 월드컵뿐만 아니라 어떤 대회에서건 예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이번 유로 예선은 월드컵 후의 허탈감과 피로 축적이라는 소위 '월드컵 신드롬'외에 많은 대표선수들의 소속 클럽이 타격을 받은 '칼치오 스캔들'의 후유증도 더해진 악조건이 계속 되었다.


 스코틀랜드 시합 직전인 예선 B조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프랑스, 우크라이나, 스코틀랜드의 3개국이 5시합을 치룬 상태에서 4승 1패인 12P로 동률이고, 이탈리아가 4시합을 치룬 상태에서 2승 1무 1패로 7P로 추격하고 있으며 그 뒤편에 그루지야가 6P(6시합), 리투아니아가 4P(5시합), 페로제도가 0P(6시합)가 되어있었다.

 만약 이탈리아가 스코틀랜드와의 시합에서 이길 수 없다면 상위 세 팀과의 승점차이가 커다랗게 벌어지게 되어 아직 남은 7시합이 있다고 하여도 본선 출장 티켓인 상위 2팀에 끼는 것이 굉장히 어렵게 될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도나도니 감독이 정신적인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시합 전에 초조하게 문답을 한 인터뷰를 보아도 명확했다. 단 도나도니를 시합하기 전부터 초조하게 한 원인은 또 있었다.

 하나는 매스컴이 흘린 차기 대표팀 감독 소문이었다.

 원래 도나도니가 대표팀 감독취임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매스컴뿐만 아니고 많은 축구 팬들도 다음 적임자를 찾기 전까지 일시적인 연결고리로써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감독을 맡아왔던 인물들은 클럽에서 성적을 남겼던 감독(리피, 트라파토니, 디노 조프, 사키, 파브리, 베르나르디니), U-21 감독을 오랫동안 지휘했던 감독(비치니, 말디니), 오랫동안 대표팀에서 조감독을 맡아왔던 감독(베아르조) 등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 취임해 왔다.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나라와 같이 감독 경험이 거의 없는 전 선수(그 선수가 아무리 전설적인 선수라고 하여도)가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도나도니는 세리에 A에서 감독경험(리보르노)은 있지만 월드컵 독일 대회 직전에 종료한 05-06시즌 도중(23라운드)에 리보르노 감독에서 해임되었다.

 감독으로써는 아직 미지수인 도나도니가 월드컵에서 우승한 리피의 후임자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결과를 내지 않는 한, 매스컴이 후임감독에 대하여 언급할 기회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번 소문은 밀란이 얽힌 것이었다. 다음 시즌 감독에 리피가 밀란 감독에 취임하며 안첼로티가 이탈리아의 감독이 된다는 것이었다. 안첼로티도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였기에 일파만파가 되었다. 단지 '2011년에...'라고 안첼로티가 말한 것은 빠지고 매스컴은 6월부터 취임할 가능성이 있는 듯이 썼다.

 도나도니는 합숙 중의 인터뷰에서 "나의 꿈은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꿈은 있다. 안첼로티는 대표팀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2011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너희들은, 곧바로 '당장 감독으로'라고 썼나? 저널리스트로써 확실히 일하고 있는 인간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며 말했다.

 필시 도나도니는 내심, '요즘 같은 때 카를로(안첼로티)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것인가'하고 친구인 안첼로티의 발언에 혀를 찼을 것이다.


■ 파문을 일으킨 토티의 대표팀 사퇴


 또 하나 도나도니를 안절부절 못하게 한 것은, 토티의 대표팀 참가 거부였다.

 토티는 "올해 9월부터 대표팀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고 축구 협회를 통해서 코멘트를 발표했다. 지금은 아직 컨디션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그러나 토티는 올 시즌 득점왕 레이스의 톱(18골)을 달리고 있으며 로마를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시킬 정도로 활약하고 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와의 시합 3일 후에 홈에서 밀란과의 시합이 있으며 거기에 그 4일 뒤에는 홈에서 챔피언스리그 8강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1차전을 앞두고 있다. 만약 스코틀랜드아의 시합에 출장했을 경우 1주일에 3시합을 치루는 것이 되어 아직 왼쪽 발목에 볼트를 박아놓은 토티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가혹한 스케줄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유럽선수권 출장이 스코틀랜드와의 시합 결과에 좌우될 상황을 생각하자면 평소부터 이탈리아 대표보다 로마를 우선한다고 거리낌없이 말한 토티의 대표팀 참가 거부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라고 도나도니는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나도니도 이 건에 관해서 표면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지만 질문을 받자 "9월이 되어 그가 의욕을 보이더라도 컨디션을 보고서 소집할지 어떨지를 판단하겠다"고 하여 토티가 자기 좋을 때 멋대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투 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예전 칼럼(새로운 추문과 도나도니의 시련)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필자에게는 도나도니가 월드컵 우승을 이루어낸 선수들에게 조금은 무시 받는 듯이 보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 스코틀랜드에게 강했던 이탈리아


 이와 같이 시합 전에 대표팀을 둘러싼 분위기는 좋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침착했다. 역시 월드컵 직전에 대표팀을 감싼 '칼치오 스캔들'에 의한 어두운 중압감을 겪으면서도 그것에 눌리지 않고 우승한 것이 지금으로썬 커다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시합에 대한 것을 보자면 이탈리아는 로마와 같은 4-2-3-1시스템을 취했다. 그러나 로마의 전법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1.5열인 토티를 CFW의 위치에 두는 로마는 토티가 자유분방한 움직임으로 골문 앞에서 공간을 창출하여 MF가 빈 공간으로 뛰어들어 공격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의 CFW에는 진정한 CFW인 토니가 확실히 골문 앞에 자리를 잡고 토니의 높이를 살리거나 디나탈레나 페로타와의 콤비플레이로 상대 골을 위협하는 평범한 정공법이었다.

토티가 CFW에 들어가는 변칙적인 포진은 로마에서나 실현할 수 있는 포진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멤버는-


-------------토니

----디나탈레--페로타-카모라네시

-------가투소-----데로시

참브로타--칸나바로-마테라치-오도

-------------부폰

(와이비노멀의 홍명보님의 포진도를 허락 없이 빌렸습니다. 죄송합니다 ^^ - 역자 주)


 상대하는 스코틀랜드는 4-1-4-1이라는 중반의 숫자를 늘려 상대 공격의 싹을 뽑는 포진으로 임했다.

 스코틀랜드는 이탈리아에게 있어서는 전통적으로 상대하기 쉬운 상대다. 지금보다도 훨씬 강했던 스코틀랜드(60년대의 데니스 로나 지미 존스톤, 70년대의 빌리 브렘너, 피터 로리머, 케니 달그리쉬 등 명선수를 데리고 있었다)였을 때도 그랬다.

 스코틀랜드는 라틴이나 슬라브의 여러 나라들처럼 얍삽함이나 술수를 부리지 않는 너무도 정직하다고 할 정도의 시합운영을 한다. 이탈리아에게 있어서는 스코틀랜드보다 더 격이 낮은 그루지야나 리투아니아와 같은 얍삽함을 가지고 있는 쪽이 더 상대하기 어려웠음에 틀림이 없다.

 필자는 스코틀랜드의 이런 정직함을 좋아하기에 그들이 월드컵에 출장했을 때에는 반드시 응원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멋지게 기대를 저버렸다.

 1974년 월드컵에서는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강호 클럽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의 브렘너, 로리머, 조던 등에 더해 베테랑인 데니스 로나 존스톤 등을 갖추고 있어 다크호스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조 예선에서 탈락.

 78년 월드컵에서도 달그리쉬나 조던 거기에 아치 게밀, 그레암 수네스 등 실력으로는 1급인 선수를 데리고 있었지만 또다시 조 예선 탈락했다.

 계속해서 82년, 86년 월드컵에서도 조던이나 수네스 외에 현 셀틱 감독인 고든 스트라간 등 균형 잡힌 팀으로 도전했지만 여전히 조 예선에서 탈락했다.

 90년대에 들어와 스코틀랜드에서 명선수가 적어져 서서히 팀도 쇠퇴해갔다. 그러나 이번 유로 예선에서는 오랜만에 선전을 펼치고 있어, 10월 7일 행해진 홈경기에서 프랑스를 1-0으로 이겼다.


■토니의 활약으로 스코틀랜드를 분쇄


 그러면 시합으로 이야기를 돌리자.

 개시하자마자 이탈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양 사이드에서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했다. 이탈리아가 좁은 공간에서 재빠른 원투패스를 보이거나 드리블 돌파를 선보이거나 하여 양 팀 개개인의 기술력의 차이는 확연히 느끼게 해주었다.

 이탈리아의 선취점은 전반 12분.

 스코틀랜드 진영 오른편 위치에서 오도가 올린 FK을 토니가 상대 DF와 몸싸움하면서 머리에 맞추어 골 넷을 흔들었다. 1점을 선취한 뒤 이탈리아는 게임을 지배하였지만 무턱대고 공격하려하지 않고 상대를 떠보는 운영을 하였다. 스코틀랜드도 스콧 브라운이 왼쪽 사이드에서 공격을 시도하거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리 맥클러크가 칸나바로와 접촉하여 쓰러져 PK를 어필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이탈리아 우위인 전개는 변함없이 1-0으로 전반전이 종료.

 후반에 들어서 이탈리아의 공격이 거세졌다. 디나탈레가 2번에 걸쳐 왼쪽 사이드에서 스피드있는 드리블로 돌파하여 슛을 쏘았지만 GK 크레이그 고든에게 막혔다. 그 후에도 토니와 카모라네시가 슛을 시도했지만 불발로 그쳤다.

 이탈리아의 2점째는 후반 25분.

 스코틀랜드 진영에서 볼을 빼앗은 가투소가 오른쪽 사이드의 카모라네시에게 패스. 카모라네시가 올린 크로스에 또다시 토니가 머리로 넣어 2-0. 그 후 스코틀랜드의 추격을 뿌리쳐 종료.


 앞으로 이탈리아는 6월 2일 페로 제도, 6월 6일 리투아니아와 원정시합을 예정되어있다.

 꽁지에 불이 붙자 겨우 엔진을 걸기 시작한 이탈리아는 6월 달의 원정 2시합에서 승점을 얻지 못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유럽선수권 출장을 건 진정한 사투는 9월 8일 예정 된 홈에서의 프랑스, 그 시합부터 4일 후인 12일에 예정된 원정에서의 우크라이나와의 시합이다. 토티의 대표팀 복귀도 있어, 9월 달의 이탈리아 축구는 열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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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사카마키 요우코

이탈리아 선수로는 1993년 로베르트 바조 이후 5명째의 수상.


 올해의 발롱도르(유럽 연간 최우수 선수상)에 이탈리아 대표로 레알 마드리드 DF인 파비오 칸나바로가 선출되었다. 발롱도르라는 것은 프랑스의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이 주최하며, 유럽 52개국의 기자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FIFA의 세계 최우수 선수상과 맞먹는 영예이기도 하다. 칸나바로는 주장으로서 이탈리아가 독일 월드컵 제패하는데 공헌. 거기에 지난 시즌까지 소속되어 있던 유벤투스가 세리에A 2연패(주: 지난 시즌은 세리에A 부정문제로 인해 타이틀 박탈)의 원동력이 된 것을 높이 평가 받은 수상이 되었다. DF의 수상은 1996년 마티어스 잠머 이후 10년만의 수상. 더구나 이번엔 수비 전문의 센터백이 가치 있는 타이틀을 처음으로 수상한 것도 있어 큰 반향을 불렀다.


 “축구에는 디펜더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칸나바로. 명수 바레시나 말디니조차도 도달할 수 없었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즉 이탈리아 축구의 전통인 [카테나치오]가 칸나바로라는 문지기로 인해 긴 세월을 지나 결국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선수에 한하면 세리에 A와 발롱도르의 연은 굉장히 깊다. 1961년 당시 유벤투스에 소속하고 있던 FW 시보리가 첫 선출된 이후 50년간 18회 수상은 2위인 에스파냐리그의 10회 수상과 큰 차를 벌리고 있다. 요즘은 2002년 이후 3년 연속으로 수상자를 배출했다. '세리에 A는 재미없어'라고 전세계에서 혹평을 받아도 우수한 선수를 항상 배출하는 토양임에는 변함이 없다.


 9회로 3위에 랭크된 분데스리가의 수상자가 전부 독일 선수인 것에 비해 세리에 A는 외국인 선수의 선출이 대부분. 이것은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로 간주되어 온 축구가 이탈리아에서는 '산업'으로 취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가 요 10년간 5명의 외국인 선수에 의해 발론도르를 얻은 '세리에 A 현상'을 일으킨 것도, 에스파냐에서도 축구를 '산업'으로 보려는 것이 정착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적한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부진으로 고생하고 있는 칸나바로의 수상을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풋볼]의 엘느 국장은 선출된 요인으로 [페어플레이]를 언급했다. 즉 월드컵이라는 긴 대회기간 중 상대의 에이스를 마크하는 [스토퍼]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옐로카드를 받지 않았던 칸나바로의 자세는 축구 선수의 모범이라 하였다.

“골을 넣는 숫자나 판타스틱한 플레이만이 발롱도르의 전부는 아니다”고 엘느씨는 말한다.

현대 축구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질 - 룰을 지키는 플레이가 유럽 축구의 달인들에게 존중받은 것이다. 세리에 A의 진수인 수비력과 페어플레이가 화려한 공격 축구를 추월한 이번의 발롱도르. 51회째를 맞이하여 황금 볼을 둘러싼 환경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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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ro/08/column/200610/at00010930.html

저자: 혼마 요시카

유로 예선 출발은 안 좋은 이탈리아지만, 10월의 2연전은 둘 다 승리를 거두었다.

 월드컵 우승 후 도나도니를 새로운 감독으로 맞이하여 유로 2008 예선 시합에 임한 이탈리아 대표팀이지만 최초의 2시합(리투아니아와 프랑스)에서 1무승부 1패를 기록하여 벌써부터 낭떠러지로 몰렸다. 그러나 10월 7일 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11일 원정인 그루지야와의 시합에서 2연승하여, 이 2시합의 결과에 따라서는 해임의 위기까지 갈 수 있었던 도나도니 감독도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칼럼은 도나도니의 이탈리아 대표팀에 대해서 쓸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새로이 발각된 인테르의 스캔들 '도청의혹'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인테르도 스캔들 발각



 텔레콤(이탈리아의 구 국영통신사)이 일으킨 몇 명의 정치인을 도청한 사건으로 텔레콤의 보안 책임자였던 줄리아노 타바롤리가 체포되었다. 이 타바롤리가 경찰의 조사에서 “인테르의 의뢰로 심판원인 마시모 데 산티스의 전화를 도청했다”고 자술하여, 이 자술내용을 타바롤리의 변호사가 매스컴에 알리면서 새로운 축구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인테르는 타바롤리에게 의뢰한 전화 도청뿐만 아니고 동시에 탐정사무소를 이용하여 데 산티스의 주변도 조사시켰다.


 원래 인테르가 이러한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공정치 못한 행위를 취하게 된 원인은 데 산티스와 유벤투스의 중역이었던 모지의 불필요한 관계에 의심을 품고 있던 전 심판원인 다닐로 누치니가 2002년 연말에 인테르의 구단 사무소를 방문하여 정보를 전한 데 따른 것이다. 누치니와 만난 당시 인테르의 부회장 고(故) 지아친토 파케티는 알고 있는 정보를 곧바로 경찰에게 신고하도록 누치니에게 말했다.

 파케티가 누치니에게 이탈리아 축구 협회가 아닌 경찰에게 신고하라고 말한 것이 대단히 흥미롭다. 그러나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누치니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테르가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인테르의 부회장이며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피렐리(이탈리아 굴지의 타이어 메이커)의 오너인 마르코 트론케티 프로베라는 당시 텔레콤의 오너이기도 했다. 거기에서 전화 도청으로 이른 경위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테르는 데 산티스의 부인의 계좌를 조사하여 부정한 돈의 흐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조사했던 것 같지만 결국 이 조사에서는 부정한 사실은 잡을 수 없었다.


 데 산티스 이외에도 루치아노 모지나 축구협회 회장이었던 프랑코 카라로뿐만이 아닌 놀랍게도 당시 인테르의 스타 선수였던 크리스티안 비에리까지 도청하고 있었다. 비에리의 도청에 관해서는 당시 스폰서였던 피렐리의 이미지 캐릭터로 계약의 이야기가 오고가던 비에리에게 마이너스 이미지를 줄 듯한 부정한 주변인물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인테르 특히 마시모 모라티에 대해서 인테르의 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던 깨끗한 이미지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번 스캔들로 인테르가 어떠한 제재를 받는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다. 왜냐면,

(1)지난 시즌 종료할 시에 분출된 심판 매수 스캔들과 같은 시합에 관한 부정행위가 아니고 개인에 대한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부정행위라는 것.

(2)사건에서 3년 이상 경과했기 때문. 축구 협회의 규칙(클럽에 관해서는 3년 이내, 개인에 대해서는 6년 이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만 처벌)에 따르면 마시모 모라티만이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


 앞으로 어떠한 전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테리스타에게 있어서 굉장히 뒤끝이 나쁜 스캔들이라는 것이다.

 자 어쨌든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화제를 바꾸자.



■ 명백히 실패한 3톱



 이탈리아 대표팀은 로마에서 행해진 홈에서 우크라이나와의 시합(2-0)과 트빌리시에서 행해진 원정 그루지야와의 시합(3-1)에서 2연승했다. 4시합을 치룬 시점에서 승점은 7점이 되어 어떻게든 2포인트 차로 선두를 달리는 2팀(프랑스와 스코틀랜드)를 사정권 내에 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2시합의 시합내용은 결코 합격점을 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이것은 도나도니의 서투른 선수기용도 있지만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중심선수의 나쁜 컨디션도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홈인 우크라이나의 시합에서는 솁첸코가 빠진 우크라이나에게 공격당해 부폰의 파인세이브가 없었다면 확실히 다른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토니를 CF에 두고 오른쪽에 이아퀸타, 왼쪽에 델피에로를 배치한 공격적인 포진으로 임했지만 이것이 전혀 기능되지 못했다.

 이아퀸타와 델피에로의 역할은 상황에 따라 중반의 측면도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하며 섬세한 것이지만 소속 클럽에서는 이아퀸타가 CF, 델피에로가 트레제게와 2톱이기에 둘 다 이 포지션에서는 플레이하고 있지 않다.

 이미 명확한 시스템이 무너진 시합 도중에서의 기용이라면 이아퀸타의 스피드나 델피에로의 기교있는 페인트 등으로 측면에서의 공격이 먹힐 수 있는 경우가 있지만 시작부터 이 역할이 주어진 것은 명백히 도나도니의 판단 미스였다. 특히 운동량이 떨어져 있는 델피에로에게 있어서는 잔혹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공격이 좋아진 것은 후반 17분에 델피에로와 교체된 디 나타레가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이걸로 왼쪽 측면에서의 공격이 늘었다. 이탈리아가 선제점을 넣은 것은 후반 26분, 오른쪽 측면에서의 오도의 크로스를 기다리던 토니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쓰러져 PK를 얻었고, 이 PK를 라치오에서 키커를 맡고 있는 오도가 넣었다.

 추가점은 속공에서 이루어졌다. 후반 34분에 왼쪽 측면에서 디 나타레의 30미터의 정확한 크로스를 받은 토니가 왼발로 골을 넣어 승리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첫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중심 선수 몇 명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참브로타는 효과적인 오버래핑을 할 수 없었으며 수비적인 면에서도 불안을 남겼다. 참브로타정도는 아니지만 칸나바로의 컨디션도 월드컵 때와 비교하면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합에서 합격점이 주어진 것은 부폰, 오도, 토니, 디 나타레, 마테라치의 5선수뿐이었다.


■ 신생 이탈리아의 중심은 데 로시인가?



 4일 후에 열린 그루지야와의 시합에서는 마테라치를 대신해서 네스타가, 경고누적으로 출장 정지가 된 가투소를 대신해서 페로타가, 이아퀸타를 대신해서 카모라네시가, 그리고 델피에로를 대신해서 디 나타레가 각각 출장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시합에서 쓴 4-3-3에서, 토니를 톱에 두는 4-5-1(또는 4-1-4-1)로 변경했다.


 시합은 전반 18분에 데 로시가 페널티 에어리어 밖 왼쪽 근처의 위치에서 롱 슛을 넣어 선제점을 넣었지만, 8분 후인 전반 26분에 샤시아시필리에게 동점 골을 먹어 그 후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후반 15분에 2장째의 옐로우카드로 그루지야의 칸카바가 퇴장하고 부터였다. 수적 우세가 되어 상대의 압박이 약해지자 이탈리아는 재빠른 공 돌리기로 공격을 시도하여 후반 18분에 왼쪽 측면에서 디 나타레가 골문 앞으로 크로스를 공급. 오른쪽에서 골문 앞으로 파고든 카모라네시가 헤딩으로 추가점을 넣었다. 거기에 8분 후에는 페로타가 골을 넣어 시합을 결정지었다.


 이 시합에서 데 로시의 질과 양이 동반된 플레이는 압권이었다. 이번 2시합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때때로 보이는 화내기 쉬운 성격만 고칠 수 있다면 데 로시는 게임메이크도 가능한 올라운드 MF로 신생 이탈리아의 중심 선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합에서도 몇 명인가의 중심 선수의 나쁜 컨디션이 눈에 띄었다. 만약 그루지야의 선수가 퇴장 처분을 받지 않았다면 마지막까지 고전했음이 틀림없다. 컨디션이 나쁜 선수 중에서도 특히 비참했던 것이 네스타였다. 밀란에 있어서도 이번 시즌의 네스타에게서는 플레이에 자신감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으며 이 시합에서도 이지 미스를 계속 범했다. 반대로 이 2시합에서 수확한 것 중 하나는 왼쪽 측면 공격수로써 높은 능력을 보여준 디 나타레와 오른쪽 SB에서 공수가 안정된 플레이를 보여준 오도 2선수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이탈리아 대표팀이지만, 도나도니에게 있어서는 만족할 수 있는 결과로 끝난 2연전이었다.



■ 선수에게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도나도니



 마지막으로 대표팀 감독으로써 도나도니에게 신경 쓰이는 부분을 언급하고 싶다.

 아시는 바데로 대표팀 감독은 전술적인 능력 이상으로 각 클럽에서 선발된 스타 선수의 신뢰를 얻는 능력, 이런 선수를 하나로 묶는 카리스마가 필요로 하지만, 도나도니는 아직까지 선수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장면을 몇 번인가 보았다.


 그건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시합이었다. 칸나바로가 상대선수와 강하게 머리를 부딪쳤다. 때때로 아픈 듯이 머리를 감싸면서 플레이했던 때였다.

 벤치의 도나도니는 몇 번이나 칸나바로에게 큰 소리로 괜찮은지 어떤지를 물었지만 칸나바로는 명백히 도나도니를 무시하고 있었다. 주장으로서 월드컵을 우승하였고 대표팀에서도 클럽에서도 도나도니 이상으로 풍부한 경험의 명감독 아래서 시합을 해  온 칸나바로는 도나도니를 풋내기로 얕보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이 때의 칸나바로의 태도는 굉장히 불유쾌했다.


 또한 같은 프랑스와의 시합에서 도나도니는 후반에 접어들어 움직임이 둔해진 카사노에게 시합을 계속할 수 있는가 어떤가를 몇 번이나 물었다. 이 장면은 도나도니의 소심한 성격이 나타난 듯이 느껴졌다. 카사노가 부상당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감독 자신이 카사노가 피로해 있다고 판단하여 곧바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토티가 연내가 아닌 내년부터 대표팀으로 복귀한다고 제멋대로 선언을 한 것도 도나도니를 깔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렇듯 대표팀 감독 도나도니가 가는 길에는 여전히 힘겨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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