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1011/other/text/201103310007-spnavi.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저작권자: sportsnavi.com



■ 그 사건부터 3년 후 또 다시…


  2008년 3월 15일. 아르헨티나 1부 후기리그의 벨레스 사르스필드 대 CA 산로렌소의 시합이 시작되기 직전 21살의 벨레스 팬 엠마누엘 알바레스가 상대 팀 서포터에게 총을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골문 뒤의 벨레스 팬들은 자기 팀의 선수들에게 알바레스의 몸에 일어난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드와 스탠드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을 파괴하였다. 그 고통스런 2008년의 시합은 이렇게 해서 중지되었다.

 이 두 팀은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본거지로 하며 또한 과거에도 몇 번이나 우승다툼을 펼쳐왔기에 오랜 기간 극심한 라이벌관계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양 클럽의 집행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대책을 철저히 하게 되었다.

 저 사건으로부터 거의 3년이 경과한 2011년 3월 20일. 그 때와 마찬가지로 두 팀이 역시 같은 스타디움에서 시합이 개시되었고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산로렌소의 팬들이 골문 뒤의 철조망을 부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시합 직전에 36살의 산로렌소 팬 라몬 아라마조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시합은 역시 중지되었다.


■ 클럽의 노력도 보람없이 사건은 일어났다.


 부검 결과, 아라마조의 유체에서 다수의 폭행 흔적과 찰과상이 발견되었다고 변호사인 페르난도 블란드는 설명하였다. 또한 NGO ‘축구를 구하자(SAF)’의 통계에 따르면 아라마조는 아르헨티나 축구계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의 256명째의 희생자라고 한다. ‘축구를 구하자’의 간부인 모니카 니찰드는 아르헨티나 팬 협회(HUA)와 협력하여 많은 폭력적인 팬들을 남아공 월드컵 대회에 파견할 수 있게 원조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AFA), 그리고 아르헨티나 정부를 포함하여 이러한 폭력을 옹호하는 부패한 시스템과 싸워야만 한다고 용감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합에 앞서 벨레스와 산로렌소, 양 클럽의 집행부가 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양 클럽은 시합이 있기 수 일전에 클럽의 깃발을 서로 교환하며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클럽간의 우호관계를 강조하였다. 거기에 시합 당일에는 양 팀의 선수들이 라이벌의 클럽 깃발을 치켜들고 입장하는 – 아르헨티나 리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광경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없었다. 선수들이 라이벌 클럽 깃발을 들고 입장할 때 스탠드에서 볼 수 있던 것은 상찬과 응원의 박수가 아니라 시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폭력을 쓰고 철조망을 파괴하는 원정 팬들의 모습이었다.


■ 해결책은 있는가?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축구계에서는 이것 외에 어떤 사망사건이 있었나?
 ‘라 나시온’ 지(紙)의 카를로스 벨 기자가 2009년 11월 14일에 쓴 뛰어난 기사가 있다. 루벤 칼바조라는 젊은이가 록 밴드 ‘비에하스 로커스’의 콘서트 뒤 사망한 사건에 대한 기사이다. 

 
벨레스의 홈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콘서트에서 벨레스 사르스필드의 울트라스(열광적인 서포터 그룹)가 좌석을 우선 확보할 수 있게 해당 지역경찰(제44분서)에서 편의를 봐 주었다. 칼바조의 죽음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 셀레스의 울트라스와 일반인 관객간에 좌석 다툼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저 지역 경찰. 즉 제44분서의 이름을 기억하길 바란다.

 아라모조의 사망판결에는 그 후 목격자가 나타났다. 후안 카브레라라는 남성이 파트리시오 루고네스 검사에게 진술한 증언은 다음과 같은 공식기록이 되어 남아있다. 아라마조가 스타디움에 입장할 때 받는 소지품 검사에서 경찰(이 경찰도 제44분서 소속)과 다툼이 일으났다. 처음엔 반항하던 아라마조는 도망을 쳤고 그 아라마조를 추격한 경찰은 럭비와 같은 태클로 덮쳤다. 거기에 다섯 명의 경관이 달려들어 겨우 잡았는데 아라마조는 잡힐 때 얼굴에 강한 충격을 입었다. 2명의 경관이 무릎으로 등을 눌러 제압하였고 그래도 몸부림 치는 아라마조의 음낭을 강하게 잡아 구속. 하지만 별 혐의가 없었기에 석방되었지만 아라마조는 다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길 옆에 주저앉았다. 그 뒤 그곳을 지나치던 다른 경관이 쓰러져있던 아라마조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지만 그때 이미 아라마조는 죽어있었다고 한다.

 소속경관이 이러한 중대한 사건을 일으킨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제44분서에 대해, 아르헨티나 정부의 닐다 가레(Nilda_Garré) 국방장관은 국가헌병대에게 조사할 것을 명령하였다.

 폭력과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경관의 어려움 그리고 그런 경관들의 행동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고려한 뒤 아르헨티나 축구계에 질문을 던진다. 축구를 보러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일반 시민이 현 상태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일까? 어떠한 권력기관도 이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축구를 구하자’와 같은 NGO, 미디어, 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일부 클럽의 임원만이 사태해결을 위한 노력의 전부인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과격 서포터즈 그룹인 울트라스와 싸울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256명이라는 아르헨티나 축구계의 희생자 수는 또다시 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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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ews.blog.ocn.ne.jp/column/soccer110311_1_1.html
인터뷰어: 콘체토 만니지
저작권자: OCN 스포츠

2011년 2월 9일 포르투갈과의 친선전에서 하비에르 파스토레(왼쪽 23번).

많은 빅 클럽들이 팔레르모에서 계속 성장 중인 신예 하베에르 파스토레에게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다”는 파스토레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잊지 않고 팔레르모를 위해서 플레이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축구에 몰두한다.


- 우선은 가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을 위해서 가족 전부가 팔레르모로 이사 왔다고 하더군요.

맞아.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전부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이야. 내가 볼을 차기 시작했을 때부터 계속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의 귀중한 시간을 날 위해 희생시키며 내가 축구 할 수 있게 해 주었어. 부모님의 은혜는 어떻게 다 갚을 수가 없지. 가족들 덕분에 나는 이탈리아에 와서 고독을 느끼는 일 없이 축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질 수 있었지.

- 이탈리아에 와서 1년 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곧바로 레귤러 멤버에 정착하여 주력으로 팀을 이끌고 있고, 지금은 팔레르모의 리더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축구선수로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연습밖에 없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열심히 연습해 온 결과가 지금의 나야. 물론 앞으로도 더욱 성장하고 싶어. 항상 ‘좀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생의 즐거움은 축구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축구에 몰두하지 않으면 참된 성장을 할 수 없지. 때문에 연습을 대충한 적이 없어.

- 팔레르모의 회장에게는 유럽의 빅 클럽들에게서 많은 오퍼가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여기서 쾌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어. 팔레르모에서 플레이 하는 것도 만족하고 있지. 때문에 이적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이 팀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기에 그 속에서 나도 성장할 수가 있는 거야. 내가 그렇게 평가 받게 된 것도 팔레르모 덕분이지. 그런 팀에서 굳이 나갈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 안 해.

- 그래도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는 빅 클럽에서 당신에게 러브 콜을 보낸다면 ‘노’라고 말하기 힘들지 않나요?

 음… 내 거취에 대한 뉴스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의 영역에 지나지 않으니까. 구체적인 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야. 어쩌면 올 시즌이 끝나고 그런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 그때까지 많은 시합이 있어. 우선은 그런 시합에서 최선을 다 할 생각이야. 이적 때문에 플레이에 집중할 수 없어서는 안 되니까.

- 하지만 이적 소문이 나오는 것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으시죠?

 그렇지. 축구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레벨의 빅 클럽에서 플레이 하는 것을 꿈꾸는 법이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빅 클럽이 정말 나를 좋게 평가해주고 획득하고자 한다면 그건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단지 앞서 말했듯이 팔레르모는 굉장히 좋은 곳이야. 지금은 팔레르모에서 최고의 결과를 남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

- 참파리니 회장과의 관계는?

내가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부터 전화를 걸어 오거나 했기에 굉장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확실해. 이탈리아에 와서도 여전히 나를 귀여워해 주지. 연습 용 운동화를 사러 가는데 일부러 함께 가 준 적도 있었어. 보통 다른 클럽의 회장이라면 그렇게까지는 해주지 않을걸?

- 참파리니 회장은 ‘성질 급하고 화를 잘 낸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가 보군요.

 그건 주위에서 지들 맘대로 만든 이미지지. 선수들에게는 언제나 친절하며 우리들의 요구도 될 수 있는 한 응해주려고 노력해. 틈만 나면 연습도 보러 오지. 우리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그리고 열심히 지켜보는 느낌이야. 최고의 회장임과 동시에 굉장히 멋진 인물이라고 생각해.

감독에게 혼나더라도 힐킥을 노린다.


- 2009년 여름. 팔레르모에 가입했을 때 당신은 유럽에서 거의 무명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놀랄 만큼 빨리 이탈리아 축구에 적응하였습니다. 이것에는 어떤 비밀이 있나요?

나 스스로도 이렇게 빨리 이탈리아 축구에 적응한 것에 놀라고 있어. 우선 꼽을 수 있는 요인이라면 역시 팔레르모의 환경이지. 어린 선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팀이야. 실제로 이 팀에는 많은 어린 선수가 레귤러로 활약하고 있어. 많은 어린 선수들을 경험 풍부한 베테랑들이 받쳐주는 형태로 팀이 움직이고 있지. 마치 내가 예전에 플레이 했던 CA 우라칸과 같은 느낌이야. 여기에서는 젊은 선수가 맘껏 플레이 할 수 있어. 물론 잘 못하면 팬들이 야유를 보내기는 하지만 선수를 위축시키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적당한 향상심을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감독의 존재도 커. (델리오) 로시 감독은 그야말로 스승이지.

- 하지만 당신은 그 로시 감독에게 때때로 힐킥을 하지 말라며 혼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나는 힐킥으로 플레이의 리듬을 바꾸려고 하지만 감독은 그런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봐. 하지만 힐로 패스가 이어지면 공격을 빠르게 변화시킬 수가 있으며, 단번에 상대 수비라인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 (요십) 이리치치[각주:1]나, (아벨) 에르난데스[각주:2]는 순간적으로 내 의도를 파악해서 움직여 주거든. 내 힐킥 한번에 그들이 GK와 1대1 상황이 되는 일도 많지. 때문에 감독이 바라는 플레이는 아니지만 나는 힐킥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로시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 지난 시즌엔 언제나 팀 연습이 끝난 뒤 개인 연습을 함께 해 주었지. 시합의 흐름 속에서 빈 공간을 발견하는 방법이나 체력의 소모를 피하면서 중반을 지원하는 방법은 로시에게 배운 것이야. 특히 전술면에서 그에게 배운 것은 셀 수 없이 많아.

- 월드컵에 참가한 것도 당신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나요?

확실히 아르헨티나의 일원으로서 월드컵에서 플레이 한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지. 필드 안팎에서 월드컵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커다란 플러스가 되었지. 나는 월드컵 직전의 시즌을 팔레르모에서 레귤러로 플레이 하였고 어느 정도는 실적도 쌓았지. 그렇게 얻은 자신감을 남아프리카에서 더욱 크게 만든 것은 확실하지.

- 당신과 같은 아르헨티나의 어린 선수에게 디에고 마라도나는 어떤 존재인가요?

그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에게 있어 ‘모든 것’,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지. 축구계의 No.1이야. 때문에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들에게는 커다란 자극이 되었어. 아르헨티나 국민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디에고의 말을 무시하지는 못해. 합숙 중에 처음으로 ‘너는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흥분은 말로는 표현 못 해.

- 마라도나뿐만이 아닙니다. 리오넬 메시도 언제나 당신을 절찬합니다. ‘엄청난 장래성을 느낀다’고 하거나 ‘굉장히 상성이 좋다’라거나.

메시는 위대한 FW이며 위대한 프로페셔널이야.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멋지지. 그와 함께 플레이 하고 싶지 않은 선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 그렇다면 메시와 함께 플레이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는 것도 있을 수 있겠군요.

언젠가 클럽에서 메시와 함께 플레이 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 것인지, 어떤 팀에서인지는 알 수가 없어. 현시점에서 나는 팔레르모의 선수이며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선수야. 미래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 중 어떤 것이 현실이 되는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니까. 미래는 내다 볼 수 없는 법이지. 무엇보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메시와 내가 함께 플레이 할 거라고는 나 역시 상상도 못했으니까(웃음)

- 메시는 당신과의 플레이를 굉장히 즐거워하는 것 같더군요. 당신은 메시와의 호흡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메시 정도의 선수라면 함께 플레이 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 어쨌든 굉장한 선수니까. 하지만 위닝 일레븐이라면 질 것 같지가 않아. 몇 번이나 대전하였는데 단 한번도 진 적이 없거든(웃음)



  1. Josip Iličić. [본문으로]
  2. Abel Mathías Hernández Platero.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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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809/other/text/200812290012-spnavi.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 3팀에 의한 플레이오프 끝에 우승


[보카 주니어스는 플레이오프 끝에 2008년 전기리그를 제패하였다]

 아르헨티나 리그의 2008년은 12월 23일 보카 주니어스가 새로운 영광을 손에 넣으며 막을 내렸다. 3팀에 의한 플레이오프라는 역사에 남을 격전 끝에 움켜쥔 극적인 우승이었다. 축구계에서 빛나는 역사를 가진 보카가 요 11년간 아무런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했던 적은 2002년뿐이다. 자국 리그뿐만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수다메리카나 등의 큰 무대에서 멋진 결과를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실패를 교훈 삼으며 그럴 때마다 클럽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카는 그 팬이 많음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횟수로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지만 2008년 전기 리그에서는 결코 평온함 속에 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기는 19시합을 끝낸 상태에서 산 로렌소, 보카, 티그레 3팀이 12승 3무 4패로 승점 39이어서 3팀에 의한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에 돌입(아르헨티나 리그의 정규 시즌에서 득실점차는 순위에 고려되고 있지 않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팀이 승점 3으로 동점이 되어 불과 1골의 차로 보카가 23회째의 영광을 손에 넣었다.

 우승을 결정짓는 3팀에 의한 미니 리그에서 우선 산 로렌소가 티그레(최근 승격한 팀으로 1부에 참전한지 이제 2년째이다)에 2-1로 승리하였다. 이어서 보카가 산 로렌소에 3-1로 승리. 보카의 우승은 너무도 쉬운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보카가 티그레에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1점차로 지더라도 득실점차에서 챔피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카는 티그레에 0-1로 패하여 우승을 손에 넣은 것인데 타이틀을 다른 팀에게 빼앗길 위기도 있었다. 67분에 실점하였을 때 상대 선수와 맞부딪친 젊은 GK 하비에르 가르시아(Javier Hernán García)가 부상으로 떠남으로 해서, 이 큰 무대가 데뷔전이 되는 약관 20살의 호수에 아얄라(Josué Ayala)가 교체 출장하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공세를 거듭하는 티그레에 보카도 반격. 결국 0-1인 채 시간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려 보카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 만신창이인 상태로 움켜쥔 영광

 최종적으로는 우승하였다고는 하지만 올 시즌 보카가 고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제일 먼저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캡틴이며 에이스 FW인 마르틴 팔레르모(Martín Palermo)의 부재이다. 1930년대에 활약했던 프란시스코 바라요(Francisco Varallo - 현재도 살아있다[각주:1])의 보카의 역대 최다 골 기록[각주:2]을 갱신한 스트라이커는 8월 24일 CA 라누스와의 시합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를 다쳐 장기간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또한 팔레르모와 짝을 이루며 국내에서는 베스트 FW라고도 말할 수 있는 로드리고 팔라시오(Rodrigo Palacio)도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예전 리버풀에서 뛰었던[각주:3] CB 가브리엘 팔레타(Gabriel Paletta), 퍼스트 GK인 마우리시오 카란타(Mauricio Caranta)는 감독인 카를로스 이스치아(Carlos Ischia)와 논쟁을 벌인 끝에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더욱이 경험 풍부한 SB인 우고 이바라(Hugo Ibarra)와 클라우디오 모렐 로드리게스(Claudio Morel Rodríguez)도 부상당해버렸다.

 그래서 보카는 새로운 인재를 발굴했다. 유스 팀에서 21살의 GK 가르시아, 20살의 DF 후안 포를린(예전 레알 마드리드B에 소속[각주:4]해 있었다), 21살의 DF 파쿤도 롱카글리아(Facundo Roncaglia), 22살의 볼란치인 크리스티안 마누엘 차베스(Cristian Manuel Chávez) 그리고 앞 선에는 21살의 두 공격수 리카르도 노이르(Ricardo Noir)와 놀랄만한 득점감각을 갖춘 루카스 비아트리(Lucas Viatri)를 승격시킨 것이다. 그들은 주력선수들의 포지션을 빼앗을 정도로 성장하여 팀 승리에 공헌하였다.

■ 1998년부터 시작된 팀 개혁

 
[팬들의 존재는 보카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예전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랜 기간 트로피에서 멀어져 있던 보카는 이 해에 새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미디어에 이용당하고 있던 팀을 해체하고 선수나 감독을 일신했다. 당시의 보카는 ‘마라도나 2세’라 일컬어졌던[각주:5] 디에고 라토레(Diego Latorre)가 “보카는 난장판이다”고 말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새로운 지휘관으로 카를로스 비안치[각주:6]가 취임하면서 보카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시작으로 한 수많은 영광을 획득하게 된다.

 1995년에 회장에 선출된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 현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장을 맡고 있다)는 어떻게 하면 팀을 재건할 수 있는지 몰랐다. 카를로스 빌라르도[각주:7]에 이어서 엑토르 베이라[각주:8]를 감독에 앉힌 것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98년 마크리는 팀을 프로페셔널 집단으로 하기 위해서 비안치를 초빙하였고 동시에 하부조직의 충실을 꾀했다. 또한 보카는 유소년을 위해 ‘클럽 파르케(Club Social y Deportivo Parque)’와 협력체제를 확립하였고 현재는 하부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큰 선수로는 레돈도(Fernando Redondo), 소린(Juan Pablo Sorín), 리켈메, 가고, 테베스 등 쟁쟁한 면면들이다.

 예전 보카는 선수들을 사 모으는 측이었다. 그러나 마크리는'”10년 안에 11명 중 9명은 클럽 토박이 선수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 당시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평정을 되찾은 팀은 승리를 거듭하며 클럽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 라이벌 리베르의 존재.

 보카는 개혁 이후 국내에서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4번, 토요타 컵(현 클럽월드컵)을 2번 제패했다. 또한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2번, 레코파 수다메리카나[각주:9]에서도 3번 우승하였다. 이것은 전부 1998년 이후에 획득한 타이틀이다. 아르헨티나, 남미대륙 거기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선수들 대부분은 자신의 가치를 높여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페르난도 가고(레알 마드리드), 에베르 바네가(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에밀리아노 인수아(Emiliano Insúa, 리버풀), 오스칼 트레호(Oscar Trejo, 마요르카), 세바스티안 나야르(Sebastián Nayar, 레크레아티보), 파비안 몬손(Luciano Fabián Monzón, 베티스), 카를로스 테베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현재 보루시아 MG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FW 로베르토 콜라우티(Roberto Colautti)도 보카의 유스 출신이다.

 한편 보카는 하부조직의 선수육성만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으로 보낸 클럽을 상징하는 선수들을 몇 년인가 후에 다시 불러들임으로 인해 팀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 세바스티안 바타글리아(Sebastián Battaglia, 전 비야레알), 후안 로만 리켈메(바르셀로나, 전 비야레알), 우고 이바라(FC 포르투, 모나코, 에스파뇰), 팔레르모(비야레알, 베티스, 알라베스) 등의 면면들이다. 또한 보카는 ‘등번호 12’로 알려진 가장 잔소리가 심한 팬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거대한 깃발을 휘날리며 팀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보켄세[각주:10](보카의 팬)에게 있어 2008년 전기 리그 우승은 특별한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팀 우승은 물론이거니와 최대의 라이벌인 리버플레이트(리베르)가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최하위로 떨어진 것이다. 1931년 프로 리그화된 이후 리그 우승회수를 따지면 23번의 보카에 비해 리베르는 국내 최다인 33회를 자랑한다(국제 타이틀까지 포함하면 보카는 리베르를 크게 앞서고 있다). 2008년 후기 리그에서는 리베르에 우승을 허용하여 2위로 마쳤던 만큼 그 반년 후에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였기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베르가 곧바로 2부로 강등당하지는 않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과거 3년(전기, 후기 3대회 씩)의 성적에서 평균값을 산출하여 하위 2팀이 강등당하기 때문이다(17, 18위 팀은 교체전을 행하게 된다).

  1. 1910년 2월 5일생. [본문으로]
  2. 194골. 보카의 아마 시절까지 포함하면 로베르토 체로(Roberto Cherro)의 221골. [본문으로]
  3. 2006-2007시즌 3경기 출장. [본문으로]
  4. 2007년. [본문으로]
  5. 이 선수가 처음으로 '마라도나2세(New Maradona 혹은 New Diego)'라고 불렸다. [본문으로]
  6. 현재는 보카의 GM [본문으로]
  7. Carlos Bilardo. 그는 1983~1990년까지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이다. 월드컵 우승 1회, 준우승 1회. 1996년 보카 감독으로 당시 리그 5위. [본문으로]
  8. Héctor Veira - 1996~1998의 감독. 리그 순위는 각각 9위, 2위, 6위. [본문으로]
  9. Recopa Sudamericana.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수다메리카나의 우승팀이 격돌하는 UEFA의 슈퍼컵과 같은 대회이다. [본문으로]
  10. 철자는 boquense....굳이 각주를 단 이유는....철자 찾기 힘들었거든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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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an Glanville

일본어 번역: Katsumi Hond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 [스포츠 20세기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이 스트라이커는 틀림없이 축구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성된 선수 중의 한 명이다.

 그는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볼 컨트롤은 선수 생활 말년까지 여전하였다. 빠른 스피드와 경이적인 스태미나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뛰어다니며 그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파괴적인 오른 발, 공중전에서의 능력, 킬러패스를 만들어 내는 후각, 신출귀몰함 등 그는 혼자서 토탈 사커를 보여주었다.

 자신 진영 골문 앞에 갑자기 나타나 상대의 공격을 막고서는 곧바로 볼을 능숙히 다루어 상대 골 앞까지 운반하였다.

 장신[각주:1]에 두꺼운 갑빠와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은 이탈리아 카프리에서의 이주민으로 리버 플레이트에서 플레이 했었다. 알프레드 자신도 16살에 이 클럽에 가입하여 한 번 우라칸(Club Atlético Huracán)에 임대되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1947년에는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로써 7시합에 플레이 하여 얼마나 많은 대표팀 출장 회수를 늘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지만, 준비되어 있던 운명은 달랐다.

 1949년에 같은 세대의 뛰어난 스트라이커 아돌포 페데르네라(Adolfo Pedernera)나 다른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콜롬비아로 건너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말을 바꾸면 나라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FIFA에 가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적료를 제시할 수 있어 원하는 대로 선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디 스테파노는 보고타의 미요나리오스(El Club Deportivo Los Millonarios)에 입단하였다. 그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 귀국하는 일은 있어도 플레이 하지는 않았다. 그를 시작으로 많은 뛰어난 선수들을 잃은 것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아르헨티나가 출전할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53년에는 콜롬비아에서의 모험도 끝을 맞이한다.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가 아닌 에스파냐를 선택하자 영원의 라이벌인 두 빅 클럽 -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그와의 계약을 위해서 다투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의 소유권을 가진 리버 플레이트에게 당시로써는 거금인 3만 4000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했지만 간단히 해결되지 않아 결국 에스파냐 축구 협회가 중재에 들어가 양 클럽이 그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1년마다 팀을 옮기기로 하여 첫해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권리가 주어졌지만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플레이 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에게 있어서는 잊기 힘든 후회로 남았다.

 그의 활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에스파냐 리그에서 8번, 컵에서는 1번 우승했다. 에스파냐의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새로운 모국의 대표로써 31시합에 플레이 하였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와 같이 넘치는 힘과 통솔력은 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전혀 활약하지 못했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태평양 연안의 비냐 델 마르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의 호텔에 에스파냐 대표팀이 머물고 있었기에 필자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부친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부친은 마사지 약을 가지고 와 있었다. “이것을 써서 치료하라고 녀석에게 말했지만……” 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들은 이젠 저 악독한 아르헨티나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각주:2]) 감독을 위해서 플레이 할 생각이 없다”……고. 바르셀로나와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성공하여 유명한 에레라는 거만한 권위주의자였다. 지배욕이 강한 디 스테파노는 라이벌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 후 두 슈퍼스타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였다. 한 사람은 우승한 브라질의 중반을 떠받쳤던 흑인 지지[각주:3]이고 또 한 사람은 스웨덴의 젊은 스트라이커 앙네 시몬손(Agne Simonsson). 그러나 둘 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디 스테파노가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지휘대 위에 누구도 올라서지 못하게 하였다. 지지는 굴욕적인 시즌을 보내는 동안 제대로 볼도 차지 못한 채 빛나는 경력을 되찾기 위해서 모국으로 돌아가 1962년 월드컵에서 2번째 우승을 이룩하게 된다.

 헝가리에서 망명해 온 푸슈카시(Puskás Ferenc)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확실히 그때까지 그는 헝가리 대표팀의 주장으로 팀을 통솔해 왔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현실적인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디 스테파노가 왕이었다.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득점왕 경쟁을 하던 둘은 같은 골 수로 마지막 시합을 치르게 되었고, 푸슈카시는 득점을 올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디 스테파노에게 패스를 하여 골을 선물했다. 이리하여 둘의 파트너십은 더욱 강고해 졌다고 한다[각주:4].

 그들은 1960년 챔피언스컵 결승 아이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시합에서 둘이서 7골을 넣었다[각주:5].

 1962년 벤피카와의 시합에서 푸슈카시는 3골을 넣었는데, 그 중 1골은 디 스테파노에게서의 멋진 스루패스로 인한 것이었다[각주:6].

 푸슈카시 이전에 또 한 사람의 세계적인 선수가 디 스테파노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몽 코파(Raymond Kopaszewski)다. 1956년 5월 파리에서 행해진 제1회 챔피언스컵 결승에서 코파도 또한 팀을 지배했다. 랭스에서 코파는 디 스테파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 최초의 결승전에서 4-3으로 승리하였는데, 디 스테파노는 자기 진영에서 출발하여 혼자서 골을 넣는 항상 볼 수 있었던 형식으로 골을 넣었다. 코파는 이 때 이미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에 합의하고 있었지만 이런 완벽한 팀에 어째서 자신이 필요한지를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코파는 오른쪽 윙으로써 명성을 날렸지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게임메이커로 활약하여 프랑스를 3위로 이끌었다.

 디 스테파노는 챔피언스컵에서 비할 대 없는 활약을 보여 58시합[각주:7]에서 49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 중 7골은 결승전에서 기록한 것이었다.

 1964년에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결별하여 바르셀로나의 작은 클럽 에스파뇰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다. 그 후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감독으로써도 성공한다.

 하지만 선수로써 보여준 눈부신 광채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Alfredo Di Stefano/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26년 7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바라카스에서 태어났다. 17살에 리버 플레이트의 톱 팀에 데뷔. 처음엔 오른쪽 윙이었지만 우라칸에 임대되어 스트라이커가 되었고,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하여 [라 마키나[각주:8]]라 불리는 유명한 공격 라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 1947년에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선출되었다. 그 후 1949년에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보고타’로 이적, 4시즌 동안 대활약[각주:9]한 후, 에스파냐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유럽 챔피언스컵 5년 연속 제패[각주:10]에 공헌한다. 스트라이커이면서 포지션은 유동적으로 드리블, 슛, 패스 능력을 모두 구사하여 올라운드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 후 에스파냐 대표팀에서도 플레이 했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 결국 본선에서 출장하지 못하였다.(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 178cm. 이 키는 당시로써는 큰 키였었다. [본문으로]
  2. 세리에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카테나치오 전술을 확립한 전설적인 감독 [본문으로]
  3. 애칭 Didi로 풀 네임은 Valdir Pereira [본문으로]
  4. 아마 푸슈카시가 레알 마드리드 입단 첫해인 1958~59 시즌의 이야기 같다. 스테파노 23골, 푸슈카시 21골. 이 시즌 말고는 둘의 골 수에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5. 시합은 7-3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 디 스테파노: 27분, 30분, 73분. 푸슈카시: 46분, 56분, 60분, 71분. [본문으로]
  6. 3-5로 패하여 벤피카의 우승. 당시 에우제비우가 3-3 동점 상황에서 쐐기골이 되는 두 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 [본문으로]
  7. 기록에 따라서는 60시합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La Máquina, ‘기계’라는 뜻 [본문으로]
  9. 292시합 출장하여 269골 [본문으로]
  10. 1955년 ~ 1560년까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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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umber.goo.ne.jp/soccer/world/europe/20080129-1-1.html

저자: 스즈이토모히코



<허가받지 않은 여행으로 크게 꾸중들은 메시>


시합 후의 휴일이라고는 하여도 리허빌리 중에 메시가 카타르에 개인 여행을 떠난 것에는뭔가 냄새가 난다. 겉으로는 카타르의 내셔널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하였다고 하지만 실은 다른 클럽과 교섭을하고 있었다면?

예를 들면 마라도나를 FC 바르셀로나에서 빼돌려 황금시대를 구축했던 나폴리가 이번엔 메시를 노리고 있다면? 더구나 디에고 마라도나까지 거기에 관여되어 있고, 석유왕이 큰 돈을준비하고 있거나 한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소문이지만말도 안 되는 억측일 것이다.

하지만 클럽의 허가도받지 않고 무단으로 7시간이나 플라이트.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면좋을지…… 크라위프도 화내고 있습니다.

벌금 메겨!!” 라며……

발렌시아도 수수께끼투성이다.

카니사레스와 알벨다가쿠만 감독에게서 갑작스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올 시즌은 더 이상 벤치에도 앉히지 않겠다니까 놀랄따름이다. 이대로는 연습생과 마찬가지.

이유를 원했지만 설명도해주지 않았다고 알벨다는 목을 갸우뚱하였고, “클럽에서나가는 것도 어려워서……”라며 카니사레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팀을 젊게 하기 위한수단이라는 것만으로는 누구도 납득하지 않는다. 에스파냐 대표였던 알벨다도 이 상태로는 유로 2008에 참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도 냄새가 난다.

문제는 돈인가? 솔레르 회장이 높은 급료를 받는 둘을 버렸다는 것일까?

확실히 모르겠다.

왠지 최근은 이렇게어딘가 수상한 뉴스들만이 어지럽게 날라다니고 있는 에스파냐다.

그렇다면 레알 마드리드는아무 소문도 없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코파 델 레이에서 마요르카에게 2패를 하여 16강에서 패퇴. 이미냄새가 난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더비에서 승리하여 리그 1위를달리고 있지만 이 독주 상태야 말로 [위험]인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의통계이지만 터닝 포인트 지점에서 1위였던 클럽이 그대로 우승까지 도착했던 케이스는 7시즌에 2번밖에 없다.

03-04 시즌이 좋은예일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봄까지 승점으로 8P 차이를두고 있던 2위 발렌시아에게 우승을 빼앗겼다. 멀리 갈 것도없이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도 최후의 최후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당하여 악몽을 맛보았다.

[겨울의 승자가 리그를제패한다]라는 대사도 예전엔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반전에너무 무리하여 후반에 헥헥댄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 있다.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가 2위인 FC 바르셀로나에게 7P 차이를두고 있어도 아직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크라위프의 역린을 건드린 메시도 말했다.

지난 시즌처럼 그들이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들을 제칠 수 있다. 올 시즌도전설은 만들어 지는가?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는,마지막에 전설을 만들었지만 결말은 슬펐다. 하지만 뭐 에스파냐 리그도 해피엔드가 아닌 편이재미있다. 올 시즌은 지금까지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온 것도 있으니.

한가지 더.

에스파냐적인 뜬소문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세리에 A의 리보르노에서 약 1년 만에 골을 넣어 부활의 조짐을 보여준 디에고트리스탄에 대한 것인데, 에스파냐에서 그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세비야 출신으로 안달루시아의 피가 흐르는 트리스탄은 도박을 굉장히 좋아했다.2002년 한일 월드컵 에스파냐 10번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뒷세계의 도박에 손을 대었다가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십억이라는 빚을 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천지 이탈리아에서 또다시 큰 거 하나터뜨렸다고.

계속해서 생겨나는 여러가지뜬소문이 에스파냐 축구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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