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90409_1_1.html
저자: 조나단 윌슨

잉글랜드의 축구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이렇게까지 주목을 끄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에는 현지기자 조나단 윌슨이 직접 경험한 것들을 섞어가며 해설. 축구 인기 정착의 배경부터 바탕에 깔린 것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를 깊이 파고들어 보자.

‘예배’보다 ‘관전’이 자리잡은 풍토


축구는 낚시와 달리기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3번째로 경기인구가 많은 스포츠이며 팀 스포츠로써는 단독 1위이다. 또한 관전 스포츠로써도 그레이하운드 레이스(멍멍이 경주)나 경마를 제치고 수십 년간 톱을 유지하고 있다.

관전빈도에 관해서 경이적인 자료가 있다. 경건한 기독교 신도가 많은 잉글랜드이지만 성인남성에 있어서는 어느 통계를 보더라도 교회에 가는 횟수보다 축구관전을 하러 가는 횟수 쪽이 더 많은 것이다. 거기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지면의 대부분도 축구가 차지하고 있어 다른 스포츠를 전부 합치더라도 축구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취급하고 있다. 스포츠 뉴스에서 축구가 제일 앞머리에 나오지 않는 때는 올림픽 기간 중이나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중대한 뉴스가 생겼을 때 정도이다.

당연히 특별한 인기가 있는 만큼 그 주변에서 움직이는 돈도 자릿수가 다르다. 축구 톱 플레이어의 연봉은 500만 파운드를 가볍게 넘기는데 이는 영국에서 비슷하게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크리켓 톱 플레이어보다 10배 이상 많다. 또한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된 클럽의 연간 수익은 스폰서료나 티켓요금, 텔레비전 방영권을 합쳐 5000만 파운드가 넘는다.

잉글랜드의 축구는 스포츠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하나의 커다란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남미에서는 ‘축구가 생활의 일부’인 나라가 몇 개있지만 유럽에서는 드물다. 거기에 축구를 둘러싼 금전에 관해서는 남미와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잉글랜드에서 이렇게까지 축구가 주목을 모으는가? 이번엔 ‘종주국’의 축구 인기 이유를 파헤쳐 보자.

간단한 규칙으로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축구를 즐기는 경기인구수가 많은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예전보다 복잡해졌다고는 해도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다. 럭비나 크리켓에 비해서 룰도 익히기 쉬우며 어린이라도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플레이에 필요한 도구도 거의 없다. 공원이나  빈터, 주차장 등 어디서건 가능하다. 높은 보급률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축구는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다. 초짜라면 크리켓의 보울러(야구의 투수와 같은 역할을 담당)같이 빠른 공을 던지는 것도 불가능하며, 럭비에서 몇 명을 쓰러뜨려 가며 트라이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축구에서는 쌩초짜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골을 넣을 수 있다. 조기축구에 참가한 여성이나 아이가 이외의 활약을 보이는 장면은 누구나가 한번 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축구의 큰 매력이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도 예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드윈 판데르사르에게서 골을 빼앗은 경험이 있다. 축구선수로서는 최저레벨인 필자이지만 아디다스의 이벤트에 참가했을 때 유벤투스의 알렉산드로 델피에로와 절묘한 호흡을 발휘하면 저 위대한 GK가 지키는 골문을 뚫은 것이다. 이는 지금도 필자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최고의 추억이다. 축구 경험자라면 필시 이와 같은 인상적인 경험을 몇 개정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경기인구수의 많음에 더하여 또 하나 축구를 인기 스포츠로 만든 이유가 있다. 그것은 100년 넘게 국민이 축구에 심취해 온 역사이다.

부친이 매주 축구를 보고 있으면 아이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활의 일부가 된다. 잉글랜드에서는 각 가정에 5~6대의 전세대부터 축구관전이라는 풍습이 정착되어 있다. 물론 필자의 가족도 그 중 하나이다.

필자의 부친이 큰 수술을 받기에 최근 필자는 런던을 떠나 고향인 선덜랜드로 돌아와 완치될 때까지 간병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선덜랜드의 홈 게임을 관객석에서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필자는 새삼 축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실감하게 되었다.

시합 전 퍼브에서 옛 친구와 재회했을 때 우선 느낀 것은 친구도 포함하여 그 장소에 있던 모두가 축구에 대해서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선덜랜드의 인구는 25만인데 1시합 관전에 모여드는 팬은 4만. 전 시민의 약 1/8이 스타디움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퍼브에 오는 녀석들이라면 열렬한 지지자이지 아닐 턱이 없다.

필자는 5살 때 부친에게 이끌려 처음으로 축구를 관전했다. 그로부터 14살이 될 때까지 매 시즌 6번 정도는 선덜랜드의 본거지로 돌격했다. 그 후에는 친구들과 보러 가게 되어 어느 샌가 홈 게임은 빼놓지 않고 관전하게 되었다. 더해서 선덜랜드의 홈 시합과 겹치지 않는 옆 마을 뉴캐슬의 시합도 보러 가게 되었다.

이렇게 많이 시합을 보러 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입장료가 굉장히 쌌기 때문이다. 아이라면 2파운드 50펜스였기에 지금 15파운드의 약 1/6로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선덜랜드는 다음 시즌 입장료를 인하하기로 결정하여 16살 이하의 아이는 어른과 함께라면 1파운드로 관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정말 기쁜 뉴스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많은 아이들에게 있어 자주적으로 축구 관전을 하러 가는 것은 음주나 직업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기 위한 ‘성인식’과 같은 것이다. 어느 지역에건 축구 클럽이 하나는 있기에 한 번도 축구를 보러 간 적이 없는 아이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 ‘성인식’은 지금도 변함없이 행해지고 있다.

노동자층을 포로로 만든 19세기 유일의 오락


새삼스럽겠지만 여기서 축구가 잉글랜드에 정착된 경위를 설명해 본다.
축구가 프로 스포츠화 되어 내셔널 리그가 탄생된 1888년은 잉글랜드의 주요 산업인 광업과 조선업의 노동조건이 개혁된 시기이기도 하다. 토요일은 하루의 반만 일하는 것으로 의결되어 오후는 휴업이 의무화되었다. 거기에 일요일은 교회의 예배가 있기 때문에 축구는 국민들이 한가한 시간으로 여겨지는 토요일 오후에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다른 스포츠 등의 오락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이 시대에 일에서 해방된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축구로 눈을 돌리게 되어 어느 샌가 축구관전이 생활화되었다. 물론 이것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음주(예전엔 끽연도)가 자유라는 것도 있어 스타디움은 청년남성들에게 있어 좋은 사교장이 되었다. 또한 상대 팀이나 심판에 대해서 맘껏 야유를 보낼 수 있는 것도 평소의 스트레스를 발산하기에 바라 마지 않던 환경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거기에 선수와의 거리감도 현재와 비교하여 굉장히 가까웠기에 팬은 자기 지역 팀에 대해서 각별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노동자에게 있어 얼마나 축구가 중요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례로도 알 수 있다. 1933년 FA컵 5회전, 선덜랜드 vs. 더비. 수요일에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스탠드에 몰린 팬은 7만5000명 이상. 어떻게 평일에 이렇게 많은 관객이 몰릴 수 있었을까?
실은 선덜랜드의 탄광이나 조선소가 다 함께 임시휴업을 하여 그 주의 토요일에 일하기로 조정한 것이다. 이 시기는 대공황으로 인해 노동자가 절대 약자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노동시간의 변경이라는 ‘폭거’에 나서 스타디움으로 달려간 것이다.

잉글랜드 국민에게는 인생의 ‘필수품’


축구는 우리들 잉글랜드 국민에게 있어 사회적 문화이다. 탄광이나 조선소에서 5일간 일한 뒤 맥주를 마시면서 시합을 본다. 이 정형화된 사이클이 100년 이상 이어져 이제는 일상생활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생활의 리듬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어른이 되기 위한 ‘성인식’이며 동시에 부자의 인연을 깊게 하기 위한 ‘의식’이기도 하다.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폭적인 룰 변경이 없는 한, 혹은 ‘축구 버블’이 꺼져 프리미어리그 자체가 몰락하지 않는 한 팬이 축구에서 이탈하는 일은 없으며 이 사이클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참고로 필자가 몇 일전에 관전한 선덜랜드 vs. 위건의 시합(3월 14일 개최)은 1-2로 선덜랜드가 패했다. 강한 바람과 최악의 필드 상태. 선덜랜드는 뭐 하나 좋은 것 없이 홈에서 중위권 라이벌에게 패배를 당했다. 보는 사람에게 있어선 좋지 않은 뒤끝만 남은 시합이었다.

그러나 이 시합을 본 것이 손해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결과는 둘째인 것이다. 2부 강등이라도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한 시합 한 시합 즐기는데 있어 우리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친구나 이웃 혹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팀을 응원함으로써 친교를 더해가며 평소의 피로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이것이 잉글랜드 국민의 축구 관전의 진수인 것이다.

필자 자신도 오래간만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선덜랜드의 홈 스타디움)를 찾아 축구의 즐거움을 재확인하였다. 고향과의 끈이나 친구들과의 교유, 골이 들어 갔을 때의 흥분… 이런 것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역시 축구는 종교나 정치와 마찬가지로 우리 잉글랜드 국민에게 있어 인생의 ‘필수품’인 것이다.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90129_1.html
저자: 조나단 윌슨
일본어 번역: 아베 히로시 알렉살더

 30여 년 전에 잉글랜드 축구에는 4-4-2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고도로 전술이 발전함에 따라 시스템이 다양화되었다. 잉글랜드 전통의 4-4-2에 이은 새로운 유행으로써 프리미어 리그의 많은 클럽들이 4-2-3-1을 도입하고 있다.

 1970년대.
 잉글랜드에는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골을 양산한 콤비가 있었다. 리버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존 토샥(John Toshack)과 케빈 키건(Kevin Keegan)의 2톱이다.

 토샥과 키건은 1971년에 콤비를 결성하자마자 화려한 연계 플레이를 펼쳐 리버풀은 양 선수가 재적했던 6년간 3번의 리그 우승을 이룩했으며 1977년에는 유럽까지 제패했다. 그들의 플레이는 언젠가부터 ‘텔레파시로 서로 교신하는 거 아냐?’라는 말들이 나오기에 이르러 BBC가 이 ‘텔레파시 설’을 시험해 보기 위해 테스트를 하자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BBC는 어느 프로그램에 토샥과 키건을 게스트로 초대. 키건에게만 카드를 보여주고 토샥이 카드에 쓰여진 문자를 맞추는 실험을 행했는데 놀랍게도 토샥은 굉장히 높은 확률로 문자를 적중시켜 수 백만의 시청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텔레파시’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듯 했다. 그러나 20년 후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토샥이 사태의 진상을 고백했다. “실은 키건 뒤에 있던 유리에 카드의 문자가 비쳤었거든”

 이 에피소드를 이 이상 파고들어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냐 하면 당시 축구의 주역이 2톱이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70~80년대 클럽은 4-4-2를 채용하고 있었다. 리버풀의 토샥과 키건을 시작으로 80년대 리버풀을 견인했던 케니 달글리쉬이안 러쉬(Ian Rush)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마크 휴즈브라이언 맥클레어(Brian McClair) 등 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도 팬들의 관심을 주목시키는 것도 항상 앞 선의 둘 이었던 것이다.

 당시 2톱의 역할은 현대 축구만큼 복잡한 것이 아니었고 조합도 2개의 패턴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타겟맨과 피니셔의 조합. 90년대 후반에 선덜랜드를 약진시킨
나이얼 퀸(Niall Quinn)과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 첼시에서 일세를 풍미한 토레 안드레 플로(Tore André Flo) 와 잔플랑코 촐라(Gianfranco Zola)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크리에이터와 피니셔 콤비. 서두의 에피소드에 나온 토샥과 키건 외 80년대의 잉글랜드 대표팀의 2톱
피터 비어즐리(Peter Beardsley)와 게리 리네커 등을 대표적인 예로써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축구는 크게 변화하였다. 현대 축구는 당시와 비교하여 보다 치밀해지고 조직적이 되어 전술이나 시스템도 다양화. 이에 따라 FW의 역할에도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여 그 평가기준도 바뀌게 된 것이다.

4-2-3-1이 현대 축구의 주류로

 축구는 말할 것까지도 없이 누가 골을 많이 넣느냐는 다투는 스포츠다. 그러나 최근은  이기기 위한 축구보다도 지지 않기 위한 축구가 보다 중시되고 있다. 즉 득점을 올리는 방법보다도 실점을 막는 방법에 중점을 둔다. 원정에서는 어떻게든 무승부로 가져가고 홈에서 승리를 거둔다 - 요 5시즌 리그의 패자는 이렇게 타이틀을 손에 넣어왔다.

 지지 않는 축구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 받은 것이 4-2-3-1이다.
 이 시스템에는 두 가지 방법론이 있다. 하나는 4-4-2에서 FW를 1명 줄이고 수비형 MF를 투입하는 수비적인 전법. 이 전술을 채용할 때 1톱은 포스트워커 겸 피니셔라는 중요하고 어려운 역할이 주어진다.

 또 하나는 양 측면에 FW와 동등한 공격력을 갖춘 창조적인 선수를 배치하는 포진. 양 측면 MF의 전방에 공간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데 그 컨셉트는 4-3-3과 거의 마찬가지이기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수비력뿐만 아니라 공격력까지 현저히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현재 프리미어 리그에서 수위다툼을 벌이고 있는 첼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리버풀 세 팀은 이 시스템을 능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첼시는 4-2-3-1의 선구자적인 존재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 시스템을 채용한 것은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감독이 취임한 올 시즌부터. 단 2004-05 시즌부터 그 기반이 되는 4-3-3으로 시합을 해 왔기에 양 측면에 공격수를 둔 포진에는 익숙해져 있다.

 4-3-3을 도입한 것은 모리뉴 전 감독. 그는 앞 선의 3명을 공격에 전념시키고 후방 7인으로 지키는 <분업제>를 확립함으로써 성과를 올렸다. 한편 스콜라리 감독은 양 측면에 조 콜이나 데쿠 등 테크니션을 배치하는데 이는 중반의 5명을 공격에 참가시킴으로써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선택기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다. 약간의 스타일 차이는 있지만 양 시스템의 전술기반은 같다. 그들은 5년을 투자해서 성숙도를 높여 4-2-3-1을 완성의 영역까지 높인 것이다.

 단 현 포진이 최고의 전술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확실히 톱 스코얼러인 니콜라 아넬카는 전반전만으로 14골을 넣었지만 팀 성적이 동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아넬카 자신도  빅 게임에서는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볼튼 시대의 은사 샘 알라다이스는 아넬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GK와의 1대1이라면 아넬카만큼이나 뛰어난 선수가 없다. 단 그의 득점패턴은 단순하다. 상대 DF의 뒤를 노린 뿐이니까”. 그가 강호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골 앞에 밀집지대를 만들어 수비를 굳건히 하는 상대와 대전할 시는 무조건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활약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첼시가 수위로 부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아넬카 1톱 기용에 원인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칼럼에서 몇 번이나 썼던 대로 역시 디디에 드록바의 존재 없이 그들의 패권탈환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드록바는 우수한 골 사냥꾼일 뿐만 아니라 포스트 워커로서도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밀집지대에 우뚝 버티고서 아넬카 혹은 조 콜이나 데쿠가 공간을 파고든다. 이런 형태를 구축할 수 있다면 빅 게임에서도 충분히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드록바와 아넬카를 동시 기용함에 있어 어느 시스템을 채용할지 고민해야겠지만. 4-2-3-1의 [1]에 드록바, [3]의 중앙에 아넬카를 놓은 형태 혹은 4-4-2의 2톱에 둘을 배치하는 포진. 또는 4-3-3의 중앙에 드록바, 윙에 아넬카를 두는 진용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의 <공존>이 팀 부상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새로운 전술을 도입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전통의 4-4-2를 기본형으로 하면서 4-2-3-1을 옵션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패턴은 다채로워 1톱에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나 웨인 루니 혹은 카를로스 테베스를 배치. 1.5열에 루니나 라이언 긱스 양 측면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루니, 박지성 등을 기용하여 대전 상대나 상황에 따라 응용한다.

 실은 4-2-3-1을 병용하기 시작한 지난 시즌 초반에는 팬들에게서 야유에 가까운 ‘4-4-2’콜이 쏟아졌다. 그들은 2톱의 공격적인 포진을 보고 싶다고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야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왜냐하면 호날두, 루니, 테베스의 하모니가 ‘4-4-2’와 맞먹는 파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올 시즌 4-2-3-1의 버전 업을 시도하였다. 1톱에 운동량의 테베스를 대신하여 포스트 워커인 베르바토프를 기용. 베르바토프에게 조연을 맡겨 그 주변을 헤집고 다니는 호날두나 루니의 득점력을 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지금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며 옵션으로써 확립되었다고도  단정지을 수 없다. 20시합을 치르고 33이라는 득점수도 지휘관을 만족시키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바토프가 팀에 녹아 들며 생각했던 대로 활약한다면 놀랄만한 결과로 이어질 터이다. 수위 리버풀을 사정권내에 둔 지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습은 이 새로운 전술의 완성과 함께 시작될 지도 모른다.

전술의 고도화에 따라 FW의 역할이 크게 변화

 현재 4-2-3-1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리버풀이다. 지난 시즌 후반 페르난도 토레스를 1톱에, 사비 알론소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더블 볼란치에 배치하자 공격과 수비의 질이 향상. 올 시즌은 4-4-2와 4-2-3-1을 병용하여 19년 만의 리그 제패를 향해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덧붙여 말하면 그들이 기본 시스템으로 채용하는 4-4-2도 변칙 1톱이라고 볼 수도 있다. 2톱은 토레스를 전방에 로비 킨을 후방에 둔 가로가 아닌 세로 관계. 피니셔 겸 크리에이터인 토레스는 득점력과 어시스트 능력을 겸비하고 있어 1톱에 적합한 FW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킨은 수비 뒤편으로 파고드는 것을 장점으로 하는 스피드 형. 토레스가 앞 선에서 여러 가지 시도하고 틈을 노려 킨이 파고든다. 이 공격 패턴을 보는 한 1톱이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터이다.

 리그 초반 토레스가 부상을 당하고 킨의 컨디션이 나쁜 상황 하에  있으면서도 리버풀은 수위를 지켰다. 그리고 후반전 토레스의 복귀와 함께 킨도 컨디션 회복. 공격진이 제 기능을 갖춘 현재 염원인 리그 제패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4-2-3-1이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다. 2톱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30년 전을 생각해보면 커다란 변화이다. 그리고 전술이 다양화된 현대 축구에 있어서 감독이 가장 맘에 들어 하는 FW는 타겟맨, 크리에이터, 피니셔라는 3가지 역할 중 둘 이상을 가진 범용성이 높은 선수이다. 드록바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그 모든 것을 갖춘 FW라고 말할 수 있다. 2을 갖춘 선수의 대표격은 루니나 토레스 등이 아닐까?

 이렇게 둘 이상의 능력을 가진 FW가 최저 1명밖에 없으면 전술은 제 기능을 못한다. 단적으로 말해 ‘슛을 잘 차는 것만’, ‘헤딩이 강할 뿐’인 FW로는 작전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축구는 고도로 치밀한 스포츠가 된 것이다. 진짜 ‘텔레파시’라도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ps;올라오자 마자(1월 29일)에 번역했던 것이긴 한데 워낙 게을러서~

Posted by 渤海之狼
l

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81209_2.html
저자: 조나단 윌슨
일본어 번역: 아베 히로시 알렉산더

 계속해서 마구 빅 네임을 사들이면서 팀에 융화되지 못하면 사정없이 잘라버린다. – 무계획적인 선수 보강이 횡행하고 있는 작금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어린 선수 발굴과 육성에 힘을 기울이는 아스날. 그들의 강화 플랜이 이 리그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휘관의 적극적인 젊은 선수 기용

 2008년도 조금 있으면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거기서 이번엔 1년을 뒤돌아보며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뉴스를 정해보고 싶다. 독자들께서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보시길 바란다.

 이탈리아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취임인가? 9년만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럽 제패인가? 2004년 2월부터 86시합 계속되고 있던 첼시의 리그 전 홈 무패기록 스톱인가? 그 무패기록을 멈춘 리버풀의 파죽지세인가? 아니면 맨체스터 시티를 격변시킨 UAE의 투자회사 아브다비 유나이티드 그룹의 팀 매수인가? 혹은 필자가 사랑해 마지 않는 선더랜드가 28년 만에 본거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타윈 웨어 더비(Tyne-Wear Derby)편집부 주: 선더랜드와 뉴캐슬이 맞붙는 북동부 최대의 더비)에서 승리한 것일까?

 확실히 전부 이목을 끈 뉴스들이다. 그러나 축구가 가진 본래의 매력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이번 시즌 칼링 컵에서 아스날의 승승장구만큼이나 임팩트가 있는 토픽은 없지 않을까? 실력으로 판단한다면 아스날이 리그 컵에서 8강에 진출한 것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필자는 굳이 이 토픽을 거론한 것인가? 새삼스럽지만 이유를 설명하겠다.

 아스날은 3회전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6-0, 4회전에서는 위건은 3-0으로 물리치고 8강에 진출. 어느 시합이건 [아스날 다운] 빠른 패스 돌리기로 상대 수비진을 무너뜨리는 식의 스피드감 넘치는 공격 축구를 완벽히 구사하며 완봉승리를 장식했다. – 여기까지는 평상시의 아스날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2시합에서 선발 출장한 11명의 평균 연령이 20살도 안 되었다는 점이다.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시합에서 평균 연령은 19.18세이며 위건과의 시합에서는 더욱 어려져 실로 19.09세였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주중에 행해진 시합이라는 것도 있어 위건의 모티베이션이 낮았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단지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영 아스날]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았다.

 아스날을 이끄는 아르센 벵거는 말한다.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30살을 넘은 베테랑보다 어린 선수를 기용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더욱 큰 성장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일반적으로 출전시킨 어린 선수의 실수로 패하면 비판의 창 끝은 기용한 지휘관에게 향한다. 그런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감독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벵거는 주저하는 일 없이 어린 선수를 기용한다.

 지휘관은 계속해서 말한다. “어린 선수는 자신의 표현방법을 알고 있다. 자유로운 발상에서 나오는 플레이는 어 리면 어릴 수록 표현하기 쉽다”. 뒤집어 말하면 베테랑이 될 수록 주위의 평가나 계약 문제 등에 신경을 쓰는 나머지 실패를 두려워하며 방어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 벵거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를 경험해야만 선수는 성장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벵거는 어린 선수 기용의 장점을 알면서도 리그의 시합에서는 정기적으로 기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로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선수는 몸과 마음 둘 다 지구력 부족]이라는 것이다. 벵거는 유스 팀에도 톱 팀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기교에 바탕을 둔 빠른 패스 돌리기 기반의 게임 진행을 부과하고 있다. 그 결과 아스날의 어린 선수는 톱 팀에 승격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주저 없이 실행에 옮기며, 팀으로서는 누가 출장하건 전술에 흔들림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높은 레벨의 플레이를 1시즌간 계속해서 실행할 수 있는가?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컵 대회와 같이 2, 3주마다 톱 레벨의 팀과 싸우는 것이라면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단지 선수는 아직 20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 3일마다 싸우는 피지컬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더욱이 멘탈 면에서 미숙한 부분도 많다. 벵거는 <무리한 기용>으로 인해 그들 선수 생명이 위험해 지는 듯한 사태를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대에서 사라져 간 재능을 필자는 몇 명이나 보아왔다.

 오해를 사면서까지 말하면, 칼링 컵은 아스날에게 있어 어린 선수를 <시운전>하는 장소밖에 되지 않는다. 어린 선수에게 좀 더 톱 레벨에 가까운 무대를 체험시켜, 그 레벨에 서서히 익숙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 벵거는 위치를 부여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어린 선수 중심인 팀으로 도전하면서도 아스날은 근년 칼링 컵에서 좋은 성적을 계속 남기고 있다. 지지난 시즌은 준우승, 지난 시즌은 4강 그리고 이번 시즌도 8강에 진출. 그렇다 그들은 결코 대회를 경시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클럽의 기초를 쌓은 지휘관의 선견지명과 지성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지만 아스날의 [어린 선수 육성을 중시한 팀 만들기]의 기초를 쌓은 것은 벵거이다. 그가 아스날과 계약한 것은 1996년. 취임 후 벵거는 무명의 프랑스 선수 2명을 획득하며 팀 개혁에 착수했다. 그 2선수야 말로 클럽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 파트리크 비에라(현 인테르나치오날레) 그리고 니콜라 아넬카(현 첼시)이다.

 비에라는 2005년까지 9시즌에 걸쳐 핵심멤버로 팀에 공헌. 아넬카는 전력으로써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으로도 큰 공헌을 하게 된다. 70만 유로로 손에 넣었던 아넬카를 불과 2년 후에 3500만 유로로 레알 마드리드에 팔았기에 벵거의 주가가 오른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그 후도 개혁을 이어갔다. 아넬카를 팔아 얻은 자금을 바탕으로 무명의 어린 선수나 소속 클럽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던 선수를 뽑아 오는 데 성공. 그 중에서도 유벤투스에서 빈둥대고 있던 티에리 앙리를 1999년에 획득한 것은 벵거의 최고 업적이 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쓰는 일 없이 팀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그는 화려한 공격 축구로 1998년, 2002년, 2004년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더욱이 4번의 FA 컵 제패를 이룩하여 명장으로서의 평가를 확립. 뛰어난 선견지명과 지성 그리고 인간성으로 인해 선수, 스탭의 신뢰를 모음과 동시에 <동업자>들도 경의를 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스날 즉 벵거의 강화 방침은 12년 전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싼 가격에 획득한 선수를 톱 팀에서 사용하여 가치를 높인 후에 매각. 이러한 사이클을 거듭하면서 안정된 결과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 외 대다수 클럽이 배워야 할 강화 플랜

 빅 클럽의 대다수가 이름 있는 즉전력을 획득하여 팀을 강화하고 있는 것에 비해 아스날은 미지수의 어린 선수 육성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작금에는 이러한 어린 선수의 태두가 아스날 매력의 하나가 되어 팬들을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즌 입단하여 당시는 잉글랜드에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바카리 사냐는 리그 굴지의 SB로 성장을 이룩하였다. 또한 지난 시즌까지는 출장 기회가 한정되어 있던 시오 월컷도 시합을 거듭함에 따라 안정감을 늘려 지금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밀란으로 이적한 플라미니를 대신하여 주전에 발탁된 데닐송도 천성의 공격 센스를 발휘. 앞 선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무기로 수 많은 결정적 기회를 연출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의 스타 후보는 그들뿐만이 아니다. 칼링 컵에서 승리를 거둔 멤버에는 멕시코 대표팀 FW인 카를로스 벨라, 덴마크 대표팀 FW인 니클라스 벤트너, 웨일스 대표팀 MF인 아론 램지 등등의 각국 대표팀 클래스, 거기에 결정력을 갖춘 16살의 MF 잭 윌셔 등 현재 아스날에는 높은 잠재능력을 간직한 재능들이 즐비하다.

 현재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아스날만큼 긴 안목으로 팀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 클럽을 찾아볼 수 없다. 어린 선수의 육성술을 숙지하고 있는 벵거가 새로운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배출하는 날도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글머리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필자가 아스날에 대해 [가장 인상에 남는 뉴스]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은 이 뉴스 속에 잉글랜드 축구계의 미래를 비추는 실마리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현재 프리미어 리그에는 높은 텔레비전 방영권에 따른 수입이나 오너의 출자를 베이스로 하는 거액 투자로 계속해서 거물들을 마구 사들이면서도 팀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짤라 버리는 등의 보강을 거듭하는 클럽도 적지 않다. 그런 와중에 아스날은 건전한 클럽 운영을 하면서 거기에 안정된 결과를 남기고 있다.

 무한의  가능성을 간직한 어린 선수에 대한 <투자> – 그 외의 대다수 클럽들이 아스날 스타일을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좋겠다 – 고 필자는 생각한다.

Posted by 渤海之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