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1978'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4.15 우고 산체스 - 대표팀에서 해임된 멕시코의 영웅 by 渤海之狼 2
  2. 2006.02.14 일세를 풍미했던 “플라토슈” 미셀 플라티니 by 渤海之狼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other/column/200804/at00016872.html
저자
: 세르히오 레빈스키

바라 마지 않던 멕시코 대표팀 감독 취임 회견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던 우고 산체스였지만....

필시 우고 산체스[각주:1]에게 있어서 2008 3 31일은 자신의 캐리어 속에서 최악의 하루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날 멕시코 축구 협회는 국민적 영웅이며 세계에서도 명성을 떨친 선수 중에 한 명이었던 남자에게서 대표팀 감독의 지위를 박탈했다.

■ 프리메라 리가에서 5번 득점왕에 빛났던 영광의 나날들

 산체스는 1980년대 에스파냐에서 활약하며 멕시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칭송 받았다.

 1981년 멕시코 UNAM 푸마스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그 4년 뒤에는 레알 마드리드로 활약의 장소를 옮겨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는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각주:2], 마누엘 산치스[각주:3], 마르틴 바스케스[각주:4], 미첼[각주:5], 미겔 파르데사[각주:6] 5명으로 구성된 [퀸타 델 부이트레][각주:7]가 중심이 되어 영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체스도 리가 에스파뇰라에서 5번의 득점왕에 빛났으며, 골을 넣은 다음에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퍼포먼스도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체스는 모국 멕시코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당시 멕시코는 대표팀이건 클럽이건 산체스만큼의 영광과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산체스는 모든 광고나 잡지의 표지를 독점했다. 당시 멕시코 축구계에서 산체스 외에는 해외에서 플레이 하고 있던 선수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멕시코 자국 클럽의 월급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무엇보다 해외로 나간다는 전통이 멕시코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산체스의 경우 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회장이 이 멕시코 스트라이커를 보자마자 반해버리는 행운이 있었다. 회장은 처음에 크루스 아술의 말도나도를 시찰하러 멕시코에 갔는데, 푸마스에 소속해 있던 산체스가 눈앞에서 연속 골을 넣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었다. 결과 아틀레티코는 산체스를 획득하였고, 그때부터 마니토(산체스의 애칭) 영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에스파냐에서 1년째는 부진하여 주위에서는 푸마스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체스는 성공을 거두기까지 에스파냐에 남겠다고 우겼던 것이다.

■ 산체스의 월드컵이 될 예정이….

 산체스의 경력에서 이상한 점은 에스파냐에서 그처럼 빛나는 실적을 올린 것에 비하여, [엘 트리][각주:8]에서는 그에 필적하는 활약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전성기의 대부분을 해외 클럽에서 보냈기 때문에 대표팀에 그다지 소집되지 못한 것이 이유이다. 그래도 산체스는 78, 86, 94년이라는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다.

 78년 아르헨티나 대회에서는 조 예선에서 3연패를 당하여 승점 0인 채로 귀국길에 올랐다. 더구나 서독과의 시합에서는 0-6이라는 대패였다.

 자국 개최가 된 86년 대회는 누구나가 [산체스의 월드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큰 활약도 하지 못했고, 조 예선 파라과이와의 시합에서는 PK를 실축. 멕시코는 8강에 진출하기는 하였지만 자국민들을 실망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 호된 비난을 받은 감독 시대

 현역을 은퇴하고 지도자가 되어서부터 산체스는 자주 멕시코 언론에게 비난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2000
년 친정인 푸마스 감독에 취임하여 2004년에는 전후기 리그에서 연패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산체스는 불청객이었다. 사람들은 예전의 영웅을 거만하다고 느꼈고, 전술 면에서도 무지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멕시코 미디어는 산체스가 당시 멕시코 대표팀 감독 히카르도 라볼페[각주:9]에 대한 일련의 규탄 캠페인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산체스는 라볼페를 대표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무엇이건 비판을 전개하였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라볼페는 원래 GK였다. 현역 시대에 상대팀 선수로 만났던 경험도 있던 라볼페와 산체스는 필드 밖에서도 대립했다.

 산체스는 외국인인 라볼페가 멕시코 대표팀 감독에 앉아 있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엘 트리]는 조 예선 돌파를 이루었지만 16 1차전 상대는 지휘관의 모국 아르헨티나가 되었다. 결과는 연장전 끝에 1-2로 패배. 산체스는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표팀 감독은 자국 출신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6 11. 결국 산체스는 멕시코 대표팀 감독의 자리에 취임하여, U-21대표( U-23 대표팀 세대)의 감독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임까지의 1년이 넘도록 대표팀에 어울리는 전술을 확립하지도 못하였고, 팀으로써의 형태를 보이는 것 조차도 없었다. 산체스가 취임 시에 내세운 목표는 CONCACAF 골드컵[각주:10] 우승과 코파 아메리카(남미선수권) 4,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메달 획득이었다.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3위에 입상하여 멕시코 국민들 기쁘게 하였지만 나머지 두 개는 실현되지 않았다.

 2007년 골드컵[각주:11]에서 미국에게 패하여[각주:12] 준우승에 그친 것에 더하여, 그지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올림픽 예선 탈락은 산체스의 거취를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그 이전부터 대표팀 감독으로써의 산체스의 수완에는 의문부가 찍혀 있었다. 라볼페 쪽이 좋았다는 목소리도 나올 정도였다.

■ 일류 선수는 감독으로써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인가?

선수와 감독으로 양쪽에서 성공하여 여전히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요한 크라위프

 산체스의 해임으로 인해서 멕시코에서는 '감독론'과 같은 논의가 재연되고 있다. 즉 위대한 선수가 위대한 감독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멕시코 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이번 단 한번으로 자신의 경력 그리고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일류 선수가 감독으로서도 일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예를 들면 알프레도 스테파노[각주:13] 혹은 크라위프와 같은 천재는 지도자로서도 빛나는 실적을 남겼다. 그러는 한편 펠레는 감독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두 개의 클럽을 이끌었지만 스트레스만 쌓였을 뿐이었다. 감독 시대의 마라도나는, “나처럼 플레이하면 된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감독 대 선수라기 보다는 같은 동료로써 선수를 취급했던 듯 하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경우는 감독직을 일찌감치 끝내고 명함을 건네주고 악수를 나누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이다. 프랑스가 낳은 천재 지네딘 지단은 은퇴 후도 감독직에는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가 존경하는 우루과이의 엔소 프란체스콜리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텔레비전 해설자로 축구와 끈을 이어가고 있다.

 일류 선수가 감독에 앉으려 할 때는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명성을 손에 넣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잃는 것은 일순이다. 우고 산체스와 같이 불과 1년 만에 빛나던 명성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이쯤에서 적절한 산체스 (현역 때의) 탑 10 플레이 >

  1. Hugo Sánchez Marquez [본문으로]
  2. Emilio Butragueño, FW [본문으로]
  3. Manuel Sanchís Hontiyuelo, CB [본문으로]
  4. Rafael Martín Vázquez, MF [본문으로]
  5. Míchel, RMF. 현 레알 마드리드 칸테라 총책임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한국과의 시합에서 헤드트릭을 기록했다. [본문으로]
  6. Miguel Pardeza, MF [본문으로]
  7. Quinta del Buitre - ‘독수리(Buitre)의 집(quinta)’이란 뜻으로, 중심 선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별명이 독수리(El Buitre)였기에, 그를 중심으로 한 80년대의 레알 마드리드를 그렇게 불렀다 [본문으로]
  8. El Tri = Los Tricolores의 약자. 삼색(三色)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멕시코의 국기색이 삼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멕시코 대표팀의 애칭 [본문으로]
  9. Ricardo Lavolpe, 재임 2002-2006, 대표팀 해임 후 보카를 거쳐 현재 멕시코 리그 몬테레이(Monterrey)의 감독. 아르헨티나 출신. 융통성 있는 전술과 함께 경기장에서 줄담배로 유명하다고 함 [본문으로]
  10.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 주최의 대륙 선수권 [본문으로]
  11. 미국 개최 [본문으로]
  12. 1-2 [본문으로]
  13. Boca, River에서 리그 타이틀, 발렌시아에서 코파 델 레이, 리그 타이틀, 컵 위너스 컵(현 UEFA컵)를 제패했으며, 1974-75년에는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리스본, 1982-84, 1990-91은 레알 마드리드 등 1967년부터 91년까지 몇 년을 제외하곤 총 8개 팀의 감독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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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Vincent Machenaud
일본어 번역 : Shuichi Ta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미셀 플라티니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던 것은 그가 11살이 되던 해였다. 로렌느지방의 작은 마을 죄프에서 태어난 그는 마을의 클럽인 AS죄프에서 축구선수로써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길바닥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었다. 축구는 굉장히 좋아했지만 놀이이상으론 생각하지 않았다.고 훗날 플라티니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젊어서 아마츄어팀에서 플레이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 어딘가의 클럽에 넣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플라티니가 놀이의 영역을 뛰어넘어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하게 된 것도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축구에 대한 정열이 넘쳤었다. 공부는 특별히 흥미를 가지진 않았지만 축구는 매일 밤 꿈에서도 플레이할 정도였으니까

 이미 그에게 있어서는 축구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성장함에 따라 그 생각은 더 강해져만 갔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르러 플라티니의 부친도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 때로는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부친도 서서히 아들의 재능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반대로 엄격하시기만 하셨지.

 라고는 하지만 플라티니가 당시 로렌느지방 최대의 클럽인 FC메스의 입단테스트를 받은 것도 부친의 어드바이스에 따랐기 때문이다.


 당시 플라티니는 17. 그의 이름이 지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단테스트에서 멋진 테크닉과 뛰어난 잠재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메디컬 체크에서 문제가 생겼다. 호흡기관이 수준 이하며 심장이 스포츠선수로써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메스의 팀닥터가 내린 진단이었다.

 이리하여 메스에의 문은 닫혀져 버렸지만 이 일로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 것은 FC메스쪽이었다.


 부친이 다음으로 아들을 보낸 곳은 옆 마을인 낭시였다. 입단한지 1년 후에는 AS낭시에서 프로 데뷔했으며 명성도 차츰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엔 프랑스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플라티니는 프랑스 축구 희망의 별이었다.

 이즈음부터 플라티니는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젊었기에 자신감과 야심이 온 몸에 충만했다. 프랑스 대표로서 데뷔는 76년 3월 26 파르크 드 프랑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친선시합에서였다. 75, 프랑스는 1-0으로 리드한 상황에서 프리킥을 얻자 캡틴인 앙리 미셀이 볼에 다가갔다. 당시 미셀은 프랑스 축구의 최대 스타이며 프리킥의 명수이기도 했다.

 나에게 맡겨줘. 반드시 넣을 테니까

 미셀의 귓가에서 플라티니는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프랑스는 리드를 2점차로 넓히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의 프리킥은 '플라토슈'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대명사중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가 뛰어난 것은 비단 프리킥뿐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몸싸움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완벽한 선수였다. 그에게는 다른 선수에게는 없는 재능이 있었다. 넓은 시야였다.

 맞어. 확실히 판단은 빨라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넓게 필드를 볼 수 있었었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10번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7년간 낭시에 있은 후 그는 당시 프랑스 최강의 클럽이었던 AS 생떼띠앤느로 이적.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 그리고 진정한 슈퍼스타로 성장해간다

 그는 플레이메이커이면서도 뛰어난 득점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높은 헤딩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또한 강한 슛을 쏘지도 없었다. 그러나 플레이 메이크의 센스와 골 앞에서의 득점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프랑스 대표에서는 72시합에 출장해서 41. 물론 득점은 역대 1위이다. 아마 당분간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희망의 별이 이제는 구세주가 되었다. 플라티니만 있으면 프랑스대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월드컵에 관해서만은 요한 크라위프처럼 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78년 아르헨티나대회에서는 내가 너무 어렸다. 우리들의 세대는 세계에서 이겨나가기 위한 경험이 부족했다. 4년 후의 스페인대회에서는 정말 불운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대회에서는 내가 조금 나이가 들었었다…”


 그렇지만 그 외의 타이틀은 많이 얻었다.

 낭시 최후의 시즌이 된 78년에는 낭시 최초의 타이틀인 프랑스컵을 가져오는데 큰 공헌을 한다. 후에 그가 내 마당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파르크 드 프랑스의 페널티 에리어 왼쪽 30. 거기서 결정한 프리킥이 결승점이 되었다. 프랑스컵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최초의 빅 타이틀이었다.

 다음으로 81년에는 생떼띠앤느에서 프랑스 리그 우승. 또한 이 시즌에는 득점왕도 획득. 명실공히 프랑스 넘버원 플레이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는 가정내의 문제로 인해 만족할만한 활약을 못하고 종료. 이것이 스페인 월드컵이 끝난 후 선조의 땅이기도 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배신행위였다. 월드컵 후 최초의 대표시합인 슈트트가르트와의 친선시합에서 프랑스가 1-3으로 패하자 파르크 드 프랑스의 관중은 플라티니를 향해서 비난의 함성을 보냈다.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나쁜 기억중에 하나다. 프랑스 대표에서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유벤투스에서의 데뷔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월드컵 우승멤버들은 프랑스의 영웅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축구선수로써 최고의 시기를 유벤투스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일요일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칼초의 분위기속에서 보낸 것은 최고의 추억이지.

 여기서 그는 5시즌 동안 2번의 리그 우승과 이탈리아 컵, 유럽 챔피언즈 컵, 컵 위너스 컵, 그리고 인터컨티내탈 컵을 획득. 또한 유럽최우수선수상인 발롱도르도 3년 연속 수상했다. 유벤투스의 서포터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미켈레는 잊을 수 없는 영웅인 것이다.

 발롱도르를 수상한 83~85년이 나의 절정기였다. 신체적인 레벨이 최고조에 도달했었으니까. 생각과 몸이 완전히 일치되었었지. 이탈리아에서의 중압감은 힘들었지만 플레이는 너무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지


 1984. 그는 프랑스 대표에게도 최초의 타이틀을 가져오게 한다. 자국 개최의 84년 유럽선수권 프랑스대회였다. 2번의 헤드트릭을 포함한 5시합 9. 그것은 그야말로 플라티니를 위한 대회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괴로운 일을 경험한다. 리버풀과 행해진 유럽 챔피언즈 컵 결승이었다. 챔피언즈 컵은 월드컵과 더불어 플라티니가 가장 얻고 싶어하는 타이틀이었고 이날 밤은 그 꿈이 이루어질 밤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축구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렸다. 그 날 이후 난 축구를 순수하게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합 전에 일어난 사망자 38명을 낸 훌리건의 폭동, 소위 헤이젤의 비극이 그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결승점이 된 PK를 득점했을 때도 그는 담담히 센터써클로 향했을 뿐이었다.

 시합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관중석에서 일어난 비극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권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로도 2시즌 플레이를 계속했지만 마음속의 에너지는 고갈되었으니까

 모든 것을 축구에 바쳐온 인간의, 이것도 또한 인생일 것이다.



Michel Platini

1955 6 21일생. 프랑스 죄프에서 태어났다. 낭시에서 프로의 캐리어를 스타트해 1976년 프랑스 대표로 데뷔. 그 후 쌩떼띠엔느에서 활약해, 82년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대표로서는 78, 82, 86년 월드컵에 출장하지만 82, 86년의 월드컵에서는 준결승에서 패배하여 세계 넘버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84년 자국 개최인 유럽선수권에서는 9골을 넣은 대활약으로 프랑스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유벤투스에서도 리그우승 2, 유럽 챔피언즈 컵,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 인터콘티네탈 컵도 제패하였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3번의 득점왕과 83년부터 3년 연속 발롱도르를 획득하는 등 세계를 대표하는 넘버 10. 공격적 MF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다. 87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역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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