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4.08 바조의 근황 by 渤海之狼
  2. 2007.08.24 아름다운 투사(鬪士)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by 渤海之狼
  3. 2006.01.28 비운에 운 "하얀 펠레" 지쿠 by 渤海之狼 3

출처: http://www.ocn.ne.jp/sports/go11/080404.html
저자: 아카호시 케이코

2004년 은퇴 이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로베르토 바조가 오래간만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인테르나치오날레 창립 100주년 파티였다. 왕년의 주된 선수들과 함께 주세페 메아차[각주:1] 스타디움의 그라운드에서 서포터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런 바조가 이탈리아 스포츠 신문 [가체타 델로 스포르토]와의 인터뷰를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채소밭과 가족을 위한 하루하루

바조는 현재 실질적으로 완전히 축구와 관계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
채소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시간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다. 운 좋게 장인과 장모가 그쪽에 관해서 굉장히 잘 알기에 많이 가르쳐 준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집을 벗어난 적이 많았으니까. 이제서라도 가족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다
고 말했다. 부인인 안드레이나(Andreina)와 서로 알게 된 것은 15살 때로 아직 학생이었을 때부터라고 한다. 3명의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었다.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사냥을 즐길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바조. 그 정열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르는 듯하다.
계절에 따르지만 할 일이 굉장히 많다. 차를 이용하여 광대한 산악지대까지 가서 그냥 걷기만 할 때도 있다. 무릎에 신경을 써야 하기에 너무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할 수 없다. 믿지 못할 정도로 공기가 깨끗하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다. 필시 나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있을 것이다
고 자연과의 '대화'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완전히 보카의 팬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현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서포터들의 모습에 끌려, 뭔가를 느끼게 된 후 보카가 '나의 팀'이 되었다고 한다. 마라도나와도 공항에서 만난 적이 있으며 또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마라도나는 코카인 중독 등으로 인한 재활 치료로 고생하였고, 건강 상태가 일시 위험한 적도 있었다. 그런 때도 굉장히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마라도나의 마음 속 깊이까지 도착하기는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요한 것이다. 주위에 있는 인간들 중에 자신을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파악하여 그렇지 않은 인간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마라도나에게 어드바이스를 보냈다.

리피, 사키 등과 좋지 않았던 이유는?

현역 시대를 되돌아 보는 질문에도 답했다.

바조와의 사이가 정말 안 좋았던 감독은 리피, 울리비에리(Renzo Ulivieri), 카펠로, 사키. 어째서 사이가 나빴는가?
자문자답한 적이 몇 번이나 있다. 그래서 찾아낸 답이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언제나 주인공 혹은 일인자로 있고 싶어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듯 하다”.
즉 리피 등의 바조에 대한 [질투]가 이유라고 느끼고 있는 듯 했다.

94년 미국 월드컵에 대해서도
사키에게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있었으며 많은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이 항상 주인공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안타깝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더욱 많은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비꼬았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였다.
다가가는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냐고? 물론 나도 잘못한 부분은 있었다. 내 쪽에서부터 허심탄회하게 다가갔어야 했을 것이다. 내가 범한 실수는 어떤 때라도 그들을 존경했어야 한다는 점과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고 분석하였다.

주목하고 있는 것은 메시. 대표팀에서는 피를로.

물론 축구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았다. 보면서 자신을 흥분하게 만드는 플레이어로 메시를 꼽았다.
가끔은 예전의 나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가 볼을 가졌을 때 필시 무언가를 해 줄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또한 호나우지뉴와 카카도 그러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브라히모비치, 토티도 굉장한 선수들이다. 대표팀에서는 피를로다. 그의 플레이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난다. 우디네세의 콸리아렐라, 디 나탈레의 콤비도 흥미롭다고 선수의 이름을 거론하였다.

바조, 바조 팬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팀이라고 하면 유벤투스와 피오렌티나일 것이다. 현재의 양 팀에 대해서
라니에리는 잘 하고 있다. 프란델리도 그렇다. 개인적인 면식은 없지만 그가 부인과 사별했을 때에는 위안의 말을 보내고 싶었다
고 하며, 또한 델 피에로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축구계의 복귀는 주니어 선수들의 육성을 통해서

은퇴를 결정했을 때의 에피소드도 알려 주었다. 다른 선수들과 동등한 연습을 하기가 힘들어져 신체적인 면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무릎 속은 힘줄을 제외하곤 전부 부서져 있었다
고 말한다. 어느 날, 브레시아의 연습이 끝나 차로 1시간 정도 걸려서 자택에 도착했을 때, 무릎이 90도로 꺾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발을 뻗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고 할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던 듯 하다.

가까운 장래, 축구계로 돌아오는 것은 틀림 없는 듯하다.
주니어 부문을 담당하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여러가지 위험한 것을 미리 알려주고 싶다. 한 마디의 말이 얼마나 많은 것에 영향을 주는가, 축구 선수로써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가……
자신의 경험한 것을 어린 세대에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모라티 회장이 예전에 바조를 주니어 부문의 담당으로 채용하려고 한 적이 있다. 바조도 그것을 인정했다.
확실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앞으로 이야기가 더 진행되고 거기서 나눈 이야기를 납득하게 된다면 그 때는 팀에 들어가 있는 상태일 것이다
또한 유벤투스의 매수 사건 등의 이야기로 이어지자,
내 경험을 말하자면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쓰고 싶다
며 자서전 출판의 가능성도 비쳤다.

현재 가장 행복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막내인 3살 레오나르도와 노는 것.
그 아이의 미소를 보는 것.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며 아빠미소를 보여주었다.

축구 지도자로써 제 2의 축구 인생을 보낼 바조의 모습이 기다려진다.

  1. 원문에선 ‘산 시로’로 되어 있지만 인테르나치오날레 주최이기에 ‘주세페 메아차’로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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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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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드의 대관중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지쿠는 천천히 페널티 스팟으로 향했다.

 천천히 달리면서 오른발 인사이드 킥. 정확히 찬 볼이 골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모든 것은 계산대로였을 터였다.


 1986년 6월 21일.

 멕시코의 과다라하라의 하리스코 스태디움.

프랑스와의 8강 전은 20분 남은 상황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스코어는 1-1. 브라질은 PK의 찬스를 얻게 된다. 킥커는 지쿠. 그라운드에 들어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 잡은 볼을 한번의 스루패스로 브랑코에게 연결했고 브랑코가 태클에 쓰러졌다. PK. 자신이 만들어낸 기회를 자신의 결정짓는다 - 그것은 누구나가 생각했던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반전을 거듭하며 수정되었다. 계산대로 날아간 볼이 GK 바츠의 일생일대의 세이브에 의해 막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치며 힘없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은 프로에 들어온 이래 PK의 달인이 범한 단지 세번째의 실축이었다.


 이리하여 브라질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승부차기 끝에 한 번은 쓰러트렸던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33살.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 있던 늙은 영웅은 이 시합을 끝으로 카나리아의 셔츠를 벗게 된다. 이 결과는 어떻게 보면 그의 사커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라 추앙 받는 선수이지만 세계 축구 역사에서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만은 않다. 동시대의 아르헨티나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프랑스의 장군 미셀 플라티니에게 쏟아지는 절찬에 비하면 지쿠는 변변치 못하다. 그러나 마라도나, 플라티니와 지쿠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대표팀 주장을 맡은 수를 비교해 보면 91번의 주장을 맡은 마라도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71번의 주장을 맡은 지쿠 72번의 플라티니에 불과 한번이 모자란 정도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나 프랑스와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쟁이 심한 브라질에서 11년간이나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왔던 것이다.

 무시하지 못할 것은 골을 넣은 수에 있다. 대표에서는 펠레에 이어 역대 2위인 48골을 기록(2000 1월 기준..지금은 아마 호나우도가 넘어섰죠?). 플라티니가 41, 마라도나는 34골이므로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써 그의 득점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득점력의 높음으로 따지자면, 이러한 기록도 있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로 이적한 1년째인 83-84시즌에 24시합에서 19골을 기록득점왕에 오른 플라티니는 30시합에서 20. 1시합 평균 득점률에서는 플라티니를 능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리그를 제패한 유벤투스에서 주위에 뛰어난 선수들에게 도움을 받은 플라티니와는 달리 겨우 세리에B 강등을 면한 약소 클럽에서의 골 러쉬였던 것이다. 플라티니를 제치고 리그 MVP의 수상한 것은 그러한 가치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등번호"10"번으로서 라이벌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면서도 충분한 평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빅 타이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지쿠는 비운의 스타였다.


 본명 알투르 안트네스 코인브라. 결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젯거, 에두(한때 일본 대표팀 테크니컬 디렉터가 된 사람 - 역자주) 두 형이 프로축구 선수였을 정도로 혈통은 좋았다. 어렸을 적부터 두 형을 능가하는 재능은 인정받고 있었으나 주위사람들을 걱정케 하는 것은 빈약한 몸이었다. [사이보그]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 육체개조에 들어간 것은 그런 빈약한 몸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하자 마자 피지컬 코치와 정형외과 의사들로 구성된 "지쿠 개조실"에 의해 4년에 걸친 육체개조가 시작되었다지쿠는 자신 전용의 메뉴에 따라 기절할 정도로 힘든 근력 트레이닝을 담담히 행하면서 빈약했던 몸은 어느새 눈에 뜨일 정도로 튼튼하게 변해 갔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운동 기구와 맞대고 트레이닝을 쌓아가면서도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으며 보냈다고 한다. 근력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은 치아 교정에까지 이르러 얼굴의 응어리까지 없앴다. 괴롭고 힘든 개조계획이 끝날 즈음에는 소년이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콤플렉스는 전부 없어졌다.


 20살에 레귤러가 되면서부터 캐리어는 곧 전설이 되었다. 2년 후인 75년에는 플레멩구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대표팀의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우루과이와의 A매치에서 국가대표 데뷔를 했는데 그 날이 그의 22번째 생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하얀 펠레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던 2의 펠레에 대한 환상이 이제서야 마침표가 찍히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펠레와 같은 화려하고 트릭키한 플레이도, 놀랄만한 스피드도 아니었다. 지쿠 자신은 그것을 방향감각이라고 했다. 자서전에서 지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그라운드의 어디에 있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아래를 쳐다보고 있어도 내가 원하는 장소에 정확한 패스를 하고 또한 슛을 쏠 수가 있었다.

 그것이 선천적인 재능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기술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프리킥도 또한 끊임 없이 반복한 트레이닝의 결과라고 한다. 새로운 펠레는 신의 아들이 아닌 계속해서 땀을 흘린 노력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스루패스의 멋진 광경은 그것을 땀의 결정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의 발끝에서 패스가 혹은 슛이 쏘아질 때마다 관중은 일어섰고 상대팀 수비수의 무리는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한 예술작품의 전람회가 플라멩구의 에이스로써 맞이한 81년 토요타컵이었다.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단지 1번의 프리킥과 2번의 패스로 물리쳤다. 자로 잰 듯이 상대 수비수의 머리 위를 지나 뒤로 떨어지는 절묘한 로빙 패스와 막 닫히려는 듯한 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라운드의 스루 패스. 여기에 GK의 펌블을 유도한 프리킥을 포함한 3개의 어시스트로 플라멩구를 세계의 정점에 이끈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긴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단순히 슈퍼 스타의 탄생의 예고편으로써 기억되어야 했었다. 약 반년 후에 시작되는 스페인 월드컵이야 말로 그 무대에 어울렸기에......


 실제로 대회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는 젊은 날의 마라도나의 눈 앞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과시하였다. 대회 최고의 ‘10인 것을 세계에 인정시킨 지쿠가 가는 길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1982년 바로셀로나의 사리아 스태디움. ‘드림팀이라 절찬 받던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교활한 덫에 걸렸다. 파죽지세로 진군해 온 탤런트 군단이 계속해서 이탈리아가 보낸 암살자들의 손에 걸려 쓰러졌다.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무참하게 찢긴 지쿠도 또한 등뒤에 집요하게 붙은 젠티레의 악랄한 파울에 쓰러진 한 사람이었다29. 캐리어의 절정기였던 지쿠는 결승전은커녕 4강전의 그라운드도 밟지 못한 체 떠났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와의 차이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월드컵의 여신에게 계속 미움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플라티니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84년 유럽선수권에서 프랑스를 국제무대에선 처음으로 빅 타이틀로 이끈 것에 비해서 지쿠에게는 대표 레벨에서 자랑할 만한 실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보는 사람에게 꿈을 주는 것이 스타의 진정한 가치라고 한다면 지쿠 만큼이나 소년들의 마음을 흔든 영웅도 없다. 지쿠의 플레이를 보고 자란 소년들은  90년대 축구계를 석권하게 된다.

하나는 20세기 최후의 판타지스타로, 또 하나는 21세기의 슈퍼스타로......

 로베르토 바조와 호나우도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지쿠처럼 되고 싶었다"


Arthur Antunes Coimbra “Zico”

1953 3 3 리오데자네이로 킨치토에서 태어났다. 80년대를 리드한 이상적인 넘버 10.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소년시대의 우상은 펠레가 아닌 플라멩구의 스타 지자였다. 13살 때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 세밀한 프로그램에 의한 육체개조로 신체의 약점을 극복하여 [사이보그]라 불리었다. 플라멩구에 있을 때 브라질 전국 선수권에서 4번 우승. 81년 리베르타토레스컵에서 우승하였고, 같은 해 토요타컵에서 우승하여 플라멩구를 세계 클럽 넘버원으로 이끌었다. 22세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78년 아르헨티나 대회를 시작으로 월드컵엔 3번 출장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FK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지만 그의 대명사는 예술적인 스루 패스였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에 2년간 재적. 일본에서 현역생활의 피리어드를 찍었다.


;Satoshi Hojo


Ps; 외국어 발음은 아무래도 일본글을 번역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영어는 어떻게 때려 맞추겠는데 그 외의 외국어는 좀….)

Ps2;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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