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1.12 용맹과감한 전사 - 펠리피 멜루 by 渤海之狼
  2. 2006.01.28 비운에 운 "하얀 펠레" 지쿠 by 渤海之狼 3

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81216_1.html
저자: 마리오 테네라니
일본어 번역: 오가와 미츠오

 2005년 체사레 프란델리(Cesare Prandelli) 감독 취임에 맞추어 이탈리아의 강호 피오렌티나는 [2010년 이후에 스쿠데토를 노릴 수 있는 팀 만들기]를 목표로 장기적인 강화 계획을 진행시켜 왔다.

 지난 시즌은 4위가 되어 올 시즌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확보. 9년 만에 유럽 최고봉 무대로의 도전권을 얻은 클럽은 올 여름 5000만 유로(약 907억 원)라는 거액을 투자하여 대형 보강에 나섰다. 획득한 총 12선수 중에는 민완 GM 판탈레오 코르비노(Pantaleo Corvino), 프란델리 감독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만드는 한 명의 MF가 있었다. 펠리피 멜루(Felipe Melo de Carvalho), 25살. 지난 시즌 에스파냐에서 크게 활약한 [축구 왕국산]의 유망주이다.

 대형 보강의 주인공이 일찍부터 에이스의 자리를 부동의 것으로 한 알베르토 질라르디노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F. 멜루도 개막부터 DMF의 자리에서 부동의 레귤러로서 활약. 장기인 다이나믹한 플레이로 공수양면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휘하여 지금은 질라르디노와 맞먹는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끝없는 투쟁심과 거친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예전 피오렌티나에서 활약한 같은 나라의 선배 둥가의 재림이라고도 칭해지는 펠리피 멜루. 피오렌티나를 더욱 높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리고 우연하게도 그 둥가가 감독을 맡고 있는 브라질 대표팀 입성의 꿈을 이루기 위해 - 용맹 과감한 ‘전사’는 앞으로 전진한다.

클럽의 일체감에 큰 매력을 느꼈다.

- 이탈리아의 땅을 밟은 지 5개월. 이젠 피렌체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셨나요?

 굉장히 쾌적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지난 시즌 생활했던 알메리아는 작고 아담한 항구마을로 굉장히 분위기가 좋은 곳이긴 하였지만 피렌체 쪽이 마음 편하더군. 생활하기에 불편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관광도시이기도 한 이곳은 언제나 활기가 넘쳐. 나는 히우지자네이루 출신. 역시 번화한 곳이 좋더라구.

- 도시 중심부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도 번화한 것이 이유?

 관광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 광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 조금 높은 언덕에 있는 집으로 거기에서는 피렌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와. 언제나 최고의 광경을 즐기고 있지. 그 중에서도 야경의 아름다움은 정말 최고다.

- 그렇다면 서포터에게 얼굴 팔리는 것도 많겠네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힘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기쁘더군. 나가면 곧바로 알아보고는 “차오 멜루!”하고 인사를 받거나 “열심히 해!”하고 격려의 말을 듣거나 한다. 피렌체 서포터의 열정은 장난이 아니잖아. 그들에게 직접 격려의 말을 들음으로 책임감을 가질 수 있으며 “좋아 해 주마!”하는 투쟁심도 불러일으켜 준다. 즉 서포터와 접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모티베이션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

- 과연… 피렌체의 거리와 서포터. 그러한 요소가 피오렌티나로의 이적을 결심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인 듯 하군요.

 응. 이적이 정식으로 결정되기 전에 한 번 스타디움에서 시합을 본 적이 있는데 서포터의 열광적인 모습에는 정말 놀라게 되더군! 시합은 제쳐두고 그들의 열정이 담긴 응원에 흠뻑 빠질 정도로 감동하였어. 선수, 감독, 프런트 그리고 서포터. 피오렌티나라는 클럽의 일체감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 그렇다면 코르비노 GM의 열렬한 권고도 그다지 필요가 없었겠군요.

 아니 아니 그에게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몇 번이나 알메리아로 직접 찾아와 준 코르비노의 존재가 있었기에 나는 피오렌티나로 오게 된 것이지. 그의 권유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 에스파냐에서 플레이하고 있었을 터이다.

- 프란델리 감독도 입단 전부터 당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지. 지난 시즌까지 나는 에스파냐에서야 조금 이름이 알려졌지만 국제적인 지명도는 결코 높지 않았어. 그들은 그런 나를 높게 평가해 주었다. 기쁘지 않을 턱이 없잖아? 처음 프란델리 감독과 만났을 때도 ‘자네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선수다’라는 고마운 말을 들었다. 의욕이 한층 더 높아진 것을 지금도 확실히 기억한다.

- 당신이 보기에 프란델리는 어떤 감독인가요?

 말 그대로 [지도자]. 예를 든다면 선생님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플레이에 관한 세세한 설명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며 우리들 선수에게 언제나 성실하게 대해줘. 감독에게도 여러 타입이 있지만 프란델리 감독은 무턱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선수와 동등한 시선으로 무엇이든 세심하게 가르쳐 주지.

- 감독이 그러한 인물이라는 것은 당신들 선수에게 있어서 역시 중요한 것인가요?

 중요라는 말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지. 말하는 상대나 상황에 따라 말하는 것이 다른 인간들 있잖아? 그런 타입 나는 정말 혐오한다. 감독은 역시 정당한 인물이 아니면 안 되지. 그래 프란델리와 같이 선수를 차별하지 않고 대해주는 사람 말이야. 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라도 컨디션이 나쁘면 선발멤버에서 제외하는 그 정도의 공정함을 가진 감독이 아니면 안심하고 함께 갈 수 없지. 그런 의미에서도 프란델리는 이상적인 지휘관. 평소에 그와 함께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실한 하루를 보냈다. 조금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대신할 수 없는 선수가 될 생각이다.

- 지금부터는 당신의 커리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 편하게 말하시길.

- 프로 데뷔를 장식한 것은 브라질의 명문 플라멩구. 충격적인 데뷔전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잘 알고 있네. 내 데뷔전이지만 정말 자랑스런 데뷔전이었지(웃음). 벌써 7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믿을 수 없을 정도야. 당시 나는 18살. 시합 종료 10분전에 필드로 보내져 무려 퍼스트 터치에 골을 넣었다구! 더구나 팀을 2부 강등의 위기에서 구하는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골을 말이야. FW이지도 않은 내가 데뷔전에서 그것도 1부 잔류가 걸린 중요한 일전에서 득점을 넣다니 그야말로 기적, 행운이었지.

- 플라멩구는 지금도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요?

 당연하지. 나는 10살 때부터 플라멩구에 입단하여 19살까지 플레이 했다. 약 10년간이나 신세를 진 클럽을 잊을 턱이 없지. 플라멩구에서의 추억은 앞으로도 계속 내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거기에 은퇴하기 전에 언젠가 한번 더 플라멩구에서 플레이 할 생각이다. 나를 키워준 클럽에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하고 말이지.

- 그 플라멩구에서 2003년에 크루제이루로 이적. 가자마자 팀은 3관왕을 달성하여 그 해의 타이틀을 전부 획득하였죠?

 재적한 것은 1시즌 뿐이었지만 덕분에 굉장히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시즌 우리들은 (반데를레이) 룩셈부르구라는 뛰어난 지휘관 아래서 클럽 첫 전국선수권 제패 그리고 브라질 사상 첫 3관왕을 달성할 수 있었어. 정말 익사이팅한 시즌이었지. 룩셈부르구 감독에게는 많은 것을 배웠다. 감독뿐만이 아니지. 그 팀에는 우수한 선수들이 아주 많아 선수 모두가 서로에게 자극 받으며 연습을 열심히 하여 날이 갈수록 팀 전체가 성장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어떠한 선수들이 있었나요?

 수비진에는 GK 고메스(현 토트넘)를 시작으로 마이콩(현 인테르나치오날레), 크리스(현 리옹), 루이장(현 벤피카). 그 외에도 알렉스, 에두(Edu Dracena), 데이비드 - 이상 페네르바체 - 등, 지금은 유럽의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유명한 선수들뿐이지.

- 확실히 엄청난 면면들이군요. 그런 선수들 틈에서 19살의 어린 당신은 볼란치 포지션에서 팀의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었단 말이죠? 결코 쉽지 않았을 터인데요?

 굉장히 힘들었지. 경험이 부족했기에 팀에 폐를 끼친 적이 많았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들과 플레이 하는 것이 즐거워 미칠 정도였다.

- 당신은 지금까지 계속 볼란치에서 플레이 한 것입니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말하면 내 어릴 적 우상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었다. 라이벌인 나라의 선수이기에 큰 소리로는 말하지 못하지만(쓴웃음). 필드 중앙에 자리잡고 격렬하며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참고로 하였었다. 다만 2005년부터 2시즌 재적했던 라싱 산탄데르에서는 당시의 감독에게 ‘윙을 맡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피오렌티나를 예를 들면 (마리오 알베르토) 산타나가 담당하고 있는 오른쪽 윙이다. 그때까지 전혀 뛰어본 적이 없었던 포지션이었기에 그 때는 정말 힘들었지(쓴웃음). 때문에 2007년 여름에 알메리아로 이적이 결정되었을 때는 내심 ‘럭키~’라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 그 알메리아에서의 지난 시즌은 당신에게 있어 비약의 해였습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알메리아에서의 나는 확실하게 팀의 중심이었어. 여기 피렌체로 말한다면 (아드리안) 무투와 같은 존재지. 지난 시즌 종료 후의 팬 투표에서는 6000표 이상을 얻어 팀 시즌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으니까. 성적은 34시합에 출장하여 7골. 만족할만한 1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당연히 여기 피오렌티나에서도 중심선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계시겠죠?

 물론이다. 피오렌티나에서도 무투와 같이 대신할 수 없는 선수가 될 생각이다. 단지 우선은 이탈리아 축구에 익숙해지는 것이 최우선. 이번 시즌은 포지셔닝이나 축구관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1년으로 삼았다. 덤으로 활약까지 할 수 있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시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싸움은 이골이 날 정도.

- 팀 동료 중에서는 누구와 가장 플레이 하기 쉽다고 느끼나요?

 누구와 플레이 하건 문제없다. 내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매 시합 선발 멤버가 바뀐다고 하여도 바꿀 필요가 없으니까.

- 그렇다면 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선수는?

 알베르토(질라르디노)이지. 그의 플레이는 그가 밀란에 있을 때부터 때때로 보았지만 그 때는 이렇게까지 굉장한 플레이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연 피오렌티나에서 함께 플레이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 때문에 이번 시즌 그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굉장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천성의 골게터. 틀림없는 일류 스트라이커다.

- 질라르디노의 플레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뛰어난 곳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득점감각. 이 한마디로 전부 정리된다. 높은 슛 기술은 말할 것도 없으며 공간으로 파고드는 타이밍이나 페널티 에리어 안에서의 포지셔닝도 좋다. 득점하기 위한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

-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축구에서 가장 커다란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리가 에스파뇰라에서는 중반에서 조금 차분히 플레이 할 수 있었어.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곧바로 압박이 들어와. 중반에서 볼을 건드릴 기회가 많은 나에게 있어 속도감 있는 플레이 템포에 익숙해지기까지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었지. 일반적으로 알려졌듯이 역시 전술면에서는 이탈리아 쪽이 위일 거라고 생각해. 개인보다는 팀의 규율이나 조직이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있으니까.

- 알메리아 시대와 비교해서 피오렌티나에서는 수비의 비중이 높아진 것같이 보입니다. 그것도 규율이나 조직을 중시하는 것과 관계되어있습니까?

 확실히 지금의 나는 최종 라인 바로 앞에서 플레이 하는 일이 많지. 지금까지의 축구 인생에서 3명이 형성하는 중반의 밑바닥을 맡은 것은 처음이니까. 처음엔 갈피를 잡지 못한 적도 많았지만 오해하지 마길. 결코 억지로 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지금은 새로운 포지션에도 완전히 적응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자신이 해야만 하는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당신은 투쟁심을 전면으로 내뿜는 터프한 플레이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이나믹한 플레이를 당신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라고 말해도 좋을까요?

 확실히 내 태클은 거칠며 다이나믹한 움직임도 내 무기다. 단,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상대에게 부상을 입힌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거칠기는 하지만 결코 더티하지는 않다. 골을 빼앗길 것 같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일부러 파울을 범하는 듯한 일은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필드 위에서는 어떠한 때라도 클린하며 ‘용감한 전사’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요는 정신적인 문제인 것이다.

- 당신은 어렸을 적부터 지우짓수(브라질유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투쟁심은 거기에서 길러진 것입니까?

 맞어. 이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우짓수는 축구에 굉장히 도움이 되. 상대에게 달려드는 투쟁심은 물론 일대일 장면에서 상대의 순간적인 틈을 놓치지 않는 통찰력, 더 말하면 몸싸움 장면에서의 포지셔닝에서도 지우짓수에서 배운 것을 살리고 있다.

-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지우짓수는 상대와의 머리싸움이나 서로 주도권을 쥐는 것이 중요한 스포츠이기에 축구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바로 그래. 머리싸움은 내 주특기지.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읽은 것은 이골이 날 정도. 지우짓수와 마찬가지로 축구에서도 항상 두수 세수 앞 플레이를 예측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가를 언제나 생각하면서 플레이하고 있지.

둥가보다 더 활약하는 것이 목표

- 올 시즌 세리아A에서는 몇 위가 될 것 같나요?

 우선은 하나씩 눈 앞의 시합을 소중히 하며 싸워가는 것이 중요하지. 당연하게도 그것이 쌓이고 쌓여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시즌 종반까지 상위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들에게도 충분히 우승 기회가 있지 않을까? 다만 당면의 목표는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4위 이내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 만약 우승할 수 있다면 당신이 가진 또 하나의 목표인 브라질 대표팀 입성에도 크게 접근하는 것이 될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되길 기도하고 있어. 브라질 대표팀에 선택되는 것은 내 어릴 적부터의 꿈. 브라질 사람에게 있어 저 카나리아 색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일이니까.

- 대표팀 감독 둥가가 예전 피오렌티나에서 플레이 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죠?

 응. 내 플레이 스타일이 당시의 그와 닮았다고 자주 비교되는 것도 알고 있어. 굉장한 영광이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활약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런 건방진 말을 하면 둥가에게 혼날 것 같지만(웃음).

- 피오렌티나와 같은 강호 클럽에서 활약하면 둥가 역시 당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터. 응원하니 열심히 해주길 바랍니다.

 고맙다. 피오렌티나에 조금이라도 더 공헌할 수 있도록 그리고 브라질 대표팀에 선택되기 위해서도 평소의 연습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하겠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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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드의 대관중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지쿠는 천천히 페널티 스팟으로 향했다.

 천천히 달리면서 오른발 인사이드 킥. 정확히 찬 볼이 골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모든 것은 계산대로였을 터였다.


 1986년 6월 21일.

 멕시코의 과다라하라의 하리스코 스태디움.

프랑스와의 8강 전은 20분 남은 상황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스코어는 1-1. 브라질은 PK의 찬스를 얻게 된다. 킥커는 지쿠. 그라운드에 들어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 잡은 볼을 한번의 스루패스로 브랑코에게 연결했고 브랑코가 태클에 쓰러졌다. PK. 자신이 만들어낸 기회를 자신의 결정짓는다 - 그것은 누구나가 생각했던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반전을 거듭하며 수정되었다. 계산대로 날아간 볼이 GK 바츠의 일생일대의 세이브에 의해 막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치며 힘없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은 프로에 들어온 이래 PK의 달인이 범한 단지 세번째의 실축이었다.


 이리하여 브라질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승부차기 끝에 한 번은 쓰러트렸던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33살.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 있던 늙은 영웅은 이 시합을 끝으로 카나리아의 셔츠를 벗게 된다. 이 결과는 어떻게 보면 그의 사커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라 추앙 받는 선수이지만 세계 축구 역사에서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만은 않다. 동시대의 아르헨티나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프랑스의 장군 미셀 플라티니에게 쏟아지는 절찬에 비하면 지쿠는 변변치 못하다. 그러나 마라도나, 플라티니와 지쿠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대표팀 주장을 맡은 수를 비교해 보면 91번의 주장을 맡은 마라도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71번의 주장을 맡은 지쿠 72번의 플라티니에 불과 한번이 모자란 정도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나 프랑스와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쟁이 심한 브라질에서 11년간이나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왔던 것이다.

 무시하지 못할 것은 골을 넣은 수에 있다. 대표에서는 펠레에 이어 역대 2위인 48골을 기록(2000 1월 기준..지금은 아마 호나우도가 넘어섰죠?). 플라티니가 41, 마라도나는 34골이므로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써 그의 득점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득점력의 높음으로 따지자면, 이러한 기록도 있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로 이적한 1년째인 83-84시즌에 24시합에서 19골을 기록득점왕에 오른 플라티니는 30시합에서 20. 1시합 평균 득점률에서는 플라티니를 능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리그를 제패한 유벤투스에서 주위에 뛰어난 선수들에게 도움을 받은 플라티니와는 달리 겨우 세리에B 강등을 면한 약소 클럽에서의 골 러쉬였던 것이다. 플라티니를 제치고 리그 MVP의 수상한 것은 그러한 가치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등번호"10"번으로서 라이벌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면서도 충분한 평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빅 타이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지쿠는 비운의 스타였다.


 본명 알투르 안트네스 코인브라. 결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젯거, 에두(한때 일본 대표팀 테크니컬 디렉터가 된 사람 - 역자주) 두 형이 프로축구 선수였을 정도로 혈통은 좋았다. 어렸을 적부터 두 형을 능가하는 재능은 인정받고 있었으나 주위사람들을 걱정케 하는 것은 빈약한 몸이었다. [사이보그]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 육체개조에 들어간 것은 그런 빈약한 몸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하자 마자 피지컬 코치와 정형외과 의사들로 구성된 "지쿠 개조실"에 의해 4년에 걸친 육체개조가 시작되었다지쿠는 자신 전용의 메뉴에 따라 기절할 정도로 힘든 근력 트레이닝을 담담히 행하면서 빈약했던 몸은 어느새 눈에 뜨일 정도로 튼튼하게 변해 갔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운동 기구와 맞대고 트레이닝을 쌓아가면서도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으며 보냈다고 한다. 근력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은 치아 교정에까지 이르러 얼굴의 응어리까지 없앴다. 괴롭고 힘든 개조계획이 끝날 즈음에는 소년이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콤플렉스는 전부 없어졌다.


 20살에 레귤러가 되면서부터 캐리어는 곧 전설이 되었다. 2년 후인 75년에는 플레멩구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대표팀의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우루과이와의 A매치에서 국가대표 데뷔를 했는데 그 날이 그의 22번째 생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하얀 펠레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던 2의 펠레에 대한 환상이 이제서야 마침표가 찍히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펠레와 같은 화려하고 트릭키한 플레이도, 놀랄만한 스피드도 아니었다. 지쿠 자신은 그것을 방향감각이라고 했다. 자서전에서 지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그라운드의 어디에 있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아래를 쳐다보고 있어도 내가 원하는 장소에 정확한 패스를 하고 또한 슛을 쏠 수가 있었다.

 그것이 선천적인 재능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기술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프리킥도 또한 끊임 없이 반복한 트레이닝의 결과라고 한다. 새로운 펠레는 신의 아들이 아닌 계속해서 땀을 흘린 노력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스루패스의 멋진 광경은 그것을 땀의 결정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의 발끝에서 패스가 혹은 슛이 쏘아질 때마다 관중은 일어섰고 상대팀 수비수의 무리는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한 예술작품의 전람회가 플라멩구의 에이스로써 맞이한 81년 토요타컵이었다.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단지 1번의 프리킥과 2번의 패스로 물리쳤다. 자로 잰 듯이 상대 수비수의 머리 위를 지나 뒤로 떨어지는 절묘한 로빙 패스와 막 닫히려는 듯한 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라운드의 스루 패스. 여기에 GK의 펌블을 유도한 프리킥을 포함한 3개의 어시스트로 플라멩구를 세계의 정점에 이끈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긴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단순히 슈퍼 스타의 탄생의 예고편으로써 기억되어야 했었다. 약 반년 후에 시작되는 스페인 월드컵이야 말로 그 무대에 어울렸기에......


 실제로 대회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는 젊은 날의 마라도나의 눈 앞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과시하였다. 대회 최고의 ‘10인 것을 세계에 인정시킨 지쿠가 가는 길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1982년 바로셀로나의 사리아 스태디움. ‘드림팀이라 절찬 받던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교활한 덫에 걸렸다. 파죽지세로 진군해 온 탤런트 군단이 계속해서 이탈리아가 보낸 암살자들의 손에 걸려 쓰러졌다.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무참하게 찢긴 지쿠도 또한 등뒤에 집요하게 붙은 젠티레의 악랄한 파울에 쓰러진 한 사람이었다29. 캐리어의 절정기였던 지쿠는 결승전은커녕 4강전의 그라운드도 밟지 못한 체 떠났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와의 차이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월드컵의 여신에게 계속 미움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플라티니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84년 유럽선수권에서 프랑스를 국제무대에선 처음으로 빅 타이틀로 이끈 것에 비해서 지쿠에게는 대표 레벨에서 자랑할 만한 실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보는 사람에게 꿈을 주는 것이 스타의 진정한 가치라고 한다면 지쿠 만큼이나 소년들의 마음을 흔든 영웅도 없다. 지쿠의 플레이를 보고 자란 소년들은  90년대 축구계를 석권하게 된다.

하나는 20세기 최후의 판타지스타로, 또 하나는 21세기의 슈퍼스타로......

 로베르토 바조와 호나우도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지쿠처럼 되고 싶었다"


Arthur Antunes Coimbra “Zico”

1953 3 3 리오데자네이로 킨치토에서 태어났다. 80년대를 리드한 이상적인 넘버 10.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소년시대의 우상은 펠레가 아닌 플라멩구의 스타 지자였다. 13살 때 명문 플라멩구에 입단. 세밀한 프로그램에 의한 육체개조로 신체의 약점을 극복하여 [사이보그]라 불리었다. 플라멩구에 있을 때 브라질 전국 선수권에서 4번 우승. 81년 리베르타토레스컵에서 우승하였고, 같은 해 토요타컵에서 우승하여 플라멩구를 세계 클럽 넘버원으로 이끌었다. 22세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78년 아르헨티나 대회를 시작으로 월드컵엔 3번 출장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FK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지만 그의 대명사는 예술적인 스루 패스였다. 이탈리아의 우디네세에 2년간 재적. 일본에서 현역생활의 피리어드를 찍었다.


;Satoshi Hojo


Ps; 외국어 발음은 아무래도 일본글을 번역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영어는 어떻게 때려 맞추겠는데 그 외의 외국어는 좀….)

Ps2;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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