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japan/2011/text/201101120002-spnavi.html
저자 : 우츠노미야 테츠이치

■ 서아시아 ‘예전 맹주’끼리의 대결

 7일 개막한 아시안컵도 11일로 5일째. 이날은 D조의 2시합이 행해져 이제야 출장한 16팀 전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된다. D조의 면면은 이라크, 북한, UAE 그리고 이란. 전부 월드컵 출장경험을 가진 팀들이 할거하는 이번 대회 유일한 조이다. 특별히 돌출된 강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양민학살이 가능한 약팀도 없다. 어떻게 보면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차전 카드는 북한 vs. UAE, 그리고 이란 vs. 이라크. 필자는 19시 15분에 알라이얀 스타디움에서 행해진 후자를 선택했다. 서아시아의 ‘예전 맹주’끼리인 멋진 카드이다.

 20세기말부터 21세기 서아시아 축구 정세는 윤택한 오일머니를 배경으로 한 중동국가의 태두가 눈에 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효시로 하여 UAE, 바레인, 카다르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서아시아 지역에 축구 문화를 정착시켜 현대적이고 세련된 축구를 보여주었던 나라라고 하면 누가 무어라 하던 이란이었으며 그리고 이라크였다. 한편 이 두 나라는 국제정치의 격동에 계속 농락당하여 그럴 때마다 대표 팀이 저조기에 접어 든 슬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1979년에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이란이 월드컵에 첫 출장한 다음 해의 일), 1980년부터는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 이로 인해 중동의 세력지도는 새로 쓰여 1990년대에 들어서자 맹주의 자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라크는 그 후에도 변변찮았다. 1990년에는 걸프전쟁 그리고 2003년의 이라크 전쟁으로 시작된 빈번한 폭탄테러로 인해 국내에서는 사실상 축구 시합이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2004년 아시안 컵에서 8강, 동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4강, 2006년 아시아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었으며 그리고 4년 전 아시안 컵에서는 우승을 이룩하는 등 근년의 이라크 부활조짐은 괄목할 만하다. 대조적으로 이란은 저조기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대표 팀에 대한 개입이 두드러져 개혁파에 지지를 보내던 주력선수 4명(알리 카리미나 하셰미안도 포함되어 있다)이 대표에서 ‘은퇴’ 당하는 사건이 발생. 먼저 번 월드컵 예선에서도 조 예선 4위로 끝마쳐 월드컵 출장의 꿈이 끝나버렸다. 그런 만큼 이번 아시안 컵을 어떻게든 부상의 계기로 하고 싶을 터. 그 첫 시합 상대가 이라크라는 것에 팀 관계자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숙명을 느꼈을 것이다.

■ 결승점을 불러온 모발리의 FK

 알라이얀 스타디움의 백 스탠드에는 이란과 이라크 양 팀의 서포터 집단이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 잡고 활발히 자국 대표 팀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주최국 카타르는 부유한 나라로 아시아 각국에서 카타르로 돈 벌러 온 많은 노동자를 다수 있기에 서포터의 수는 그럭저럭 모인다. 대개의 경우 백 스탠드의 좌우로 나뉘어 응원하지만 명색이라고 할 정도의 방책만 있을 뿐 특별한 완충지대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예전엔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나라들끼리였기에 ‘이거 괜찮을까?’하고 좀 걱정했지만, 서로 이국의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기에 서로 도발하는 일 없이 실로 평화적으로 성원을 보냈다.

 전반전에는 견실히 패스를 이어가며 우세로 시합을 진행시킨 이라크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때때로 날카로운 역습을 보여준 이란 - 이라는 전개가 계속 되었다. 양 팀 다 볼 탈취시의 몸싸움에 강하여 선수들이 부딪힐 적마다 나는 소리가 기자석까지 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 선취점을 올린 팀은 전 대회 챔피언인 이라크. 13분 왼쪽 SB인 카림이 사이드체인지하여 에마드가 오른쪽 사이드에서 헤딩으로 띄운 것이 이란 GK의 머리를 넘어 바운드하기 직전에 주장 유니스가 건드려 골이 되었다. 그 후 잠시 동안 이라크 주도로 시간대가 이어지지만, 42분 이라크의 클리어 볼을 얻게 된 이란은 테이무리안이 절묘한 스루패스를 하자 오프사이드 될까 말까한 타이밍에서 침투한 레자에이가 침착히 오른 발로 슛하여 동점으로 만들었다. 전반은 양 팀 다 물러서지 않고 1-1일채 하프타임을 맞이하였다.

 후반은 양 팀 다 빠른 공수전환을 거듭하는 전개에서 시작. 곧이어 20분이 지나자 서로의 장점을 봉쇄하였기에 교착상태가 되어 차츰 시합은 거칠어졌다. 그야말로 의지와 의지의 충돌. 그러면서도 여기까지 카드가 한 장도 나오지 않은 것이기에 굉장했다. 사투를 벌이면서도 실은 깨끗한 게임. 그러나 후반37분 교체로 들어간 이라크의 사에드가 파울을 범하여 이 시합 첫 번째 옐로카드가 나왔다. 킥커는 이 시합에서 몇 번이나 정확한 프리킥을 보여주던 모발리로 그의 슛은 잡으려 하던 이라크 GK 모하메드 카시드의 바로 앞에서 뚝 떨어지며 옆구리를 지나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이라크의 수호신이라도 볼의 궤적과 달려드는 상대편 선수의 움직임에 완전히 대응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킥커인 모발리의 기술을 칭송할 만하다. 결국 이것이 결승 골이 되어 이란은 영원의 라이벌에게서 귀중한 승점 3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 골 장면 ]

■ 스탯 이상으로 호각지세였던 양 팀

 승리한 이란의 고트비 감독은 이번 대회 종료 후 J리그 시미즈 에스펄스[清水エスパルス]의 차기 감독으로 결정되었다. 현재 46세. 이란 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하였고 거기에서 축구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네덜란드, 한국, 미국 클럽에서 코치를 역임한 후 27년 만에 고국 이란으로 귀국. 명문 피루지[각주:1]의 감독을 거쳐 대표 팀 감독이다. 그런 고트비 감독에게도 역시 이날 시합은 굉장히 어려웠나 보다.

 “상대가 이라크라는 것. 더구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이었고 이날이 우리 첫 시합이라는 점. 이상의 이유로 이 시합은 3가지 의미로 어려운 시합이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오랜 기간 라이벌임과 동시에 계속 정치적인 문제까지 낀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축구를 하며 이는 스포츠다. 거칠고 감정적인 게임이었지만 선수들은 확실히 축구에 집중해 있었다”

 시합 후의 스탯을 보면 이 시합에서 이란의 우위는 명확했다. 볼 점유율은 이란 61에 이라크 39. 슛 수는 이란 16(유효 6), 이라크 6(유효 3). 하지만 스탯으로 나온 것보다 양 팀의 실력은 거의 호각지세였으며 양 팀 다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팀 전체적인 면에서 이란 쪽이 위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긴 역사 속에서 배양된 양 팀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이 결과적으로 이 날의 ‘거칠고 감정적인’ 게임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정말 ‘서아시아의 클라시코’라 명명하고 싶을 이날의 일전. 알라이얀에 간 가치는 충분했다.

  1. 페르세폴리스 FC.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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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우츠노미야 테츠이치

■ 반세기 동안 멀어졌던 왕좌 탈환에 불타는 한국

 대회 4일째. 이미 A조와 B조에 속하는 8팀의 1차전이 끝나 이제야 이번 대회 전체적인 모습을 반 정도 볼 수 있었다. 당초 주최국인 카타르가 소속된 A조를 보고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제 밤 B조의 2시합을 보고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허술한 인식을 재고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FIFA 랭킹 100위대인 요르단(104위)과 시리아(107위)가 과거 이번 대회 3차례 우승한 일본이나 사우디아라비아를 오히려 압도하였기에 누구나 위기감을 품었을 것이다.(여담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패전으로 인해 감독이 교체되었다)

 어쨌든 이날은 알사드 스타디움에서 인도 vs. 오스트레일리아가, 알가라파 스타디움에서 한국 vs. 바레인의 시합이 펼쳐졌다. 우승후보로 꼽히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한국, 월드컵 예선이나 아시안컵 예선에서 몇 번이나 일본을 괴롭힌 바레인 그리고 3년 전 AFC 챌린지컵의 컵 우승국인 인도가 동거하는 C조. 인도 이외에는 어느 팀이건 8강 진출 가능성이 있는 ‘3강1약’으로 보면 그다지 틀리진 않을 것이다. 필자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한국과 바레인 카드 관전을 선택. 양 팀 다 일본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팀들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이웃나라 한국이 이번 대회에 임하는 ‘각오’라는 것을 확인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우승후보로 꼽히는 팀들 중에 가장 아시아 챔피언의 자리를 갈망하고 있는 팀은 다름 아닌 한국이다. 아시아 최다인 8차례 월드컵 출장을 자랑하며, 아시아 최고인 4강에 빛나는 실적을 가진 한국이지만 이상하게도 아시안 컵 우승은 1956년과 60년 두 차례뿐이다. 당시는 대회 초창기 때로 4팀밖에 출장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한국개최였던 1960년 대회에 출장한 팀은 이스라엘, 중화민국 그리고 남베트남. 현재 UEFA 소속인 이스라엘,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호칭을 강요당하기 이전의 중화민국(대만),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남베트남이 보이는 것에서 반세기라는 시대의 두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한국은 실로 반세기만의 아시아 챔피언 탈환에 불타고 있다. 무엇보다 주장인 박지성이 “이 대회를 끝으로 대표 팀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할 정도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월드컵 후 대표은퇴를 선언한 선수는 있어도 “아시안 컵에서 은퇴”라는 것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의 국보 박지성의 결의표명을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이번 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레인에게 2골! 광채를 내뿜은 구자철

 시합은 초반부터 공격하는 한국, 수비하는 바레인이라는 도식. 한국은 오른쪽에 이청용, 왼쪽에 박지성 그리고 원톱에 지동원과 그 보다 조금 아래에 구자철이 유기적으로 연동해가며 찬스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오른쪽 후방에서 기세 좋게 올라오는 SB의 차두리 그리고 정확한 프리킥을 자랑하는 CMF 기성용은 공격의 시발점. 상대하는 바레인도 한국에 맞추어 적확한 수비 블록으로 대항하면서 원톱의 제이시 존 오쿤와네에게 볼을 집중시키려 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에 비하면 공격 루트의 다양함에서는 부족함을 느꼈다.

 이날 한국에서 가장 광채를 발한 선수는 이청용도 박지성도 아닌 13번을 단 구자철이었다. 카가와 신지[香川 真司]와 같은 1989년생 21살로 소속은 제주 유나이티드. 2년 전 U-20월드컵에서 8강 진출에 공헌했다고 하지만 필자는 처음 보는 선수였다(작년 10월 행해진 한일전에서는 대기명단에만 이름을 올렸다). 날카로운 턴과 반응 거기에 과감한 슛. 종횡무진이라는 말에 걸맞은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패스를 받는 위치를 점하거나 공간을 만드는 것도 뛰어났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섀도 스트라이커다.

 이 구자철이 선제골을 넣었다. 40분 기성용에게서 스루패스를 받아 그대로 짧은 턴과 함께 오른발 슛. 볼은 바레인 DF가 뻗은 발에 맞아 붕 뜬 뒤 그대로 골에 빨려 들어갔다. 마치 전날 일본의 실점 장면 같은 골이 들어가 한국은 1점 리드로 전반을 마쳤다. 후반 7분에는 차두리가 호쾌한 미들 슛을 쏴 GK가 간신히 막지만 튕긴 볼을 구자철이 침착하게 집어넣어 2골 째를 넣었다. 이날 슛을 쏜 수는 박지성보다 1번 적은 5번이지만 유효슈팅은 3번(박지성은 1번). 그 중 2골을 넣은 것이기에 굉장한 결정력이다. 21살의 신성(新星)은 후반 33분에 벤치로 물러날 때까지 존재감을 자랑하여 시합 MVP에 뽑혔다.

 시합 종반이 되자 그때까지 낙승 무드를 날려버리는 듯한 사고가 한국을 덮쳤다. 페널티에어리어에 파고들던 알데킬을 곽태휘가 넘어뜨렸다. 이 플레이로 바레인은 PK를 얻었고 한국은 곽태휘를 레드카드로 잃었다. 후반 41분 이 PK를 아이시가 침착하게 넣어 1점차로 만든 바레인은 동점을 노리며 10명의 한국에게 최후의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려도 역시 한국은 단단했다. 한국은 마지막까지 중요한 위치를 확실히 점하며 1점을 끝까지 지켜 중요한 첫 시합에서 확실히 승점 3을 손에 넣었다.


[경기 하일라이트]

■ 첫 번째 시합을 확실히 준비한 한국

 C조의 다른 시합인 인도 vs.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임은 4-0으로 오스트레일리아가 압승하였다. 경기가 크리켓이라면 대등한 시합이었겠지만 축구라면 타당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1차전이 끝난 시점에서 C조는 1위 오스트레일리아, 2위 한국, 3위 바레인, 4위 인도가 되었다. 두 번째 시합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한국이 직접 대결. 이미 양 팀은 이번 대회 우승다툼의 전초전이 되는 2차전을 향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에게 1점차로 진 바레인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지만 2강과의 격차는 상상하고 있던 것보다 더 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실력만 본다면 일본과 예선에서 다투고 있을 즈음과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오랜 기간에 걸쳐 바레인의 약진을 견인해 왔던 '중동의 마술사' 체코 출신의 마차라 감독이 팀을 떠나 상대 팀이나 상황에 따른 타개책을 준비 못한 것을 보자면 그들에게 있던 위험한 이미지는 많이 없어졌다. 인도에 대해 말하자면 안타깝지만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날 시합은 새삼 한국의 저력을 실감하게 만드는 시합이었다. 이번 멤버 23명 중 작년 월드컵 멤버에서 남은 것은 반수 이하인 10명. 반대로 대표 팀 참가횟수가 1자리 수인 젊은 선수가 10명이나 있다. (이날 2골을 넣은 구자철도 10여 시합밖에 없다). 특필할만한 것은 FW진. 박주영이 부상으로 빠졌다곤 하여도 FW로 등록된 3명은 전부 23세 이하의 국내파로 대회 전 대표 팀 참가 횟수는 5시합 이하였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과감한 리빌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바레인을 상대로 확실히 결과를 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대표팀은 작년 말인 12월 26일에 한국을 출국하여 30일에 시리아 그리고 1월 4일에는 UAE의 클럽과 연습시합을 하였기에 빈틈없이 준비를 해놓고 1차전을 맞이하였다. 거기가 일본과의 큰 차이다. 결국 월드컵 출장회수나 유럽파의 머리수만으로 아시아 챔피언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가장 많이 자각하고 있던 팀이 실은 한국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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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spain/column/200802/at00016213.html

저자: 우츠노미야테츠이치

●● 눈이 보슬보슬 내리는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기자석에서갑자기 멀리 라스팔마스에서 플레이 하고 있는 후쿠다 켄지(福田 健二)가 떠올랐다.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일본은 첫 시합에서 태국에게 4-1로 이겨 좋은 출발을 보였다. 3차 예선은 필시 국내파 만으로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 예선, 그리고 본선에서의 험난한 싸움을 생각했을 때, 무엇보다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 강렬한 개성과 골에 대한 후각을 겸비한 [일본인답지않은 일본인 스트라이커]의 존재가 아닐까? 규격 외의 해외일본인 스트라이커인 타카하라 나오히로(高原 直泰) [국내파]가 된 현재 해외에서꾸준히 골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후쿠다 켄지말고는 없다.

2004년 일본을 뛰쳐나간 후, 클럽 과라니(Club Guaraní – 파라과이), 파추카(멕시코), 이라프아토(Club Deportivo Irapuato – 멕시코), 카스테욘(Club Deportivo Castellón), 누만시아, UD 라스팔마스(이상 에스파냐)에서 플레이. 지난시즌까지는 카스테욘을 제외한 나머지 클럽에서 1시즌 두 자릿수의 골을 쌓아 왔다. 단지 불운하다고 해야 할지…… 후쿠다가 소속하고 있는 곳은 [세군다]라고 불리는 2부리그. 따라서 현지에서 전해져 오는 영상도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에서그의 평가는 부당할 정도로 낮게 취급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시대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 듯하다. 팬들 사이에서 [후쿠다 켄지 대망론]이 조용히……그러나 확실히 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본인은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 무엇을생각하고, 또한 조국의 대표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일까? ●●

■ 섬 클럽. 라스팔마스에서

- 일본을 벗어난 지 벌써 4년이 됩니다만, 역시 이제는 [하폰(일본인), 하폰]이라는 말에는 익숙해지셨나요?

반대로 일본인인 것을 잊을 때가 있을 정도여서……(웃음) 잊지 않으려고 하는 쪽이 강합니다. (이쪽 사람들과) 함께 축구를 하며 식사를 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를하고 있으면 잊어버리게 되죠.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문에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과 일본어로 대화하며, 거울을 보고 난일본인이다라곤 하죠. 환경에 녹아 들어가는 것은 좋지만, 일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니까요.

- 올 시즌에 소속하고 있는 라스팔마스에 대해서입니다만, 지도에서 보면 에스파냐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으로, 거의 아프리카에 가깝군요. 역시 에스파냐 본토와는 굉장히 다른 환경인건가요?

건물이 에스파냐 같지가 않고 오히려 남미에 가깝지요. 말도 다르며, 무엇보다 날씨지요. 일년 내내 따뜻하기 때문에 익숙해지는데 애먹기도했으며 부상도 당했었습니다. 바로 전에 있던 누만시아의 소리아(Soria)라는 곳은 에스파냐에서도 가장추운 곳이었습니다. (지금이라면) 라스팔마스는 25도 정도고, 소리아는 -3도정도. 그렇기 때문에 식사나 수분의 섭취도 바꾸어 갔지요.

- 라스팔마스라고 하면, 발레론(데포르티보)의출신지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그런 타입의 선수가 많은가요?

그는 라스팔마스의 전설이죠. 누구나가 동경하는 선수입니다. 하지만원래부터 소질이 있는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지역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도 팀에서 이 고장 출신의 21 FW가 마요르카와 4년계약을 맺기도 했고요. 본토의 선수보다도 더 라틴 기질의 플레이를 하지요. 때문에 게으르거나 정신적으로 약한 선수도 있기도 합니다만 확실히 테크닉은 뛰어납니다.

- 섬 클럽이다 보니, 원정은 굉장히 힘들겠군요?

비행기로(에스파냐 본토까지) 가는데 3시간, 돌아올때는 기류의 영향으로 2시간 조금. 공항에서 또 이동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누만시아에서는 전부 버스로 이동했었습니다. 10시간, 12시간의 이동도 있었으니까요. 어느 쪽이 좋은지는 그 사람 나름이죠. 저는 어느 쪽도 상관 없습니다. 반드시 지켰던 것은 스트레치를 확실히하는 것. 버스에 계속 있다 보면 허리가 굳어지기 때문에, 호텔에도착하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스트레치를 하는 것. 그것만은 반드시 지키고 있습니다.



<파라과이, 멕시코, 에스파냐에서 플레이 했던 후쿠다. 올 시즌은 라스팔마스에서 플레이하고 있다>


■ 에스파냐 2부의레벨

- 후쿠다 선수는 카스테욘, 누만시아 그리고 라스팔마스라는 에스파냐 2부의 클럽을 전전해 왔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아무래도 2부의 이미지라는 것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레벨일까요?

이곳 에스파냐에서는 자주 언급됩니다만,1부의 중위권부터 2부는 전부 똑같다고.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은 차원이 다르지만 톱 5보다 아래라면 어디건 똑같다고들합니다.

- UEFA 컵 출전 클래스라면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고?

그건 확실합니다.

- 그렇다면 스코틀랜드나 오스트리아 정도와 비교한다면?

실제로 해 본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에스파냐 사람들은 모두 이런 말을 합니다. 에스파냐 2부에서시합에 나갈 수 없던 선수가 스코틀랜드나 그리스 1부에 가면 저건돈 때문이다라고(웃음).

그러고 보니, 요전번에 토너먼트 식의 대회가 있어서 로젠보리(노르웨이), 카이저슬라우테른(독일)과시합했었는데 우리들이 우승했지요.

- 예를 들면 후쿠다 선수가 올 시즌 만약 포르투갈 1부에 이적했었다면(실제로 오퍼가 있었다), 톱 리그이기에 미디어의 취급도 확실히 바뀔것입니다만, 그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엇을 []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웃음). 단지 저는 에스파냐 2부에서플레이하고 있으며, 거기서 평가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앞으로 일본의 젊은 선수들이 해외 이적할 경우, 유럽 2부 클럽에서 캐리어를 스타트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떤가요?

젊은 선수가 해외로 간다면 에스파냐의 2부라는것도 선택기(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2부는 (EU 이외의) 외국인 제한이 두 명밖에 없어서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남미, 멕시코,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니까요. 거기서부터 싸움이 되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에스파냐 2부에서 플레이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정말 운이좋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인 선수가 에스파냐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지난 시즌 소속해 있던 누만시아에서는 10득점을 올려 팀내 득점왕이 되었다>


- 일본인 선수의 에스파냐 도전은, 자이젠 노부유키(財前 宣之 – [운동량의 나카타 히데토시, 패스 센스의 자이젠 노부유키]라 일컬어 졌던 일본의 환타지스타. 부상을 달고 다녔기에 대표팀과는 연이 없었다. – 역자 주)선수가 로그로녜스(Club Deportivo Logroñes)와 계약(1996)한 이래, 여러명이 도전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오오쿠보 요시토(大久保嘉人)가 마요르카에서 1년 반정도 노력했었습니다만 역시 완전히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왠지 에스파냐라는 나라는 일본인 선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이죠. 어쨌든 (에스파냐 사람들은) 말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니까요. 버스로 10시간 이동한다고 하면, 10시간 동안 계속 주절대죠(웃음). 때문에 말하지 못하면 괴로워요. 하여간 이동 중에도 떠들며, 연습 중에도 떠들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제가 일본에서 직접 에스파냐로 갔다면 상당히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파라과이나 멕시코에 있을 때 에스파냐 어를 배웠지만 갑자기 에스파냐였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 말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중요한가요?

뭐 물론 축구를 하러 온 것입니다만 나는축구만을 하러 온 거다라는 태도라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축구를 하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대체로 2시간 정도. 그 이외의시간은 에스파냐라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이고, 나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말을 익히는 것, 동료들과 잘 지내는 것. 그런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후쿠다 선수는 어느 정도로 에스파냐 어를 마스터하고 있나요?

~ 어느 정도라야 [마스터 했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축구를 하는데 곤란하지 않을 정도가되는데 대체로 1년 정도. 하지만 아직이죠. 세세한 뉘앙스 같은 것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군이라며 배우는 것은 아직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어도 그렇지만요.

- 처음 파라과이에 갔을 때도 통역은 없었던 것인가요?

대리인이, ‘통역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해서(웃음). 하지만 저도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랭귀지 스쿨에는 다니지 않았어요. 파라과이의 신문에 저에 대해서실린 것이 있었기에, 궁금해서 사전을 펼치면서 읽거나 했었지요. 독학이라고할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파라과이엔 일본사람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죠.

- 즉 필연적으로 필사적으로 말을 익힐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후쿠다 선수는 원래부터 어학 공부는 좋아했던 것인가요?

저 어학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학교 다닐 때도 영어 수업을 굉장히 좋아했으니까요.

- 그러고 보니 후쿠다 선수의 블로그에서 (아스날 감독인) 웽거 감독과 재회했을 때의 이야기를 블로깅 하셨더군요. 그 때는영어로?

영어하고…… 그리고 그는 에스파냐어를 조금 할 수 있더군요. 2006년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서 비야르레알과 시합하기에, 갑자기 약속도 잡지 않고 호텔로 갔었죠. 그리고 벵게르(일본에서의 웽거 감독의 발음 역자 주) ~” 하니까후쿠다 상!” 하더군요(웃음). 경비가 굉장히 엄했지만 저만 통과시켜 주더군요. 지금의 제 이야기를하니까, “그런가? 잘 되었군. 여기서 하면 할수록 자신의 밑거름이 되지. 그런데 내일 시합 티켓은있나? 자 받게라는 식이었죠(웃음)

- 좋은 이야기군요(웃음). 웽거감독은 후쿠다 선수가 프로가 되어서 첫 감독이었죠?

나고야에서 저를 데뷔시켜 주었던 것이 웽거 감독이었습니다.

- 그 웽거 감독도 지금은 아스날의 명장으로 전세계의 슈퍼스타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긴장되지 않던가요?

유럽에 있으면 반대로 가까운 느낌이 들더군요. 긴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 올라운더 보다도 스페셜리스트



<후쿠다는 일본 선수가 에스파냐에서 성공할 수 없는 이유를 언어때문이라고 한다>


- 일본 선수와 에스파냐와의 상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되돌리죠. 플레이스타일이나 환경의 차이로 당황한 적이 있나요?

우선 볼 터치죠. 한번에 트랩을 해라, 한번에 패스를해라, 확실히 강하게 볼을 보내면, 확실히 컨트롤할 수 있다. 반대로 (패스가) 통통이면그 다음 플레이에 부담이 걸리기에 꽤 섬세한 부분까지 요구 받죠. 뭐 볼을 간수(볼 키프)한다는 점에서는 일본 선수도 잘하는 편이지만요. 단지 저도 최근에 일본 선수와 플레이 해 본적이 없어서……

- 필드의 상태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저는 멕시코에서 에스파냐로 왔는데요…… 멕시코는 굉장히 잔디가 길어서 볼의 이동도 늦죠. 하지만 에스파냐는 굉장히 잔디가 짧은데다가 시합 전에는 물도 뿌립니다. (볼의이동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때문에 정말 빨라서 전혀 다리가쫓아가질 못하더군요. 컨트롤 하나만 해도 처음엔 당황스러웠고요.

- 그런 환경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이군요. 그런데후쿠다 선수는 자신의 가장 큰 어필 포인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골을 넣는 것이죠. 헤딩은 지지 않으며 그리고…… 일본어로는뭐라고 말하더라…… 일순간의 움직임이라고 할까? 일순간에마크를 제치는 움직임이라고 할까…… 에스파냐 말로는 [데스마르케]라고 합니다만. 그리고 포스트 플레이.

- 확실히 2부라고는 하여도 골 수는 굉장하군요. 카스테욘에서의 한 시즌을 제외하곤 전부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정도로 해외에서 실적을 올리고 있는 일본인 스트라이커는 없죠. 아니면 후쿠다 선수가 정말로 에스파냐축구와 상성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에스파냐에서는 저에게 드리블 같은 거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골 앞에 듬직하게 자리잡고서 거기서 골을 노리라고. 누만시아에서는앞 선에서 몸싸움해서 이기라던지, 크로스 볼이 오면 DF의뒤편을 노리라던지…… 하는 움직임도 요구 받았습니다. 하지만일본이라면 드리블도 가능하고 포스트 플레이도 가능하며, 슛도 능숙한……하여튼 전부 요구 받을 것입니다.

- 과연…… 올라운더 보다도 오히려 스페셜리스트를 요구 받는군요. 감독에게는 평소 어떤 것을?

기본적인 역할 이외에는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선수는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고,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축구에 맞는 선수를 거기에 껴 넣으니까요. 키운다는느낌은 아니기에 감독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어렵죠.

■ 시드니 올림픽에 나갔다면 성장하지 못했을 지도……



<멈추어진 채로 있는 후쿠다의 대표팀 캐리어. 후쿠다가 다시 푸른 유니폼을 입을 날이 올 것인가?>


- 후쿠다 선수는 J리그에서 플레이 하고 있을 때부터 해외로 나간다는생각이 강했다고 하던데, 당시는 지금처럼 쉽사리 해외 이적을 하기에는 힘든 시대였었죠. 최근 제프 이치하라의 미즈노 코우키(水野 晃樹) 선수가 이적료 없이 셀틱으로 이적했습니다(육성비는 발생). ‘조금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나도……’ 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그런 것은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그런(파라과이나멕시코에서 플레이 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으며, 지금의제 밑바탕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을 돌아서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선택기는 그것밖에 없었으며, 파라과이에서 결과를 내지 않으면다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에서 유럽에 가주마~’라기 보다는 여기서 뭔가를하자라는 생각 쪽이 강했었죠. 정말로 하루하루를 소중히보낸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그리고 대리인의 협력도 있어멕시코나 에스파냐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대표팀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현재 후쿠다 선수의대표 캐리어는 시드니 올림픽 최종 예선으로 끝나 있습니다. 올림픽 본선에서 낙선했던 것은 역시 분하셨겠죠?

당연한 결과였죠. 나고야에 있을 때는 웨슬레이(Ueslei –브라질)이나 픽시(스토이코비치)가 있어서 시합에 나가기 힘들었으니까요.

- 만약 시드니에 갔었다면 하고 생각한 적은?

반대로 나빠져 있을 지도 모르죠. 대표팀에있으면 잘난 척 머신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지 않아서 좋았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의 나에게서 비추어보았을 때입니다만.

- 그 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던 타카하라 선수나 야나기사와아츠시() 선수는 A대표팀에서도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활약을 어떻게 보고 계셨습니까?

열심히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입니다. 그들은 그들의길에서 열심히 하고 있으며, 저는 그들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경험을 하고 있으며, 레벨이 높은 곳에서 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대표팀에 들어가는지어떤지에 대해서는 제가 아닌 남이 정하는 것이니까요.

- 하지만 역시 최근 대표팀의 움직임에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닌지요?

때때로 영상이 사무소에서 보내져 오기는 합니다만, 그것보다 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까…… 그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인터넷 같은 곳에서도 보고 있으니까 대체적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일본이 어떤 축구를 하고 있는지 까지는 모르죠. FW에 관해서는 뭐든 가능한 올마이티한 선수를 요구하고있는 듯한 경향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 [이거다]라는 무기가 있어 지금까지 해 왔기에 (날 불러주기에는) 조금 힘들지도……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 현역 시대의 목적지는 월드컵 남아공 대회

- 제가 왜 이런 것을 묻는가 하면, 최근 [후쿠다 켄지 대망론]의 조용히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책도 나왔으며, 이번엔 텔레비전 방송(*2 10일 방송한 [정열대륙] TBS 계열)에도 나온다고 하니, 그렇다면 더욱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가장 스트라이커다운스트라이커 후쿠다 켄지를 대표팀으로!]라는 듯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웃음)

물론 대표팀에는 들어가고 싶습니다. 기회가있다면(웃음)

- 예를 들어 올 시즌 시작하기 전에 J리그에서 오퍼가 있었다고들었습니다만. 일단 일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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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iMBC 기사 링크)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jtoto/column/200801/at00016053.html

저자: 우츠노미야 테츠이치

■ 누구도 [소동]의 본질을 말해 주지 않는다.

<바리엔테 코오리야마의 총감독에 취임한 조지 웨아 씨>

처음부터 미리 양해를 구한다. 필자는 이번 조지 웨아 씨()의 방일(訪日)을 어떤 면에선 [소동]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웨아 씨()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많은 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95년에는 아프리카 출신 선수로써는 최초로 발롱도르(유럽 최우수 선수상/현 세계 최우수 선수상), 이어서 FIFA 연간 최우수 선수상도 수상. 아프리카 연간 최우수 선수에는 3(89, 94, 95) 선출되었다. 클럽은 모나코, 파리 생제르맹, AC밀란 등에서 활약. 특히 밀란 시대에 보여준 초인적인 신체 능력으로 만드는 호쾌한 골 장면은 축구팬이라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웨아 씨() 2003년 현역을 은퇴한 후 2년 뒤인 2005년에는 조국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우리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낙선. 이후 잠시 동안 그 이름을 들을 수 없었지만 갑자기 일본에 온 것이다. 더구나 그를 부른 것은 [바리엔테 코오리야마(郡山)]라고 하는 올해(즉 이번 달)에 막 만들어졌을 뿐인 클럽. JFL(일본 3부리그 - 역자 주)도 지역 리그(일본 4부리그 - 역자 주)도 아니다. 후쿠시마(福島) () 리그 소속. 그것도 3부이다.

3부라고 하면, 일본 톱 리그인 J1에서 보면 8부 리그에 해당한다. 필자도 지역 리그( 4부리그)까지는 취재해 왔지만, 아무래도 각 현 레벨의 리그까지 다 돌아 볼 수는 없다. 필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서도 현 3부를 관전한 사람보다도 플레이 한 적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관전보다도 플레이 할 기회가 훨씬 많은 리그.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각 현 3부인 것이다.

이야기를 웨아 씨로 돌린다.

[라이베리아의 괴인] 18일에 일본에 오자, 곧바로 토우호쿠 신칸센(東北新幹線)을 타고 후쿠시마 코오리야마로 이동. 다음 날인 19일 코오리야마에서의 기자 회견에서는 실로 60개 회사의 미디어가 쇄도하였고, 그 중 반은 토우쿄우(東京)에서 달려 온 미디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날 보도를 보고 필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어떤 미디어건 웨아 씨, 바리엔테 코오리야마의 총감독 취임이라고 표면적인 사실을 보도할 뿐으로, 3부에 막 생겨났을 뿐인 클럽이 발롱도르, FIFA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던 인물을 [총감독으로 초빙]한 것이 얼마나 발칙하고 상식을 벗어난 [소동]인가, 그 본질적인 부분을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이번 웨아 씨의 방일(訪日) [라이베리아 와 코오리야마], [발롱도르 와 현 3]라는…… 너무도 미스 매치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폭발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킨 [소동]이었다. 그 본질적인 부분을 누구도 말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얼토당토않은 결합은 왜 어떻게 해서 성립된 것일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필자는 망설임 없이 20일에 토우쿄우의 어떤 호텔에서 행해진 웨아 씨의 미디어 대담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 사회 공헌을 말하는 웨아 씨.

꿈 속에 있는 것 같고, 아직 몸은 플로리다에 있는 것 같다(웃음)”

[라이베리아의 괴인]의 첫 목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시차와 방일 후의 과밀 스케줄로 인하여 이 날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한 웨아 씨. 하지만 그래도 정중히 우리들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일반적인 [괴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신사다움. 참고로 웨아 씨는 현재 미국 플로리다에 생활의 거점을 두고서는 그 곳의 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으면서도 정치가로써의 실적과 학력을 약점잡혔다고도 한다. 41살의 대학 생활은 틀림없이 2012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를 향한 포석일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도로도 굉장히 잘 정비되어 있어 굉장히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오전에 국회 의사당을 방문했는데 굉장히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번은 비즈니스로 일본에 왔지만 언젠가는 관광을 하러 오고 싶다

일본의 인상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웨아 씨. 필자는 [국회 의사당]이라는 단어에 ?’이라고 반응했다. 실제로 일본의 정치가들과 만나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래도 이번 웨아 씨의 방일(첫 방일이라고 한다)은 정치가로써의 목적도 다소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참고로 웨아 씨는 [Congress of Democratic Change(CDC)]라는 라이베리아 야당 제1당의 당수이기도 하다. 이번엔 당의 간사장과 야당 제 2당의 당수도 함께 왔기에 적어도 바리엔테 만을 위해서 방일한 것이 아니란 것은 명백하다.

어쨌든 이번 회견에 앞서, 어째서인지 클럽에 대한 이야기는 웨아 씨에게 질문하지 않아주었으면 한다라고 사전에 담당자에게 다짐을 받았다. “클럽과 웨아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표인 타치카와(立川)가 이야기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웨아 씨에 대한 질문은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되어, “한 나라의 축구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던가, “일본 축구 선수 중에 아는 사람은 있는가?”라는 막연한 것이 많아져 버렸다. 필자는 웨아 씨가 축구 선수에서 정치가로 변신하게 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질문을 해 보았는데, 그러자 웨아 씨는 실로 정열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축구 선수로써의 목표는 이미 인생의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달성할 수 있었다. 다음 스테이지로 내가 정치를 선택한 것은한마디로사회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베리아도 그렇지만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전쟁이나 굶주림 등으로) 죽음이라는 의미 조차 알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많다. 나는 우선 라이베리아에 평화와 사랑을 가져다 주고 싶다. 축구 선수로써 그리고 인간으로써 배운 것, 받은 것을 통해서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

그러면서 웨아 씨는 바리엔테에서의 도전도 언급했다.

코오리야마가 지금은 작은 클럽이다. 빅 클럽이 된다는 것을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장시키기 위해서 어째서 한계를 둘 필요가 있을까? 도전해 보는 거다. 그것이 나의 정치 스타일이다.”

■ 바리엔테를 만든 젊은 경영자

<바리엔테 코오리야마의 타치카와 미츠아키 대표>

웨아 씨의 회견은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어 거의 40분 정도 이어졌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질문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응해준 것에 대해서 새삼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렇지만 [라이베리아 와 코오리야마를 잇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결국 웨아 씨의 입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물론 필자에게 있어서도 웨아 씨는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이번 취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와 바리엔테와의 관계이다.

그런 필자의 의문에 답해 준 것이 [주식회사 바리엔테 스포츠 코오리야마]의 타치카와 미츠아키(立川光昭) 대표. 31살의 젊은 경영자는 우선 바리엔테의 이념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였다.

저의 이념으로써 [우선 J리그]가 아닌, 지역의 사람들이가족 전부가참가할 수 있는 듯한 지역 통합 스포츠 클럽이라는 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치원 세대부터 시니어까지 카테고리는 달라도 같은 이름의 클럽이 있어 나는 저기 출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듯한 클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에 융화됨에 따라 톱 팀이 J리그에 있던지 토우호쿠(東北)리그에 있던지 최종적으로는 팬이나 서포터가 어느 정도 모일지 또는 관객들이 어느 정도 들어올지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타치카와 대표와의 질문 응답에서 알게 된 것을 아래에 정리해 본다.

우선 그는 코오리야마 출신이 아니다. 야마나시(山梨) 태생으로 토우쿄우에서 자랐다. 사이타마(埼玉)의 고등학교에서 진지하게 축구에 임하여 처음엔 프로를 목표로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언젠가 클럽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그것을 위해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11개의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사업상 자주 가는 코오리야마에서 지역 통합 스포츠 클럽을 만들어 보지 않겠나라는 오퍼를 받았다. 1년 전의 이야기다.

코오리야마의 많은 분들에게 밖에서 사람들이 와 주지 않으면 이 지역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최근에는 J리그에 진출하고자 하는 지방 자치단체도 줄었습니다만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바리엔테가 웨아 씨에게 바라는 것은?

한편 타치카와 대표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인의 비즈니스 파트너를 통해서 웨아 씨가 라이베리아에서 운영하고 있는 [조지 웨아 사커 아카데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서 아프리카 지역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모아 축구뿐만 아니라 학업에도 힘을 쏟게 하여 축구 선수의 길이 끊겨도 사회인으로써 성공할 수 있는 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이념에 공감한 타치카와 대표는 매니지먼트 면에서 서포트를 약속. 곧이어 둘간의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웨아 씨도 일본에서의 활동에도 흥미를 갖게 되어 이번 일본 방문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코오리야마에서의 오퍼와 (웨아 씨의 건은) 거의 같은 시기였습니다만, 당초는 완전히 따로따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타치카와 대표)

그렇다면 바리엔테는 [총감독] 웨아 씨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지도자에 대한 교육, 프로 의식의 정착, 그리고 그 자신이 작은 클럽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클럽 운영에 대한 어드바이스. 거기에 해외, 특히 아프리카의 선수에 대한 정보. 그리고 교류의 촉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타치카와 대표. FC 류큐우(琉球 오키나와()가 있는 지역 역자 주)의 트루시에 감독과 같이 구체적으로 [연간 몇 일]이라는 듯한 약정은 없다고 한다.

웨아 씨도 대학의 수업이 있으니까 계속 일본에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오는 3월에 일본에 오실 때에는 조금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몇 일 확정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거기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면 더욱 더 힘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지도에선 선배 클럽을 리드

<발롱도르를 수상한 적이 있는 웨아 씨의 지명도는 잴 수 없을 정도이다>

그 후에도 타치카와 대표에게 클럽의 운영이나 전망에 관하여 여러가지 설명이 있었지만 너무도 길어져 버리기에 이 즈음해서 그만 둔다. 무엇보다 아직 클럽으로써의 실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인 것이다(참고로 1 23일 현재, 위키피디아에도 [바리엔테 코오리야마]에 관한 기술은 없다). 지금 여기서 클럽의 운영이나 전망에 대해서 이것저것 언급할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필자가 알고 싶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라이베리아와 코오리야마를 잇는 것]이었으며 이번 소동의 본질인 것이다.

현재 후쿠시마 현에는 [J리그를 목표로 한다]고 여겨지는 클럽이 2개 존재한다. 토우호쿠 리그 1부인 비안코네(Viancone) 후쿠시마(ビアンコ福島), 그리고 토우호쿠 리그 2부인 후쿠시마 유나이티드 FC(福島ユナイテッドFC). 비안코네에 이르러서는 같은 코오리야마를 홈 타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타치카와 대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두 팀 다착실히 전진하고 있으며, 이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시민에 대해서 침투라는 의미에서는…. 그것은 코오리야마에 가 보시면 알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역 앞에 어느 정도 깃발이 세워져 있는가? 얼만큼의 사람들이 (클럽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 하고 있다는 것은 멋지다고 생각합니다만 인지도라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낮다(고 밖에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웨아 씨에게 힘입어 인지도를 높여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토우호쿠 리그 소속의 라이벌에게 발롱도르와 맞부딪히게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반칙이며 그러한 발상 자체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우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실제로 해버렸기 때문에 여러 미디어를 말려들게 한 이번 [소동]이 되었다. 결과 바리엔테는 3개나 4개나 상위 카테고리에 있는 유나이티드나 비안코네에 대해서 적어도 인지도라는 면에서는 훨씬 앞서나가게 된 것이다.

■ 후쿠시마 FC의 실패를 거울 삼아

라고는 하여도 그들은 단순히 거대한 광고탑을 세운 것으로 멈추지 않고, 먼 미래 J리그 입성을 착실하게 내다보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우선 J리그]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현 리그에서의 특별 처치(카테고리를 단번에 뛰어넘는 것)도 조사해 두고 있었으며, 더욱이 팀 명인 [바리엔테]의 상표 등록도 끝내 놓았다고 하니 놀랄 따름이다. 참고로 호쿠신에츠(北信越)리그 1부에는 같은 이름의 [바리엔테 토야마(ヴァリエンテ富山)]라는 클럽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타치카와 대표는 알고 있었다.

토야마에서는 ‘YKK AP’애로우즈 호쿠리쿠(アロズ北陸)’가 현 협회의 요청으로 합병하여 [카타레 토야마]가 탄생함으로 인해 현 협회 차원에서 카타레를 응원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바리엔테 토야마는 J리그를 목표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타치카와 대표는 예전에 J리그를 목표로 했으면서도 1997년에 해산한 후쿠시마 FC’(이 팀엔 곽경근이 뛰었었다 역자 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전설의 클럽(JFL의 활약을 바탕으로 J2에 참가 신청을 하자마자 여러 사정으로 팀 해체 역자 주)의 이름을 들었을 때 필자는 이 인물이 진심인 것을 확신했다.

역시 홈 타운에서는 후쿠시마 FC의 실패로 인하여 어차피 J리그 클럽은 무리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있지요. 하지만 코오리야마의 인구는 34. 토우호쿠에서는 센다이(仙台) 다음가는 포텐셜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조금씩이라도 도전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웨아 씨에 관해서도 처음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부탁을 하니 와 주었으니까요. 처음엔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닮은 꼴의 가짜를 데리고 오는 거 아니냐는 뒷담화도 까였습니다. 그래도 와 주었던 것입니다!”

한편의 당사자인 웨아 씨도 코오리야마에, 그리고 일본에 무언가를 원했기 때문에 힘든 일정 속에서도 일본에 왔을 것이다. 적어도 돈이 목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실례지만 현 3부의 클럽이 낼 수 있는 돈이래 봐야 안 봐도 뻔할 것이다). 그렇다면 웨아 씨가 몇 번이나 역설했던 [사회 공헌]이 현 3부의 클럽과 어떻게 이어져 갈 것인가. 둘의 생각은 복잡하게 얽혀, 지금은 아직 명확한 형태로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21일 웨아 씨는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일본을 떠나, [조지 웨아 소동]은 막을 내렸다.

당초 다소 의심스런 느낌을 가지고 임했던 이번 취재. 하지만 실제로 당사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말들 하나에서 열까지 정열이나 꿈, 야심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라이베리아와 코오리야마를 잇는 것]이 과연 어떤 전개를 보여줄 것인가? 앞으로도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싶다.

조지 웨아 스포츠인

출생 1966.10.01 (해외 라이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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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트루시에 스포츠인

출생 1955.03.21 (해외 프랑스)

소속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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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japan/column/200605/at00009088.html

저자: 우츠노미야 테츠이치
 

[서프라이즈]는 무엇이었나?


 IC레코더로 회견의 음성을 다시 들어보았다.

 평소보다 엄숙히 선수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읽는 지쿠, [카와구우치]부터 시작하여, 이후는 [카아지], [알렉스] [낫카아타 히-데]하며 변함없는 멤버를 막힘없이 계속하여 23사람 째에 [마아키]의 이름이 불려지자, 회장에서 [오오~]하며 웅성거렸다. 이 순간 팽팽했던 회견장의 공기가 자연스럽게 풀리며 안도하는 분위기로 차 가는 모습이 재생된 디지털 음성에서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쿠보[久保 =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낙선과, 마키[巻 = 제프유니이티드 치바]의 역전 당선. 현 상태에 있어서 양 선수의 컨디션 차이를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다. 요 일주일간 계속 미디어에 의해 선전되어 온 [서프라이즈는 있는가?]라는 물음은 결국 [지쿠는 현명한 선택이 가능한가?]와 같은 뜻이었다.

항상 지쿠는 선수 선발의 기준을 [대표팀에 대한 공헌도]라고 명언해 왔다. 위로 여행으로 독일로 가는 것이라면 이 기준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싸우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독일에 가는 것이라면 때가 때이니 만큼 [공헌도]는 팀 편성의 장해물이 된다.

[공헌도]로 선택된 멤버 = 일본 최강 멤버라는 보증이 어디에도 없는 이상 지휘관은 개개의 선수에 대한 온정이나 의리나 아름다운 추억을 모두 떨쳐버리고, 냉정한 판단과 투철한 현실 인식에 따라 멤버 선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지쿠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라는 것. 이것이 소위 [서프라이즈]의 정체였다.


어쨌든 최후의 최후의 타이밍으로 지휘관은 쿠보를 포기하고 마키를 선택했다. 물론 쿠보의 드문 잠재능력을 누구보다도 평가하고 있던 지쿠에게 있어서 이 결단은 읍참마속의 기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정말로 쿠보는 굉장히 좋은 선수. 수년간 죽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았는데 그의 플레이를 정말 좋아했다. (중략) 어떻게 해도 완벽한 컨디션이 아니기에 마지막까지 생각한 결과 이러한 일(낙선)이 되었다.] (지쿠)


지쿠의 멤버 발표라 한다면 지금까지는 신선미도 기대감도 떨어지는 일이 많았지만 최후의 최후에서 지휘관은 승부사로써의 현실 인식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2대회 연속으로 눈물을 삼킨 쿠보에게는 불쌍하다는 마음도 있지만 이번 지쿠의 결단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주고 싶다.


높이가 없는 DF진, 경험이 없는 FW진


이번에 선택된 23명의 리스트에서 몇 개인가 신경 쓰이는 부분을 써 보겠다.

유럽 해외파는 과거 최다인 6명. 한편 국내파의 소속 클럽을 보면 간바 오오사카와 우라와 레즈, 쥬비로 이와타가 각각 3명으로 최다이다. 이외로 카시마 앤틀러즈에서는 오가사와라[小笠原]와 야나기사와[柳沢]의 두 명뿐. 지쿠가 처음 팀을 맡았을 때는 [카시마 지분]이라고 야유 받을 정도로 많은 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을 돌이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그러고 보니 나카타 코우[中田 浩 = FC 바젤 1893]도 예전엔 카시마였다.). 그러고 보면 쿠보나 마츠다[松田]라는 다른 선수와 바꾸기 어려운 재능을 다수 가지고 있는 요코하마 F-마리노스에서는 결국, 나카자와[中澤] 한 선수밖에 선택되지 않은 것도 이외라고 하면 이외였다.


포지션 별로 살펴보자.

우선 GK. 이 세 명은 철밥통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상의 레귤러 GK는 카와구치[川口 = 쥬비로 이와타]지만 등번호가 몇 번일지가 더 궁금하다. 카와구치의 [1]번에의 집착은 유명하지만, [23]은 그의 복귀 극을 상징하는 숫자. 과연 그는 어느 번호를 바랄까? 참고로 과거 2대회, 일본 골 마우스를 등번호 [1]이 지킨 적은 없다.


DF는 4백을 상정해서 X 2인 8명. 나카타 코우는 알렉스(우라와 레드다이야몬즈)의 백업으로써 DF에 등록되어있다. 하지만, 주~욱 둘러보아도 높이가 없는 수비진이다. DF의 평균 신장은 178.5Cm. 180Cm대는 나카자와(187)과 나카타 코우(182) 이 두 선수뿐. 이 높이로 비두카(188 = 미들스브로)나 프루소(187 = 레인져스), 아드리아노(189 = 인테르)와 대전해야 한다는 것이 약간 걸린다 - 아니 굉장히 걸린다.


MF는 FW쪽이 한 명 더 뽑혔기에 7명. 공격적 MF는 나카타 히데[中田 英 = 볼튼]를 포함한 3명, 수비적 MF는 4명이라는 구성이다. 얼핏 보면 나카무라(中村 = 셀틱)의 백업이 될 만한 선수가 보이질 않는다. 엔도우[遠藤 = 간바 오오사카]가, 키린 컵에서 공격적인 포지션을 맡은 적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그런 역할을 맡을 것인가? 어쨌든 [공헌도]의 차이로, 엔도우는 마츠이[松井 = 르망]를 제치는 것에 성공했다.


FW은 과거 최다인 5명. 그러나 뭐라고 할까……. 이 중에서 월드컵 경험자는 부상에서 막 나은 야나기사와(카시마 앤틀러즈) 단 한 명. 그 야나기사와도 전 대회에서는 노골이었다. 쿠보의 이탈로 팀 내의 A매치에서 최다 득점자는 17골의 야나기사와 이어서 타카하라(高原 = 함부르크SV)가 나카무라와 더불어 15골을 넣고 있지만 월드컵에서 이 숫자를 늘리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야나기사와가 하루라도 빨리 뛸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리고 뭐라 해도 마키. 얼마나 시합에서 뛸지 알 수 없지만 조커로 출장해서 스타디움을 들끓게 하는 그 존재감은 석년의 오카노(岡野)[각주:1]를 생각나게 한다(타입은 완전히 다르지만). 독일에서의 활약여하에 따라서는 이번 대회가 유럽 진출의 발판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외로 본 대회에서 크게 성장할 타입일 지도 모르겠다.


선발되지 않은 멤버들에 대해서


이즈음해서 낙선된 쿠보 이외의 선수들에 대해서도 언급해 본다.

우선 스즈키[鈴木 = 레드스타 베오그라드]. 쿠보와 마키의 존재로 인해서 발표 회장에 있던 기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일까? 스즈키가 선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지쿠에게 질문한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즈키라 하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트루시에 저팬의 스타팅 FW이며 2002년 대회에서 일본의 첫 골을 넣은 선수이다. 그 때부터 4년. 스즈키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 하나도 없는 것에 시간의 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역시 트루시에 저팬의 멤버로써 바로 직전인 키린 컵에서도 선발되고 있던 부동의 19번. 모토야마[本山 = 카시마 엔틀러스]의 이름도 잊을 수는 없다. 이 선수의 경우 현 체재에서 단순히 [머릿수 채우기]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FW로 기용되는 일도 있었다. 대표에서 서열은 동료인 오가사와라보다도 아래이며 특히 인상에 남는 플레이나 골도 없었다. 그래도 모토야마는 팀을 뒤에서 지탱하는 얻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도 사실. 그런 만큼 예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던 것은 모토야마에게 있어서도 우울했을 것이다.


무라이[村井 = 쥬비로 이와타]의 경우 이 날을 맞이하기 전에 비극적인 부상을 입었기에 안타깝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지쿠에게 있어서는 나카타 히로쪽이 서열이 위였을 테지만, 그래도 그의 정밀한 크로스는 버리기는 아까워서 알렉스의 백업으로서는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확실히 치료를 받아 하루라도 빨리 필드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


가장 아깝고 가장 재능을 기대 받았으며 그리고 지난 시즌 가장 유럽에서 성공한 일본인 마츠이의 낙선은 낙담 이외에 뭐라고 할 수도 없다. 나카무라의 백업으로써는 더할 나위 없으며 연령적으로도 큰 무대를 경험하기에 가장 이상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프랑스의 팬들도 인정한 그 테크닉을 독일에서도 보고 싶었던 것은 결코 나뿐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츠이가 뽑히지 않은 것은 현 대표뿐 만아니라 4년 후의 대표에게 있어서도 비운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마츠이와 같은 아테네 세대의 DF 모니와[茂庭 = FC 토우쿄우]의 낙선도 이외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이 정도로 높이가 없는 일본 수비진에게 있어서 나카자와의 대역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모니와였다. 또한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계에서 얻은 쓰라린 경험도 팀에게는 플러스 재료가 될 터였다. 그러나 올 해 들어서부터 대표에 소집은 받지만 거의 출장하지 못했다. DF라는 포지션이기에 서열을 올릴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은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사토우 히사토[佐藤 = 산프레체 히로시마]. 어떤 의미로 본인에게도 주위에도 예상된 결과였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할 사토우는 아니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올해 들어서부터 사토우의 플레이에는 대표에서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도 장난이 아닌 [굉장함]과 눈을 번쩍 뜨게 할 [상쾌함]이 느껴졌다. 대표에서는 FW의 서열에서 제일 마지막, 히로시마에서도 이기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 최하위 근처를 방황했다. 어디로 가든 역경이라는 속에서 결코 비탄에 빠지는 일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던 그의 한결 같은 모습에, 때로는 냉소적이 되기 쉬운 팬의 마음에 뜨거운 열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대표에서의 싸움은 우선은 종결. 그러나 J리그에서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된다. 필자는 결코 히로시마 팬은 아니지만 사토우 히사토라는 풋볼러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싶다.


약속으로 끝난 [아테네 경유 - 독일 행]


어쨌든 독일로 향하는 23인의 사무라이들이 결정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좀 더 긍정적으로 [힘내라~!]라는 내용의 원고를 쓸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협회도 팬도 미디어도 스폰서도, 그야말로 거국일치된 한 목소리로 성원을 보내는 것은 대표가 독일에 가서부터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번 멤버 선출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문제 제기하고 이 글을 끝내고 싶다.


그건 다름 아닌 그 [아테네 세대]에 관해서다.

이번 23명 중에 아테네 올림픽 대표 멤버 중에서 선출된 것은 오노[小野 = 우라와 레드다이야몬즈]와 코마노[駒野 = 산프레체 히로시마]뿐. 라고는 해도 오노는 물론 오버 에이지였으며 코마노도 부상 때문에 최종 예선에는 출장하지 않았다. 그렇다, 저 아부다비에서의 사투(선수 대부분이 원인 불명의 설사에 고통 받았다)나, 토우쿄우[東京]-코쿠리츠[国立]에서의 환희([보이지 않는 적] 바레인과의 데드 히트)를 경험했던 선수들 - 앞서 이야기 한 마츠이나 모니와 외에도 여태까지 지쿠에게 소집된 적도 있는 아베[阿部 = 제프유나이트드 치바], 콘노[今野 = FC 토우쿄우], 타나카 타츠야[田中 達也 = 우라와 레드다이야몬즈], 오오쿠보[大久保 = 전 마요르카], 이시카와[石川 = FC 토우쿄우] 또는 지쿠가 쳐다보지도 않았던 투리오[鬪莉王 =우라와 레드다이야몬즈], 히라야마[平山 = 헤라클레스], 나스[那須 =요코하마 F마리노스], 타카마츠[高松 = 오오이타 트리니타], 토쿠나가[徳永 = FC 토우쿄우](거기에 그들과 동세대인 하세베[長谷部 = 우라와 레드다이야몬즈]를 더하면 좋을 것이다)등등. 그러한 차세대를 짊어져 갈 세대의 재능들이 이번에 한 사람도 뽑히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당시의 야마모토 마사쿠니[山本 昌邦] 올림픽 대표 감독이 캐치 플레이즈로 사용했던 [아테네 경유 - 독일 행]은 결국 입으로만 한 약속밖에는 되지 않았다.

라고는 해도 이것은 야마모토 감독 때문도 지쿠 감독때문도 아니다. 책임은 세대 간을 연결할 비젼을 제시하지 못한 일본 축구 협회에게 돌려야 한다.


생각해 보면 98년 멤버에는 21살의 나카타 히데와 18살의 오노가 있었다. 2002년에는 빼어난 활약을 한 젊은 선수는 없었지만, 카와구치, 나라자키[楢崎 = 나고야 그램퍼스에이트]의 GK진, 그리고 나카야마[中山 =쥬비로 이와타]와 아키타[秋田 = 나고야 그램퍼스에이트, 당시 가시마 앤틀러즈]의 베테랑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전임자인 투르시에가 찾아낸 [황금 알]들이었다. 이러한 과거의 선행 투자가 지금의 대표를 지탱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지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현 감독은 이런 유산을 낭비할 뿐으로 다음 세대를 향한 선행 투자라는 것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이번 리스트로 눈을 돌려주길 바란다. 이 중에 4년 후의 대표 캡틴이나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는가? 4년 후의 월드컵 본선으로의 꿈을 맡길 수 있을 듯한 [미래의 미야모토(宮本)]나 [미래의 나카타 히데]를, 이 리스트에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이 리스트는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4년간의 결과이다. 이 사이에 아테네 세대의 정예를 퍼스트 팀으로 올려 주는 방책이나 그라운드 디자인이 제시되지 않은 채 오늘이라는 날을 맞이해 버렸다. 그리고 현재 25세 전후인 아테네 세대는 가장 성장할 시대에 세계를 체험하는 기회를 [빼앗겼다]는 것이 되었다. 4년 후가 있어?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2010년 만약 월드컵 본선 출장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이미 그들은 29세. 지금의 나카타 히데와 같은 연령으로 난생 처음 월드컵을 맞이하게 된다. 이 현실을 우리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멤버 발표에서 하룻밤이 지났다. 오늘 스포츠 신문 각지는 마키 일색. 인터넷에서도 [쿠보가...][마키가...]하며 떠들썩하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23명의 리스트에서 단순히 독일에서의 시합만을 논하는 것은 철이 너무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지쿠가 생각한 끝에 제출한 리스트. 그 반대편에 비쳐지는 포스트 월드컵의 풍경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직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1. 1998년 예선 플레이오프 이란전에서 골을 넣어 첫 월드컵 출장을 결정지었다. 일본에선 조커의 대명사로 불림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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