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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07 고도화된 전술로 인해 태어난 4-2-3-1이 잉글랜드의 대세가 되었다. by 渤海之狼
  2. 2009.01.17 재능이 태어나는 장소 (지에구/브레멘/브라질 대표) by 渤海之狼

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90129_1.html
저자: 조나단 윌슨
일본어 번역: 아베 히로시 알렉살더

 30여 년 전에 잉글랜드 축구에는 4-4-2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고도로 전술이 발전함에 따라 시스템이 다양화되었다. 잉글랜드 전통의 4-4-2에 이은 새로운 유행으로써 프리미어 리그의 많은 클럽들이 4-2-3-1을 도입하고 있다.

 1970년대.
 잉글랜드에는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골을 양산한 콤비가 있었다. 리버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존 토샥(John Toshack)과 케빈 키건(Kevin Keegan)의 2톱이다.

 토샥과 키건은 1971년에 콤비를 결성하자마자 화려한 연계 플레이를 펼쳐 리버풀은 양 선수가 재적했던 6년간 3번의 리그 우승을 이룩했으며 1977년에는 유럽까지 제패했다. 그들의 플레이는 언젠가부터 ‘텔레파시로 서로 교신하는 거 아냐?’라는 말들이 나오기에 이르러 BBC가 이 ‘텔레파시 설’을 시험해 보기 위해 테스트를 하자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BBC는 어느 프로그램에 토샥과 키건을 게스트로 초대. 키건에게만 카드를 보여주고 토샥이 카드에 쓰여진 문자를 맞추는 실험을 행했는데 놀랍게도 토샥은 굉장히 높은 확률로 문자를 적중시켜 수 백만의 시청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텔레파시’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듯 했다. 그러나 20년 후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토샥이 사태의 진상을 고백했다. “실은 키건 뒤에 있던 유리에 카드의 문자가 비쳤었거든”

 이 에피소드를 이 이상 파고들어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냐 하면 당시 축구의 주역이 2톱이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70~80년대 클럽은 4-4-2를 채용하고 있었다. 리버풀의 토샥과 키건을 시작으로 80년대 리버풀을 견인했던 케니 달글리쉬이안 러쉬(Ian Rush)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마크 휴즈브라이언 맥클레어(Brian McClair) 등 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도 팬들의 관심을 주목시키는 것도 항상 앞 선의 둘 이었던 것이다.

 당시 2톱의 역할은 현대 축구만큼 복잡한 것이 아니었고 조합도 2개의 패턴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타겟맨과 피니셔의 조합. 90년대 후반에 선덜랜드를 약진시킨
나이얼 퀸(Niall Quinn)과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 첼시에서 일세를 풍미한 토레 안드레 플로(Tore André Flo) 와 잔플랑코 촐라(Gianfranco Zola)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크리에이터와 피니셔 콤비. 서두의 에피소드에 나온 토샥과 키건 외 80년대의 잉글랜드 대표팀의 2톱
피터 비어즐리(Peter Beardsley)와 게리 리네커 등을 대표적인 예로써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축구는 크게 변화하였다. 현대 축구는 당시와 비교하여 보다 치밀해지고 조직적이 되어 전술이나 시스템도 다양화. 이에 따라 FW의 역할에도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여 그 평가기준도 바뀌게 된 것이다.

4-2-3-1이 현대 축구의 주류로

 축구는 말할 것까지도 없이 누가 골을 많이 넣느냐는 다투는 스포츠다. 그러나 최근은  이기기 위한 축구보다도 지지 않기 위한 축구가 보다 중시되고 있다. 즉 득점을 올리는 방법보다도 실점을 막는 방법에 중점을 둔다. 원정에서는 어떻게든 무승부로 가져가고 홈에서 승리를 거둔다 - 요 5시즌 리그의 패자는 이렇게 타이틀을 손에 넣어왔다.

 지지 않는 축구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 받은 것이 4-2-3-1이다.
 이 시스템에는 두 가지 방법론이 있다. 하나는 4-4-2에서 FW를 1명 줄이고 수비형 MF를 투입하는 수비적인 전법. 이 전술을 채용할 때 1톱은 포스트워커 겸 피니셔라는 중요하고 어려운 역할이 주어진다.

 또 하나는 양 측면에 FW와 동등한 공격력을 갖춘 창조적인 선수를 배치하는 포진. 양 측면 MF의 전방에 공간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데 그 컨셉트는 4-3-3과 거의 마찬가지이기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수비력뿐만 아니라 공격력까지 현저히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현재 프리미어 리그에서 수위다툼을 벌이고 있는 첼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리버풀 세 팀은 이 시스템을 능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첼시는 4-2-3-1의 선구자적인 존재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 시스템을 채용한 것은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감독이 취임한 올 시즌부터. 단 2004-05 시즌부터 그 기반이 되는 4-3-3으로 시합을 해 왔기에 양 측면에 공격수를 둔 포진에는 익숙해져 있다.

 4-3-3을 도입한 것은 모리뉴 전 감독. 그는 앞 선의 3명을 공격에 전념시키고 후방 7인으로 지키는 <분업제>를 확립함으로써 성과를 올렸다. 한편 스콜라리 감독은 양 측면에 조 콜이나 데쿠 등 테크니션을 배치하는데 이는 중반의 5명을 공격에 참가시킴으로써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선택기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다. 약간의 스타일 차이는 있지만 양 시스템의 전술기반은 같다. 그들은 5년을 투자해서 성숙도를 높여 4-2-3-1을 완성의 영역까지 높인 것이다.

 단 현 포진이 최고의 전술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확실히 톱 스코얼러인 니콜라 아넬카는 전반전만으로 14골을 넣었지만 팀 성적이 동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아넬카 자신도  빅 게임에서는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볼튼 시대의 은사 샘 알라다이스는 아넬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GK와의 1대1이라면 아넬카만큼이나 뛰어난 선수가 없다. 단 그의 득점패턴은 단순하다. 상대 DF의 뒤를 노린 뿐이니까”. 그가 강호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골 앞에 밀집지대를 만들어 수비를 굳건히 하는 상대와 대전할 시는 무조건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활약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첼시가 수위로 부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아넬카 1톱 기용에 원인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칼럼에서 몇 번이나 썼던 대로 역시 디디에 드록바의 존재 없이 그들의 패권탈환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드록바는 우수한 골 사냥꾼일 뿐만 아니라 포스트 워커로서도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밀집지대에 우뚝 버티고서 아넬카 혹은 조 콜이나 데쿠가 공간을 파고든다. 이런 형태를 구축할 수 있다면 빅 게임에서도 충분히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드록바와 아넬카를 동시 기용함에 있어 어느 시스템을 채용할지 고민해야겠지만. 4-2-3-1의 [1]에 드록바, [3]의 중앙에 아넬카를 놓은 형태 혹은 4-4-2의 2톱에 둘을 배치하는 포진. 또는 4-3-3의 중앙에 드록바, 윙에 아넬카를 두는 진용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의 <공존>이 팀 부상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새로운 전술을 도입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전통의 4-4-2를 기본형으로 하면서 4-2-3-1을 옵션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패턴은 다채로워 1톱에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나 웨인 루니 혹은 카를로스 테베스를 배치. 1.5열에 루니나 라이언 긱스 양 측면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루니, 박지성 등을 기용하여 대전 상대나 상황에 따라 응용한다.

 실은 4-2-3-1을 병용하기 시작한 지난 시즌 초반에는 팬들에게서 야유에 가까운 ‘4-4-2’콜이 쏟아졌다. 그들은 2톱의 공격적인 포진을 보고 싶다고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야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왜냐하면 호날두, 루니, 테베스의 하모니가 ‘4-4-2’와 맞먹는 파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올 시즌 4-2-3-1의 버전 업을 시도하였다. 1톱에 운동량의 테베스를 대신하여 포스트 워커인 베르바토프를 기용. 베르바토프에게 조연을 맡겨 그 주변을 헤집고 다니는 호날두나 루니의 득점력을 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지금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며 옵션으로써 확립되었다고도  단정지을 수 없다. 20시합을 치르고 33이라는 득점수도 지휘관을 만족시키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바토프가 팀에 녹아 들며 생각했던 대로 활약한다면 놀랄만한 결과로 이어질 터이다. 수위 리버풀을 사정권내에 둔 지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습은 이 새로운 전술의 완성과 함께 시작될 지도 모른다.

전술의 고도화에 따라 FW의 역할이 크게 변화

 현재 4-2-3-1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리버풀이다. 지난 시즌 후반 페르난도 토레스를 1톱에, 사비 알론소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더블 볼란치에 배치하자 공격과 수비의 질이 향상. 올 시즌은 4-4-2와 4-2-3-1을 병용하여 19년 만의 리그 제패를 향해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덧붙여 말하면 그들이 기본 시스템으로 채용하는 4-4-2도 변칙 1톱이라고 볼 수도 있다. 2톱은 토레스를 전방에 로비 킨을 후방에 둔 가로가 아닌 세로 관계. 피니셔 겸 크리에이터인 토레스는 득점력과 어시스트 능력을 겸비하고 있어 1톱에 적합한 FW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킨은 수비 뒤편으로 파고드는 것을 장점으로 하는 스피드 형. 토레스가 앞 선에서 여러 가지 시도하고 틈을 노려 킨이 파고든다. 이 공격 패턴을 보는 한 1톱이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터이다.

 리그 초반 토레스가 부상을 당하고 킨의 컨디션이 나쁜 상황 하에  있으면서도 리버풀은 수위를 지켰다. 그리고 후반전 토레스의 복귀와 함께 킨도 컨디션 회복. 공격진이 제 기능을 갖춘 현재 염원인 리그 제패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4-2-3-1이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다. 2톱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30년 전을 생각해보면 커다란 변화이다. 그리고 전술이 다양화된 현대 축구에 있어서 감독이 가장 맘에 들어 하는 FW는 타겟맨, 크리에이터, 피니셔라는 3가지 역할 중 둘 이상을 가진 범용성이 높은 선수이다. 드록바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그 모든 것을 갖춘 FW라고 말할 수 있다. 2을 갖춘 선수의 대표격은 루니나 토레스 등이 아닐까?

 이렇게 둘 이상의 능력을 가진 FW가 최저 1명밖에 없으면 전술은 제 기능을 못한다. 단적으로 말해 ‘슛을 잘 차는 것만’, ‘헤딩이 강할 뿐’인 FW로는 작전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축구는 고도로 치밀한 스포츠가 된 것이다. 진짜 ‘텔레파시’라도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ps;올라오자 마자(1월 29일)에 번역했던 것이긴 한데 워낙 게을러서~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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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90105.html
인터뷰: 토마스 제(Thomas Zeh)
일본어 번역: 아베 히로시 알렉산더

 

 최고급의 기술과 창조성 넘치는 플레이로 브레멘의 상징적 존재가 된 사령탑 지에구(Diego Ribas da Cunha).
 프로로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그가 그 원점인 산투스 시대에 대해서 말한다.

 2002년 브라질 선수권.
 난조를 보이고 있던 산투스가 이 가혹한 전쟁에서 영광을 차지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의 지휘관 에메르송 레앙(Émerson Leão)은 대담하게도 어린 선수를 기용하여 팀 쇄신을 꾀하고 명문 산투스를 멋지게 부활시켰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두 사람의 천재 - 당시 18살의 호비뉴와 17살의 지에구이다. 10대인 둘은 활력 넘치는 플레이로 공격진을 리드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부분도 있었지만 두려움 모르는 대담한 발상과 고도의 테크닉으로 팬들을 매료하여 유명한 <영 산투스>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6년.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지에구는 현재 월드클래스 MF로 성장하였다. 소속팀 브레멘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사령탑이 되어있으며 동시에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귀중한 전력으로써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는 이 인터뷰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브라질 대표팀에 관하여, 산투스 시대부터의 친구 호비뉴에 관해서, 축구 선수의 커리어에 관해서 냉정히 분석하는 모습은 그가 필드 위에서 보여주는 현명한 볼 처리를 연상케 한다. 젊은 천재사령탑이 말하는 축구관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펠레 덕분에 연습에서 진지해졌다.

- 올 시즌은 힘든 싸움이 계속되고 있군요. 리그에서는 16라운드를 끝내고 10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고 UEFA 컵으로 시프트.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운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공격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으며 수비진에 부상자가 나온 몇 시합을 제외하면 수비 역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 확실히 리그에서 총 득점은 바이에른과 마찬가지인 37. 당신 자신도 8골 3어시스트로 결코 나쁜 숫자는 아니군요.

 맞아. 사실 바이에른과의 시합이나 호펜하임과의 시합, 헤르타 베를린과의 시합에서는 5득점을 넣으며 승리했으니까 실마리만 풀면 단번에 부상할 수 있다고 보는데…. 뭐 곧 있으면 겨울 중단기간에 들어가기에 거기서 어떻게 재정비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어쨌든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타이틀의 가능성이 있기에 후반전엔 온 힘을 다 쏟을 생각이다.

- 그런데 실례지만 브레멘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내도 좋을까요? 사실 오늘은 당신의 커리어를 테마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브라질 시대의 이야기 같은 것을요. 괜찮을까요?

 물론 오케이다. 브라질의 이야기라면 대환영이다.

- 그럼 당신이 볼을 차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축구를 시작한 것은 몇 살 때였습니까?

 5살. 아버지가 하고 있던 조기축구에 나를 데려갔었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어른들은 작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조심스러웠지. 단 브라질이기에 슛 찬스만은 절대로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나는군(웃음)

- 그때부터 축구에 빠져버린 것이군요.

 그렇지. 잘 때도 볼을 껴안은 채 침대에 누웠으며 집 안에서도 볼을 찼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서 리프팅하다가 어머니가 소중히 여기시던 그릇이나 장식을 부셔버린 적이 있었지.

- 그 후의 전개는 안 듣기로 하지요(웃음). 그리고 11살에 산투스에 입단하게 된 것인데, 브라질에서 산투스라고 하면 엄청난 명문 클럽이지요? 그 영웅 펠레가 오랜 기간에 걸쳐 플레이 했던 클럽이잖아요.

 펠레의 영향력은 지금도 굉장해. 그는 당시부터 나와 호비뉴의 잠재능력을 꿰뚫고 있어 우리들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고 하더군. 그것을 듣고 엄청 흥분했지 ‘펠레가 우리들을 주목하고 있다고?!’하면서(웃음). 그 덕분에 그 전보다 훨씬 진지하게 연습하게 되었지. ‘재능만으로는 크게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이 펠레의 입버릇이었으니까.

- 당시 동경하던 선수는? 역시 펠레였나요?

 아니 내 아이돌은 라이(Raí)였어. 상파울루나 파리SG 그리고 브라질 대표에서 10번을 짊어졌던 선수야. 굉장히 우아한 스타일로 패스는 정확 그 자체. 그런 플레이에 흠뻑 빠졌었지.

남아공 월드컵에 무슨 일이 있어도 출장하고 싶다.

- 고향을 떠나 산투스에 입단하였을 때 양친은 어떻던가요?

 어머니는 굉장히 우셨지.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지는 것이 괴로우셨을 거야. 아버지는 ‘남자에게는 언젠가 이러한 시기가 찾아오는 법이지’라고 달관해 있었던 것 같지만.

- 산투스의 하부조직에 있을 때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엔 울고 싶었을 정도로 외로웠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도 고민이 있어도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곁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문제 같은 것은 전부 내다버려주마. 슬픔은 언젠가 없어진다’고 기분을 리플레시하며 생각하였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귀중한 시기였어. 축구 선수는 ‘꿈의 직업’이야. 당연 강한 의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며 네거티브한 정신상태로는 성장도 멈추어 버려. 기숙사에서는 그런 것을 배웠어.

- 후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호비뉴와 만난 것도 산투스의 기숙사에서였죠?

그래. 나와 호비뉴는 산투스 시대 깊은 우정을 맺었지. 지금도 매일같이 전화나 메일로 서로 연락하고 있어. 내가 브라질 대표팀에 복귀했을 때는 곧바로 ‘축하요’하고 전화가 왔으며 브레멘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졌을 때도 ‘안 됐네’하고 전화해 주더군. 축구뿐만 아니라 사생활적인 이야기도 하지. 내용은 여기서 말할 수 없지만(웃음)

- ‘브라질 대표팀에 복귀했을 때’라는 것은 11월 중순 친선시합을 말하는 것이군요.  오래간만에 대표팀 소집이 되었는데 어떤 기분이셨나요?

 나는 항상 브라질 대표에서 플레이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굉장히 기뻤어. 나 자신의 컨디션도 조금씩 좋아졌기에 기회는 있다고 생각했었지.

- 결과도 좋았지요? 포르투갈에 6-2로 대승하셨으니까요.

 강적 포르투갈을 상대로 저렇게까지 이겼으니까 선수들은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둥가 감독도. 1년의 마지막 시합을 베스트 게임으로 마칠 수 있어서 좋았다.

- 앞으로는 월드컵 남미 예선도 시야에 들어오는군요. 당신이나 호비뉴에게 있어서는 어필할 수 있는 장소가 넓어지게 되는군요.

 그렇지. 남아공 월드컵에는 어떻게 해서든 출장하고 싶으니까 적극적으로 어필해 나가고 싶다. 브라질 대표는 내용, 결과 양 쪽을 요구 받기에 그런 압박에 지지 않도록 준비를 하여 어느 시합이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 호비뉴와는 역시 같은 팀에서 플레이하고 싶나요?

 언젠가 또 같은 클럽에서 플레이 하게 된다면 최고겠지. 둘이서 그런 이야기도 나누고 있어.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 산투스에 입단하였을 즈음 처음부터 프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나요?

 응! 첫 날만은 그랬지(웃음). 기숙사에 들어가서 이틀째부터 자신을 잃었다. ‘잘하는 선수들 뿐이잖아!’라는 생각이 들더군. 거기에 무엇보다 경쟁이 엄청난 세계이기에 대다수 연습생들은 계속해서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건 슬펐지. 나는 그들을 라이벌이 아닌 친구로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렸을 때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기에 좋은 추억이지.

- 그럼 처음으로 프로선수로서 계약서에 사인했던 순간은 어떤 기분이었나요?

 16살에 프로가 되었는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놀랐어. 계약 같은 것은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 그 1년 후에는 톱 팀의 주장에 임명되어 호비뉴와 함께 팀을 브라질 선수권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산투스의 우승은 실로 19년만의 쾌거였다고 하더군요.

 우리들은 굉장히 어린 팀이었기에 우승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거든. 믿기 힘들었어. ‘기적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무엇보다 플레이 하고 있던 우리들 자신 우승할 줄은 꿈에도 꾸지 않았었으니까.

- 당신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상대가 다음에 무엇을 해 올지 알고 있는 듯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플레이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 아니면 당시부터 뭔가 특별한 훈련을 하셨나요.

 아니. 연습에서 특별히 의식한 적은 없으니까 아마 하느님이 선물해 주신 재능이 아닐까? 단 굳이 말하자면 스트리트 사커에서 익힌 기술이  도움이 되었을 지도.

-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도 클럽 연습과는 별개로 스트리트 사커를 하신 건가요?

 그냥 놀이 삼아. 기숙사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들이 모여있고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웃음). 하지만 그런 ‘놀이’가 중요해. 상대를 어떻게 제치느냐 에는 일종의 ‘얍삽함’도 필요하니까. 그런 스타일을 익히기에는 스트리트보다 뛰어난 ‘연습장’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러고 보니 기숙사에서는 아주 ‘개구쟁이’였다고 하더군요. 호비뉴가 예전에 말했어요. 엄청 날뛰어서 동급생이나 선생들과 문제를 일으켰다면서요?

 설마~ 나는 아주 착한 소년이었다구. 호비뉴 녀석 너무 과장시켜 말했군(쓴웃음). 뭐 우선은 그렇다고 하자구(웃음).

- 그럼 마지막 질문. 당신에게 있어 산투스라는 클럽은 어떤 장소였나요?

 내 경우 산투스는 커리어 시작점 뿐만이 아니라 인격형성 상에 굉장히 의미가 있는 장소였어. 아이는 무엇이건 배울 수 있을 만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 ‘책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발한발 착실히 성장해 나가는 것의 중요성도 알 수 있게 되거든.

- 즉 기숙사 생활을 한 당신은 같은 연배의 아이들보다 정신적인 성장이 빨랐다는 것이군요,

 중요한 것은 빨리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해. 16살에 프로가 되어서 17살에는 브라질 선수권에서 우승하였지. 같은 연배의 아이들에 비해서 많은 것을 계속 경험한 것이야. 하지만 그 덕분에 자만심에 빠지는 일 없이 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 프로인 이상 몇 살이건 아이라고 봐주는 일이 없으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거든. 거기에 프로 축구의 세계에서는 큰 돈이 움직이잖아? 당연 좋은 사람만 접근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속더라도 ‘아이니까’하는 변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건 응석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성장시켜주지 않을까?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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