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레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0.13 [마법사]의 생존자 - 호마리우(Romario) by 渤海之狼
  2. 2006.04.08 "밀란의 혼(魂)" 프랑코 바레시 by 渤海之狼 1
글: Satoshi Hojo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있는 힘껏 펼친 양 손으로 브라질 국기를 등에 매고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리는 자신을 한껏 자랑스러워했다.


 1994년 7월 17일. 미국 로즈 보울 스타디움.

브라질 국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던 날은 한 명의 스트라이커가 그 이름을 역사에 아로새긴 날이기도 했다.


 한창 전성기였던 펠레를 중심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1970년 멕시코 대회 후 실로 여섯 번의 대회를 거친 뒤의 월드컵 우승. 땅에 떨어지려하던 축구 왕국의 위신을 되찾은 것은 신사로 알려진 펠레와는 정반대인 악동 호마리우였다.


 남을 깔보는 듯한 발언을 계속하며 수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엄격하게 정해진 규율도 그에게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사생활에서는 밤에 너무 놀러 다닌다고 하여 감독들의 분노를 산 이야기 등은 셀 수도 없이 많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법자는 아니었다.

 유언실행 - 말한 것은 반드시 행한다. 그 하나만을 집어낸다고 해도 같은 시대를 산 다른 어떤 스타보다도 걸출한 존재였다.


 에스파냐의 명문 클럽 바르셀로나에 이적한 93-94시즌.

개막전에 “30골을 넣어 보이마!”라고 예고하여, 그 숫자대로[각주:1] 넣었다. 그 중 해트트릭이 5번[각주:2]. 총 득점의 반은 몰아넣기에 위해 달성된 숫자이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크라위프에게 사생활을 주의받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은 자기 일만 걱정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밤에 놀러 다니기에 골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크라위프라도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사생활이 문란하건, 연습에 지각하건, 정작 게임이 시작되면 벤치의 기대대로 골을 넣어갔다. 프로에게 부과된 사명이 결과라고 한다면 호마리우정도의 프로페셔널도 없었다.


 “이번 월드컵은 호마리우를 위한 대회이다”

 그렇게 선언하고 임한 1994년 월드컵 미국대회. 그리고 선언대로 대회는 호마리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우승이 결정된 순간부터 카니발이 펼쳐지는 듯이 기뻐 날뛰는 팀 동료들과는 대조적으로 경직된 얼굴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베테랑 프랑코 바레시에게 봉쇄된 것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한 골만 더 넣으면 득점왕의 타이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인지……. 어쨌든 그 얼굴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명랑한 브라질리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많은 브라질 국민들이 호마리우에게 가지고 있는 감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24년에 걸친 공백을 메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왕국의 부활을 알려주는 심벌로써, 그를 사랑했다. 90년대에 있어서 그만큼 브라질리언다운 브라질리언은 없었다.


 1966년 1월 29일.

 ‘호마리우 지 소사 파리아’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에서 태어났다.

 사커 닉네임이 주류인 브라질에서는 별나게 호마리우는 본명이다.

 도장공(塗裝工)인 부친은 처음으로 얻은 장남의 이름을 붙이는데 굉장히 고민한 끝에 당시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붙였다.

 [살아있는 사전, 돈 호마리우].

 여러 가지 단어의 의미를 해설하는 호마리우 박사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거기에 부친의 어떤 바람이 담겨져 있었는지는 둘째 치고, 아들은 단어를 설명하는 대신 온갖 패턴의 골을 넣어가는 골의 박사가 되었다.

 공칭 168Cm. 실제로는 더 작을 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소아천식에 걸려서인지 키가 생각대로 커주질 않았다. 그것이 호마리우의 미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리우데자네이루 주(州)의 명문, 바스코 다 가마의 감독의 눈에 띈 것은 13살 때였다. 곧이어 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기대로 가득 찼지만, 결국 입단할 수 없었다.

 “너무 쪼그맣다”
 라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적으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일원이 되지만 그것도 2부 리그인 올라리아(Olaria Atlético Clube)에서 득점왕에 빛난 수년 후의 일이다. 의지가 되는 것은 언제나 두 다리뿐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에서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어 19살 때에는 처음으로 카나리아 색의 셔츠를 입고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 출장한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였다.


 21살을 맞이한 87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선수권의 득점왕을 획득. 그 다음해에 참가한 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6시합에서 7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다. 호마리우의 명성이 해외의 여러 나라로 울려 퍼지는 것은 이 때부터이다.

 1988년에 네덜란드의 PSV로 탈취 당하게 되는데, 많은 브라질 국민들에게는 [부르터스, 너마저도]라는 명언으로 알려진 로마의 케사르의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브라질에는 [배신]이라는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브라질리언의 해외로의 유출이 본격화 된 것은 1986년 월드컵 멕시코 대회 직후부터이다. 이 대회에서 불과 2명에 지나지 않았던 [해외파]가, 4년 후인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12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유럽으로 건너간 그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볼의 마술사라는 간판을 버리고, 근면성실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노동자로 변해버렸다. 어떤 선수는 브라질계 독일인으로, 어떤 선수는 브라질계 이탈리아인으로써 대표팀에 돌아왔다. 그러한 [유러피언 척하는 선수]들을 긁어모은 카나리아 군단에는 본능대로 마법의 지팡이를 흔들어, 전 세계의 사람들을 매료해 왔던 예전의 자유분방함도 창조력도 실종되어 있었다.

화려함만으로는 더 이상 세계를 제패할 수 없다. 그런 뿌리 깊은 생각이 유럽화로 경도된 배경에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손에 넣은 것은 낙담과 실망뿐인 패배들뿐이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 22살의 호마리우는 바다를 건넜다.

 그로부터 7년여. 작은 거인은 유럽 축구의 냉엄한 세례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브라질리언으로 존재했다. 그에게서 눈부신 마법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브라질의 어느 기자는 상상과 현실을 오고가는 모습을 [악마]라고 표현했다. 걸작인 것은 호마리우가 바르셀로나에 있을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인 호르헤 발다노(Jorge Alberto Valdano Castellanos)의 말이다.

 “정말 불공평한 이야기다. 그는 애니메이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선수이니까”

 즉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발다노에 따르면 호마리우의 움직임은 비디오를 돌려도 코마 단위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이라고까지 불리는 듯한 요술을 호마리우는 떼지어있는 디펜더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던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94년 월드컵 미국대회에서였다.

 러시아의 GK가 “유럽 선수라면 절대 저 코스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인 오른발 아웃사이드에 의한 상식 밖의 다이렉트 슛. 그것을 시작으로 담담히 5골을 넣어갔다. 그건 전부가 세세한 기교로 만들어진 예술품이었다. 동시에 골은 결코 억지로 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 GK의 손이 닿질 않는 곳에 차분히 굴리면 된다. 이정도로 슛의 기본에 충실한 선수도 없다.


 화려함이 사라진 현대 축구에 있어서 멸종되어 가고 있는 마법사의 생존자. 그 호마리우에게 축구의 신인 펠레는 [천재]라는 말을 선사했다.

Romário de Souza Faria/호마리우 지 소사 파리아.

1966년 1월 2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태생. 축구 왕국이 90년대에 낳은 천재 스트라이커. 명문 클럽 바스코 다 가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살 때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 출전, 2년 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州) 선수권의 득점왕에 빛났다. 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해서 득점왕을 획득. 대회 후 네덜란드의 PSV에 이적하자마자 득점왕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89년에는 브라질 대표의 일원으로 자국에서 개최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 베베토와 투 톱을 짜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90년 월드컵 이탈리아에서는 벤치였다. 93년에 이적한 바르셀로나에서 득점왕을 획득하여, 그 기세를 살려 94년 월드컵 미국대회에서는 5골을 넣어 브라질을 6 대회만의 4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1. 33시합 30골. [본문으로]
  2. 그 중 한번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시합. [본문으로]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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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Rolf Finders
일본어 번역 : Miyako Hirose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단순한 심벌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였다. 스파이크를 벗은 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프랑코 바레시는 여전히 'AC 밀란의 혼()'인 것이다.

 () 카피탄(캡틴)은 여전히 롯소네로(이탈리아어로 적과 흑. 밀란의 애칭)와의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클럽의 암흑기에도 바레시는 결코 밀란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결코 버리질 않았다.

 바레시에게는 좀 더 편한 길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을 선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운명을 밀란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도박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밀란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하늘이 내려준 천직으로 선택한 것이다.

 

 바레시는 브레시아 교외의 작은 노동자의 마을 트라바리아토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유니온 스포르티바 오라토리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그가 밀란과의 험난 모험을 시작한 것은 1974 7월이었다.


 14살의 여름, 그는 아탈란타의 입단테스트를 받았다. 신장 겨우 164Cm. 어디에 있어도 작은 몸집인 프랑키노는 말랐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이 되었다. 그 후 한 살 위인 형 벳페(쥬세페의 약칭)가 있던 인테르나치오날레에 소개받았지만 여기서도 역시 거부 당했다. 그때 바레시에게 오라고 한 곳이 인테르나치오날레와 같이 밀라노를 본거지를 하고 있던 밀란이었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와 지안니 리베라(Gianni Rivera)가 보는 앞에서 처음엔 풀백으로, 다음에는 리베로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결과 150만 리라, 거기에 키가 1Cm 클 때마다 100만 리라를 추가하는 조건으로 밀란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20살이 될 즈음에는 178Cm가 되어 있었다.

 

 바레시는 항상 풍부한 개성과 더불어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인생을 통해서 그가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인 레지나를 잃는 비극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밀란에 입단한 후에도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리하여 귀중한 조언자인 누나 루치아가 모친 대신 그를 키웠다.

 그는 밀란의 프리마베라(주니어 유스팀)에서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클럽은 월 2만 리라의 급료로 계약을 맺기로 결정한다. 인생의 분기점은 니리스 리드홀름의 감독 취임과 찾아 왔다. 78년 이 스웨덴 감독이 아직 18살도 안 된 바레시를 탑 팁에 데뷔시킨 것이다.


 바레시는 그라운드에 있어서의 자신감과 침착성을 주위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같은 대선배이자 스타에게 볼을 건네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였다.

 주목을 모은 그는 78-79시즌 밀란의 10번째 스쿠데토 주역의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축구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실망을 맛보게 된다. 불법 도박 스캔들로 인하여 밀란이 세리에 B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1980년 바레시는 낮은 수준의 리그로 내려가지만 다음해 곧바로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밀란의 부진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진 않았다.

 1982년 AC밀란은 세리에 A 잔류에 실패한다. 그 시점에서 다른 팀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바레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팬들은 팀과 고난을 함께 하려 한 그의 선택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바레시는 또래 선수들 보다 빨리 캡틴이 되어 있었다. 클럽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금고는 비어있었다. 선수 획득도 어떻게 절약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었다. 바레시에게는 삼프토리아에서 매력적인 오퍼가 있었으나, 거부했다. 인테르도 그를 원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이러한 일들로 서포터는 더욱더 그를 진정한 우상으로 받들게 되었다. 팀을 위한 좋은 기회를 진중히 기다리고 있던 바레시의 판단은 옳았다. 모든 일을 큰 스케일로 생각하는 사업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밀란의 만회극이 시작되었다.

 87, 이 신회장은 새로운 선수를 획득하여 팀을 강화하고 곧이어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명장 아리고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고참도 새로 온 선수들도 신감독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으나 좀 지나자 팀은 강해졌다.

 뤼트 휠리트와 마르코 판 바스턴이라는 네덜란드 콤비를 얻어 밀란은 다시 스쿠데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챔피언즈 컵과 토요타 컵(대륙간 컵)에서도 승리하여 힘들었던 모험의 여정을 끝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바레시는 아주리(대표의 애칭)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말수가 적긴 하였지만 한번 말한 것은 굉장히 명료했다.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콘택트면 충분했다. 소리치지 않아도 그의 존재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동료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그라운드에 한 번도 서진 못했지만 이탈리아는 우승했으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91년 밀란에 있어서의 [사키의 시대]는 끝났지만 바레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파비오 카펠로 지휘하에서 존재감을 더해 갔다.

 4개의 스쿠데토를 획득하였고 챔피언즈 컵을 제패했으며 여전히 그라운드 위에서는 가장 뛰어난 선수로 계속 존재했다. 사키는 언제나 바레시를 대표팀에 있길 원했으나 바레시는 1994 9월 아주리의 셔츠를 벗었다.


 그 수개월 전의 여름, 그는 미국 월드컵 초반 노르웨이전에서 다친 무릎을 20일간에 걸쳐 회복하여 브라질과의 결승전에 겨우 출장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악몽을 보게 된다. 승부차기에서 통한의 킥 미스. 세계의 정점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가 흘린 눈물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후도 밀란에서 플레이를 계속한 바레시는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마크할 수 없을 듯한 선수가 나타났을 때 나는 은퇴할 것이다."

 97년 4월 6. 밀란은 스타디오 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1-6으로 대패했다. 그 시합에서 그는 눈 앞을 화살과 같이 빨리 달리는 크리스챤 비에리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필시 커리어의 막을 내릴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바레시는 97 6월에 현역에서 은퇴를 표명한다. 클럽의 회장인 베를루스코니는 그가 달고 있던 [등번호 6]을 영구 결번으로 정했다. 그리고 뛰어났던 커리어의 포상으로 클럽 부회장에 임명했다.


Franco Baresi

1960 5 8. 북이탈리아의의 트라바리아토 태생. 근대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리베로.

14세때 클럽에 들어가서 37세에 스파이크를 벗을 때까지 커리어 전부를 AC밀란에서 보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우승한 이탈리아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출장하지는 못했다. 세계적으로 평가를 높인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귀재(鬼才)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밀란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 수많은 타이틀을 손 안에 넣었다. 절묘한 수비 라인 제어와 탁월한 수싸움으로 상대 선수를 수비망에 걸리게 하는 디펜스는 예술의 영역. 개성파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발롱도르에 선출되지 못한 것은 운이 없었을 뿐이며 이탈리아 대표에서도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에서 커리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면서도 승부차기에서 패퇴. 그런 만큼 [이탈리아의 바레시]보다는 [밀란의 바레시]라는 인상이 보다 강하다.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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