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italy/column/200803/at00016584.html
저자: 비토 스켐바리(Vito Schembari)
일본어 번역: 키무라 카야코


"패배자"의 낙인과 "명장"의 칭호 -1편-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길 2, UEFA 슈퍼 컵 그리고 클럽 월드컵도 제패한 AC밀란의 감독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이제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감독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수에게 가장 사랑 받는 지휘관으로써도 알려진 그가 한때 패배자라 불렸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공한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페루자에서 찍힌 낙인과 터닝 포인트

이것은 2000 5 14일부터 시작되는 인내와 희망의 이야기이다.

그 날 카를로 안첼로티는 페루자에서 돌아오는 자가용 헬리콥터의 의자에 앉아서 구름을 바라보며 부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다 잡았던 스쿠데토를 잡으려고 우리들은 함께 땀을 흘리고 싸워왔었는데……”

비가 줄기차게 내린 그 저주받은 날.

역전 우승을 결정지은 라치오가 기쁨에 들끓고, 감독인 스벤 예란 에릭손이 타이틀을 축복하고 있는 동안, 안첼로티가 지휘를 하는 유벤투스는 내린 비로 인해 논으로 변한 페루자의 필드의 진흙탕 속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설마 하던 패배와 동시에 일어난 라치오의 승리가 시즌을 계속 지배해 왔던 유벤투스에게서 스쿠데토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안첼로티는 이 날 이후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불쾌하고 무거운 낙인이었다.

좋은 감독이지만 승리의 여신과 함께 있는 남자는 아니다

이런 말을 계속 들으면, 어느 순간에는 필시 그 자신 스스로 정말 패배자인 것인가 하고 믿어 버린 적도 있었을 터이다. 당시 파르마 교외에 있는 안첼로티의 자택의 진열장에는 그가 선수 시절에 받은 트로피만 있을 뿐으로, 감독으로써의 획득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부인은 언제나 안첼로티의 곁에 있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는 풀이 죽지 않게 격려를 하여 침착한 마음으로 일에 임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하였다. 안첼로티가 2001년 밀란의 감독에 취임해서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인차기나 ??첸코가 한두 번 골을 놓쳤다고 해서 손톱을 물어뜯을 필요는 없어요. 늦건 빠르건 바퀴는 구르기 시작하니까요

그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처가 말한 것은 옳았다.

터닝 포인트는 2003 5 28일 흑과 적으로 물들은 올드 트래포드에서 찾아 온다.

감독 안첼로티의 첫 기쁨의 제스처가 나온 것도 맨체스터에서의 그날 밤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 유벤투스와의 120분을 넘기는 사투 끝에 승자가 된 안첼로티가 하늘 높이 양 손을 치켜 올렸을 때, 그의 넥타이는 느슨해져 있었고, 셔츠의 제일 위 단추는 풀려있었다. 그것을 보아도 승부를 결정지은 PK의 긴장감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인가 상상이 간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패배자의 낙인은 그의 등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그의 부인은 선수들 속에 섞여 흥분하고 있는 남편을 객석에서 내려다 보며 바퀴가 드디어 돌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요. 최대의 목표는 스쿠데토 획득이니까요

2003-04 시즌 안첼로티가 결국 밀란에서 세리에A 우승을 실현시켰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페루자에서의 고통과 실망을 잊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멋진 시간이 찾아 오네요

■ 선수로써, 감독으로써

선수로써 안첼로티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달린 후에는 필드의 잔디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스파이크를 신었던 당시의 안첼로티는 세련된 플레이메이커도 아니었으며 판타지스타도 아닌 라스트 패스를 보낼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지구력이 장점으로 근성과 주력을 내세우는 MF였던 것이다. 3번에 걸친 무릎 수술의 영향으로 1982년 월드컵에 출장할 수 없었지만(1986년 대회는 이탈리아 대표팀 멤버에 포함되었지만 출장하지는 못하였고, 1990년 대회는 2시합에 출장), 캐리어를 통해서 활발히 필드를 내달렸던 안첼로티는 필리포 인차기에 따르면 “80~90년대 버전의 스티븐 제라드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선수라고 말한다.

당시 세리에C였던 파르마에서 캐리어를 시작했던 안첼로티는 AS로마로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9 9 16. 운명의 연()이라고 할지 AC밀란과의 시합에서 세리에A 데뷔를 장식한다. 이리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는 후에 이 두 클럽에서 선수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안첼로티는 우선 로마(79~87), 이어서 밀란(87~92)에서 플레이 하며 22골을 기록. 3번의 스쿠데토(로마에서 1, 밀란에서 2)를 시작으로, 2번의 챔피언스 컵(현 챔피언스 리그), 2번의 인터컨티넨탈 컵(현 클럽 월드컵), 2번의 유럽 슈퍼 컵, 이탈리아 슈퍼 컵(이상 밀란 시대), 4번의 코파 이탈리아(로마)를 이루어 총 283 시합을 뛰었다.

1992년 은퇴 후, 곧바로 사키의 어시스턴트로써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감독 수업을 하기 시작한 안첼로티는 1995년 레자나(Associazione Calcio Reggiana 1919, 당시 세리에B)의 감독이 되어, 그 시즌에 세리에A 승격을 이루었다.

그 후 파르마(96~99)를 거쳐, 99 2월에 리피의 뒤를 이어 유벤투스의 감독에 취임.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채 2001년 여름에 유벤투스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해 11월에 당시 곤경에 처해있던 밀란의 감독으로 발탁되었다. 여기서 결국 그는 감독으로써 꽃을 피운다. 밀란과 함께 스쿠데토를 획득하고(03-04), 또한 코파 이탈리아(02-03), 이탈리아 슈퍼 컵(04), 챔피언스 리그(02-03, 06-07), UEFA 슈퍼 컵(03, 07), 클럽 월드컵(07) 등 총 8개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 사키에게 이어 받은 가르침과 독자적인 유연성

황금시대였던 Grande Milan. 후열 왼쪽 2번째부터 말디니, 판 바스턴, 안첼로티.

감독으로써 안첼로티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그는 사키나 리피와 같은 전략의 마술사는 아니다. 오히려 데리고 있는 선수에게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 내는 것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며, 그 멤버를 최대한 살리는 형태로 스타일을 구축해 가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감독으로써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예전 밀란의 팀 동료로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았던 마르코 바스턴의 견해가 흥미롭다.

우리들은 사키가 이끈 [그란데 밀란(Grande Milan - 80년대 후반의 황금기)]에서 팀 동료였다. 당시부터 카를로는 미래의 위대한 감독으로써의 편린을 틈틈이 보여주었다. 그는 필드 위에서 이미 감독이었다. 감독이 되고자 결정했을 때, 그는 사키의 가르침을 전부 실행에 옮겼고, 거기에 멤버에 따라 시스템을 조절하는 독자적인 특성을 더했다. 카를로는 사키처럼 융통성이 없는 타입이 아니기에 개인의 재능을 빛나게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선수에게 걸리는 스트레스도 사키에 비하면 적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 앞으로 많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

또한 밀란의 GM,

카를로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의 한 사람이 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위대한 선수에서 위대한 감독으로의 이행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밀란의 번영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자신의 생각에 너무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밀란에 컨디션이 좋은 스트라이커가 한 명만 있다면 그는 FW 1명만 기용한다. 컨디션이 좋은 FW 2명이 있다면 그는 그 둘을 채용한다. DF 3명밖에 없었다면 필시 그는 3명을 두는 수비를 쓸 것이다

■ 말디니 그의 성실함과 정직한 인격이 좋다

안첼로티를 말할 때, 그 축구 철학과 함께 언급되는 것이 그의 인격이다.

신사적인 안첼로티는 호랑이 선생님 타입은 아니다. 선수에게 머리 위로 명령하기 보다는 대화를, 분노를 쏟아내기 보다는 설명하는 쪽을 좋아한다. 예전 팀 동료였던 베테랑 선수의 놀림도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받아 치거나 한다. 그의 성격과 자세는 정신적인 시점으로 보았을 때, 지금도 어떤 면에서는 선수인 상태인 채이다.

그의 인격은 경력 속에서 두 가지 설을 만들어 내었다.

유벤투스 시대에 이길 수 없었을 때, 혹은 밀란에서 어려움에 빠져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길, “안첼로티는 선수와 너무 친하기 때문에 선수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규율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사키 아래서 선수였을 때와 같이, “로커룸의 리더였던 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에서 기인한다. 부분적으로 선수인 채로 있는 안첼로티는 선수들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선수들이 최고의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가 있어 선수들도 그에 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안첼로티에게 절찬을 보내는 명 플레이어는 셀 수 없이 많으며, 그 중 몇 명인가는 선수로써 그의 팀 동료였던 적도 있다. 예를 들면 현재의 밀란의 주장인 파올로 말디니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카를로?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카를로에 대해서는 그가 선수였던 때부터 알고 있다. 처음엔 그가 로마에 있을 때에 상대 선수로 만났고, 그 후에 밀란 선수들의 리더로써, 지금은 감독으로써 그를 알게 되었다. 나는 예전부터 계속 그의 성실함, 정직한 인격이 좋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로커룸 밖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닌 팀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도

2편에서 계속.

Posted by 渤海之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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