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809/other/text/200812290012-spnavi.html
저자: 세르히오 레빈스키

■ 3팀에 의한 플레이오프 끝에 우승


[보카 주니어스는 플레이오프 끝에 2008년 전기리그를 제패하였다]

 아르헨티나 리그의 2008년은 12월 23일 보카 주니어스가 새로운 영광을 손에 넣으며 막을 내렸다. 3팀에 의한 플레이오프라는 역사에 남을 격전 끝에 움켜쥔 극적인 우승이었다. 축구계에서 빛나는 역사를 가진 보카가 요 11년간 아무런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했던 적은 2002년뿐이다. 자국 리그뿐만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수다메리카나 등의 큰 무대에서 멋진 결과를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실패를 교훈 삼으며 그럴 때마다 클럽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카는 그 팬이 많음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횟수로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지만 2008년 전기 리그에서는 결코 평온함 속에 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기는 19시합을 끝낸 상태에서 산 로렌소, 보카, 티그레 3팀이 12승 3무 4패로 승점 39이어서 3팀에 의한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에 돌입(아르헨티나 리그의 정규 시즌에서 득실점차는 순위에 고려되고 있지 않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팀이 승점 3으로 동점이 되어 불과 1골의 차로 보카가 23회째의 영광을 손에 넣었다.

 우승을 결정짓는 3팀에 의한 미니 리그에서 우선 산 로렌소가 티그레(최근 승격한 팀으로 1부에 참전한지 이제 2년째이다)에 2-1로 승리하였다. 이어서 보카가 산 로렌소에 3-1로 승리. 보카의 우승은 너무도 쉬운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보카가 티그레에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1점차로 지더라도 득실점차에서 챔피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카는 티그레에 0-1로 패하여 우승을 손에 넣은 것인데 타이틀을 다른 팀에게 빼앗길 위기도 있었다. 67분에 실점하였을 때 상대 선수와 맞부딪친 젊은 GK 하비에르 가르시아(Javier Hernán García)가 부상으로 떠남으로 해서, 이 큰 무대가 데뷔전이 되는 약관 20살의 호수에 아얄라(Josué Ayala)가 교체 출장하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공세를 거듭하는 티그레에 보카도 반격. 결국 0-1인 채 시간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려 보카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 만신창이인 상태로 움켜쥔 영광

 최종적으로는 우승하였다고는 하지만 올 시즌 보카가 고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제일 먼저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캡틴이며 에이스 FW인 마르틴 팔레르모(Martín Palermo)의 부재이다. 1930년대에 활약했던 프란시스코 바라요(Francisco Varallo - 현재도 살아있다[각주:1])의 보카의 역대 최다 골 기록[각주:2]을 갱신한 스트라이커는 8월 24일 CA 라누스와의 시합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를 다쳐 장기간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또한 팔레르모와 짝을 이루며 국내에서는 베스트 FW라고도 말할 수 있는 로드리고 팔라시오(Rodrigo Palacio)도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예전 리버풀에서 뛰었던[각주:3] CB 가브리엘 팔레타(Gabriel Paletta), 퍼스트 GK인 마우리시오 카란타(Mauricio Caranta)는 감독인 카를로스 이스치아(Carlos Ischia)와 논쟁을 벌인 끝에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더욱이 경험 풍부한 SB인 우고 이바라(Hugo Ibarra)와 클라우디오 모렐 로드리게스(Claudio Morel Rodríguez)도 부상당해버렸다.

 그래서 보카는 새로운 인재를 발굴했다. 유스 팀에서 21살의 GK 가르시아, 20살의 DF 후안 포를린(예전 레알 마드리드B에 소속[각주:4]해 있었다), 21살의 DF 파쿤도 롱카글리아(Facundo Roncaglia), 22살의 볼란치인 크리스티안 마누엘 차베스(Cristian Manuel Chávez) 그리고 앞 선에는 21살의 두 공격수 리카르도 노이르(Ricardo Noir)와 놀랄만한 득점감각을 갖춘 루카스 비아트리(Lucas Viatri)를 승격시킨 것이다. 그들은 주력선수들의 포지션을 빼앗을 정도로 성장하여 팀 승리에 공헌하였다.

■ 1998년부터 시작된 팀 개혁

 
[팬들의 존재는 보카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예전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랜 기간 트로피에서 멀어져 있던 보카는 이 해에 새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미디어에 이용당하고 있던 팀을 해체하고 선수나 감독을 일신했다. 당시의 보카는 ‘마라도나 2세’라 일컬어졌던[각주:5] 디에고 라토레(Diego Latorre)가 “보카는 난장판이다”고 말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새로운 지휘관으로 카를로스 비안치[각주:6]가 취임하면서 보카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시작으로 한 수많은 영광을 획득하게 된다.

 1995년에 회장에 선출된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 현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장을 맡고 있다)는 어떻게 하면 팀을 재건할 수 있는지 몰랐다. 카를로스 빌라르도[각주:7]에 이어서 엑토르 베이라[각주:8]를 감독에 앉힌 것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98년 마크리는 팀을 프로페셔널 집단으로 하기 위해서 비안치를 초빙하였고 동시에 하부조직의 충실을 꾀했다. 또한 보카는 유소년을 위해 ‘클럽 파르케(Club Social y Deportivo Parque)’와 협력체제를 확립하였고 현재는 하부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큰 선수로는 레돈도(Fernando Redondo), 소린(Juan Pablo Sorín), 리켈메, 가고, 테베스 등 쟁쟁한 면면들이다.

 예전 보카는 선수들을 사 모으는 측이었다. 그러나 마크리는'”10년 안에 11명 중 9명은 클럽 토박이 선수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 당시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평정을 되찾은 팀은 승리를 거듭하며 클럽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 라이벌 리베르의 존재.

 보카는 개혁 이후 국내에서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4번, 토요타 컵(현 클럽월드컵)을 2번 제패했다. 또한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2번, 레코파 수다메리카나[각주:9]에서도 3번 우승하였다. 이것은 전부 1998년 이후에 획득한 타이틀이다. 아르헨티나, 남미대륙 거기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선수들 대부분은 자신의 가치를 높여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페르난도 가고(레알 마드리드), 에베르 바네가(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에밀리아노 인수아(Emiliano Insúa, 리버풀), 오스칼 트레호(Oscar Trejo, 마요르카), 세바스티안 나야르(Sebastián Nayar, 레크레아티보), 파비안 몬손(Luciano Fabián Monzón, 베티스), 카를로스 테베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현재 보루시아 MG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FW 로베르토 콜라우티(Roberto Colautti)도 보카의 유스 출신이다.

 한편 보카는 하부조직의 선수육성만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으로 보낸 클럽을 상징하는 선수들을 몇 년인가 후에 다시 불러들임으로 인해 팀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 세바스티안 바타글리아(Sebastián Battaglia, 전 비야레알), 후안 로만 리켈메(바르셀로나, 전 비야레알), 우고 이바라(FC 포르투, 모나코, 에스파뇰), 팔레르모(비야레알, 베티스, 알라베스) 등의 면면들이다. 또한 보카는 ‘등번호 12’로 알려진 가장 잔소리가 심한 팬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거대한 깃발을 휘날리며 팀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보켄세[각주:10](보카의 팬)에게 있어 2008년 전기 리그 우승은 특별한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팀 우승은 물론이거니와 최대의 라이벌인 리버플레이트(리베르)가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최하위로 떨어진 것이다. 1931년 프로 리그화된 이후 리그 우승회수를 따지면 23번의 보카에 비해 리베르는 국내 최다인 33회를 자랑한다(국제 타이틀까지 포함하면 보카는 리베르를 크게 앞서고 있다). 2008년 후기 리그에서는 리베르에 우승을 허용하여 2위로 마쳤던 만큼 그 반년 후에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였기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베르가 곧바로 2부로 강등당하지는 않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과거 3년(전기, 후기 3대회 씩)의 성적에서 평균값을 산출하여 하위 2팀이 강등당하기 때문이다(17, 18위 팀은 교체전을 행하게 된다).

  1. 1910년 2월 5일생. [본문으로]
  2. 194골. 보카의 아마 시절까지 포함하면 로베르토 체로(Roberto Cherro)의 221골. [본문으로]
  3. 2006-2007시즌 3경기 출장. [본문으로]
  4. 2007년. [본문으로]
  5. 이 선수가 처음으로 '마라도나2세(New Maradona 혹은 New Diego)'라고 불렸다. [본문으로]
  6. 현재는 보카의 GM [본문으로]
  7. Carlos Bilardo. 그는 1983~1990년까지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이다. 월드컵 우승 1회, 준우승 1회. 1996년 보카 감독으로 당시 리그 5위. [본문으로]
  8. Héctor Veira - 1996~1998의 감독. 리그 순위는 각각 9위, 2위, 6위. [본문으로]
  9. Recopa Sudamericana.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수다메리카나의 우승팀이 격돌하는 UEFA의 슈퍼컵과 같은 대회이다. [본문으로]
  10. 철자는 boquense....굳이 각주를 단 이유는....철자 찾기 힘들었거든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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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other/column/200804/at00017056.html
저자
: 세르히오 레빈스키

■ 리베르의 무관 시대와 현재의 고뇌

시메오네 감독을 초빙하여 팀 재건을 꾀하는 리베르. 후기 리그에서도 지금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다.

 리베르 플라테(아르헨티나)의 올드 팬은 고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브라질에 있는 위대한 전통을 가진 클럽이라 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상파울로를 본거지로 하는 코린티안스는 1977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상파울로 주() 선수권)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20년 이상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다. 리베르(리버 플레이트) 1957~1975년까지 18년간이나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그러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경우 2위나 상위에는 위치하고 있었다. 다른 컵 대회에서도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우승은 아니더라도 주역 중에 하나이기는 했었던 것이다.

 

 고난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리베르를 무시하며 최대의 라이벌인 보카 주니어스는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국내 타이틀을 획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7, 1978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연패(連覇). 1977년에는 인터콘티넨털 컵(현 클럽월드컵)도 제패하여 세계의 정상에 올랐다.

 70년대 후반이 되자 리베르는 정상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우승을 이룩했어도 국제 타이틀과는 무연이었다. 그들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첫 우승을 이루기까지 1986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후의 리베르는 순조롭게 트로피 장식장을 채워갔다. 그러나 축구에 있어서는 영광을 획득하고 있었지만 조직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클럽의 울트라스(Ultras – 과격 서포터)는 내부에서 대립을 거듭하여 사상자가 나오는 사태까지 발전. 또한 근년에는 많은 스타 선수들이 계속해서 팀을 이탈, 올해 들어서도 페르난도 베유스치[각주:1], 마르코 루벤[각주:2] 등이 유럽 클럽으로 이적하였다. 수뇌진은 2007 12월 감독으로 디에고 시메오네[각주:3]를 임명.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에서 감독으로 활약했던 모국의 영웅에게 팀의 재건을 맡겼다.

 

■ 부채로 인한 선수 방출의 연쇄작용

 

 계속된 선수 이적 뒤편에는 리베르가 안고 있는 막대한 부채로 인해 주력 선수를 방출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페소에 대해서 미국 달러나 유로의 가치가 강한 요즘, 유럽 클럽에 선수를 이적시키면 많은 돈이 지갑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적이 유력하다고 여겨졌던 선수는 GK인 후안 파블로 카리소(Juan Pablo Carrizo)와 콜롬비아 출신의 FW 라다멜 팔카오 가르시아(Radamel Falcao Garcia).

 전자는 이탙리아의 라치오, 후자는 브라질의 플루미넨세 이적[각주:4]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카리소의 경우 2007년 여름에 라치오와 계약했지만 쉽게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여권 취득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각주:5].

 이 로마의 클럽은 이미 EU권외의 선수 제한에 걸려있었고, 리베르와 라치오의 우호적인 관계 덕분에 카리소는 6월까지 임대로 고향 팀에 귀환. 올 여름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리베르는 GK 카리소와 팔카오가 팀에 잔류한 덕분에 후기 리그에서는 보카를 제치고 7 3로 수위를 달리고 있다. 더구나 허용한 골은 10시합에서 불과 2. 산마르틴과의 시합에서 허용한 2실점(시합은 3-2로 승리)뿐이다. 즉 리베르는 10시합 중 9시합에서 무실점이라는 성적을 남기고 있다.

 결과만을 보면 철벽의 수비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을 전부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리베르의 수비진은 다른 클럽(리베르보다 하위인 팀)보다 뛰어나지는 않다. 상대에게 득점을 허용하고 있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위대한 GK 카리소의 파인 세이브 덕분이다.

 

■ 카리소의 활약으로 인한 파죽지세

 카리소는 리베르 클럽 역사상 이름 높았던 GK  1명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데오 라울 카리소(Amadeo Raúl Carrizo)[각주:6]. 1945년에 프로 데뷔를 한 후 오로지 리베르에서만 플레이하다 은퇴한 선수이다[각주:7]. 한때는 아르헨티나 축구계에서 무실점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던 GK의 개척자이기도 하였다[각주:8].

 

 23살의 후안 파블로 카리소는 리베르의 하부 조직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톱 팀으로 올라가 2005년 프로 데뷔를 이루었다. 당시의 감독이었던 다니엘 파사레야[각주:9]는 헤르만 룩스[각주:10]를 대신하여 카리소를 퍼스트 GK로 앉혔다. 현재 프리메라의 RCD 마요르카에 소속되어 있는 룩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골 문을 지켰던 실력자였다.

 

 이 젊은 수호신은 톱 팀에 정착해서도 특별히 자신의 실력을 어필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카리소는 축구 선수로서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로 특히 그 조용하고 눈에 띄려고 하지 않는 행동(필드 내외에서)과 날렵함은 특필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을 미리 탐지하는 능력도 뛰어나 상대 팀의 찬스가 될 만한 싹을 미리 제거하는 것에도 뛰어나다. 그의 움직임은 굉장히 유연하며, 그 재빠름 몸놀림으로 인해 상대 선수의 움직임은 마치 슬로 카메라를 통해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될 때도 있다.

 

 PK 장면을 예를 들어 본다. 카리소는 몸 전체를 어느 한 곳으로 던지면서도 양 다리는 다른 방향에 둔 채로 있을 때가 많다. 마치 모든 가능성에 대응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볼이 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방향으로 볼이 왔을 때에도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볼을 건드린다.

 

 리베르는 카리소의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지게 하고 있다.

 GK로써의 활약뿐만 아니라 후기 리그에서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에 공헌. 2004년 후기 리그 이래 벌써 7시즌이나 무관인 채인 리베르에게 있어서 리그 반환점을 돌아 1위에 서 있는 올 시즌은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또한 12년 만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리베르는 49번이나 참가하면서도 단 2(1986, 1996)밖에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리베르에게 있어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감독인 시메오네의 전술도 아니며, 팀 내에서의 신뢰 관계도, 젊은 MF 디에고 부오나노테(Diego Buonanotte)나 우루과이 스트라이커 세바스티안 아브레우(Sebastián Abreu)의 컨디션 유지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GK 카리소의 존재이다. 올 시즌 리베르는 골 라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카리소의 슈퍼 세이브로 끝나고 있다.

 이미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는 카리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대한 GK가 되어 가고 있다.


  1. Fernando Belluschi, MF, 올림피아코스 [본문으로]
  2. Marco Rubén, FW, 비야레알 이적 후 레크레아트보 임대. [본문으로]
  3. Diego Simeone, 현역시절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베컴한테 밟힌 사람으로 유명(동국 대표 출장 역대 2위인 106시합) [본문으로]
  4. 결국 팀 잔류 [본문으로]
  5. 카리소의 선조가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가 각하 [본문으로]
  6. 혹자는 ‘유럽에 야신이 있다면 남미엔 카리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야신은 세계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지만 카리소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6골을 허용하며 대표팀에서 물러나면 유럽에서 그의 명성을 알리는데 실패. [본문으로]
  7. 아르헨티나 리그 은퇴 후 페루의 1969년 알리안사 리마(Alianza Lima), 1970-71년은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Millonarios)에서 플레이 한 후 은퇴. [본문으로]
  8. 페널티 박스 바깥으로의 과감하게 뛰쳐나오는 것이나, 수비진과의 연계에 따른 골키퍼 기술은 이 사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Daniel Passarella – 아르헨티나 사상 최고의 DF. 수비수이면서 451시합에서 134골을 넣었다. 사족으로 머리가 장발인 선수를 극도로 싫어한다. [본문으로]
  10. Germán Lux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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