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Vincent Machenaud
일본어 번역 : Shuichi Ta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에릭 칸토나의 생애.
그것은 사랑과 증오의 반복이었다.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칸토나 만큼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감정을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준 축구 선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칸토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따르는 것을 일절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필드 위에서건 사생활에서건 일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칸토나는 세계 유일무이한 선수였다.
그 정도로 전형적이라는 말과 거리가 먼 선수도 없다.
1966년 5월 24일에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칸토나는 지역 클럽인 케롤(SO Caillols – 장 티카나(Jean Amadou Tigana)도 여기서 뛰었었다)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15살 때부터 상대 팀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부터 그는 반역자였다. 재능은 주목받고 있었지만 획득을 노린 어느 클럽도 그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우선 그의 부모와 이야기를 한 후 이어서 칸토나 본인을 납득시킨 것이 오세르(AJ Auxerre)의 스카우터였다.
“그는 정직했으며 총명했다. 그렇게 납득시켜주면 ‘농(non)’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2부리그 마르티그(FC Martigues)에서 1시즌 임대 이적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오세르에서 7년을 보냈다.
바지르 볼리(Basile Boli 1), 장 마르크 페레리(Jean-Marc Ferreri 2) 등을 키워 낸 오세르의 유소년 육성 센터는 프랑스에서 가장 정평난 곳이었다. 거기서 프로가 무엇인지를 배울 동안에도 칸토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바꾸지 안않다. 재능있는 선수인 것은 누구나가 인정했다. 오세르의 명물 감독인 기 루(Guy Roux 3)도, 이 ‘놀라운 아이’에게 기대하였다. 다른 선수는 용납되지 않는 것도 칸토나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기 루는 칸토나를 1부 리그에 데뷔시켰고 필드 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이 소년에게 프랑스 미디어가 주목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수로서 평가가 높아짐에 따라 기이한 행동도 눈에 띄게 되었다. 멋진 골을 넣음과 동시에 상대 선수에 대한 폭력 행위나 심판, 관객에 대해 욕을 하는 칸토나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프랑스 대표팀에 데뷔도 하였다.
1987년 8월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동독과의 시합(2-1로 동독 승리)에서 처음으로 삼색 유니폼을 입게된 그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펼쳤다.
당시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스킨헤드를 처음으로 행한 것도 칸토나였다. 머리를 빡빡 밀고 등장한 메츠와의 시합에서는 플라티니처럼 프리킥을 넣어 전 프랑스의 화제를 독점했다.
독설은 독해져 갔지만 또한 확고부동한 스타가 되어갔던 것이다.
“별로 내 인생에 축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감독이나 팀 동료들이 뭐라 말하건 나하곤 상관 없다. 흥미가 일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은 그런 특이한 행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프로로서의 캐리어는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는 말만 보면 이미 천하무쌍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오세르의 GK는 프랑스 대표팀의 브르노 마르티니(Bruno Martini)였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난 뒤에, 마르티니는 칸토나에게 자신의 가방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칸토나는 거절했다.
“나는 니 명령같은 건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선 마르티니의 얼굴에 펀치를 먹였다.
망나니 기질은 더욱 커져만 갔다.
1988년 5월 오세르와의 계약을 끝났을 때, 그를 획득하고자 했던 팀은 올림피크 마르세유와 마트라 라싱 4이라는 2大 클럽이었다. 치열한 획득 경쟁이 벌어졌고 결국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프랑스 신기록인 180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제시한 마르세유였다. 큰 실적을 남기지도 않은 젊은 선수에 대한 계약금으로써는 파격의 액수였다. 교섭의 자리에는 칸토나 자신도 참석하여,거기서 마르세유의 회장이며 사회당 소속의 국회의원 겸 실업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베르나르 타피(Bernard Tapie)에게 대들었다. 후에 타피는 이렇게 회고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는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타피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칸토나에게 있어서도 태어난 고향으로 개선했다고는 하여도 결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타피의 방식도, 또한 마르세유라는 도시의 분위기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바로 전에 칸토나는 프랑스 대표팀에 자신을 부르지 않은 앙리 미셀을 공공의 자리에서 “10할NOM”이라고 욕하여 큰 문제를 일으켰다. 사태를 중히 여긴 프랑스 축구협회는 그에게 1년간 국제 시합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칸토나는 자신만만히 이렇게 말했다.
“옳은 것은 나다. 확신한다.”
한편 마르세유에서도 타피가 맘에 들어했던 것은 칸토나가 아닌 이미 에이스 자리를 확보하고 있던 장 피에르 파팡(Jean-Pierre Papin)이었다. 때문에 칸토나는 보르도와 몽페리에에 2시즌간 임대된다. 그 후 또다시 마르세유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도,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국은 곧바로 찾아온다. 어느 시합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그는 유니폼을 벗어 던진 채 스타디움을 뒤로 한 뒤 그 상태로 3일간 행방 불명이 되었다. 할머니와 오세르 시대의 친구인 미셸 피네다와 만나러 카탈루냐까지 간 것이다.
타피는 칸토나를 방출할 것을 맘먹고 님(Nîmes Olympique)에 그를 팔아 넘겼다. 이 작은 클럽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킨다. 공격적 미드필드로써 필드에 군림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트러블은 끊이지 않았다.
심판에게 항의하던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볼을 심판에게 차서 퇴장당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위기였다. 아무리 칸토나라고 하여도 이때는 은퇴를 결심하였다. 그것을 번복시킨 것은 미셸 플라티니의 어드바이스였다. 플라티니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행선지는 리즈 유나이티드.
시즌 도중에 입단한 그는 리즈에게 프레미어 우승을 안겨주며 곧바로 잉글랜드에서도 절찬을 받는다. 그런 그를 주목한 것이 당대 제일의 인기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5시즌을 보낸 그는 [에릭 더 킹]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활에 큰 공헌을 한다. 옷깃을 세운 백넘버 7의 유니폼은 클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칸토나 자신도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정신적인 아버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비호 아래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 그는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져 잉글랜드 넘버 원 선수라는 평가를 획득한다.
한편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그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미셸 플라티니도 울리에도 칸토나를 파팡에 버금가는 에이스로써 계속 기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파팡이 프랑스 국민의 아이돌이었던 것에 비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우승 4회, 컵 우승 2회라는 위대한 결과를 남긴 칸토나는 그런 영광만큼의 인기를 프랑스에선 얻지 못했다. 프랑스 대표팀이 이기면 물론 박수를 받았지만 패했을 때의 모든 비난과 야유가 그에게만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파팡과의 차이는 뚜렷했다.
“녀석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라고 불가리아에게 패하여 미국 월드컵 출장권을 잃은 직후에 그는 말했다.
그 시합이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월드컵 기회였다.
프랑스 대표 출장 45회, 19득점을 올린 칸토나도 대표에서의 타이틀은 불운했다. 1996년 유럽 선수권은 그의 홈 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있는 잉글랜드에서 개최. 그러나 에메 자케는 애지중지하던 지네딘 지단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칸토나를 대표팀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이때 그의 영광도 끝을 고했다.
이 시기의 그는 정신적인 황폐가 두드러진다. 상대 선수에 대한 공격, 심판에 대한 욕설, 나중에는 상대 팀 서포터에게 날라치기를 먹여 3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다. 결국 TV 광고에서만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은퇴가 거론되었지만 그가 미디어와 이야기하지 않게 된 때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때문에 누구도 그가 언제 현역 생활의 마침표를 찍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맨체스터와의 계약을 1년 남기고 은퇴는 97년 5월에 발표되었다. 클럽에서 짧은 프레스 릴리스가 배포도었을 뿐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은퇴 선언.
마지막까지 칸토나는 유아독존이었다.
Eric Cantona/에릭 칸토나.
1966년 5월 24일.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오세르에서 캐리어를 스타트시켜 21살에 대표팀에 데뷔하지만 너무도 강한 퍼스널리티로 인하여 클럽 수뇌진 등과 트러블이 끊이질 않아 자주 소속 클럽이 바뀌었다. 92년에 잉글랜드 리즈에 이적하여 팀을 리그 우승에 이끌었고, 다음 시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겨서는 젊은 선수들을 리드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90년대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94-95 시즌에 팬과의 트러블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지만, 95-96시즌에 복귀하여 리그와 컵 2관왕에 공헌했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불운이 많아 1998년 월드컵 멤버에서 제외된 것을 계기로 선수로써의 캐리어도 막혀버렸다. 독특한 외모, 강렬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위키피디아에 있던 말 추가
칸토나 어록
- 세상에는 보통과 다른 인간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자랑스럽다.
- 갈매기들이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95년 날라차기 사건으로 24시간 구치소에 있은 후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을 갈매기로 비유하며)
- 팀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 내가 눈에 띄면 된다.!
- 내 묘비석에는 아무런 말도 새겨 넣고 싶지 않다. 새하얀 돌인 상태로 좋다. 나란 인간을 언제까지고 수수께끼인 채로 남겨 두고 싶다.
- 내가 보스다!
- 나는 신이다!
-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써 무엇을 하는가다. 개인으로써 주목을 받고 싶다면 난 테니스를 할 것이다. 혹은 멋진 여성을 파트너로 삼아 혼합 복식을 하거나.
- 나는 축구에 대한 정열을 잃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은퇴 회견에서)
- 내 최고의 순간? 나에겐 많은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는 녀석을 발로 찼을 때이다.
(관객에게 날라차기 한 뒤에)
- 아니! 그건 나다.(지네딘 지단과 미셸 플라티니 중 어느 쪽이 프랑스 역대 최고의 선수인가를 질문받았을 때)
- 골은 아기와 같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칸토나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마신 모든 샴페인을, 올드 트래포드에 영광을 가져다 준 칸토나에게 바친다.(조지 베스트)
칸토나를 데리고 있는데, 누가 펠레를 필요로 할까요.
(영국 해설자 마틴 테일러. 1993~94시즌 첼시와의 경기에서, 칸토나가 중앙선에서 찬 킥이 골 대를 맞추었을 때)- 앨런 시어러를 획득함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PK를 차고 싶어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백넘버 9를 달고 싶다는 것. 백넘버 문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즈음 우리 팀에서 PK를 차고 있던 것은 칸토나였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앨런 시어러 획득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 확실히 칸토나에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의 지시를 받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팀에 가져다 준 최대의 공적은, 완벽을 목표로 한다면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알렉스 퍼거슨)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는 그가 최고. 그와 같은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 나의 꿈.(데이비드 베컴)
- DF. 마르세유 재적 시에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어 챔피언스 리그 우승. 별명 ‘골 문 앞의 암살자’ [본문으로]
- AMF/FW. 대표력 37경기 3골. 84년 유럽 선수권 당시의 중심 선수. [본문으로]
- 선수 생활(1952-1961)과 감독 생활(1961-2005) 을 합하여 50년 넘게 오세르에만 있었다. 현 RC Lens의 감독. [본문으로]
- (Racing Club de France – 파리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지만, 경영 악화로 현재는 아마추어 팀. 마트라(Matra )는 당시 클럽 회장이 경영하던 자동차 회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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