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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2일 아시안컵 조별예선 D조 1차전 - 이란 vs. 이라크 - 서아시아 클라시코

渤海之狼 2011. 1. 13. 03:21

출처 :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japan/2011/text/201101120002-spnavi.html
저자 : 우츠노미야 테츠이치

■ 서아시아 ‘예전 맹주’끼리의 대결

 7일 개막한 아시안컵도 11일로 5일째. 이날은 D조의 2시합이 행해져 이제야 출장한 16팀 전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된다. D조의 면면은 이라크, 북한, UAE 그리고 이란. 전부 월드컵 출장경험을 가진 팀들이 할거하는 이번 대회 유일한 조이다. 특별히 돌출된 강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양민학살이 가능한 약팀도 없다. 어떻게 보면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차전 카드는 북한 vs. UAE, 그리고 이란 vs. 이라크. 필자는 19시 15분에 알라이얀 스타디움에서 행해진 후자를 선택했다. 서아시아의 ‘예전 맹주’끼리인 멋진 카드이다.

 20세기말부터 21세기 서아시아 축구 정세는 윤택한 오일머니를 배경으로 한 중동국가의 태두가 눈에 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효시로 하여 UAE, 바레인, 카다르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서아시아 지역에 축구 문화를 정착시켜 현대적이고 세련된 축구를 보여주었던 나라라고 하면 누가 무어라 하던 이란이었으며 그리고 이라크였다. 한편 이 두 나라는 국제정치의 격동에 계속 농락당하여 그럴 때마다 대표 팀이 저조기에 접어 든 슬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1979년에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이란이 월드컵에 첫 출장한 다음 해의 일), 1980년부터는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 이로 인해 중동의 세력지도는 새로 쓰여 1990년대에 들어서자 맹주의 자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라크는 그 후에도 변변찮았다. 1990년에는 걸프전쟁 그리고 2003년의 이라크 전쟁으로 시작된 빈번한 폭탄테러로 인해 국내에서는 사실상 축구 시합이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2004년 아시안 컵에서 8강, 동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4강, 2006년 아시아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었으며 그리고 4년 전 아시안 컵에서는 우승을 이룩하는 등 근년의 이라크 부활조짐은 괄목할 만하다. 대조적으로 이란은 저조기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대표 팀에 대한 개입이 두드러져 개혁파에 지지를 보내던 주력선수 4명(알리 카리미나 하셰미안도 포함되어 있다)이 대표에서 ‘은퇴’ 당하는 사건이 발생. 먼저 번 월드컵 예선에서도 조 예선 4위로 끝마쳐 월드컵 출장의 꿈이 끝나버렸다. 그런 만큼 이번 아시안 컵을 어떻게든 부상의 계기로 하고 싶을 터. 그 첫 시합 상대가 이라크라는 것에 팀 관계자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숙명을 느꼈을 것이다.

■ 결승점을 불러온 모발리의 FK

 알라이얀 스타디움의 백 스탠드에는 이란과 이라크 양 팀의 서포터 집단이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 잡고 활발히 자국 대표 팀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주최국 카타르는 부유한 나라로 아시아 각국에서 카타르로 돈 벌러 온 많은 노동자를 다수 있기에 서포터의 수는 그럭저럭 모인다. 대개의 경우 백 스탠드의 좌우로 나뉘어 응원하지만 명색이라고 할 정도의 방책만 있을 뿐 특별한 완충지대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예전엔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나라들끼리였기에 ‘이거 괜찮을까?’하고 좀 걱정했지만, 서로 이국의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기에 서로 도발하는 일 없이 실로 평화적으로 성원을 보냈다.

 전반전에는 견실히 패스를 이어가며 우세로 시합을 진행시킨 이라크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때때로 날카로운 역습을 보여준 이란 - 이라는 전개가 계속 되었다. 양 팀 다 볼 탈취시의 몸싸움에 강하여 선수들이 부딪힐 적마다 나는 소리가 기자석까지 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 선취점을 올린 팀은 전 대회 챔피언인 이라크. 13분 왼쪽 SB인 카림이 사이드체인지하여 에마드가 오른쪽 사이드에서 헤딩으로 띄운 것이 이란 GK의 머리를 넘어 바운드하기 직전에 주장 유니스가 건드려 골이 되었다. 그 후 잠시 동안 이라크 주도로 시간대가 이어지지만, 42분 이라크의 클리어 볼을 얻게 된 이란은 테이무리안이 절묘한 스루패스를 하자 오프사이드 될까 말까한 타이밍에서 침투한 레자에이가 침착히 오른 발로 슛하여 동점으로 만들었다. 전반은 양 팀 다 물러서지 않고 1-1일채 하프타임을 맞이하였다.

 후반은 양 팀 다 빠른 공수전환을 거듭하는 전개에서 시작. 곧이어 20분이 지나자 서로의 장점을 봉쇄하였기에 교착상태가 되어 차츰 시합은 거칠어졌다. 그야말로 의지와 의지의 충돌. 그러면서도 여기까지 카드가 한 장도 나오지 않은 것이기에 굉장했다. 사투를 벌이면서도 실은 깨끗한 게임. 그러나 후반37분 교체로 들어간 이라크의 사에드가 파울을 범하여 이 시합 첫 번째 옐로카드가 나왔다. 킥커는 이 시합에서 몇 번이나 정확한 프리킥을 보여주던 모발리로 그의 슛은 잡으려 하던 이라크 GK 모하메드 카시드의 바로 앞에서 뚝 떨어지며 옆구리를 지나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이라크의 수호신이라도 볼의 궤적과 달려드는 상대편 선수의 움직임에 완전히 대응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킥커인 모발리의 기술을 칭송할 만하다. 결국 이것이 결승 골이 되어 이란은 영원의 라이벌에게서 귀중한 승점 3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 골 장면 ]

■ 스탯 이상으로 호각지세였던 양 팀

 승리한 이란의 고트비 감독은 이번 대회 종료 후 J리그 시미즈 에스펄스[清水エスパルス]의 차기 감독으로 결정되었다. 현재 46세. 이란 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하였고 거기에서 축구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네덜란드, 한국, 미국 클럽에서 코치를 역임한 후 27년 만에 고국 이란으로 귀국. 명문 피루지[각주:1]의 감독을 거쳐 대표 팀 감독이다. 그런 고트비 감독에게도 역시 이날 시합은 굉장히 어려웠나 보다.

 “상대가 이라크라는 것. 더구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이었고 이날이 우리 첫 시합이라는 점. 이상의 이유로 이 시합은 3가지 의미로 어려운 시합이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오랜 기간 라이벌임과 동시에 계속 정치적인 문제까지 낀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축구를 하며 이는 스포츠다. 거칠고 감정적인 게임이었지만 선수들은 확실히 축구에 집중해 있었다”

 시합 후의 스탯을 보면 이 시합에서 이란의 우위는 명확했다. 볼 점유율은 이란 61에 이라크 39. 슛 수는 이란 16(유효 6), 이라크 6(유효 3). 하지만 스탯으로 나온 것보다 양 팀의 실력은 거의 호각지세였으며 양 팀 다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팀 전체적인 면에서 이란 쪽이 위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긴 역사 속에서 배양된 양 팀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이 결과적으로 이 날의 ‘거칠고 감정적인’ 게임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정말 ‘서아시아의 클라시코’라 명명하고 싶을 이날의 일전. 알라이얀에 간 가치는 충분했다.

  1. 페르세폴리스 FC.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