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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태어나는 장소 (지에구/브레멘/브라질 대표)

渤海之狼 2009. 1. 17. 20:22

출처: http://www.ocn.ne.jp/sports/soccer/soccer090105.html
인터뷰: 토마스 제(Thomas Zeh)
일본어 번역: 아베 히로시 알렉산더

 

 최고급의 기술과 창조성 넘치는 플레이로 브레멘의 상징적 존재가 된 사령탑 지에구(Diego Ribas da Cunha).
 프로로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그가 그 원점인 산투스 시대에 대해서 말한다.

 2002년 브라질 선수권.
 난조를 보이고 있던 산투스가 이 가혹한 전쟁에서 영광을 차지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의 지휘관 에메르송 레앙(Émerson Leão)은 대담하게도 어린 선수를 기용하여 팀 쇄신을 꾀하고 명문 산투스를 멋지게 부활시켰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두 사람의 천재 - 당시 18살의 호비뉴와 17살의 지에구이다. 10대인 둘은 활력 넘치는 플레이로 공격진을 리드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부분도 있었지만 두려움 모르는 대담한 발상과 고도의 테크닉으로 팬들을 매료하여 유명한 <영 산투스>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6년.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지에구는 현재 월드클래스 MF로 성장하였다. 소속팀 브레멘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사령탑이 되어있으며 동시에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귀중한 전력으로써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는 이 인터뷰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브라질 대표팀에 관하여, 산투스 시대부터의 친구 호비뉴에 관해서, 축구 선수의 커리어에 관해서 냉정히 분석하는 모습은 그가 필드 위에서 보여주는 현명한 볼 처리를 연상케 한다. 젊은 천재사령탑이 말하는 축구관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펠레 덕분에 연습에서 진지해졌다.

- 올 시즌은 힘든 싸움이 계속되고 있군요. 리그에서는 16라운드를 끝내고 10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고 UEFA 컵으로 시프트.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운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공격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으며 수비진에 부상자가 나온 몇 시합을 제외하면 수비 역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 확실히 리그에서 총 득점은 바이에른과 마찬가지인 37. 당신 자신도 8골 3어시스트로 결코 나쁜 숫자는 아니군요.

 맞아. 사실 바이에른과의 시합이나 호펜하임과의 시합, 헤르타 베를린과의 시합에서는 5득점을 넣으며 승리했으니까 실마리만 풀면 단번에 부상할 수 있다고 보는데…. 뭐 곧 있으면 겨울 중단기간에 들어가기에 거기서 어떻게 재정비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어쨌든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타이틀의 가능성이 있기에 후반전엔 온 힘을 다 쏟을 생각이다.

- 그런데 실례지만 브레멘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내도 좋을까요? 사실 오늘은 당신의 커리어를 테마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브라질 시대의 이야기 같은 것을요. 괜찮을까요?

 물론 오케이다. 브라질의 이야기라면 대환영이다.

- 그럼 당신이 볼을 차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축구를 시작한 것은 몇 살 때였습니까?

 5살. 아버지가 하고 있던 조기축구에 나를 데려갔었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어른들은 작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조심스러웠지. 단 브라질이기에 슛 찬스만은 절대로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나는군(웃음)

- 그때부터 축구에 빠져버린 것이군요.

 그렇지. 잘 때도 볼을 껴안은 채 침대에 누웠으며 집 안에서도 볼을 찼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서 리프팅하다가 어머니가 소중히 여기시던 그릇이나 장식을 부셔버린 적이 있었지.

- 그 후의 전개는 안 듣기로 하지요(웃음). 그리고 11살에 산투스에 입단하게 된 것인데, 브라질에서 산투스라고 하면 엄청난 명문 클럽이지요? 그 영웅 펠레가 오랜 기간에 걸쳐 플레이 했던 클럽이잖아요.

 펠레의 영향력은 지금도 굉장해. 그는 당시부터 나와 호비뉴의 잠재능력을 꿰뚫고 있어 우리들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고 하더군. 그것을 듣고 엄청 흥분했지 ‘펠레가 우리들을 주목하고 있다고?!’하면서(웃음). 그 덕분에 그 전보다 훨씬 진지하게 연습하게 되었지. ‘재능만으로는 크게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이 펠레의 입버릇이었으니까.

- 당시 동경하던 선수는? 역시 펠레였나요?

 아니 내 아이돌은 라이(Raí)였어. 상파울루나 파리SG 그리고 브라질 대표에서 10번을 짊어졌던 선수야. 굉장히 우아한 스타일로 패스는 정확 그 자체. 그런 플레이에 흠뻑 빠졌었지.

남아공 월드컵에 무슨 일이 있어도 출장하고 싶다.

- 고향을 떠나 산투스에 입단하였을 때 양친은 어떻던가요?

 어머니는 굉장히 우셨지.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지는 것이 괴로우셨을 거야. 아버지는 ‘남자에게는 언젠가 이러한 시기가 찾아오는 법이지’라고 달관해 있었던 것 같지만.

- 산투스의 하부조직에 있을 때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엔 울고 싶었을 정도로 외로웠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도 고민이 있어도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곁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문제 같은 것은 전부 내다버려주마. 슬픔은 언젠가 없어진다’고 기분을 리플레시하며 생각하였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귀중한 시기였어. 축구 선수는 ‘꿈의 직업’이야. 당연 강한 의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며 네거티브한 정신상태로는 성장도 멈추어 버려. 기숙사에서는 그런 것을 배웠어.

- 후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호비뉴와 만난 것도 산투스의 기숙사에서였죠?

그래. 나와 호비뉴는 산투스 시대 깊은 우정을 맺었지. 지금도 매일같이 전화나 메일로 서로 연락하고 있어. 내가 브라질 대표팀에 복귀했을 때는 곧바로 ‘축하요’하고 전화가 왔으며 브레멘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졌을 때도 ‘안 됐네’하고 전화해 주더군. 축구뿐만 아니라 사생활적인 이야기도 하지. 내용은 여기서 말할 수 없지만(웃음)

- ‘브라질 대표팀에 복귀했을 때’라는 것은 11월 중순 친선시합을 말하는 것이군요.  오래간만에 대표팀 소집이 되었는데 어떤 기분이셨나요?

 나는 항상 브라질 대표에서 플레이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굉장히 기뻤어. 나 자신의 컨디션도 조금씩 좋아졌기에 기회는 있다고 생각했었지.

- 결과도 좋았지요? 포르투갈에 6-2로 대승하셨으니까요.

 강적 포르투갈을 상대로 저렇게까지 이겼으니까 선수들은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둥가 감독도. 1년의 마지막 시합을 베스트 게임으로 마칠 수 있어서 좋았다.

- 앞으로는 월드컵 남미 예선도 시야에 들어오는군요. 당신이나 호비뉴에게 있어서는 어필할 수 있는 장소가 넓어지게 되는군요.

 그렇지. 남아공 월드컵에는 어떻게 해서든 출장하고 싶으니까 적극적으로 어필해 나가고 싶다. 브라질 대표는 내용, 결과 양 쪽을 요구 받기에 그런 압박에 지지 않도록 준비를 하여 어느 시합이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 호비뉴와는 역시 같은 팀에서 플레이하고 싶나요?

 언젠가 또 같은 클럽에서 플레이 하게 된다면 최고겠지. 둘이서 그런 이야기도 나누고 있어.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 산투스에 입단하였을 즈음 처음부터 프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나요?

 응! 첫 날만은 그랬지(웃음). 기숙사에 들어가서 이틀째부터 자신을 잃었다. ‘잘하는 선수들 뿐이잖아!’라는 생각이 들더군. 거기에 무엇보다 경쟁이 엄청난 세계이기에 대다수 연습생들은 계속해서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건 슬펐지. 나는 그들을 라이벌이 아닌 친구로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렸을 때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기에 좋은 추억이지.

- 그럼 처음으로 프로선수로서 계약서에 사인했던 순간은 어떤 기분이었나요?

 16살에 프로가 되었는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놀랐어. 계약 같은 것은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 그 1년 후에는 톱 팀의 주장에 임명되어 호비뉴와 함께 팀을 브라질 선수권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산투스의 우승은 실로 19년만의 쾌거였다고 하더군요.

 우리들은 굉장히 어린 팀이었기에 우승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거든. 믿기 힘들었어. ‘기적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무엇보다 플레이 하고 있던 우리들 자신 우승할 줄은 꿈에도 꾸지 않았었으니까.

- 당신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상대가 다음에 무엇을 해 올지 알고 있는 듯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플레이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 아니면 당시부터 뭔가 특별한 훈련을 하셨나요.

 아니. 연습에서 특별히 의식한 적은 없으니까 아마 하느님이 선물해 주신 재능이 아닐까? 단 굳이 말하자면 스트리트 사커에서 익힌 기술이  도움이 되었을 지도.

-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도 클럽 연습과는 별개로 스트리트 사커를 하신 건가요?

 그냥 놀이 삼아. 기숙사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들이 모여있고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웃음). 하지만 그런 ‘놀이’가 중요해. 상대를 어떻게 제치느냐 에는 일종의 ‘얍삽함’도 필요하니까. 그런 스타일을 익히기에는 스트리트보다 뛰어난 ‘연습장’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러고 보니 기숙사에서는 아주 ‘개구쟁이’였다고 하더군요. 호비뉴가 예전에 말했어요. 엄청 날뛰어서 동급생이나 선생들과 문제를 일으켰다면서요?

 설마~ 나는 아주 착한 소년이었다구. 호비뉴 녀석 너무 과장시켜 말했군(쓴웃음). 뭐 우선은 그렇다고 하자구(웃음).

- 그럼 마지막 질문. 당신에게 있어 산투스라는 클럽은 어떤 장소였나요?

 내 경우 산투스는 커리어 시작점 뿐만이 아니라 인격형성 상에 굉장히 의미가 있는 장소였어. 아이는 무엇이건 배울 수 있을 만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 ‘책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발한발 착실히 성장해 나가는 것의 중요성도 알 수 있게 되거든.

- 즉 기숙사 생활을 한 당신은 같은 연배의 아이들보다 정신적인 성장이 빨랐다는 것이군요,

 중요한 것은 빨리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해. 16살에 프로가 되어서 17살에는 브라질 선수권에서 우승하였지. 같은 연배의 아이들에 비해서 많은 것을 계속 경험한 것이야. 하지만 그 덕분에 자만심에 빠지는 일 없이 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 프로인 이상 몇 살이건 아이라고 봐주는 일이 없으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거든. 거기에 프로 축구의 세계에서는 큰 돈이 움직이잖아? 당연 좋은 사람만 접근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속더라도 ‘아이니까’하는 변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건 응석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성장시켜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