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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의 기쁨은 홈 타운과 함께

渤海之狼 2008. 5. 6. 20:19

출처: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0708/holland/column/200805/at00017096.html

저자: 나카타 토오루


[콜싱헐은 KNVB 컵 우승을 축복하는 페예노르트의 팬들로 메워졌다]


■ 생활의 거리가 축하를 위한 대광장으로 변신


 콜싱헐(coolsingel)은 로테르담의 중심가와 로테르담 시청 사이에 있는 평소에도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트램(tram=노면전차) 거리다……고 말해도 자동차 도로는 편도1차선에 지나지 않아 일상 생활에서는 그다지 크기를 느낄 수 없다. 횡단보도도 10초면 건널 수 있다.


 페예노르트의 전통으로 타이틀을 획득하면 코치진과 선수가 로테르담 시청의 발코니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콜싱헐에 모인 수만 명의 팬들과 기쁨을 나눈다. 때문에 이 축하연을 단순히 콜싱헐이라고 부른다.

 발코니에서 찍힌 과거의 콜싱헐(예를 들면 1999년 네덜란드 리그에서 우승했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엄청난 수의 서포터들로 거리는 꽉 차 있었다. 그런 때의 콜싱헐은 마치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과 같은 거대한 크기로 보인다. 평범한 크기의 생활 거리 콜싱헐은 페예노르트가 우승하면 대광장으로 변신을 하는 것이다.


 2002 UEFA .

 페예노르트는 홈인 로테르담에서 결승전을 치르고 우승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결승전이 행해지기 불과 몇 일전, 페예노르트의 팬으로써도 유명했던 핌 포르타윈(Pim Fortuyn[각주:1])이라는 우파정치가가 암살당하여 그 추모로 인해 콜싱헐은 실시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필자는 10년 가까이 네덜란드에 살고 있으면서도 콜싱헐을 경험할 수 없었지만, 올 시즌 페예노르트는 KNVB(네덜란드 축구 협회) 컵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이제서야 처음으로 콜싱헐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KNVB 컵 결승전 다음날인 4 28일이었다.


■ 시청의 종이 울리고 클럽을 사랑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로테르담의 중심가는 철책에 의해 출입 금지가 되었다.

상점들도 완전히 문을 닫았다.상점가는 매상보다도 피해액이 적은 쪽을 선택하였다.]


UEFA 컵 결승 직후 로테르담 시내는 폭도화된 서포터들로 인해 중심가는 파괴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콜싱헐에서는 중심가 측에 있는 상점 거리(대체로 400m * 250m 정도의 넒이) 사방으로 철책이 둘러쳐지고 경찰과 기동대가 엄중한 경비를 하였다. 콜싱헐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신체 조사를 받은 후 불과 두 곳의 출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조금 높은 건물의 위에서는 기동대가 비디오를 촬영하여 만약 소동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나중에 범인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또한 하늘에서도 헬리콥터가 방범 비디오를 촬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팀이 발코니에 등장하는 것은 12시 반부터.

 필자는 11 45분 즈음 현장에 도착하였지만 이때는 아직 앞 쪽에 자리를 잡을 수 있어서 발코니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좋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서포터들이 몰려들어와 눈깜짝할 사이에 필자의 뒤로는 사람의 머리밖에 보이질 않게 되었다. 남녀의 비율은 7:3. 성인과 10대의 비율은 8:2 정도라고 생각한다. 평일 낮에 시간을 내기 쉬운 10대의 젊은이들 보다 나이를 먹은 서포터들이 더 모인 듯한 분위기였다.


 12.

 시청의 종이 울리며 페예노르트의 응원가가 점점 거세갔다. 노래에 빠져들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로테르담의 시민들을 보고 있자니, 필자가 그 사진 속의 개미 한 마리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고 ~ 콜싱헐이라는 것은 이렇게 해서 거대해지는 구나라는 실감을 하게 되었다.

 12 10.

 과거 페예노르트의 스트라이커였으며 현재는 스타디움 아나운서인 하우트만(Peter Houtman[각주:2]) MC로 등장하자 큰 환호성이 일었다. 15분에는 [You'll never walk alone[각주:3]]으로 유명하며 페예노르트의 전속 가수라고도 일컬어지는 레이 타우어르스(Lee Towers[각주:4])가 열창을 시작하며 분위기는 점점 달아 올랐다.

 그리고 12시 반.

 짧게 종이 울린 후, 판 마르베이크 감독과 판 브롱크호르스트 주장이 KNVB 컵을 가지고 발코니에. 뒤를 이어 선수들도 나타났다. 계속 이어지는 페예노르트의 응원가에 맞추어 KNVB 컵은 파도를 타는 서핑 선수처럼 선수에서 선수로 건네졌다. 데 클레르가 KNVB 컵을 익살스럽게 팬들에게 과시하였으며, 12월에 향수병으로 일시 한국으로 귀국했었던 이천수도 팀에 익숙해진 듯 트로피를 가장 오랫동안 들어올리고 있었다. 서포터들의 노래는 때때로 끊기기도 하였으며 곧 박수로 바뀌었고 다시 노래로 이어졌다. 4만 명이라는 군중 속에 있다가 보니 필자 주위의 서포터들은 다들 박자도 틀리고 음치였다. 이런 음치들의 노래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으면 어째서 가슴을 울려오는 것일까......


■ 서포터, 감독, 선수…… 각자의 감동


< 발코니에 선 선수들을 보기 위해서 4만명의 팬들이 모여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암스테르담은 아무 것도 없지! 암스테르담은 아무 것도 없지!”

 올 시즌 무관으로 끝난 아약스를 야유하는 노래로 선수와 팬이 후렴함을 달랜 12 52분인지 53분 즈음. 선수들은 발코니에서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12시 반부터 단지 20분 조금. 이 잠시만을 위해서 콜싱헐을 4만 명의 페예노르트 서포터들이 메웠던 것이다.


 월요일 아침 수만 명의 팬이 모였다. 이것은 정말 유니크한 일이다

 UEFA 컵 우승 감독이기도 했던 판 마르베이크 감독이지만 첫 콜싱헐에는 감개무량한 듯 했다. 콜싱헐이 끝나자 4만의 팬들은 철책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중심가를 크게 우회하여 각각 돌아갈 장소로 흩어져 갔다. 열광 속에서도 질서가 있는 콜싱헐에서 로테르담 경찰은 [체포된 사람은 단지 20]이라고 가슴을 폈다. 이는 콜싱헐 역사상 가장 적은 체포자 수라고 한다.


 젊은 선수인 페르(Leroy Fer[각주:5])와 브라윈스(Luigi Bruins[각주:6])는 둘 다 1999년의 콜싱헐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콜싱헐을 경험해 보니 굉장히 멋지며 훨씬 더 대단함을 느낀다”(페르)고 실제 콜싱헐에 감동하고 있었다.

 베테랑 GK 티머르(Henk Timmer) UEFA 컵에서 우승했을 당시 페예노르트의 후보 GK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콜싱헐은 없었다. 시합 다음날, 피에르(판 호이동크)와 콜싱헐 거리를 어슬렁거렸지만, 길에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우리들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후 티머르는 아약스, AZ를 거처 2006년에 다시 페예노르트로 돌아와 현재는 주전 GK로 활약하고 있다. “어떤 선수라도 페예노르트에 오게 되면 콜싱헐을 경험하고 싶어한다며 바랬던 목표 달성을 기뻐했다.


성공으로 끝난 9년만의 콜싱헐. 그 의미라는 것은


 이리하여 9년만의 페예노르트 콜싱헐은 성공리에 마쳤다. PSV도 또한 네덜란드 리그 우승을 도시 한 가운데서 축하하였다. 그러나 만약 아약스가 우승했다면 이리 되지는 않는다. 아약스는 전통적으로 우승하면 (plein=광장)이나 에서 축하한다. 아무리 올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약스가 PSV를 역전하여 우승하였다고 하여도 암스테르담 시()는 도시 한 가운데서의 축하연을 허용하지 않고 홈 스타디움인 레나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역시 서포터들이 도시 한 가운데서 난폭해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축구 클럽이라는 것은 그 마을 혹은 도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어, 스타디움 안에서 여는 축하연은 조금 멋없다. 아약스의 선수들 역시 레잇서플레이이나 뮈쇰플레인같이 팬들과 지근거리에서 접할 수 있는 축하연을 꿈꾸며 입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번 콜싱헐이 열광적이며 또한 질서정연했던 것은 페예노르트에게 있어서도 로테르담 시에 있어서도 의미 있는 일로, 페예노르트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준 팬과 장소를 제공해 준 로테르담 시에 감사하였다. 또한 로테르담의 옵스텔턴(Ivo Opstelten) 시장은 페예노르트의 컵 획득을 굉장한 위업. 로테르담 시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로테르담을 대표해서 이 위업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다음 시즌 UEFA 컵에서도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며 기뻐하였다.

 페예노르트는 올 시즌 적극적인 보강을 하였지만 그 보람도 없이 네덜란드 리그를 6위로 끝마쳐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2008 7월에 클럽 창립 100주년이라는 기념할 만한 해에 KNVB 컵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를 거치지 않고 시즌 당초의 목표였던 UEFA 컵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페예노르트는 시즌 최후의 최후에 긍정적인 무드를 되찾았다. 7월부터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는 판 마르베이크에게 있어서도 타이틀과 함께 페예노르트와 아름다운 이별을 나눌 수가 있게 되었다. 다음 시즌 페예노르트의 감독은 올 시즌 헤렌벤을 공격력 넘치는 매력적인 팀으로 키운 페르베이크(Gertjan Verbeek). 이번 우승의 기세가 페르베이크 이끄는 새 팀으로 이어질 것인가? 명문 부활을 건 100주년의 페예노르트에 주목하자.

  1. 행동은 중도좌파였으나 언동은 ‘이슬람 문화는 떨어지는 문화”, “이슬람 이주자가 네덜란드로 유입되는 것을 반대”등을 외쳤기에 2002년 5월 6일 생태학자(포르타윈이 사회의 약자를 적으로 만들려 한다는 생각에 따라)가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본문으로]
  2. 페예노르트에서만 153경기 90골. 대표팀 8경기 7골. [본문으로]
  3. 네덜란드에서도 페예노르트뿐만 아니라 아약스 등 몇 개의 팀이 응원가로 사용 – 역자 주 [본문으로]
  4. 1976년에 you’ll~을 커버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1990년생. MF [본문으로]
  6. 1987년생. MF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