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넌 슛을 쏜 영국 제일의 위대한 신사 - 바비 찰튼(Bobby Charlton)
일본어 번역: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바비 찰튼이 과감한 돌파를 한 뒤 우레와 같은 슛을 차는 모습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가장 멋진 광경의 하나였다.
그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런 모습으로 골을 향했을 때, 거기에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발레 댄서와 같은 움직임과 재능은 그를 잉글랜드 풋볼의 역사 속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를 특별한 선수로 만든 또 하나는 스포츠맨 정신이었다. 그가 옐로 카드를 받은 것은 커리어 전체를 통해서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프리킥 시에 물러나는 것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경고였는데, 그 기록은 후에 FA에 의해 지워져 버린 것이다.
그는 결점이 없는 아이돌이었으며, 필드의 안과 밖에서 모범적인 행동을 한 신사 겸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플레이어로서의 커리어를 끝낸 후에도 신사적인 인생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존경 받고 있으며, 특별한 인물로써 군림하고 있다.
그는 1973년에 은퇴하였고, 그 11년 뒤 클럽의 디렉터에 선출되었다. 그 밖에도 많은 임무와 함께 그가 오늘날에도 가지고 있는 포지션은 사커 컨설턴트(상담역). 그리고 1994년에 ‘나이트’의 칭호를 하사 받아 [바비 찰튼 경(卿)]이 된 인물에 어울리게 스포츠 대사(大使)라는 것이었다.
맨체스터에 있는 그의 코칭 스쿨은 – 데이비드 베컴도 이곳 출신이었다 – 확립된 교육 시스템으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
===========================================
1956년 10월 6일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찰튼 어슬래틱과의 시합에서 어린 바비를 리그에 데뷔시켰다.
데뷔부터 2년 뒤 그는 홈에서 치러진 챔피언스 컵 1 8강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와의 1차전 멤버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골을 넣어 홈에서의 2-1 승리에 공헌하였고, 베오그라드에서 숙명의 2차전의 여행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손에 넣었다.
그가 3-3 무승부로 끝난 그 시합에서 2골을 넣은 덕분에 유나이티드는 4강 진출을 이루어 냈다. 그는 다른 젊은 팀 동료들과 같이 토요일 울브스와의 시합을 위해서 다음 날 귀로에 올랐다. 바비는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있었고 축구계는 그런 그의 발에 경의를 표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료 보급을 위해 뮌헨에 들렸던 비행기가 3번째 이륙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그 저주스러운 비극의 비행기 사고가 일어났다. 축구 역사에 슬픔으로 새겨진 그 날짜는 1958년 2월 6일 토요일로 오후 3시를 조금 넘었을 때였다.
44명의 승객 중 23명이 그 사고에서… 또는 사고 직후에 목숨을 잃었다. 죽은 사람들 중에 8명은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었다. 팀원 중 9명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 중 2명은 그 때 입은 부상으로 인하여 그 후 두 번 다시 플레이 할 수는 없었다.
바비 찰튼은 의식을 잃어 팀 동료인 해리 그레그(Harry Gregg, GK)에 의해 기체의 잔해 밑에서 꺼내 졌다. 사고로 인한 충격과 베인 상처 때문에 병원에 수용되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어서 비교적 행운인 편이었다. 바비는 휴양을 위해서 잉글랜드의 자택으로 보내졌지만, 다음 달에는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FA컵 6회전에 일찌감치 시합에 복귀했다. 그는 급조된 만신창이인 팀을 도와 5월 FA컵 결승에서 볼튼에게 질 때까지 팀을 이끌고 끝까지 싸웠다.
그 때부터 뮌헨의 비극으로 인하여 생긴 길고 괴로운 재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많은 플레이어가 와서는 떠났지만 찰튼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소년을 막 벗어났을 때 베오그라드에 갔지만, 뮌헨의 비극 후 눈깜짝할 사이에 “사나이”가 되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후에 [맷 버스비(Sir Matt Busby)경(卿)]이 말했듯이 찰튼은 유나이티드 부흥의 발판이었다.
“뮌헨의 비극 후 미래가 깜깜할 정도로 암흑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나는 ‘바비 찰튼이 있다’라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격려를 받았다. 그의 존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부흥을 위한 용기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비 자신도 클럽을 위해서 온몸을 바쳐, 사고 뒤인 1958-59 시즌에서는 리그 38시합에 출전하여 28골을 넣었다. 1963년에는 레스터(Leicester)를 물리치는 견인력이 되어 FA컵 우승에 공헌하였다. 1964-65 시즌에 버스비는 그를 MF로 자리를 이동시켰다. 바비는 등 번호 8번을 달고 이 시즌 리그 성공의 키 플레이어가 되었던 것이다.
뮌헨의 비극 후 불과 수개월 뒤에 잉글랜드 대표팀에 소집되어 햄프턴 파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시합에 데뷔하였다. 그 후 12년간에 걸쳐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106시합에 출장하여 여전히 득점 1위인 49골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해는 1966년에 찾아왔다.
4강 포르투갈과의 시합에서 2개의 전형적인 그다운 골인 [캐넌 슛]을 넣어 잉글랜드를 월드컵 결승으로 이끌었다. 그 강력한 슛에 골키퍼는 그야말로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웸블리에서의 결승 서독과의 시합에서 찰튼은 지칠 줄 모르는 팀을 고무(鼓舞)시키는 선수였다. 그는 냉정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정확한 컨트롤이 기반이 된 패스, 어디에서건 골을 노릴 수 있는 위협으로 시합 전체를 통해서 상대를 곤란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서독 MF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포워드를 지원할 기회를 주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2-2 동점인 상태로 90분이 종료되어 돌입한 연장전에서도 찰튼은 유명한 [월드컵 결승전 해트트릭]으로 팀을 4-2 승리로 이끈 제프 허스트(Geoff Hurst) 2의 활약을 계속 도왔다. 필드 위에서 이미 세계 최고봉이 된 바비의 옆에는 친형인 잭(Jack Charlton, CB)도 있었다. 승리의 순간엔 전부 울었지만, 바비는 그것을 창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966년 월드컵 결승의 영광 직후, 그는 잉글랜드의 축구 기자의 투표에 따라 ‘연간 최우수 선수’를 수상하였다. 이어서 심판에 의한 모범적인 선수로써도 상을 받았으며 또한 발롱도르의 영예에도 빛났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66-67년 리그 우승을 이루어낸 데니스 로(Denis Law, FW), 데이비드 허드(David Herd, FW), 조지 베스트(George Best, Winger), 노비 스타일스(Nobby Stiles, MF), 알렉스 스테파니(Alex Stepney, GK) 등과 함께 특필할 만한 명 플레이어의 한 사람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리그의 시합 거의 전부를 출전하여 미드필드의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12골을 기록하여 유럽에서 또하나의 쾌거를 향해 돌진했다.
유럽 챔피언스 컵 우승을 이루어낸 이 1967-68 시즌이 유나이티드의 선수로써 커리어의 절정이었다. 뮌헨의 비극에서 딱 10년 에 해당하는 이 시즌에 유럽 챔피언이 되도록 인과율의 법칙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바비는 느꼈다고 한다.
“벤피카와의 결승전 당일. 나는 이 결승에서 지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먼 곳까지 왔으며, 너무도 많은 위험에서 탈출해 왔다고 생각하였다”
고 고백했다. 바비에게는 드문 헤딩으로 골을 넣어 선취득점을 올렸지만, 1-1 동점으로 이어진 연장에서 팀이 3골을 몰아 넣어 4-1로 승리하였다.
시합 후, 그는 감동과 육체적 피로로 인하여 자신의 방에서 틀어박혀서 우승 축하 파티에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3
잉글랜드 1부 리그 4에서 1956년~1973년까지 플레이 했던 그는 클럽 기록인 759시합에 출전(1위)하여 통산 249골(1위)을 기록했다. 1973년에 은퇴하였고, 1984년에는 클럽 디렉터에 선출되었다. OBE와 CBE의 영예를 받은 후인 1994년 여왕 탄생 기념식 자리에서 “나이트”의 칭호를 하사 받았다. 이것은 그를 지금도 여전히 잉글랜드 스포츠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써 군림할 수 있게 하였다. 그의 특별한 인생에서 또 하나의 빛나는 한 장면이었다.
Bobby Charlton/바비 찰튼
1937년 10월 11일에 탄광의 마을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바비는 애칭으로 본명은 로버트(Robert).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함께 플레이 했던 잭 찰튼(John "Jack" Charlton –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플레이)은 2년 연상의 친형. 19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톱 팀에 들어가 데뷔를 하였지만, 1958년 2월 21살의 나이에 뮌헨에서의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많은 팀 동료를 잃었다. 본래는 [캐넌 슛]이라 일컬어졌던 강력한 무기를 가졌던 센터 포워드였지만 포지션을 미드필더로 옮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재건하는 한편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활약. 199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모국을 첫 우승으로 이끄는 활약을 보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1967-68년 시즌에 유럽 챔피언스 컵에서 염원이던 우승을 차지. 1994년 영국 황실에게서 [나이트(기사)]의 칭호를 받아, 보비 찰튼 경(卿)[Sir Bobby Charlton]이 되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디렉터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