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세를 풍미했던 “플라토슈” 미셀 플라티니

“그때까지는 길바닥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었다. 축구는 굉장히 좋아했지만 놀이이상으론 생각하지 않았다.”고 훗날 플라티니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젊어서 아마츄어팀에서 플레이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 어딘가의 클럽에 넣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플라티니가 놀이의 영역을 뛰어넘어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하게 된 것도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축구에 대한 정열이 넘쳤었다. 공부는 특별히 흥미를 가지진 않았지만 축구는 매일 밤 꿈에서도 플레이할 정도였으니까”
이미 그에게 있어서는 축구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성장함에 따라 그 생각은 더 강해져만 갔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르러 플라티니의 부친도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 때로는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부친도 서서히 아들의 재능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반대로 엄격하시기만 하셨지.”
라고는 하지만 플라티니가 당시 로렌느지방 최대의 클럽인 FC메스의 입단테스트를 받은 것도 부친의 어드바이스에 따랐기 때문이다.
당시 플라티니는 17세. 그의 이름이 지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단테스트에서 멋진 테크닉과 뛰어난 잠재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메디컬 체크에서 문제가 생겼다. 호흡기관이 수준 이하며 심장이 스포츠선수로써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메스의 팀닥터가 내린 진단이었다.
이리하여 메스에의 문은 닫혀져 버렸지만 이 일로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 것은 FC메스쪽이었다.
부친이 다음으로 아들을 보낸 곳은 옆 마을인 낭시였다. 입단한지 1년 후에는 AS낭시에서 프로 데뷔했으며 명성도 차츰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엔 프랑스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플라티니는 프랑스 축구 희망의 별이었다.
이즈음부터 플라티니는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젊었기에 자신감과 야심이 온 몸에 충만했다. 프랑스 대표로서 데뷔는 76년 3월 26일 파르크 드 프랑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친선시합에서였다. 75분, 프랑스는 1-0으로 리드한 상황에서 프리킥을 얻자 캡틴인 앙리 미셀이 볼에 다가갔다. 당시 미셀은 프랑스 축구의 최대 스타이며 프리킥의 명수이기도 했다.
“나에게 맡겨줘. 반드시 넣을 테니까”
미셀의 귓가에서 플라티니는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프랑스는 리드를 2점차로 넓히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의 프리킥은 '플라토슈'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대명사중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가 뛰어난 것은 비단 프리킥뿐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몸싸움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완벽한 선수였다. 그에게는 다른 선수에게는 없는 재능이 있었다. 넓은 시야였다.
“맞어. 확실히 판단은 빨라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넓게 필드를 볼 수 있었었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10번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7년간 낭시에 있은 후 그는 당시 프랑스 최강의 클럽이었던 AS 생떼띠앤느로 이적.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 그리고 진정한 슈퍼스타로 성장해간다.
그는 플레이메이커이면서도 뛰어난 득점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높은 헤딩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또한 강한 슛을 쏘지도 없었다. 그러나 플레이 메이크의 센스와 골 앞에서의 득점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프랑스 대표에서는 72시합에 출장해서 41골. 물론 득점은 역대 1위이다. 아마 당분간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희망의 별이 이제는 구세주가 되었다. 플라티니만 있으면 프랑스대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월드컵에 관해서만은 요한 크라위프처럼 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78년 아르헨티나대회에서는 내가 너무 어렸다. 우리들의 세대는 세계에서 이겨나가기 위한 경험이 부족했다. 4년 후의 스페인대회에서는 정말 불운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대회에서는 내가 조금 나이가 들었었다…”
그렇지만 그 외의 타이틀은 많이 얻었다.
낭시 최후의 시즌이 된 78년에는 낭시 최초의 타이틀인 프랑스컵을 가져오는데 큰 공헌을 한다. 후에 그가 “내 마당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파르크 드 프랑스의 페널티 에리어 왼쪽 30도. 거기서 결정한 프리킥이 결승점이 되었다. 프랑스컵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최초의 빅 타이틀이었다.
다음으로 81년에는 생떼띠앤느에서 프랑스 리그 우승. 또한 이 시즌에는 득점왕도 획득. 명실공히 프랑스 넘버원 플레이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는 가정내의 문제로 인해 만족할만한 활약을 못하고 종료. 이것이 스페인 월드컵이 끝난 후 선조의 땅이기도 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배신행위였다. 월드컵 후 최초의 대표시합인 슈트트가르트와의 친선시합에서 프랑스가 1-3으로 패하자 파르크 드 프랑스의 관중은 플라티니를 향해서 비난의 함성을 보냈다.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나쁜 기억중에 하나다. 프랑스 대표에서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유벤투스에서의 데뷔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월드컵 우승멤버들은 프랑스의 영웅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축구선수로써 최고의 시기를 유벤투스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일요일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칼초의 분위기속에서 보낸 것은 최고의 추억이지.”
여기서 그는 5시즌 동안 2번의 리그 우승과 이탈리아 컵, 유럽 챔피언즈 컵, 컵 위너스 컵, 그리고 인터컨티내탈 컵을 획득. 또한 유럽최우수선수상인 발롱도르도 3년 연속 수상했다. 유벤투스의 서포터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미켈레”는 잊을 수 없는 영웅인 것이다.
“발롱도르를 수상한 83~85년이 나의 절정기였다. 신체적인 레벨이 최고조에 도달했었으니까. 생각과 몸이 완전히 일치되었었지. 이탈리아에서의 중압감은 힘들었지만 플레이는 너무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지”
1984년. 그는 프랑스 대표에게도 최초의 타이틀을 가져오게 한다. 자국 개최의 84년 유럽선수권 프랑스대회였다. 2번의 헤드트릭을 포함한 5시합 9골. 그것은 그야말로 플라티니를 위한 대회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그는 괴로운 일을 경험한다. 리버풀과 행해진 유럽 챔피언즈 컵 결승이었다. 챔피언즈 컵은 월드컵과 더불어 플라티니가 가장 얻고 싶어하는 타이틀이었고 이날 밤은 그 꿈이 이루어질 밤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축구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렸다. 그 날 이후 난 축구를 순수하게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합 전에 일어난 사망자 38명을 낸 훌리건의 폭동, 소위 ‘헤이젤의 비극”이 그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결승점이 된 PK를 득점했을 때도 그는 담담히 센터써클로 향했을 뿐이었다.
“시합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관중석에서 일어난 비극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권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로도 2시즌 플레이를 계속했지만 마음속의 에너지는 고갈되었으니까”
모든 것을 축구에 바쳐온 인간의, 이것도 또한 인생일 것이다.
1955년 6월 21일생. 프랑스 죄프에서 태어났다. 낭시에서 프로의 캐리어를 스타트해 1976년 프랑스 대표로 데뷔. 그 후 쌩떼띠엔느에서 활약해, 82년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대표로서는 78년, 82년, 86년 월드컵에 출장하지만 82년, 86년의 월드컵에서는 준결승에서 패배하여 세계 넘버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84년 자국 개최인 유럽선수권에서는 9골을 넣은 대활약으로 프랑스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유벤투스에서도 리그우승 2번, 유럽 챔피언즈 컵,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 인터콘티네탈 컵도 제패하였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3번의 득점왕과 83년부터 3년 연속 발롱도르를 획득하는 등 세계를 대표하는 넘버 10. 공격적 MF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다. 87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역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