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적 번역/사커-영웅들의시대
아름다운 투사(鬪士)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渤海之狼
2007. 8. 24. 16:49
글 : Roberto Centofanti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본어 번역 : Kayako Kimura
이 글은 일본 베이스볼 매거진社의 [스포츠 20세기 –사커 영웅들의 세기]의 글을 편집, 번역한 것입니다.
또 한 1999년에 쓰여진 글이기에, 그 후의 사건 등은 첨가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Roberto Baggio/로베르토 바조
1967년 2월 18일. 북동(北東) 이탈리아 비첸차 주(州) 칼도뇨에서 태어나다. 79년에 세리에 C1 라네시로 비첸차에서 프로 데뷔. 85년까지 플레이하여 팀의 세리에 B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 85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 그러나 이적 이틀째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다음 시즌에 복귀를 하지만 그 후에도 부상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90년 유벤투스, 95년 AC 밀란, 97년 볼로냐, 그리고 98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 월드컵에서는 90년 자국 개최인 이탈리아 대회에서 첫 출전. 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골을 넣어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지만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브라질과의 시합은 자신의 미스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8강에서 홈팀인 프랑스와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스쿠데토 2회(94-95 유벤투스, 95-96 AC 밀란), UEFA 컵 1회(92-93 유벤투스) 라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겨,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우럽 최우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 그 기술과 승부근성을 역사에 남긴 '판타지스타'이다.이는 처음 로베르토 바조를 만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항상 하는 말이다.
깐깐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 조차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 진다고도 한다.
최고봉의 선수만이 가진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특히 너무 하다는 느낌이 강한 축구 계에서 바조는 반대편 위치에 있다.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높은 기술을 자랑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80년대 후반 피렌체에서 명성을 높여 아이돌로 숭배받았다.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몸에 두르는 것은 추억의 청춘시대를 보낸 장소에서 축구 계의 피터팬으로써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는 유벤투스로 갔지만 장래성 풍부한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AC밀란으로 방출당해 여기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사키 감독과의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불운의 어택커'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밀란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담았던 것을 모두 내뱉은 뒤 볼로냐로 떠났다.
“볼로냐는 작은 클럽이지만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준다. 여기라면 기분 좋게 시합에 임할 수 있다”
1997년. 그가 바라던 바 대로 생애 최고인 22골을 넣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된 것도 신천지에서의 활약이 컸다.
이때조차도 결코 주위를 위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재의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세를 보였다.
98-99 시즌부터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활약의 장소를 옮기지만 그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아직 볼 수 없다. 이 당시 일본 팀에서 고액의 오퍼가 있었지만 승납하지는 않았다. 아직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포츠 선수의 인생에는 ‘이걸로 끝이다’라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다. 최고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래를 만들어 왔다. 항상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조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쁨'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인간일 수로 자신의 에너지를 플러스로 작용하게 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한 경건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공]과 [사]를 분리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불교를 믿는 것이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 혹은 심취, 유명인의 단편적인 종교 맛보기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진지한가는 알고들 있는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지 이제 10년이다. 불교는 가는 곳 마다 지부(支部)가 있기에 어디서건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가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와 아이가 둘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말로 바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되찾았다고 실감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때때로 돈으로 인해 주어진다. 한 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조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했다.
“돈이란 중요하다.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는 이 한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근사한 축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빈부의 차가 확실히 나타나는 슬픈 축제이기도 하다. 전통에서 생겨난 관례나 관습에 의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나, 관습이나 의례를 따르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있을 터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싸고 호화로운 것보다 수수한 것이 한층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터이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며 무리해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은 인생을 보다 좋게 하는 2차적, 보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지는 결국 자기 자신 나름이다. 가능성을 가진 채 생활해 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베네토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수많은 상징적인 스토리가 남겨져 있다.
부친은 우수한 아마추어 자전거 경기 선수로 예전부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벨기에의 유명한 선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통하지 않았고, 에디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3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소년 시대의 바조는 활발한 아이로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선 마을을 질주하였다. 물론 축구공은 언제나 함께 였다.
프로 데뷔는 세리에 C1의 라네시로 비첸차. 전 세리에 A의 수비수 주세페 사보이니가 바조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의 플레이를 한 번 보고자 각지에서 모여들고 주목을 모으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에 획득 전쟁이 시작되자, 비첸차는 곧바로 20억 리라를 요구. 당시 만치니, 팔류카(Pagliuca), 비알리(Vialli) 등 인기 선수를 데리고 있던 삼프도리아가 유력시되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피오렌티나였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가 그를 덮쳤다.
이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을 날려버린 것이다. 보통 선수생명의 끝을 의미했지만 팀은 인내심 있게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하여 그를 프랑스의 외과의사 브스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 나를 덮친 고난을 이겨내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클럽, 팬과의 신뢰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렌체와의 강한 인연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90-91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이적에 납득을 할 수 없는 팬들이 폭동을 일으켜 체포 15명, 부상자 50명을 발생시킨 대참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폭력행위 등에 의한 소송이 속출. 자국 개최인 월드컵을 향해 대표팀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있던 바조는,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어난 사태에 창피함을 느꼈다. 마치 베트남 전쟁같았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팬의 절규도 전해지지 않아 피렌체를 뒤로 한 뒤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대어 92-93시즌에는 UEFA컵을 제패. 이런 활약이 인정받아 93년에는 FIFA가 선정하는 세계 최우수 선수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결승에서 브라질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 미국 월드컵 전년도의 일이었다.
바조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스타일로 외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리듬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에 갖추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본능은 우리들 안에도 감추어져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은 프로선수에게 있어선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본능에 맡겨 플레이를 해 나가고 싶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있었던 말 추가
바조가 남긴 말
- 지금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미래를 말 할 자격은 없다.
- 언제나 머리에 떠오른 플레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 PK를 못 넣은 사람은 PK를 찰 용기를 가진 사람 뿐이다.
- PK를 넣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못 넣으면 누구나 잊질 않는다.
- 축구를 할 수 있다면 수명이 짧아져도 좋다.
- 나는 축구에게 사랑을 했다.
- 내가 알고 있는 약물은 하나 뿐. 그것은 “노력”이다.
- 포기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내 성격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입성이 절망적이 되었을 때)
남들이 바조를 평가한 말
- 위대한 축구 선수의 리스트에 바조를 더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니까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98년 대표팀 동료) - 델 피에로가 핀투리키오(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면, 바조는 라파엘로다.
- 지오반니 아그녤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의 회장) - 10번이라기 보다는 9.5번이다.
[바조가 9번(스트라이커)와 10번(플레이메이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
- 미셸 플라티니 - 지금까지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다.
[과르디올라는 바조를 존경하여 이탈리아의 클럽으로 이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죠셉 과르디올라 - 그와 같은 축구 선수와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
[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가 끝난 후, 당시 골을 지켰던 브라질 골키퍼가 PK를 못 넣은 바조에게 건낸 말]
- 클라우디오 타파렐(Cláudio André Mergen Taffarel – 브라질 GK) - 세계에서 이탈리아 만이 유일하게 그를 No.1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지네딘 지단 - 필드에서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지쿠 - 만약 내가 지금 현역이라면 바조에게 프리킥을 배울 것이다.
- 역시 지쿠 - 현역일 때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선수가 셋 있었다. 마라도나, 판 바스턴 그리고 바조다.
-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 밀란의 바레시와 맞먹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상징) - 나는 바조를 필드로 내보낼 때 한 가지만을 지시한다. “90분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너 다운 플레이를 해 다오”라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 네드베트도 비에리도 토티도 필요없다. 바조 만으로 충분하다.
- 둘다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 내가 이탈리아에 왔을 때부터 언제나 바조와 함께 축구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 이반 사모라노